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이독제독의 현장 #3
“사이다패스의 방식은 쓸모가 없습니다.”
시현이 단언했다.
“보시다시피 양지희는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걸 즐기는 사디스트입니다. 그녀는 젊은 소녀의 머리통을 고무 망치로 두들겨서 상대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들어버렸지요. 그런데 고작 죽음으로 되갚아주는 건 너무나도 불공평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래서야 사이다패스가 아니라 고구마패스라고 불러야 겠군요.”
시현은 사이다패스가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이다패스의 방식을 부정했다.
유정미 작가도 시현의 말에 공감했다.
“그건 나도 공감해. 죽여봤자 고통은 순간이지.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이미 봐서 알 거 아냐? 양지희는 부모 빽이 대단해서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아. 본인이 그걸 아니까 방송국 대기실에서 사람 뺨을 때릴 정도로 막나간다고. 그런 인간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래? 사이다패스가 죽여버리는게 그나마 현실성이 있는 것 같은데.”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은 좀 쉬도록 하지요. 오늘이 가장 중요한 고비입니다.”
“중요한 고비?”
“네. 현재 추격자가 붙은 상황이거든요.”
“그, 그런 소리는 못들었는데? 당신들 미쳤어?”
유정미는 그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친한 친구도 아니고 생판 남이 스토커를 매달고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돕는 사람도 있고 거절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그 이전에 괘씸하다. 뒤에 암살자나 추격자를 달고 있다면 자신에게 피해가 올 수도 있는데 그런 걸 미리 말했어야지!
“괜찮습니다. 유 작가님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 겁니다. 상대의 성격상 유 작가님 같은 사람을 말려들어가게 하고 싶어하진 않을 거거든요.”
유정미는 방송계 인물로 본인의 영향력이야 대단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녀의 숙부는 방송계의 거물이다.
영사건 양천용 의원이건 뒤가 구린 짓을 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겠지.
그런데….
“추격자가 붙었다니?”
사이다패스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병원에서 난동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게 우리들이 빠지자 마자 병원에 직원이 난동을 부렸다고 했어요.”
류하리가 시현을 대신해서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뭐? 병원 직원이?”
사이다패스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병원 직원이 이미… 저쪽 패거리였단 말야?”
무서울 것 없어보이던 사이다패스지만 그 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보통 병원 직원으로 잠입하나?
위장취업해서 스파이 활동을 한다는 게 보통 조직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부의 첩보기관같은데서나 겨우 할법한 일을 벌이다니.
그것만 해도 등골이 싸해진다.
더욱이… 병원에 잠입했다면 상대는 병원에서 김유라의 병수발을 들어주는 보호자, 김유라의 외조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병수발하느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이 지옥같은 고통을 같이 하고 있는 외조모.
그녀에게 행여 불티라도 튄다면 사이다패스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알겠어. 젠장. 내가 처리하지.”
“하지 마세요. 상대는 바보가 아닙니다.”
“아니. 이봐. 데드맨. 내가 당신에게 한 번 당했다고 날 너무 얕잡아보는데 나는 그들이 어디있는지 잘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곳은 어디든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
사이다패스는 자신의 능력이 암살자로서 아주 특화되어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양천용과 양지희는 죽일 경우 영혼을 징수당해버리니까 시현에게 맡겨둔다 하더라도 영사와 최형림은 죽여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지금 그들을 죽여두지 않으면 그들이 자신의 외조모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사이다패스는 시현이 말리는데도 막무가내로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시현이 그녀를 말리기 위해 쫓아갔지만 화장실 문을 열자 방금 전 화장실에 들어갔던 사이다패스가 사라져있는게 아닌가?
“아.”
“어?!”
그 모습을 본 유정미와 장기정 기자가 흠칫 놀랐다.
“바, 방금 전 그 여자 들어가지 않았어요?”
“마, 마술인가 봅니다. 하하.”
시현과 이미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했던 장기정 기자는 대충 눈치채고 얼버무렸다.
“마술?….”
“뭐 곧 돌아올 겁니다. 죽지만 않으면 좋은 교훈이 되겠지요.”
시현은 손목시계를 살펴보며 그렇게 말했다.
* * *
영사는 보고를 받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이래서 사는 건 재밌단 말이지요. 예측불허의 일이 종종 일어나니 말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최형림이 물어보았다.
보아 하니 일이 생각한 대로 잘 안흘러가는 모양이었다.
영사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최형림에게 내막을 말해주었다.
“병원에 누군가가 와서 김유라 양을 빼돌렸다고 합니다.”
“빼돌려요?”
“네. 아마도 데드맨이겠지요.”
“…….”
“이거 죄송합니다. 사람을 미리 요양병원에 심어두기까지 했는데 역시 요양병원에 위장취업시켜둔 걸로 안심할 수는 없군요.”
“위장취업을 시켜뒀다고요?”
최형림은 영사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사이다패스 하나 확보해두기 위해서 부하 한 명을 요양병원에 위장취업 시켜두었다.
영사가 말하는 건 그런 것인데… 이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 아닌가?
보통 폭력배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나?
