제204화
폐쇄사회의 균열 #5
“뭐야? 아무도 없잖아? 영사 아저씨는 어디 갔지?”
과거의 류하리는 주위를 둘러보고 사무실 테이블 위에 떨어진 수화기를 집어 들어 전화기에 꽂아두었다.
“정말 미래의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요?”
안경을 쓴 시현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물어보았다.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유령일 수도 있지. 하지만 보시다시피… 전화 자체는 환각이 아니라 진짜야.”
과거의 류하리, 어린 시절의 류하리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통화내역을 역시 어린 시절의 시현에게 보여주었다.
* * *
“..........”
현재의 류하리는 그 모습을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어느 것도 그녀의 기억에 없는 내용이었다.
어째서 시현과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이처럼 만나서 대하고 있는 것이며 왜 시현은 지금의 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잔뜩 주눅 들고 눈치를 보는 채 그녀의 옆을 배회하는 가?
* * *
“누군가가 전화를 걸긴 했군요. 그것도 여기서. 바로 최근까지?”
과거의 시현은 그녀의 통화기록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영사 아저씨는 없고 말야. 영사 아저씨를 속여서 밖으로 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 누가 엄청난 놈이 했거나… 아니면 진짜 유령 같은 놈이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겠네.”
“회선을 도중에 뜯어서 다른 곳에서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지요. 통신 배선반에 연결해서 전화를 걸면 이 번호로 걸 수 있어요.”
“배선반 확인해볼까? 음, 아니 시간이 별로 없어. 오후 일정이 있잖아. 그렇지?”
“네. 최형림 선배와 만나기로 했지요?”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혀를 찼다.
“그래서. 시현. 최형림 선배에 대해서 조사했어?”
“네. 여기….”
시현은 류하리에게 자료파일을 넘겨주었다.
류하리는 그 자료파일을 휘적휘적 뒤척여보다 흥미를 잃었다.
자료파일 안쪽에 최형림의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놀랍게도 지금의 잘생긴 모습과 달리 살찌고 주눅들어있는 모습이었다.
“다 읽기 귀찮은데 특기 사항을 말해줘. 첫 대면에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으악 하고 놀랄 만한 걸로.”
“최형림 선배의 모친은… 어린 시절에 자살했습니다.”
“음 그건 기각. 초면에 보자마자 ‘당신은 모친이 돌아가셨군요.’ 라고 하는 건 추리도 뭣도 아니잖아. 선을 넘었지. 뭐 초면에 그 말을 꺼내면 으악 하고 놀라긴 하겠다만.”
“그런 뜻에서 꺼낸 말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 집안의 가정불화는 엄청나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가정불화가 엄청나?”
“네. 어찌된 일인지 최형림 선배는 전혀 집안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더군요.”
“집안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니?”
“그 흔한 학원이나 가정교사도 없습니다. 용돈도 많이 안주는지 거지꼴로 방치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 아르바이트는 안하고?”
“대인 기피가 심해서 아르바이트 같은 건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미성년자가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부모 동의가 필요하니까요.”
“그렇게 버린 자식이란 말야? 후처로 들어온 사람이 기세등등한가? 하지만 최형림 선배의 모친은 SH그룹 사람 아냐? 그럼 그쪽 눈치 보여서라도 찬밥 취급은 못 할텐데?”
“이상하게도 SH그룹에서도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더군요.”
“흠. 그래? 정말 이상한 일이네. 왜 그런 것 같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미팅이 기대가 되기도 하고요. 잘 하면 높으신 분들의 치부를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래? 그럼 이번에 찔러서 들쑤셔 보면 모르던 걸 알 수 있을 거다. 그거지?”
“네.”
“좋아. 그럼 대화가 어떻게 이뤄질지 플로우 차트를 짜보고 연습해보자.”
교복 차림의 류하리와 시현은 사전에 조사해둔 정보를 짜내어 어떻게 하면 최형림에게 자신들이 쩔어주는 탐정인지 어필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질문과 대답을 예상하며 몇 가지 패턴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미리 잔뜩 준비해놓은 뒤 상대방을 마치 추리력으로 파악한 것처럼 휘두르고자 하는 연출이라니.
그 수법이나 발상이 너무나 지금의 시현과 같다.
* * *
류하리는 당황하고 있었다.
영사 탐정사무실에서 교복차림의 류하리와 시현이 최형림을 만나기 전 준비하는 그 모습이라니.
그녀는 기억에 없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다니던 동성학원에서는 시현도, 최형림도 없었다.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
현재의 시현은 대답하지 않고 옆을 돌아보았다.
미카엘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비열한…. 정말 이런 것만 인간을 닮는 군요.”
아마도 시현은 미카엘이 이 모습을 보여주고 도망간 것에 분개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류하리로서는 지금 미카엘보다 시현과 자신이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앞섰다.
“그래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류하리는 집요하게 물어보았다.
“네. 더 봐 봤자 도움될 게 없으니 돌아가지요. 이런 곳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습니다.”
“전에 과거에 갔을 때는 그런 소리가 없었잖아요?”
“그때는 그냥 과거였으니까요. 지금 이건 이미 사라져 버린 세계의 잔영입니다.”
“세계의 잔영이 뭐죠?”
