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08화 (208/269)

제208화

잃어버린 것 #2

다시 현실로 돌아온 시현은 눈 앞에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는 류하리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아파트.

똑같은 가구 배치.

모든 것이 그때의 그 날과 똑같다.

하지만 그녀는 데드맨이 아니다.

타자기의 악마와 계약해서 어린 시절에 얻은 힘으로 스스로 탐정이 되어 좌충우돌하며 살아오던 그런 당돌한 여성이 아니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뛰어난 재능,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경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긴 했지만….

시현을 매혹시켰던 데드맨 류하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데드맨 계약이 준 힘과 그로 인해 생긴 경험들, 사명감들이 없이 자란 지금의 류하리는 분명히 매혹적인 여성이지만 시현이 사랑했던 그녀는 아니다.

‘그녀를 되살리고 싶습니까?’

타자기의 악마놈….

이런 거라고는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문득 과거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 자신만만하고 당돌하던 류하리가 그리워서 때로는 견딜 수가 없을 정도가 된다.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대체 왜 나에게 한 마디도 이야기 하지 않았었냐?’

자살할 만큼 괴로웠다면 왜 그렇게 밝게 웃고 강하게 지지해줘서 오히려 자신이 그녀에게 기대고 살았다.

‘내가 그렇게 못미더웠나?’

그녀에게 따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지만 그 질문조차 던질 수 없으리라.

“자요.”

그때 류하리가 시현에게 찻잔을 건네주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은은한 조명 속에서 시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류하리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찻잔이 따뜻하다.

시현은 그 온기를 느끼면서 류하리에게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래는 당신이 데드맨이었습니다.”

“네?”

류하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당신이 타자기의 계약자였다고요.”

“제가요?”

하지만 류하리는 생각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미카엘이 보여준 과거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류하리가 놀라는 건 시현이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는 점이다.

“네. 당신이 탐정이고 제가 당신의 조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계약에서 해방되었고… 계약했던 사실 그 자체가 없어지면서 그 대가로 기억과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신해서 데드맨이 되었지요. 과거의 시간을 역행해서 당신이 계약하던 시점의 대상이 저로 바뀐 겁니다.”

“와아.”

악마란 놈들 정말 아무거나 할 수 있구나.

류하리는 새삼 악마의 힘에 감탄했다.

시간을 역행해서 없었던 일로 만들고 대신 시현과 계약하다니.

이런게 가능하면 자신들이 질 것 같으면 계속해서 시간을 역행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그런 상대를 적으로 어떻게 이길려고 시현은 악마와 싸우고 있는 걸까?

“당신이 날 대신해서 계약을 덮어썼군요?”

“아닙니다. 제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당시에는 제가 조수가 아니라 주역이 되고 싶었거든요. 동년배의 소녀가 이렇게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게 부럽기도 하고 분해서, 그게 악마와의 계약에서 나온 힘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게다가 초능력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아이는 없습니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웃어보였다.

내가 원해서.

이 능력이 탐나서.

이 위치가 갖고 싶어서 빼앗았다.

그런 뉘앙스를 전달한다.

속아 넘어가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그 계약에서 벗어나고자 하잖아요?”

“네. 이런 건 줄 몰랐거든요.”

자신이 사랑했던 류하리와의 과거, 그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할 줄은 몰랐다.

‘그때의 당신이 언제나 웃으면서 즐겁게 사건들을 처리했기 때문에 설마 당신이 영혼을 불태워가면서 악마와 싸우고 있는 줄 몰랐어.’

‘너무나 눈부시고 아름다워서 당신에게 그늘이 있다는 걸 몰랐어.’

‘계약에서 지불해야 할 게 내 영혼 만이 아니라 당신과의 기억, 당신과의 인과, 데드맨으로서의 당신, 그 모든 것이었다는 것도….’

하지만 말할 수는 없다.

말해서도 안된다.

지금의 류하리는 그가 알던 류하리가 아니니까.

악마의 개입없이.

본래 그녀가 누렸어야 할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라도 시현은 적당히 얼버무려야 했다.

“그럼 제가 다시 그 계약을 받을 수 있나요?”

류하리가 물어보았다.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당신의 계약은 끝났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계약자가 되려고 한다고 해서 절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둘 다 악마의 손아귀로 걸어들어가는 것 뿐이지요.”

“…으음.”

류하리는 시현의 말을 들어보면서 의심을 품었다.

일단 그럴싸하게 들리긴 하지만….

정말일까?

시현의 말은 일단 반은 걸러들어야 한다.

“어떻게 제가 계약에서 해방되었지요?”

시현은 그녀가 목을 매단 사슬을 떠올렸다.

데드맨은 수명이 남아있는 한 불사.

하지만 그 사슬은 불사신을 죽일 수 있으며 그 영혼을 악마로부터 해방시킨다.

존재를 소멸시켜 버리는 또 다른 악마의 선물.

물론 공짜는 아니다. 악마들이 괜히 자비를 베푸는 경우는 없으니까.

시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지우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잘은….”

“당신이 계약에서 해방되면 또 기억을 잃고 다른 누군가가 대신 계약을 덮어 쓰게 되나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데드맨 계약은 데드맨이 바뀔 때마다 업데이트 되어왔습니다. 결코 예전과 같은 건 아니지요.”

* * *

‘으음. 어째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류하리는 감이 날카롭다.

분명히 시현은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뭔가 의도적으로 말해주지 않는 것도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감이 이상하다고 해도, 시현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뭘 알아야 추궁을 하지.

