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07화 (207/269)

제207화

잃어버린 것 #1

최형림과 헤어진 류하리는 집에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는 가사도우미를 해주는 아주머니가 차려놓고 간 식사가 덩그라니 식탁에 남아있었다.

어머니와 고모가 다니는 교회에서 소개 받은 교인 분으로 집안일을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한 편으로는 류하리의 사생활을 감시해서 어머니나 고모님께 전달하는 스파이이기도 했다.

류하리는 그 식사를 대충 전자레인지에 돌려 깨작거리고 씻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경찰 일도 굉장히 바쁘기 때문에 제 때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 미카엘이 보여준 것과 그로 인해서 최형림이 고백한 내용들,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뇌우처럼 휘몰아친다.

생각의 번개가 칠 때마다 눈앞이 실제로 번쩍이는 듯 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류하리는 전화기를 들고 시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었다.

[착한 경찰 어린이는 내일의 출근을 위해서 잘 시간 아닌가요?]

“당신은요? 안자고 있었어요? 착한 탐정 어린이가 되긴 틀렸군요?”

[네. 저는 정 졸리면 한 번 자살하면 되는지라.]

“네?”

[농담입니다.]

시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류하리로서는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최형림 선배가 사이다패스와 연관이 있다는 걸 자백했어요.”

[흠 놀랍군요.]

“전혀 놀라지 않는 목소리인데요?”

[와앗! 그럴수가!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역시 제 처음 이야기가 맞았지요?]

시현은 과장되게 놀라는 척 하며 류하리의 질문에 맞춰주었다.

“…….”

[보아하니 그와 협력하거나 그게 아니면 묵과하기로 합의한 모양이로군요.]

“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가 보고 싶습니까?”

“아뇨 밤도 늦었는데. 그럴 수는….”

하지만 그 순간 류하리의 집에 초인종이 울렸다.

깜짝 놀란 류하리가 일어나서 보니까 시현이었다.

“아니 이 인간이….”

류하리는 그가 자신의 집에 찾아왔다는 걸 알고 당황했다.

이렇게 빨리 도착하다니 텔레포트한 건 아닐 것 같고 아마 최형림 만나고 나서부터 미행한 게 아닐까?

‘태그 박았구나.’

류하리는 자신에게 태그를 박지 말라고 시현에게 말했지만 사실 이렇게 편리한 감시능력이 있는데 태그를 안 박을 이유가 없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류하리로서도 태그를 박고 말지.

류하리는 얼른 일어나서 옷장을 뒤적였다. 편하게 잠들려고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드러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가 찾아왔으니 환장할 지경이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혼자 사는 여자 집에 찾아오다니 이런 경우가 어딨어요? 준비를 좀 해야….”

[집안 자체는 깨끗한 걸로 압니다만. 늘 도우미 아주머님이 도와주시잖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어요? 제길. 기다려요. 준비해야 하니까.”

[뭐 알거 다 아니까 굳이 차려입으실 필요 없습니다. 벗고 있는 것만 아니면 아무거나 걸치시죠?]

“당신은 그럴지 몰라도 저는 안그래요!”

류하리는 그리 말하고 어떻게든 웃옷을 걸쳐입고 얼굴과 머리도 어루 만지고 그제야 시현의 문을 열어주었다.

잠시 후 시현이 올라왔다.

“흠.”

류하리의 집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였다.

“경위 월급으로는 도저히 못 살 아파트로군요.”

“네네. 부잣집 딸래미라 죄송합니다. 그보다 이야기 해줄 수 있어요?”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시현은 그렇게 반문했다.

“무슨 이야기겠어요. 당신과 나의 관계 말하는 거죠.”

“네 말씀드리지요. 차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의외로 순순하시네요?”

“아까 전엔 저도 좀 흥분했었습니다만 생각해보니까 제가 말 안하면 당신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아무나 들쑤시겠더라고요. 미카엘이나 최형림에게 가서 질문을 던질 것 같으니까 그럴 바엔 제가 이야기 해주는 게 낫겠지요. 그들의 왜곡된 시선보다는 제가 말해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류하리는 시현의 말에 혀를 찼다.

아무래도 시현은 류하리가 최형림을 만나고 오자 걱정되어서 찾아온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러했다.

류하리가 호기심이 생겼는데 그냥 말안해준다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점은 통 변하지 않는 군요.”

“네?”

“아뇨. 혼잣말입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 * *

시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살리고 싶습니까?]

타자기의 악마가 처음 그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

그의 눈 앞에는 목을 매단 여성의 시신이 있었다.

류하리.

그의 약혼자.

그리고 누구보다도 경애하는 그의 탐정.

당연히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타자기의 악마가 제안한 그녀를 살리는 방법은… 끔찍한 일이었다.

* * *

류하리는 신기한 소녀였다.

부유한 집안의 재능 넘치는 소녀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그녀의 담대함, 결단력, 그리고 자신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 힘으로 직접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미성년자이던 시절부터 자신을 대신해 영사에게 탐정사무소를 만들게 하고 의뢰를 받아 해결해 왔다.

그녀가 직접 사건을 고르고 억울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권력자들과 싸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현은 그녀의 조수로서 함께 하면서 매 순간 순간 감탄했다.

어째서 이 여자아이는 이런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는 것일까?

돈이 목적은 아닐텐데.

그것에 대해서 류하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물론 이득이 있지. 난 사람들의 일을 처리해주는 대가로 수명을 받고 있어.”

“수명? 목숨 말이에요?”

“응. 할머니와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거든. 아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남의 수명을 어떻게 가져와요?”

“동의하에.”

“네? 그게 무슨? 혹시 정신과 약 빼먹었어요?”

