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32화 (232/269)

제232화

이독제독의 현장 #4

“소용없어!”

사이다패스는 검은 양복의 여성을 피해 최형림에게 뛰어들었다.

어차피 좁은 오피스텔이라 최형림과의 거리는 가깝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최형림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가급적 죽이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만 사실 최형림이 경호원을 데려오지 않고 얼빠진 표정으로 살려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오기를 부렸다면 사이다패스는 기꺼이 살려줬을 것이다.

최형림의 목숨을 자신의 손에 쥐었음에도 살려준다.

그런 그림이 그려진다면 사이다패스는 자신이 최형림과 대등한 존재, 아니 보다 더 우위에 선 존재이며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을 최형림의 마음 속 깊이 새겨줄 수 있을테니까.

* * *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에게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감탄이라고 해야 할까?

동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잘난 부모 만난 사이코패스를 건드렸다가 폐인이 된 그녀.

그리고 미치광이 재벌의 감추어야 할 치부로 태어난 최형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그들은 연쇄살인으로 세상을 파괴하면서 까지 자신들의 울분을 풀려고 했다.

그렇지.

재벌가의 자제이며 본인의 능력만으로 검사가 된 남자가 연쇄살인 사건에 가담한다는 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형림은 그 연쇄살인이 불러일으킨 혼돈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겠다고, 이것이 자신에게 이득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렇지 않다.

결국 이 남자도 사이다패스처럼 감출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으니까 연쇄살인에 가담한 것 뿐이다.

설령 연쇄살인이 없이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해도 그는 무난하게 검찰 조직내에서 자신의 두각을 드러냈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사이다패스가 최형림을 인정하고 그의 능력에 감탄하고, 그가 지닌 분노에 공감하게 되니 문제가 생긴다.

그가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이 남자, 사건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

살의는 사이다패스의 것이나 사건의 정보 수집, 기획은 그의 것이었다.

사이다패스로서는 자신이 혹시 이 남자에게 조종당하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현실화되었다.

최형림과 영사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고 사실 언제든지 그의 손에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최형림같은 성격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런 안전망을 준비해뒀겠지.

하지만 이래서야 계속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는 신세가 아닌가?

그래서 사이다패스는 반발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주도권을 잡고 최형림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자신이 대등한 존재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호원까지 준비해두고 있었다니....

그렇게까지 주도권을 내줄 수 없단 말인가?

바로 그점이 사이다패스를 화나게 했다.

최형림도 사이다패스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설득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주도권은 자신이 쥔 채로, 그저 사이다패스에게 이치를 따져가며 설득하려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그녀의 화를 돋구었다.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에게 이득을 말하라고 온게 아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믿고 싶었구나.’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을 죽이기 위해 손을 뻗으며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그제야 이해했다.

그러나....

* * *

-우직!

분명히 어깨가 부러져 쓰러졌던 남자가 어느새 일어나 그의 몸으로 사이다패스의 팔을 받아냈다.

사이다패스의 손은 가볍게 그의 흉곽을 뚫고 등까지 관통했지만... 남자는 그 순간 사이다패스의 팔을 붙잡았다.

“윽?!”

사이다패스가 손을 잡혀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뒤에 검은 양복의 여성이 섰다.

-서걱!

섬찟한 소리와 함께 카람빗 나이프가 사이다패스의 다리와 척추, 목 뒤 연수를 찍고 지나갔다.

그리고 무서운 힘으로 휘둘러진 카람빗 나이프가 사이다패스의 목을 갈라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네 다섯 번은 죽고도 남을 중상이다.

하지만 사이다패스는 죽지 않는다.

“하... 하하하. 뭐하는 거야? 너희들?”

사이다패스가 조롱하는 그때였다.

-츱!

뭔가가 사이다패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어?”

남자의 몸이 변형되었다.

사이다패스에 의해서 부러진 어깨와 팔이 갈라지고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난 입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입이 사이다패스의 몸을 먹어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

생령인 사이다패스이지만 지금 이순간 그녀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꼈다.

이 남자가 그녀를 먹는 행위는 그녀를 죽일 수 있다.

아무리 생령이라고 해도 만약 저 남자에게 다 먹혀버리면 김유라는 영원히 깨어나는 일 없이 뇌사 상태에 빠질 것이다.

‘젠장. 뭐야 이 괴물은!’

분노한 사이다패스가 주먹을 휘둘러 남자의 머리를 박살냈다.

하지만 남자를 때리는 건 마치 진흙더미를 때리는 것과 같아서 분명히 타격감은 있지만 소용이 없다.

사이다패스의 괴력에 의해서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지만 남자는 지금 이순간도 돋아난 이빨로 사이다패스를 갉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서걱! 서걱!

카람빗 나이프 만으로 사람을 토막내는 무시무시한 검은 양복 여자의 공격이 퍼부어졌다.

칼을 맞아도 죽지 않는 사이다패스이지만 잘게 잘릴때마다 남자가 먹어치우는 양도 늘어난다.

먹기 좋게 잘게 자르는 것 같았다.

‘그렇군....’

여자가 자르고 남자가 먹는다.

이들은 죽지 않는 이능력자, 불사자들 조차 죽이기 위해 짜여진 콤비다.

“으윽! 어, 어쩌지!”

사이다패스가 당황하는 그때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의 목소리였다.

[위험에 처한 것 같으니 깨우겠습니다.]

“뭐?!”

