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악마의 제전 #5
류하리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당신, 사이다패스를 회유하려는 건가요?”
“네. 뭔가 문제라도?”
“아니 그게 문제냐고 하면….”
물론 문제가 있다.
경찰인 류하리 입장에서 보면 사이다패스는 갱생의 여지가 없는 확신범, 확고부동한 흉악범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어요. 물론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간혹, 죽을 정도까지는 아닌 사람들조차 자기 멋대로 죽였다고요. 그런데....”
“어차피 그녀를 체포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그녀의 행위를 입증할 수가 없고 입증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꿈꾸고 있는 상태, 즉 완벽한 심신상실 상태였으니까요. 법적으로도 완벽한 면책상태입니다.”
시현은 그 점을 강조했다.
“사이다패스를 막는 방법은 두 가지 뿐입니다. 지금 저 병실에 누워있는 김유라라는 무력한 여자를 죽이거나. 아니면 사이다패스의 원한을 대신 풀어주거나. 어디 한 번 김유라씨를 보시겠습니까?”
“네.”
류하리는 별 생각없이 시현이 보자는 대로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 * *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마른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상처입은 짐승의 단말마 같은 소리였다.
“아 씨발! 저 여자 좀 조용히 시켜!”
“맨날 저래!”
병원의 다른 사람들이 짜증을 내며 베개로 귀를 막고 잠을 청한다.
그걸 보면 이런 비명은 계속 나오는 것 같았다.
“...아. 제기랄.”
그 끔찍한 모습에 류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시현이 여기서 그녀를 불러서 김유라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알겠다.
김유라는 눈을 감으면 사이다패스가 되지만, 눈을 뜨는 순간은 온통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불쌍한 존재다.
불쌍하니까 살인에서 면책해주자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아무리 불쌍한 인간이라도 죄는 죄.
그러나 저 앙상해진 몸으로 쇳소리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오로지 고통만을 견디고 살아가는 존재를 보면 그 처참함이 가슴을 저미는 것이었다.
설령 증오해 마땅할 죄인일 지라도 이렇게 고통받는 것을 보면 괴롭다.
김유라의 외조모는 즉시 김유라의 몸에 붙어있는 무통주사 펌프를 눌러 펜타닐계 진통제를 투입시켰다.
모르핀보다 80배는 더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가 혈관으로 스며들지만 약효가 돌 때까지 그녀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다 약에 취해 쓰러졌다.
“보시다시피 깨어나면 그녀는 계속 고통받습니다. 몸 여기저기 손상이 너무 심해서 항상 고통받게 되지요.”
“...알겠어요.”
류하리는 시현이 사이다패스를 고객으로 맞이해도 묵인하겠다고 선언했다.
“후후. 정말 마음이 약하시군요. 이거 한 번에 바로 넘어가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살인자이고 법에서 면책상태라고 손가락 빨고 구경할 거였으면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왜 고객만족을 위해 제거했겠습니까?”
법적으로 사이다패스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그런 거에 신경썼다면 시현은 미성년자들이나 그런 이들을 파멸시키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성년자들도 법적으로 형사상의 책임이 없지 않은가?
“거참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이미 올해의 경찰 상 받기는 틀린 걸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해봐요. 궁금하니까.”
시현을 만난 후 정상적인 경찰로서 살아가긴 틀렸다. 류하리는 어쩌다 자신이 이런 처지에 몰렸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력적인 협조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잠깐만요. 그렇게 전력적인 협력까지는 장담 못하죠. 저를 납득시키면 도와드리죠. 뭐 생판 남도 아니니까 이제.”
“다른 게 아니라 최형림 검사에 대해서입니다. 경찰로서 류하리 경위가 아니라 최형림 검사의 약혼자이자 류장천 회장의 딸인 류하리 씨에게 부탁하는 겁니다만.”
“...그렇게 말하니까 들어주고 말고를 떠나서 궁금하긴 하네요. 뭘 시키려고요?”
“그건 말이지요.”
시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 * *
양천용 의원은 공안검사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쭉 수권정당인 선진당에서 정치활동을 해왔다.
그 결과 당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이는 그가 인기가 있어서 라기 보다는 경쟁자들이 스스로 미끄러져 어부지리로 오른 것 뿐이다.
검찰 출신인 그는 조직운용에는 탁월했지만 민중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던 것이다.
즉 국민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턱에 힘깨나 주고 다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관료형 정치인이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이정도면 자신도 대권에 도전해볼만 하지 않나?
그런 착각이 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본인이 일반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정치인들사이에서 워낙 영향력이 크고 그들 모두가 간신배마냥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해주니 본인이 만인에게 사랑받는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비록 정치의 묘리를 추구하느라 일반 대중들에게 그다지 잘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일반 대중들에게 나서기만 하면 다들 나의 진심을 알아봐주고 지지해줄 것이다.
이쯤되면 정신착란의 영역이지만 슬프게도 명문대 나오고 판검사하고 스펙상으론 대단한 정치가들도 다들 쉽게 걸리는 병이다.
양천용도 그런 정신병 초기 단계에 빠진 상태였다.
본인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자제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내시가 고대 황제 구워삶듯 온통 아부해대서 현실감이 없어진 자아가 서로서로 충돌한다..