시현이 류하리의 말에 의문을 품자 류하리가 사탕을 내밀었다.

“못 믿겠으면 물어보지 말고 이거나 먹고 닥쳐. 물어보니까 대답해준 건 데 왜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이야?”

“사탕은 왜 항상 갖고 다녀요?”

“이건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거야. 돌아가신….”

류하리는 그리 말하고 웃었다.

그녀는 항상 잘 웃곤 했다.

세상의 어떤 험난함을 앞에 두더라도 이 소녀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테니까.

약혼을 할 때도 그랬다.

* * *

그날도 시현은 류하리의 아파트에서 커피를 타고 있었다.

그래. 이 한강변의 아파트. 류하리의 자택은 그때도 똑같았다.

그곳에서 류하리는 시현에게 대뜸 명령조로 말했다.

“시현. 내 약혼자가 되라.”

“….네?”

“아니 아버지가 이상한 놈이랑 약혼하라고 하니까.”

“이상한 놈이라고요?”

“그래. 나보다 나이는 12살이나 많고 유흥업소 여럿 먹여 살리는 재벌가 자제. 유학 실패하고 돌아온 녀석인데 결혼을 하면 마음을 다잡을까 싶다면서 약혼 이야기가 나왔어.”

“그게 싫어서 저랑 약혼을 하겠다고요? 하지만 저는….”

시현은 고아에 아무런 배경이 없다.

류하리와 약혼이라니, 류장천 회장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어디가 어때서? 넌 내 또래고 용모도 괜찮고 머리도 좋아. 장래가 촉망되잖아? 뒤에 배경이 없는 것도 좋아. 쓸데없이 정치질에 휘말릴 필요도 없고. 날 소중히 대해줄 거 아냐?”

“아니 그야….”

시현은 류하리가 짧은 목검과 공기권총, 전기 충격기 등으로 폭력배들을 종이 인형처럼 넘기는 걸 보아왔다.

기실 그녀는 데드맨으로서 보통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건 남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였을 뿐, 맨손으로도 충분히 장정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만약 류하리가 누군가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는데 거기서 가정폭력이 일어난다면 누가 가해자가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전….”

그녀와 격이 맞지 않는다.

시현은 그런 뜻에서 말꼬리를 흐렸는데 류하리가 물어보았다.

“왜? 설마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혹시 성신아 경위? 그 경찰대학 수석이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아, 아닙니다.”

류하리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찍었다가 그 손가락으로 시현을 가리켰다.

“내 추리에 의하면 넌 날 100% 좋아할텐데? 내 착각인가?”

“아니 뭐 그걸 추리씩이나. 저 같은 거랑 약혼을 하면 회장님께서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아버지라면 걱정하지 마. 지금 회사 비자금이랑 범죄 연루된 증거들을 다 꽉 잡고 있거든. 나나 너에게 뭐라고 하면 그냥 회사 다 터지는 거야. 펑!”

류하리는 신이 나서 그렇게 말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혹시 그런 거야? 좋아는 하되 결혼할 만큼은 아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류하리가 얼굴을 붉히고 시현의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없는 듯 했다.

“아, 아뇨. 그럴리가요.”

“그, 그렇지?”

“네. 저, 저도 좋아합니다.”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류하리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좋아했다.

“그렇지. 아 완전히 옆구리 찔러서 절받기네. 절받기야. 너무 한 거 아냐? 시현? 이런 건 네가 리드해야지.”

“하하. 제가 말이지요?”

류장천 회장의 은덕으로 학교도 다니고 류하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입장인데, 지금 이것만 해도 과분하게 행복한데 감히 류하리에게 프로포즈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좋아합니다.”

“그렇지? 음. 좀 더 강렬하게 표현해봐.”

“네. 좋아 죽습니다.”

“아니 좋아 죽습니다가 뭐야? 좀 더 로맨틱하게 말해봐.”

“로맨틱한 분위기는 이미 누가 다 죽여놨는데요?”

아아 로맨틱은 이미 죽었다.

류하리가 로맨틱을 죽여놨음은 물론 그 시체마저 난도질 한 상황이다.

여기서 무슨 로맨틱을 찾아?

그러나 류하리는 피식 웃으며 시현에게 양 팔을 벌렸다.

“그래도 로맨틱하게 말해봐.”

“무립니다.”

“사랑한다던가 뭐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사… 아….”

말하려니 부끄럽다.

로맨틱 씨를 살해해놔서 분위기가 초토화되어있으니 더 말하기 힘들다.

“그럼 안기라도 해.”

“네?”

“어서. 팔 떨어져.”

“…….”

시현은 당황해하면서 류하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말은 불필요했다.

여기서 입을 열어봤자 난도질 된 로맨틱의 시체를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

* * *

너무 행복해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나날이었다.

류하리는 너무나 눈이 부셨다.

강하고, 당돌하고, 똑똑하고 항상 자신만만했다.

연애에서조차 그녀는 ‘네가 날 사랑하지 않을 리 없어! 날 사모해라!’ 라고 당당하게 주도하고 요구하던 타입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녀가 자살했을 때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랑하고, 사모하고, 숭배했다.

완전무결한 초인이 있다면 그녀가 아닐까?

그런 그녀의 곁에서 최소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시현은 몸이 부서질 정도로 노력했었는데….

사실 그녀가 악마와 계약하고 위험한 계약 위에서 외줄타기 중이였다는 걸….

시현은 데드맨이 된 후 알게 되었다.

멍청한 녀석.

완벽한 초인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약혼자라면서 결국 시현은 류하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알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숭배만 해왔다.

그녀의 짐 하나 덜어주지 못하고.

그저 류하리라는 태양을 숭배하기만 했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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