현실에서 많은 돈이 오고가는 모 온라인 게임에서 길드끼리의 승패를 가르기 위해 스파이도 쓰고 미인계도 쓴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스파이나 위장취업 같은 걸 실천할 수 있는 조직력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영사의 조직력, 행동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새삼 느끼게 해준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검사님. 위험해지실 겁니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괜찮습니다. 그건.”
“네?”
“미카엘에게 부탁을….”
“아 네. 그 분 말이군요.”
미카엘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영사의 표정에 열기가 떠오르는 걸 보니 최형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남자. 종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
‘과연 내가 통제할 수 있을까? 차라리 사이다패스가 더 쉬웠던 것 같은 느낌도 있는데.’
최형림은 그리 생각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 * *
최형림은 미카엘에게 전화를 마치고 영사의 사무실에서 나와 자택으로 향했다.
시간은 자정, 차들이 많이 줄어서 도착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차장에는 검은 양복차림의 남녀가 대기하고 있다가 최형림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카엘의 경호원으로 일하는 두 남녀였다.
사이다패스에게서 보호할 만한 전력이 필요하다고 하니 미카엘은 기꺼이 이들 둘을 내준 것이었다.
“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아직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바로 공격하진 말아줬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형림은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오피스텔의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역시, 안에는 사이다패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최형림.”
“역시 와 있었군요.”
“그래. 흥. 놀랍네. 당신도 내가 올 걸 알고서….”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의 곁에 서있는 두 남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최형림도 바보는 아니니까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이야 강구해 뒀겠지.
그렇지만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저런 이들을 데려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혹시 관계를 개선할 생각은 없습니까?”
“아하하하. 관계 개선? 지금 이상황에서 진심이야?”
“네. 저로서는 영사보다는 당신이 훨씬 다루기 수월하니까요.”
“젠장. 날 우습게 보지 마. 뭐? 내가 다루기가 쉬워?”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저 영사라는 자는 통제가 불가능하고 저를 은연 중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려고 합니다. 반면 당신이 원하는 건 알기 쉽지요.”
“내가 뭘 원하는데?”
“당신이 원하는 건 양천용 의원과 그 딸의 파멸아닙니까? 그렇다면 제가 그걸 이뤄드리지요.”
“언제? 대체 어느 세월에? 양천용이 있어야 당신 목적이 달성되는 거 아냐?”
“물론 제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양천용 의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단 그를 써먹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치우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양천용 의원도 아무런 사심없이 호의로 절 돕는게 아니니 말입니다.”
최형림이 정계에서 자리를 잡고 나면 킹메이커를 노리는 양천용은 최형림 입장에서 귀찮은 혹에 불과하다.
물론 양천용 입장에서는 자신이 공들여 투자해주고 인맥도 제공해주고 했으니 당연히 본전을 뽑아야겠지만 그렇게 뽑혀지는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것이다.
최형림은 이렇게 자신이 왜 사이다패스를 필요로 하고, 어떻게 해서 사이다패스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지, 그녀의 욕구를 어떻게 풀수 있는 지 이치에 따라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이다패스는 코웃음쳤다.
“결국 당신이 먹을 거 다 먹고 난 뒤에나 들어줄 수 있다는 소리 아냐? 내가 왜 그 공수표를 믿어야 하지? 배가 부르면 언제든지 딴 생각 할 남자를 내가 왜 믿어야 하냐고.”
사이다패스가 그리 말하자 최형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그는 왜 자신이 영사보다 사이다패스를 선택했고, 자신이 사이다패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으며 그게 서로에게 어떤 이득인지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이다패스는 이미 손익계산서를 굴릴 단계가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알아채고 감시하고 미행한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데드맨은 아마도 지금, 양천용이나 양지희에 대한 약속을 해준 것 같았다.
언젠가 최형림이 이득을 본 뒤 복수를 이루어주겠다는 최형림의 약속보다는 당장 복수를 이루게 해주겠다는 데드맨의 약속이 그녀에게는 더 매력적일 것이다.
게다가 적어도 데드맨은 그녀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우리 관계는 원래부터 드라이한 것 아니었습니까? 왜 이렇게 감정적이 되었습니까?”
“난 원래부터 항상 감정적이었어. 뭘 새삼스레!”
사이다패스가 그리 말하며 망치를 집어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검은 남녀가 최형림과 사이다패스의 사이에 섰다.
“설득이 안되는 것 같군요. 그럼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죽이지 말고 제압하면 좋겠군요.”
“누가 누굴 죽여?!”
사이다패스가 벌떡 일어나 대뜸 고무망치를 최형림에게 던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 * *
최형림의 머리로 날아드는 고무망치는 고무망치임에도 무시무시하게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검은 옷의 남자가 나서서 손을 뻗어 사이다패스의 고무망치를 막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망치를 잡는 순간 힘을 이기지 못하고 손가락이 부러지고 망치가 그의 어깻죽지를 강타했다.
상처에서 피가 튀며 남자가 뒤로 쓰러졌다.
“…….”
동료가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양복의 여성은 묵묵히 사이다패스를 눈으로 쫒으며 품에서 카람빗 나이프를 꺼내 손에서 빙그르르 돌리다 쥐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