“과거의 인과를 지나치게 바꾸다 보면 어떤 과거는 아예 사라져버리죠. 시공을 넘나드는 악마들은 이렇게 인간을 과거로 되돌려주고 그들의 선택으로 바뀌어 사라져버린 세계의 잔영을 수집합니다. 아주 안 좋은 취미지요.”
“.......”
사라져버린 세계의 잔영.
그렇게 말하니까 확실히 이곳에 오래 머무르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 얼마나?
류하리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얼마나 오래 있으면 문제가 되지요?”
“저도 확언할 수 없습니다만 여기서 길을 잃게 되면 그냥 과거에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됩니다. 가시죠.”
“.........”
“아니면 남아서 시험해보시겠습니까? 혼자서 자력으로 귀환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사물들이랑 상호작용도 못할 텐데 여기 택시 타고 오셨지요? 돌아갈 때는 걸어서 거기까지 가야 하는데 가실 수 있겠습니까?”
시현은 그리 물어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류하리는 잠시 더 이곳에 남아서 어린 류하리와 시현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려고 했는데…. 시현이 정말 뒤도 안돌아보고 가는 걸 보니 겁이 더럭 났다.
“잠깐만요! 그렇게 날 협박하지 말아요! 진짜로 날 내버려두고 갈 건 아니죠?! 아, 아니 이봐요!”
류하리는 탐정 사무소 안을 보았다.
과거의 시현과 류하리는 이제 트러블 슈팅을 끝내고 사무실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사무실에 올라왔다.
그들과 똑같은 동성학원의 교복을 입은, 살이 찌고 어깨가 축 처져있는 학생이었다.
놀랍게도 최형림이다.
지금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주눅 든 모습의 최형림!
“어? 너, 너는 류하리?”
과거의 최형림은 류하리와 시현을 알아보고 당황했다.
“어서 오세요. 선배.”
“나, 나는... 영사라는 사람에게 부탁하려고 왔는데.”
그러자 과거의 류하리가 다리를 꼬며 미소를 지었다.
“후후.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는 문제라서 가급적 관련이 없을 법한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거지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저희 탐정 사무소는 어디까지나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고객의 정보, 개인사,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저희는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겁니다.”
“...........”
“아, 사탕 드시겠어요?”
류하리는 그리 말하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사탕바구니를 최형림에게 쓱 내밀었다.
“.......”
류하리는 그런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노, 놀랍군. 어떻게 내 가정사라는 걸 알고 있지?”
“청소년기의 소년이 가정사 말고 다른 문제로 오는 경우가 드무니까요. 동성학원은 어쨌건 학교 폭력 문제는 잘 관리하고 있기도 하고요.”
“대단해. 영사라는 어른도 네가 내세운 대리인인 거야?”
최형림은 류하리의 허풍에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류하리가 단 번에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고 그의 내막도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뜸을 들이고 있다.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완전 누구 수법이네. 아니 이 경우는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이었고 시현이 내 흉내를 내는 건가?’
류하리가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굳이 구조를 마다하는 자를 구하려고 저까지 여기에 남을 수는 없지요. 아시잖습니까. 저는 고객 만족이 최우선인 거. 여기에 남는 게 당신을 만족시키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시현은 류하리 본인이 끔찍한 파멸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말하고 뒤돌아섰다.
류하리는 시현이 지금 저러는 게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블러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무시무시한 블러핑이다.
블러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정말 내버려두고 가버리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드는 것이다.
시간의 미아가 되어버리면?
아니 이건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악마가 갈무리한 세계의 파편 같은 것일 것이다.
절대로 제대로 된 세계가 아니다. 이런 곳에 남는다는 건 자신의 영혼과 육체 그 모든 걸 결국 악마에게 던져주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조, 조금만 더....”
“그럼.”
시현은 거리낌 없이 류하리를 내버려두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 걸음걸이가 빠르다.
가볍게 걷는 것 같은데도 벌써 그의 기척이 저 멀리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시현이 사라지자 류하리는 자신의 손발이 벽을 투과하고 사물들을 투과하는 존재라는 걸 보게 되었다.
만약 이 상태로 여기에 영영 남게 되면 어쩌지?
‘제기랄!’
결국 류하리는 한창 재밌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탐정사무소를 뒤로 하고 시현을 따라와 버렸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타세요.”
시현은 놀랍게도 이곳에 와있는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
다른 사물들을 건드릴 수 없었지만 류하리는 그 차는 건드릴 수 있었다.
“이건….”
“차량 째로 이동해왔죠. 걸어서 원래 출입구인 공덕동까지 돌아가는 건 힘들 테니까요. 안전벨트 매세요.”
시현은 차를 몰아서 처음에 류하리가 미카엘을 만났던 공덕동의 카페를 향해 갔다.
* * *
시현과 류하리는 류하리가 처음 미카엘을 만난 공덕동 카페 앞에 돌아와 있었다.
시현의 차량 안에서 류하리는 대쉬보드에 몸을 기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맹렬히 실망하는 중이었다.
미카엘은 분명히 류하리에게 과거 그녀가 시현이나 최형림과 알고 있던 사이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꽤 효과적이었다.
류하리는 이제는 없어진 사라진 세계의 잔영에서 그녀가 원래 탐정이었고 시현은 그녀의 조수였으며 최형림은 그녀의 의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일반적인 영화나 만화, 소설 같은 거라면 과거로 돌아갔을 때는 현재에서 알 수 없는, 이미 감춰져 있던 비밀을 알아내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