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06화 (206/269)

제206화

폐쇄사회의 균열 #7

“너무 대충 찍는 거 아닙니까?”

흥분했던 최형림도 자신이 속아 넘어갔다는 걸 깨달았는지 바로 정신을 추슬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주 짧은 한 순간, 최형림은 사람 좋고 완벽한 청년검사의 가면을 벗어던졌기 때문이었다.

“근거가 없이 추측한다고 비난하지 마세요. 인과마저 바꿔서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이들 상대로 증거만으로 수사하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네. 과학수사로는 사이다패스를 잡을 수 없지요. 절대로 잡을 수 없어요.”

최형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 시치미 뗀다고 해서 류하리가 속아 넘어갈 것 같지 않다.

그래서일까? 그는 홀가분하게 가면을 벗어던졌다.

“아아. 미카엘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니만. 그래도 놀랍군요. 설마 저를 단독으로 찾아오다니. 만약 제가 당신을 죽이기라도 하면 어쩔 겁니까?”

“죽일 리가 없지요. 당신이 말한 대로 사이다패스의 살인사건으로 당신을 잡아넣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당신을 만나러 왔는데 제가 살해당한다면 그때는 당신이 의심받지 않겠어요?”

류하리는 널 죽일 수도 있다고 은연중에 협박하는 최형림의 협박을 눈 하나 깜빡 않고 받아쳤다.

“후후후후후.”

최형림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좀 속이 편해지겠군요. 류하리 경위님.”

“.......”

“저와 손을 잡읍시다.”

최형림은 류하리에게 협력을 제안했다.

최형림은 뜬금없이 류하리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살인자와 손을 잡자고요?”

“네. 왜요? 살인에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쁜 짓이다.

그것은 어느 공동체라도 다들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독재자가 주민들을 학살하고 있는 파탄국가에서조차 살인은 죄악시되고 있다.

그런데 최형림은 그런 보편타당한 진리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당신이 손잡은 탐정은 어때요? 그도 이미 악마의 주구인데요? 그는 살인자가 아닐 것 같습니까?”

“...살인자는 아닐 거예요.”

류하리는 시현이 해온 일들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시현은 지금까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뭐 류하리 앞에서만 안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가지고 있던 비닐하우스에는 고문과... 살육의 흔적이 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시현은 살인을 하면 편리했을 상황에서도 끝끝내 살인을 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저도 살인자가 아닙니다. 살인은 사이다패스가 했지.”

“.....”

“농담입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살인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 하려는 건 아니니까. 정말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숨 쉰다면, 그래서 저나 사이다패스를 처벌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건 바로 저니까요.”

“당신이 스스로의 처벌을 바라고 있다고요?”

“네. 왜냐면 제가 목표로 삼고 있는 이들은 그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이미 처벌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평검사 정도의 권한으로는 감히 맞설 수 없는....”

“당신의 아버지인 최중선 회장 말인가요?”

“흐음. 아. 이런. 아직 자세히는 모르는 채로 왔군요. 쯧. 미카엘이 잔뜩 운을 떼서 다 알려진 줄 알았는데. 뭐 좋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드리지요.”

* * *

한영건설그룹은 SH그룹의 산하 조직이었다.

당시에는 독점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세력 일부를 떼어서 분리시킨 일종의 자회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영건설그룹의 오너 최중선 회장에겐 야욕이 있었다.

그는 당시 군사정권의 수장들에게 SH그룹의 비리와 탈세, 각종 불법행위들에 대한 자료를 넘기고 SH그룹 오너들이 군사정권에 의해 숙청당하면 무주공산이 된 경제계를 장악하고자 하는 야욕을 품었다.

그러나 그의 뇌물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었던 SH그룹은 최중선 회장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그를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SH그룹 회장 김원식은 이미 결혼 전에 미혼의 몸으로 임신한 자신의 딸을 최중선 회장에게 강제로 출가시켰다.

외부의 피,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최형림을 한영건설그룹 후계자들의 최연장자로 만드는 폭거를 취한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류하리가 소문으로 들어 대충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선배는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검사가 된 건 가요? 검사의 힘으로는 부족해서 사이다패스의 손을 빌리고?”

“그렇게 알려져 있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지요.”

최형림은 쓴 웃음을 지었다.

“진짜는 그보다 좀 더 추악한 이야기입니다.”

“......?”

지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악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추악한 이야기가 있다고?

“제 어머니는.... 그러니까 SH그룹 회장의 딸이던 그녀는... 당시 좀 드문 성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레즈비언이라고 하지요.”

“네?”

가십에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이야기는 그녀가 다른 애인과 생긴 자식이 최형림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형림이 말하는 건 그보다 더 끔찍하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딸이 동성애자라는 걸 알게 된 김원식 회장은 그걸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남자의 기쁨을 알려주면 그녀의 성적 취향이나 그런 게 교정될 거라고 믿었던 거지요. 그녀의 처녀성을 위해서 여학교, 여대를 보내서 주위에 남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 걸 실수라고 생각한 거지요. 여자들만 있는 곳에 보내놨더니 딸이 이상한 짓을 배워왔다. 애초에 그녀를 여학교에만 보낸 건 그녀의 처녀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무슨 가축이나 소유물처럼 굴려놓고선 말입니다.”

“.......”

