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폭풍 속에서 #7
“제정신이에요?”
성신아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경찰들의 격무를 덜어준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사설 경호원을 공무에 대동하다니 큰 문제다. 상식을 벗어난 행위임은 틀림없다.
‘이거 멀쩡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큰일날 사람이네.’
하지만 현재 사이다패스를 적으로 돌린 최형림으로서는 이들의 보호가 필요했다.
사이다패스를 제거하거나 다시 설득해 한 편으로 만들지 못하는 한, 일반적인 경호인력으로는 절대로 사이다패스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뭐하고 계셨습니까?”
“어, 어쨌건 엿듣는 형태가 된 건 죄송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더 이야기할 수는 없겠군요.”
류하리는 성신아에게 손짓하고 물러났다.
“일단 제 의사는 분명히 전했지요? 약혼은 파혼하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다만 류장천 회장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실 지는 모르겠군요.”
최형림이 쓴웃음을 지었다.
“윽....”
류하리는 반박할 말이 없어져서 찡그리고는 성신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성신아.”
“아 저기.”
“일단 나가자고.”
류하리가 성신아를 잡아끌었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좀 엿들었다고 화내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약혼 깬다면 둘이 남남인데 내가 최 선배 만나는 건 일때문이라고. 너무 간섭이 심한데?’
성신아는 류하리의 행동이 지나친 간섭처럼 여겨졌다.
류하리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이 멍청아. 저것들은 인간이 아냐. 너 여기서 알짱거리다 잘못하면 죽어. 빨리 따라와.’
최형림 곁에 있는 두 경호원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단 번에 알아본 류하리는 서둘러 성신아를 잡아 끌어 자리를 빠져나왔다.
* * *
“야 도대체 왜그래?”
성신아는 류하리와 함께 서부지검을 빠져나오고 나서 물어보았다.
“약혼은 파혼한다고? 무슨 일 있어?”
“아니 별건 아니고, 저 사람이 어머니에게 뭐라고 해서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야.”
“아. 그거 말이지?”
“단톡방에 있던 동기들이 험담하는 거 보내주더라.”
“풉? 그랬어?”
성신아는 류하리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단톡방에서 동기들이 다 같이 류하리를 험담하면서도 또 그중 일부는 남들이 류하리 험담하는 걸 귀신같이 잘라서 당사자에게 보내준 모양이었다.
‘누가 너 뒷담하더라.’ 하고 보내주는 건 이 사람과 이간질을 위해서 보내는 것도 있겠지만 류하리를 다들 욕하는 걸 볼 때 류하리의 속을 긁어놓으려고 하는 짓일 것이다.
‘하여튼 인간들 어디나 그러네. 가만? 내가 험담한 것도 편집되어서 올라갔으려나?’
성신아는 그래서 단톡방에서도 적당히 분위기 보아가며 맞장구만 쳤지 딱히 류하리에게 보여줘서 사이갈라질 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 뭐 성신아의 경우는 차라리 류하리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뒷담은 안해서 괜찮겠지만 언제 어떻게 편집해서 떼어다 줬는지 모르니 좀 걱정된다.
“뭐 그래서 지금 내 커리어가 개판이 되었어. 그나마 현장직 마다하지 않고 뛰어서 평판을 올렸는데 세상에....”
“뭐 괜찮아. 얼굴에 철판 깔아. 어차피 다들 앞에선 찍소리 못하잖아. 이래저래 뒤에서 헛소리 해도 눈에 보이는 실적을 만들면 뭐 어쩔거야?”
성신아는 무심코 류하리를 위로했다.
원래는 류하리를 더 엿먹이고 싶기도 한데... 다른 동기들이 류하리를 엿먹이는데 가담하고 싶진 않았다.
패거리로 몰려들어서 물어뜯으면 아무래도 대등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류하리가 더 부잣집 자제고 사격대회 선수였고 뭐 잘나간다 해도 성신아는 어디까지나 류하리의 라이벌, 대등한 존재이고 싶으니까 여럿이 뒷담을 하느니 혼자 면전에서 쌍욕을 박는 쪽을 택하겠다.
“그보다 그래서 왜 날 끌고 나왔는데?”
“아니 그게....”
류하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최형림이 사이다패스와 한패거리였다?
그러나 그건 증거가 전혀 없는 중상모략이 된다.
게다가 만약 성신아에게 최형림을 험담했다가 그게 최형림에게 흘러들어간다면 오히려 성신아의 목이 위험하다.
하지만 성신아에게 뭐라고 말해야 최형림을 경계하고 피하려 할까?
“최형림 선배는 윤회장의 스폰을 받고 있어. 저 경호원은 윤회장이 붙여준거야.”
“윤회장이라니?”
“헥사곤 엔터테인먼트의....”
“어?”
듣고 있던 성신아가 흠칫 놀랐다.
“아니 재벌가 자제인 선배가 왜?”
“왜냐면 선배는 자기 집안에 반기를 들고 있는 상태거든? 자세한 상황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류하리는 그렇게 말하고 내심 혀를 찼다. 자신이 너무 비열한 짓을 하는 것 같다만 이렇게 말해주면 성신아도 최형림이 뒤가 구린 구석이 있다는 걸 믿고 조심하겠지.
“너도 마음에 짚이는 게 있지 않아?”
류하리는 성신아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과거 성신아는 최형림을 따라 갔다가 덩달아 휴대폰을 한 대 공짜로 받아왔었다.
“아... 그, 그래.”
-콰르르릉!
우레소리가 창문을 때렸다.
“정말 약혼을 깰 생각인가 보구나.”
‘아. 지금 이렇게 말하면 최선배가 집안 혜택을 못 받아서 약혼을 깬 것처럼 보이려나? 내가 완전 속물처럼 보이잖아? 그거?’
