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폐쇄사회의 균열 #6
그러나 시현은 그녀를 협박했다.
여기에 두고 가겠다.
사라진 세계의 잔영에 홀로 남게 되면 단순히 과거에 남는 것과는 비교할 수 도 없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 협박으로 그녀가 더 이상 저 세계의 정보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이다.
‘내가 그 협박에 굴복해버렸어.’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당장 저 과거의 류하리 같았다면, 탐정 류하리였다면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악질적인 점은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지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장 끔찍한 공포는 육체에 대한 고통이 아니라 상상력에서 온다.
시현은 사라진 세계의 잔영에 남는 게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전혀 말해주지 않음으로서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류하리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 그 이상의 공포가 기다리고 있을까봐 견디지 못하고 시현의 차에 올라타 버린 것이다.
‘젠장. 당했잖아.’
간신히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류하리는 자신이 시현에게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냉정히 생각해보니 시현이 그녀를 내버려두고 올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위협을 가해야 했었다.
정말 저 사라진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나보다.
“그래서 대체 당신은 저의 뭔가요?”
류하리는 시현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시현은 딴청을 피웠다.
“...악마가 원하는 대로 되고 있군요. 당신에게 이걸 보여주다니. 이런 제길. 고작 진명 한 어절로는 손해가 막심한데.”
“딴청 피우지 말고 말해보세요. 당신은 저의 뭐에요?”
류하리는 시현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제 은인이었죠.”
“은인이었다?”
“네. 아득히 옛날 부잣집 딸인 당신은 한 소년을 구해주었습니다. 그게 저입니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비록 당신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저기선 내가 탐정이었군요. 당신이 조수고.”
“네. 주제넘게 제가 아가씨의 주역 자리를 빼앗았군요. 아 들키기 싫었는데 말이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무슨 일이 있어서 나는 저걸 기억 못하고 당신은 저걸 기억하는 건가요? 이 차이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거지요?”
류하리는 그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말해줄 수 없습니다.”
“왜요?”
“제가 그렇게 계약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더 이상 악마에 엮이지 않고 살아가기를 내가 바랐기 때문에 악마와 계약하고 데드맨으로 살던 당신의 기록이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네. 저 탐정 시절의 당신이 통째로 사라진 건 바로 제 잘못입니다.”
“.........”
류하리는 예상치 못한 시현의 답변에 당황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현과 그녀의 관계는 깊었고 시현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면서 지금까지 입을 다물어왔다.
그런데다가 이 모든 게 바로 그가 바란 것이었다니?
“당신이 멋대로 그걸 결정지었다고요?”
“네.”
“당신이 날 조종하고 내 인생의 여러 가지 요소의 가부를 마음껏 정해버렸다고 들리는 데요?”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악마 놈들의 약속이란 항상 그 모양이지요. 당신이 얽히지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결국 당신은 기어이 얽혀서 여기까지 와버렸지요.”
“대체 왜....”
기실 류하리는 지금까지의 시현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저 사라진 세계의 잔영을 보고 나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현이 보이는 모습은 과거의 그녀를 따라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지금의 그녀는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그리고 시현은 왜 이런 상황이 되도록 그녀에게 말 한마디 없이, 언질도 없이 그녀를 기만해왔나?
“당신은 제게 말해주지 않을 거지요?”
“네. 이건 그런 계약이니까요.”
“알겠어요. 그렇다면... 당신 말고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도록 하지요.”
“..........”
“말리지 않는 군요.”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 않으니까요.”
“..........”
류하리는 말없이 시현의 차량에서 내려섰다.
문이 부서지도록 세게 닫혔다.
“...문짝 부서지겠네.”
시현은 류하리가 떠나가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류하리와 헤어지고 시현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타자기가 종이도 없는데 혼자서 허공을 두들기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많나보군.”
시현이 종이를 끼워주자 타자기는 잽싸게 변명부터 내뱉었다.
[미카엘이 한 짓은 제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추후 그를 추궁해서 그의 진명 한 어절을 더 내놓게 하도록 하지요. 고작 진명 한 어절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사고였으니까 말이지요.]
“미카엘 대신 네 놈 진명이나 좀 내놓지 그래? 애초에 나는 류하리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계약하지 않았어?”
[이건 제 잘못이 아니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졸지에 그녀에게 미움 받게 되었군요. 그녀 입장에서는 당신이 자신의 인생을 조작하고 기만해 왔던 걸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웃기고 있네. 한 통 속인 놈들이…. 너희들이 짜고 치는 거 모를 것 같냐? 보나마나 미카엘도 슬슬 진명 털리고 나면 내게 손 떼고 대신 다른 악마가 나타나서 비비적거릴 것 같은데? 너희들 하는 짓이 너무 추잡스럽지 않냐?”
[저희를 너무 나쁘게만 보는 군요.]