시현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기는 한데 이 남자는 언제나 수작을 부려대서 무작정 짚고 넘어갈 수가 없다.

* * *

시현의 입장에서도 류하리에게 온전한 진실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시현에게 있어서 과거의 류하리, 데드맨으로서의 류하리는 성역이었다.

지금의 류하리가 데드맨인 류하리 시절의 기억과 관계 때문에 시현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지는 게 싫다.

자신이 잃어버린 데드맨으로서의 류하리에 대한 기억을 온전히 남기고 싶다.

이제 와서 그녀의 숨결, 그녀의 목소리를 가진 지금의 류하리와 관계를 개선하면?

인간이란 간사해서 그렇게 함으로서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될 지도 모른다.

그게 싫다.

데드맨 류하리를 기억하는 게 아픔이라면 이 아픔을 온전히 끌어안고 살아가고 싶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좋다.

그걸로 이 기억이 오래 갈 수만 있다면.

상처가 아픈 만큼 기억이 선명해질 수 있다면 이까짓 아픔 따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류하리에게도 그게 좋다.

현재 시현은 악마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생각해보라.

실험실에서 키우는 생쥐가 어느날 갑자기 실험실 너머 연구자들을 인지하고 언젠가 반드시 인간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일단 실험실 생쥐가 말하는 시점에서 난리가 날 것이지만 인간은 대부분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이건 넘어간다.

인지하고 그 차이를 명백히 알면서도 도전하는 행위만으로도 만인의 흥미를 끌 것이다.

시현은 악마들의 흥미를 끌고 있고 이것이 그를 악마들에게서 지켜주는 힘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놈 참 재밌는데.’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다.’

보는 눈이 많으면 무자비하게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없다.

‘그렇게 재밌는 소재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단순무식하게 힘으로 찍어누르다니.’

‘보물을 관리할 줄 모르는 구만. 계약자중에 그렇게 팔팔한 놈이 있으면 복받은 줄 알아야지.’

악마들이 이렇게 인간적인 대화를 하진 않겠지만 그들은 인간성에 홀려 이쪽 세계로 찾아온 존재들이다.

시현에게 흥미를 보이고 그 흥미 때문에 악마들이 오히려 시현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건 분명하다.

게다가 타자기의 악마도 시현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흥미진진해하고 좋아한다.

아마 타자기의 악마는 이 지구의 다른 모든 인간과 시현을 저울에 올려놓는다면 시현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이나 시현의 행동은 악마들에게 사랑받기 딱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랑이란 인간들이 말하는 그런 흔한 사랑과는 다르다.

저 생쥐가 과연 자신들에게 어떻게 도전하고 어떻게 버틸 것인가?

만약 무너진다면 어떻게 무너지는가?

그 모든 순간을 온전하게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랑이지만 사랑받는 측에서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형태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류하리는 정말 재미있는 재료다.

류하리를 건드려서 시현의 감정을 크게 흔들 수 있다.

물론 시현도 류하리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걸 알기에 타자기의 악마에게 류하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제약을 걸었지만 미카엘이 그러한 것처럼 다른 악마들에게까지 그 제약이 강력하게 작동하진 않는다.

타자기의 악마 체면이 있으니까 물러나는 것 뿐이지.

결국 악마들은 반드시 그녀를 이용해서 시현을 낚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자신과 얽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왜곡되고 파멸한다.

문제는 이 류하리도 어쨌건 류하리라는 점이다.

불사신에 무적의 완력을 자랑하던 데드맨이던 시절까지는 아니지만 위협이 좀 있다고 해서 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가기 보다는….

궁금한게 있다면 호랑이 굴이라도 들어가는 그런 영혼의 소유자.

이런 사람에게 위험하니 빠지라는 소리를 한들 듣는 시늉도 할 리 없다.

그렇다면….

* * *

“최형림이 사이다패스와의 연관관계를 고백했다고 했지요?”

시현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문답의 고삐를 잡기로 했다.

“네.”

“의외로군요. 그걸 솔직하게 불다니. 심문을 잘 했습니까?”

“그렇다기 보다는 본인이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원래 그런 법이지요. 살인을 하면서 선언문을 날려대는 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서 주체를 못하는 법이거든요. 물론 선언문을 날리는 건 사이다패스지만 그걸 날리도록 방조하고 있는 걸 보면 본인도 동의하고 있을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 목소리는 가볍다.

이 목소리에 힘을 실으려면 그만한 인플루언서가 되던가.

그게 아니면 목소리에 피를 발라야 했다.

사이다패스는 목소리에 피를 바르고 외치고 있으니 최형림 또한 그에 매혹되었으리라.

“그래서 어떤 이야기였습니까?”

“최형림 선배는 대기업의 오너 일가와 싸우려고 하더군요. 그걸 위해서 경찰 대학에 진학하고 검사가 되었지만….”

류하리는 최형림의 집안 사정을 시현에게 완전하게 말하진 않았다.

SH그룹과 한영건설그룹의 비사라고 할 수 있는 그 이야기는, 최형림의 어머니에 관련된 이야기는 너무나 더럽고 끔찍한 것이어서 그의 명예를 생각할 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스운 일이지. 살인보다 근친강간에 의한 출생을 더 감춰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다니.’

류하리는 자신의 센스가 경찰의 직업윤리에서 많이 어긋났음을 깨닫고 쓴 웃음을 지었다.

데드맨3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