무엇보다도 본인스스로 믿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대중들에게 지지받고 긍정받는다고.
그러한 그에게 젊고 잘생기고 유능한 새 얼굴, 최형림은 아주 좋은 시금석이었다.
대중들에게 인기 있을 만한 놈을 데려와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해본다.
만약 이 녀석이 아니라 나 혼자 해볼만하다 싶으면 대권에 도전해보는 거고, 그게 아니라 정말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것과 자신이 생각하는 게 다르다면 최형림을 밀어주면서 킹메이커의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 * *
“흐음.”
최형림은 그런 양천용 의원의 뒤를 캐보고 있었다.
양천용 의원이 자신의 뒤를 봐주고 정계에 입문시켜 주겠다고 하는 말에 감동받는 인물이면 최형림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후원자가 어떤 인물이고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지, 어떤 약점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곧 한가지 파일을 찾을 수 있었다.
검찰조사관들의 중점관리 리스트.
검찰조사관들이 업무를 공유하고 하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리스트에 양천용 의원의 딸 양지희가 특별관리 대상으로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이게 뭡니까?”
“아 그게 말이지요.”
“양지희 씨가 미국에서 거주하잖습니까. 미국이랑 한국을 오갈 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검찰 수사관들이 난처해하면서 최형림에게 설명하는데 어째 다들 안색이 이상하다.
“연예인들 중 해외에 주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마약류 중점 관리 대상이지요.”
양지희는 연예인이니 마약류에 대해서 특별히 더 주시받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특기사항에 전 공안검사 양천용 의원의 딸이라고 되어있고 연락처로 양천용 의원 비서실과 개인전화가 기재되어 있는 건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이다.
양지희 관련해서 문제 터지면 일 크게 나기 전에 양천용에게 알려라.
그런 방침이 있지 않은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다.
양지희와 연관된 파일들이 몇 개나 있는데 그 대부분이 한때 연예인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김유라도 있군.’
사이다패스의 본체도 있었다.
최형림은 그것을 본 순간 이 리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양지희를 고발할 수 있는 피해자들의 리스트다.
바꿔말하면 양지희가 아버지 권세를 믿고 패악질을 했고 그 희생자가 리스트로 뽑힐 만큼 많으면 그 뒷구멍을 검찰이 닦아주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선배 검사, 그것도 수권정당의 당수가 된 양천용 의원을 위해서 검찰조직이 물심양면으로 입안의 혀처럼 군다.
“저기, 최 검사님.”
“아 괜찮습니다. 최근 양 선배님과 독대를 했거든요.”
“네?”
“다음 총선이 가까워지니까 슬슬 앞날을 생각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아하!”
“아이고 그렇군요.”
최형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고 난처해하던 검찰 수사관들이 일제히 얼굴을 폈다.
참 알기 쉬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능하고 성실한 최형림을 정녕 좋아하고 존중하고 있었다.
업무태도 때문에 검사를 좋아한다는 건 이들이 굉장히 성실하고 인간적으로 나쁘지 않은, 착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양천용 의원을 위해서 김유라 같은 희생자들의 입을 사전에 막고 그들을 감시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저지른다.
분명히 개인적으로는 선한 사람들, 사명감이 있는 이들인데 법이 아니라 검찰 조직을 위해서, 아니 정확히는 검찰이었던 이를 위해서 사적으로 사법권을 휘두르면서 그게 잘못이라는 자각도 없다.
‘역겹군. 선할 자격도 없는 이들의 선의라는 건. 뭐 나같은 살인자가 저들을 역겨워할 자격은 없지만.’
최형림은 검찰 수사관들의 안도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경멸했다.
그러나 저들보다 더한 악인이 바로 그가 아닌가?
이들의 악함, 나약함, 어리석음은 최형림이 손에 쥐어야 할 도구다.
그가 정점에 오른다면 이들은 양천용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그에게 충성할 것이다.
‘하지만 설마 양천용 의원이 사이다패스의 원수일 줄이야. 내가 그의 계파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사이다패스에게 알려진다면 위험해지겠군. 이건... 영사의 수작인가?’
최형림이 아무리 사이다패스를 끌어안고 가려고 해도 일이 이렇게 되면 이제 사이다패스와 함께 갈 수가 없다.
최형림이 사이다패스에게 말을 한다 해도 그녀가 최형림을 믿을 수 없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양천용 의원과의 다리를 주선한 게 영사였으니... 사이다패스와 최형림을 갈라놓기 위해 영사가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 * *
법무부에서 나와 영사의 사무실로 향한 최형림은 영사 및 지은재와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해보셨습니까?”
영사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최형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당신의 뜻대로 놀아나는 것 같은데. 양천용 의원을 소개해준 게 당신 아닌가?”
“저같은 천한 것이 어찌 그런 정치가 분을 만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류장천 회장님의 배려이지요.”
류장천이 연결해준거지 내가 연결한 게 아니다. 즉 이건 나의 함정이 아니다.
영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장천 회장을 연결해준게 영사 아니었던가.
“어쩔수 없지. 합시다.”
영사의 수작에 놀아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이다패스도 이대로 둘 수는 없다.
결국 최형림은 영사에게 사이다패스를 숙청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영사는 기뻐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