“끔찍한 소리지만 과거,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여자의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여자들만 다니는 학교, 남자들만 다니는 학교로 나누어 관리해놓고선 동성애에 빠진 것은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일 뿐이다. 우리는 동성애를 교정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던 최형림은 쓴 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이게 생각에서 끝나는 것만 해도 모욕적일 텐데 김원식 회장은 그걸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겁니다. 다만 그래도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김원식 회장의 딸인데 지나가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그녀를 강간하라고 시킬 수가 없었지요. 만약 그런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자신의 체통에도 문제가 되니까. 게다가 이미 재벌이던 김원식 회장에게 있어서 돈을 받고 성폭력을 행사하는 쓰레기들은 감히 자신의 핏줄과 엮일 수도 없는 하층민 중의 하층민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원식 회장은 집안 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지요.”

“집안 내에서?”

“네. 웃기는 일 아닙니까? 고작 레즈비언이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들이라 해도 동성애가 근친에 의한 강간보다는 덜한 죄일 텐데... 아니 어쩌면 동성애를 교정하겠다는 건 핑계일지도 모르고 그저 평소부터 딸에게 자신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잠깐.... 지금 당신이 말하는 건.”

“네. 어머니는 김원식 회장과 그 형제, 아들들에게, 강간당했습니다. 동성애를 교정하겠다는 명분으로 성폭력을 행사한 거지요.”

류하리는 그 끔찍한 이야기에 경악했다.

친부와 형제, 친척들에 의해서 강간당했단 말인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 * *

최형림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걸 남에게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이게 처음이로군요.”

“그럼 당신의 목적은....”

“네. 저는 여기에 관련된 놈들 모두를 처단할 겁니다.”

최형림은 담담하게 그렇게 말했다.

처단.

법치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는 검사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단어였지만 사정을 알게 된 지금.

류하리는 차마 최형림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최형림이 원수로 여기고 있는 이들은 그야말로 왕중왕이다.

SH그룹 회장과 부회장, 그 휘하 그룹 계열사들의 사장이 된 김 씨 일가와....

그 충실한 부하이자 어린 시절부터 최형림을 학대하던 최중선 회장,

대재벌인 그들은 대한민국의 치외법권에 살고 있었다.

평검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처벌할 수가 없다.

“혹시 그냥 그들을 죽여 버리는 건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아, 그들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하라고요?”

최형림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죽음은 그들에게 너무나 가벼운 형벌입니다. 누릴 걸 다 누리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암살자가 들이 닥쳐 죽여 봤자 그들은 후회하지 않아요. 그저 그들이 누리던 권력에 수반된 재수 없는 사고로 여길 뿐이지.”

“그건 그렇겠지요.”

“나는 그들의 영혼을 말살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명성에 피를 뿌리고 그 더러운 추태를 만천하에 알리고 그들의 오만한 등골을 부숴버리고! 악마들에게 넘겨서 그들이 영세토록.... 이 우주가 증발해 없어질 그날 까지 고통 받기를!”

“........”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에게 품기엔 지나치게 끔찍한 증오지만 최형림은 그런 증오를 품을 자격이 있었다.

적어도 최형림에게 저들은 그렇게 증오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그걸 위해서는 단순한 암살 정도로는 안 됩니다. 깔끔한 죽음은 저들에게는 오히려 해방일 겁니다. 그래서 나는 사이다패스건 영사건 악마건 다른 뭐라도 좋으니까 그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저들 이상의 권력을 거머쥘 겁니다. 저들의 이름에 침을 뱉고 그들의 무덤을 더럽히고 만인이 그들의 악행과 우행을 모독하도록 할 겁니다. 어때요? 경찰로서 절 막을 겁니까?”

류하리는 최형림의 질문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경찰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아야 한다.

경찰인 이상 사적 제재를 인정할 수가 없다.

류하리는 사이다패스가 죽인 이들을 떠올려보았다.

죽어 마땅한 자들도 있었지만 죽이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은 이들도 없잖아 있었다.

마약 거래자들, 폭력배들, 그런 이들 말이다.

물론 그들 역시 그들의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죽어 마땅한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만인이 공분할 대상은 아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최형림이 파멸시키고자 하는 김원식 회장도 그렇다.

굴지의 대기업, SH그룹의 회장.

그것만으로도 그를 존경하고 숭배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자가 사실 이런 저런 일을 저질렀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을 때 공감해 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김원식 회장이 자신의 딸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것은 사실일 테지만 최형림에겐 그 증거가 없다.

있다면 유전자 감식 결과 같은 것일 텐데 설령 유전자 감식을 해서 최형림이 김원식 회장의 친 아들임이 밝혀져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사기라고 주장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재벌 그룹 총수라는 것은 그 자체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정치가, 언론사들은 물론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반인들조차 그의 위광에 스스로 굴복하여 굽실거린다.

역시 사적 제재라는 건 그런 점에서 만인의 공감을 살 수가 없다.

하지만....

만인의 공감 따위가 정말 중요한가?

“손을 잡지는 않겠어요. 다만 묵과는 하지요.”

류하리는 결론부터 말했다.

“묵과입니까?”

“어차피 선배님의 범죄를 제가 입증할 방법은 없을 테고 딱히 선배가 처단하려는 이들을 지켜야 할 의리가 없으니까요. 제가 말려들지 않게 배려해주신다면 저 역시 여러 사소한 편의를 도모해드릴 수는 있어요. 하지만....”

류하리는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이 손을 직접 더럽히면서 까지 선배님의 사상에 따르진 않겠어요. 그 정도면 어떤가요?”

“흐음.”

최형림은 흥미 깊다는 듯 류하리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묵과해주는 정도에서 만족하도록 하지요.”

최형림은 그리 말하고 류하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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