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폭풍 속에서 #2
그녀 뿐만이 아니다.
양천용 의원부터가 원래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 그는 형제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친척들이 빌빌거릴 때 그가 일자리도 알선하고 필요하면 자신이 직접 고용도 해주면서 그들의 먹고 살 길을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친지들 사이에서 아무래도 양천용 일가가 우세할 수밖에 없고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막 자란 양지희 눈에 사촌언니건 손윗사람이건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슬슬 사람들에게 밑밥을 깔아야 할 때 아냐?”
양지희는 모순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사생활이 보장받고 싶다는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대중들에게 떠받들리고 싶다는 욕망.
기실 이런 욕망은 모든 연예인,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모순된 욕망인 것이다.
사실 욕망은 모순되지 않았다.
피곤할 때는 사생활을 우선하다가도 발길을 돌리면 언제든지 대중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다.
이 욕망 자체에는 모순 따위가 없다.
현실적으로 이루기 힘들어서 그렇지.
그러나 매니저 겸 코디 입장에서는 그런 양지희의 변덕이 너무나 상대하기 고달픈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본인이 망가지기 싫다고 항상 도도한 이미지의 정극 배우만 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좋아해주길 바라니 될 턱이 없다. 친근한 이미지를 주려면 예능에도 나오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좀 많이 보여줘야 하는데 양지희의 성깔머리, 그리고 마약중독자라는 점 때문에 사생활을 그렇게 노출시켜선 안되었다.
매니저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애썼다.
“태풍 때문에 지연되었잖아요. 그냥 갑시다. 아, 아버님께 인사하러 갈까요?”
“아니 됐어. 오늘 일정 없어? 제작자나 투자자와 미팅이라던가?”
“비행기 지연될 때 늦어질 것 같아서 다 취소시켰어요.”
“그래? 그렇다면 음….”
“아버님께 인사하는 게?”
“아니 됐어. 기껏 오래간만에 미국에서 들어왔는데 오자마자 아버지를 만나러 가면 너무 못나가는 년처럼 보이잖아?”
‘대체 누가 신경쓴다고?’
가족을 만날 수도 있는 거지. 하물며 양천용은 양지희가 사고 칠때마다 다 수습해주느라 구둣발 밑창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노력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걸 지적해봤자 말을 들어먹기 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미워할테니 매니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그건 통과 되었어?”
“네.”
매니저는 자신의 수화물이 무사히 통과한 것을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약물이 들어가 있는 브라우니 쿠키나 초콜릿 등이 무사히 통관된 것이었다.
초콜릿은 개에게 독성이 있기 때문에 초콜릿 계열의 식품 안에 마약을 숨기면 마약탐지견을 속일 수 있다는게 마약중독자들 사이에서의 속설이었다.
하지만 공항 통관물을 조사하도록 훈련받은 마약탐지견들이 초콜릿 때문에 중독되는 일은 없다.
실제로 통관된 것은 양지희가 양천용 의원의 딸이기 때문에 수월하게 통과된 것이지만 말이다.
“좋아. 그럼 간단히 시간 때우기엔 좋겠군.”
“…….”
일정들이 비자 그 틈을 이용해 마약을 하겠다는 양지희의 말에 매니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많이 비나 보지. 양지희?”
그런데 그때 그녀들의 앞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화려한 핑크색 머리칼에 눈에 광기가 맴도는 상당한 미녀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는 고무망치를 하나 들고 있다. 고무망치라서 그렇게 위협적인 무기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공항 1층 도착 지점에서 보기엔 이상한 인물이었다.
“뭐야? 저건?”
“흠 날 못알아 봐?”
그녀는 그리 말하고 양지희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양지희가 짜증이 나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 거지는? 그러니까 내가 미국에서부터 경호원 대동하고 오자고 했잖아. 왜 이런 거지같은 꼴을 보게 해?”
‘아니 평소에 마리화나를 그렇게 처먹는데 어떻게 경호원을 부려? 계속 그꼴을 보는 경호원이 입을 다물어 주겠어? 그리고 네가 뭐 헐리웃 대스타도 아니잖아? 미국에서 그 비싼 경호원을 굳이 써갈 필요도 없으면서.’
그녀가 마약중독자라는 약점. 그녀의 독랄한 성격,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로 매니저는 한국에 도착하면 거기서부터 따로 단기간 경호를 붙일 셈이었다.
다만 태풍 때문에 항공기가 딜레이되어서 마침 오늘 경호원이 없는데 그 틈에 갑자기 이상한 인물이 찾아온 것이었다.
“여전하구만. 내가 누군지 모르나보네?”
사이다패스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양지희에게 혀를 찼다.
청부폭력으로 그녀를 폐인으로 만든 장본인이 아무리 지금 모습이 좀 화려하다 해도 아예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날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내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사이다패스는 무심한 양지희의 시선에 상처를 받았다.
그렇게나 쉽게 한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했으면서, 그녀 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들 까지 함께 고통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이가 이다지도 가볍게 결정한 일이었다는 게 어이가 없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차라리 자신이 뭔가 그녀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게 아니었나. 스스로 의심하고 반문하고 자책하며 고통스러워 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고 해도 이렇게 집요하게 증오하고 실천할 수 없었을테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양지희는 정녕 사소한 이유로 그녀를 짓밟고 파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양지희는 짜증난다는 듯 매니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건. 언니가 짜고 하는 거야?”
“아니....”
“그럼 얼른 경찰부르지 않고 뭐해?”