“....악마가 자기들 나쁘게 본다고 삐지는 건가.”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타자기가 신상명세를 쳐내기 시작했다.
[다음 계약자입니다.]
“아 제길. 하필이면 이럴 때.”
[끝도 없이 계약자를 요구하는 건 그대가 아니었나요?]
“........”
시현은 한숨을 내쉬고 종이에 찍힌 신상정보를 확인해보았다.
“뭐 좋아. 일해야지. 일.”
* * *
루프탑 바에서 근사한 야경을 내려다보는 위치, 그곳에서 최형림이 앉아 있다가 류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통해 들어오자 그녀를 맞이했다.
다른 손님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 모두는 각자의 세상을 즐기고 있어서 어지러운 야경과 음악 속에서 그들 둘이 만났다.
“의외로군요. 류하리 경위님이 먼저 만남을 청할 줄은? 무슨 일입니까?”
최형림은 약간 피곤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을 찾아온 류하리를 바라보았다.
류하리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서 그는 약속장소에 나와 있었는데 검사로서의 격무가 너무 심해서인지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배님은…. 동성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고 나오던데요.”
류하리가 최형림을 선배라고 부르는 건 그가 경찰대학의 선배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선배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보았던 저쪽 세계에서는 최형림도 동성학원의 학생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게 없다.
동성학원은 SH그룹이 가지고 있는 학원법인.
그리고 한영건설그룹은 SH그룹을 모태로 하고 분리된 재벌 일가다.
최형림이 동성학원에 다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이 바뀌었는가?
류하리는 그 점에 주목했다.
‘최형림 선배는 과거의 나나 시현에게 의뢰해야 할 만큼 문제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현이 의심하고 있지. 아니 의심이라기 보단 확신?’
처음에 류하리는 그저 시현이 과민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미카엘이 보여준 과거, 사라진 세계의 잔영을 보고 나니 이제는 최형림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사이다패스나 이 악마들, 그 계약자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성 학원…. 아. 고위 자제들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 사립고 말이죠. 류하리 경위님이 다녔던?”
“........”
“그걸 물어보는 걸 보니 흠. 맙소사. 왜 물어보는 겁니까? 뭔가 수사 중입니까?”
“최 선배가 사이다패스와 관련이 있었군요.”
류하리는 문득 그렇게 말했다.
“아.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관련이 있지요. 제가 바로 사이다패스 수사를 전담하는 법무부 태스크포스의 일원 아닙니까.”
최형림은 그렇게 거부했지만 류하리는 그의 반응에서 그가 사이다패스와 관련이 있다는 게 사실이라는 걸 알아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가 말하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사이다패스와 짜고 있는 거 아니냐?’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모욕감과 분노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최형림은 빠르게 변명으로 이행했다.
법적으로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눈치 상으로는 확실한 증거다.
재판으로 옭아맬 수는 없지만 류하리는 이 반응에서 최형림이 사이다패스와 한 패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생각했어요. 최형림 선배가 사이다패스 같은 것과 엮여있을 리가 없다고. 성취 사건 때 대여금고 현황을 검찰 측에서 조사했을 때도 사실 성취의 성접대 리스트에는 검사들도 많이 있었으니까. 그쪽 라인이 조사 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죠.”
“........”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류하리는 사이다패스를 떠올렸다.
“제가 직접 본 사이다패스는 이런 수사력이 없어요. 성취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이 어디에 살고 어디에 출몰하는지, 그런 것들을 알아낼 수단이 없었죠. 누군가 그런 걸 잘 아는 이가 협력하고 있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왜 접니까? 그 정도는 저 말고 다른 검사나 경찰, 수사관이나 심지어 탐정들도 알 수 있는 정보 아닙니까?”
“왜냐면….”
류하리는 최형림에게 말했다.
“보고 왔으니까요.”
“.........”
사실은 블러핑이다.
비록 미카엘이라는 악마가 보여준 과거의 모습에서 최형림이 어떤 문제로 그들과 얽혀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악마와 계약한 계약자의 힘이 필요할 정도로 몰려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곧 지금의 최형림이 사이다패스를 이용해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류하리는 최형림이 악마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걸 적재적소에 들이 밀어서 최형림의 입으로 진실을 듣고자 했다.
시현은 절대로 진실을 내뱉지 않을 테니까.
“흐음.”
최형림은 류하리를 곰곰이 뜯어보고 있었다.
이 여자가 대체 뭘 보고 왔기에 이러는 건가?
정말 나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온 건가?
그런 의심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쐐기를 하나 더 박아야 겠다.
“선배의 어머님은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셨지요.”
“........”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최형림의 표정에 금이 갔다.
객관적으로 볼 때 류하리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던진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류하리는 최형림이 이 미끼를 반드시 물 거라고 생각했다.
왜 재벌가 아들이면서 젊은 나이에 검사가 된 이 남자가 살인자와 함께 손을 잡고 범죄를 저지르는 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이 그것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