그 순간 갑자기 사이다패스의 몸이 사라졌다.

-쉭!

사이다패스의 목과 척추를 노리고 날아들던 카람빗 나이프가 허공을 갈랐다.

사이다패스가 사라지며 칼날이 헛되이 공기만 자른 것이다.

“음.”

“이런.”

검은 양복의 남녀는 사이다패스가 사라져버린 걸 보며 아쉬워 했다.

남자는 이형의 괴물 형상에서 다시금 인간으로 돌아오며 최형림에게 보고했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한동안은 계속 저희가 경호해드려야 겠군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미카엘에게 돌아가야 하는게....”

“애초에 저희들에게 주인님이 명하신 건.”

“당신을 사이다패스에게서 지키라는 명령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하지요.”

최형림은 그리 말하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음료수 캔을 바라보았다.

사이다패스는 음식을 먹지도 못하면서 또 최형림의 냉장고를 뒤졌던 모양이다.

“........”

최형림은 말없이 음료수 캔을 살펴보다가 다시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 * *

김유라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다.

왜냐면 지금 김유라의 머리에는 방독면이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용 방독면이 아니라 화재시 비상대피용 방독면이지만 그런 방독면도 상당히 훌륭한 방음효과를 지니고 있어서 김유라의 비명소리를 많이 줄여주었다.

“뭐하는 거에요 지금?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그녀는 지금 죽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류하리는 시현의 막무가내같은 행동에 혀를 찼다.

시현은 김유라가 잠든 채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그녀에게 ‘위험에 처한 것 같으니 깨우겠다.’고 선언한 후 그녀의 머리에 방독면을 씌웠다.

그리고 그녀를 흔들어 억지로 깨운 것이었다.

“아마 무사할 겁니다. 하지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큰일이요?”

“네. 머리 위의 수명이 줄어들더군요.”

“...수명이 보여요?”

류하리는 그게 궁금했다.

사이다패스가 행하는 일은 시현의 눈을 속일 수 있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서 시현은 지금 수명이 줄어드는 걸로 사이다패스가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알 수 있었을까?

“사이다패스가 죽이는 사람들의 수명 변화는 제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이다패스는 다른 이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었지요.”

“....아.”

사이다패스의 수명을 줄이는 공격은 사이다패스가 아니라 다른 계약자나 사람에 의해서 자행되는 것이라 시현의 눈이 통한 모양이었다.

“그럼 살린 거 맞군요.”

“네. 그렇게 말렸는데 가서 두들겨 맞았으니 앞으로는 좀 말을 듣겠지요.”

“...그럴까요?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성질이 좀 불 같던데?”

류하리는 한숨을 내쉬고 집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유정미 작가가 와인을 따서 홀짝홀짝 마시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김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네.”

김유라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보며 유정미 작가는 동정보다는 짜증을 먼저 내비쳤다.

뭐 전혀 관계없었는데 갑자기 쳐들어와서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무작정 동정하라는 것도 무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유정미 작가가 박정한 성격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양지희의 패악질에 사람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동정보다는 짜증을 앞세우다니.

이런 사람을 한패로 끌어들여도 괜찮을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신과 장기자님의 이름을 좀 팔아도 되겠습니까?”

“이름?”

“네. 피해자를 모으도록 하지요.”

“그래서?”

“뭐 그 다음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름 정도만 빌려주시면 더 이상 폐를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름을 빌려준 시점에서 폐 아냐? 그리고 이름이 뭐가 중요한데?”

“피해자들이 그냥은 입을 안열겁니다. 제가 탐정이라고 하면 더더욱 말이지요. 하지만 언론계, 그리고 방송 쪽에서 유명한 예능 PD가 관련되어 있다면 그때는 좀 안심하고 입을 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뭐 그리고는 여기 계시지요. 돈이라도 보수로챙겨드릴까요?”

“아니.”

유정미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아예 특집 방송으로 만들자고. 어차피 당신이 지랄하면 내가 위험해지는 거 아냐? 기왕 호랑이 굴에 뛰어들었으면 겁먹고 뒤돌아서 산으로 내려가다 호랑이에게 등짝이 따이느니 죽이되건 밥이 되건 잡아야지. 내 이름으로 방송을 만들자구.”

“...하하하.”

시현은 화끈하게 태풍의 눈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유정미 작가에게 감탄했다.

“나도 언제까지 숙부 그늘에서 살 수는 없지. 대박을 내서 이 업계에 금자탑을 쌓아보겠어.”

류하리가 그녀의 인성에 대해서 불신하고 있건 말건 유정미 작가는 이번 사건에 완전히 올라타기로 마음먹었다.

* * *

지은재는 영사의 조직에서 생활하며 만족하고 있었다.

보수도 세고 일도 쉬운 편이었다.

위에서 시키는 걸 하기만 하면 되니까.머리쓸 일도 없어서 좋았다.

그런데….

“지은재 씨. 당신이 해줘야 할 일이 있는데. 살인예술가로서 말이지.”

영사가 직접 지은재를 호출해 일을 맡기려는 것이었다.

“네. 이사님. 어떤 일입니까?”

“일을 그르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고 싶구만.”

“유종의 미 말입니까?”

살인 예술가의 능력은 트릭을 준비하면 상대의 살의를 증폭시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살인예술가의 능력을 사용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살인을 저지르게 한다는 것.

아마도 일을 그르친 조직원에게 살인을 저지르게 해서 감방에 가는 것으로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려는 것이리라.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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