사이다패스를 전혀 위협으로 보지 않는 시선이었다.
살면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분통을 터뜨리는 인간을 얼마든지 보아왔으며 그 대부분은 날아드는 불티만도 못한 것이어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그녀에게 엿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를 것이다.
사이다패스가 고무망치를 움켜쥐었다.
최형림의 경호원들에게 당해서 그녀의 상태는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의 완력이면 인간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 * *
“거기까지 하시지요.”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세웠다.
“!!!!!”
사이다패스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영사가 서 있었다.
“뭐야.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그야. 당신을 제거하기 위해서지요. 김유라씨.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뭐?”
사이다패스는 흠칫 놀랐다.
인천공항 도착 대합실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확연히 보통사람들과 다른 이들이 일어났다.
벤치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던 남자가 일어나고, 기둥 뒤에서, 화장실에서, 숨어있던 이들이 차례차례 나와서 이쪽으로 다가온다.
“안심하십시오. 양지희씨. 한국에 계실동안 저희가 경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만나뵙는데 시간이 좀 걸렸군요.”
“......”
양지희는 그런 영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했더니... 양의사 아니야?”
양의사. 그것은 한강건재 영업이사 양원일, 그러니까 영사의 현재 신분이기도 했다.
“......”
사이다패스는 영사의 신분을 양지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는 것을 보며 그들이 사실 원래부터 안면이 있던 사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그랬다.
양지희는 어떻게, 어떤 인맥으로 청부폭력업자를 불렀지?
해답은 간단했다.
누군가 범죄에 익숙하고 인맥이 넓은 자가 도와주었다.
그래, 범죄자들에게 범죄수법을 전수해주고 인맥이 넓어서 필요할 때 범죄 팀을 구성할 수 있는 픽서 같은 존재가 양지희를 도와준 것이다.
바로 영사가 청부폭력 업자와 양지희를 이어준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이자식!”
사이다패스가 분노해서 망치를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아.”
영사는 자신의 눈 앞에서 어느새 사이다패스가 사라진 것을 보았다.
“쯧.”
영사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무슨 일입니까.”
“사이다패스가 혼자 왔기에 그녀의 버릇을 못고치고 폭주한 건가 싶었는데 데드맨이 일부러 보낸 거였군. 제법인데 시현.”
“.........”
“어. 방금 왠 여자가 있지 않았어요?”
양지희의 매니저가 그렇게 물어보았다.
분명히 방금 전 사이다패스가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여자가 사라지자 사이다패스와 계약한 존재가 인간들의 인식에 손을 댔다.
악마의 힘이 너무나 당당하게 사람들의 인식에 손을 대서 공항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자신들의 일에 충실했다.
비바람이 쏟아지는 공항 대합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택시와 버스를 기다리며 분주히 오갈 뿐, 누구도 이쪽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영사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방금 전에 여자가 있었다고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아, 차, 착각이요?”
“네. 착각 말입니다.”
“.......”
착각이라는 말에 매니저는 말문이 막혔다.
“그나저나 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가시지요.”
영사는 양지희에게 그리 말하고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 * *
대림역 공영주차장에 시현의 차가 주차되어있었다.
시현은 그 눈을 금색으로 빛내며 뒷좌석의 환자용 들것에 눕혀져 있는 김유라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급격하게 줄어들던 숫자가 다시 늘어나고 있었다.
방금 전 목숨을 잃을 위험한 상황에서 회복된 것이다.
“약을 좀 독한 걸 쓰긴 했습니다만....”
시현은 주사기를 비닐봉투에 넣고 잠에서 깨어난 김유라의 입을 막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약기운 때문인지 김유라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었다.
“약이 꽤 잘 듣는 군요. 하긴 진통효과도 있습니다만.”
“으으으으.....”
“말은 잘 못해도 의식은 있겠지요? 당신은 또 죽을 뻔했습니다. 수명이 격하게 줄어드는게 보여서 얼른 조치를 취했습니다만 후우. 보아하니 양지희에게 꽤 강력한 경호원들이 붙은 모양이었군요.”
시현의 능력은 수명이 줄어드는 걸 알아채는 능력. 그렇다는 건 방금 전 그대로 사이다패스가 영사의 패거리와 싸웠다면 죽었다는 소리다.
“으으...개, 개자식....”
“흠 놀랍군요.”
시현은 김유라가 말을 하는 걸 보며 놀랐다.
김유라가 말도 못하고 폐인이 되어있었을텐데, 이번에 투약한 약이 그녀에게 잘 맞는 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윽....”
“움직여선 안됩니다. 아직 몸이 쇠약하고 지금 당신에게 투약한 건 법적으로 금지된 약입니다. 흠, 하지만 이게 설마 당신에게 말을 할 수 있게 해주다니. 하긴 알츠하이머 환자에게 칸나비노이드 같은 걸 처방하면 효과가 있다는 연구도 있었지요. 아니면, 사이다패스의 활동이 당신의 언어중추나 뇌를 회복시켜주었을 수도 있고요.”
김유라는 그런 시현의 말을 들으며 이를 갈았다.
지금 그녀는 말 한마디 한마디 내뱉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머릿 속에서 번개가 치며 뇌신경을 다 태우는 것 같은 고통과 착란이 느껴졌다.
간질환자가 된 기분이다.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려 할 때마다 뇌 내에서 엄청난 신호들이 스파크가 되어서 뇌 세포 자체를 튀겨버리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말해야 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