류하리는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자신의 평판보다 중요한 건 성신아의 안전이었다.
“그래.”
“하지만 난 오늘 일이 있어서 왔으니까 최 선배를 만나야겠는데?”
“알겠어. 내가 말했다고는 하지 말고. 조심해.”
“그래. 아 나중에 보자.”
성신아는 류하리에게 그리 말하고 최형림의 사무실로 다시 향했다.
류하리는 성신아와 헤어지며 박진감 경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어 류 경위.]
“저 계속 이거 할게요. 어차피 지금 내근직 보직 안났죠?”
[그야. 내근직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고 그러니까.]
“잘 됐네요. 한동안 계속 이 일 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얼굴에 철판 깔고 비비적 거리는 거죠 뭐. 내근직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서있을텐데 부모님에겐 자리가 안나서 어쩔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만 아니겠어요? 남들이야 뭐라고 하겠지만 어차피 정보 3팀은 이것저것 다 하는 땜빵 전문이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지. 그럼 마침 공덕 지구대에서 지금 투신자살자가 있다는데 가서 설득 좀 도와주게. 상대가 여자인데 출동한 순경들이 죄 남자라서 애를 먹는 모양이야.]
“네 알겠습니다.”
류하리는 전화를 끊고 자리를 옮겼다.
* * *
성신아는 최형림과 다시 마주했다.
“여기 경찰들 보고서에요. 뭐 죄다 그냥 사칭범들이긴 하지만... 이거랑 그리고 인터넷 트래픽 조사자료, 여론 조사자료들이랍니다.”
성신아는 아무 질문 없이 최형림에게 경찰측에서 조사한 자료와 이번주 여론 동향을 전달해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메일로 보내줘도 될텐데요.”
“메일로 보내면 답신이 언제 오는지 모른다고 해서... 게다가 검찰측도 조사하고 있잖아요?”
경찰 조사자료와 검찰 조사자료 의 데이터를 대조하고 맞춰보는 작업을 위해서 성신아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정말 류하리와 약혼을 깰 건가요? 선배님?”
“글쎄요. 흠. 그저 그녀가 화나서 저러는 겁니다. 결혼은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지요. 그녀가 과연 아버님과 어머님의 뜻을 꺾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류하리가 당장 화나서 저래도 약혼을 파기하긴 힘들 것이다.
최형림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혼하긴 하실 거로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요. 류장천 회장은, 그러니까 류 경위의 부친은 제게 아주 중요한 후원자가 될 수 있거든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결혼하는 건 별로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일 것 같은데요.”
서로서로 좋아해서 결혼한 사람들도 결혼 생활 도중에 망가져 갈라서곤 한다.
하물며 맞선이나 정략결혼 같은 거면 더욱 더 힘들겠지.
심지어 시작 전부터 이렇게 서로서로 미워할 일을 만들고 시작하면 과연 그 결혼생활이 원만할까?
성신아가 그 점을 물어보았지만 최형림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을 넘은 질문이자 간섭이다.
최형림이 결혼을 하건 말건 성신아가 따질 문제는 아닐텐데?
그런데 최형림은 그런 성신아에게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사실 이 빌어먹을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저는 결혼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고통스럽고 비참한 결혼생활이 될 거라면 류하리, 그녀와 함께 하는 게 낫겠지요. 적어도 그녀에게 내가 증오의 대상이라도 될테니 말입니다.”
“증오의 대상이 되더라도 결혼하겠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기억못하는 것 같지만 제가 그녀를 만난 건 경찰대학이 처음이 아닙니다.”
“......”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습니다만 집안 좋고 장래 유망한 청년 검사, 재벌가의 자제라는 이유만으로도 다른 여성들은 열심히 제게 관심을 보이는데, 그녀만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군요.”
“아.”
“그래서 그녀의 편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녀를 결혼하라고 보채는 가족들의 압력을 해소해주고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인 양, 그녀의 우군인 양 들어줘도 뭐 원래부터 호의를 보내는 사람이 많은 건지 연애 시그널로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차라리 그녀의 적이 되기로 한 겁니다.”
류하리는 원체부터 이성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서 정작 본인은 연얘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다.
용모가 빼어나고 집안이 유복한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할까.
목이 마른 입장이 아니라 우물을 보더라도 시큰둥하고 지나치는 것이다.
최형림처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이라 할 지라도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이네. 그런데 뭐?’ 그런 감상으로 접근하게 되니 연애 감정이 싹틀 리가 없다.
‘재벌가의 일원인 잘생긴 청년검사.’
이 명함이 류하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류하리에게 최형림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킨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최형림이 사이다패스의 협력자이며 그녀가 불러오는 죽음과 혼돈을 이용하려는 자라는 점.
그것이 류하리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서 무감동, 무감흥의 존재로 남느니 차라리 적으로서 혐오받는 쪽이 낫습니다.”
“그거 참 관심종자 악플러다운 발상인데요. 의외네요. 선배는? 선배를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을텐데 굳이 그런 식으로....”
“저도 그녀와 비슷하거든요. 이성들이 먼저 접근해오는 데 그것이 제 집안 배경이나 그런 걸 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그나마 호의에는 호의로 보답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살아서 예의는 어긋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서야 연애감정이 싹틀리 없다. 결국 최형림 역시 연애에 목마른 적이 없는 입장이다.
성신아는 최형림의 말을 듣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제게... 다 해주시나요?”
“그래도 성경위님은 그중에 남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
성신아는 최형림의 말에 당혹감을 느꼈다.
‘무슨 뜻이지? 류하리랑 결혼할 거라면서? 나는 남들과 다르다니 뭐야? 무슨 뜻이야?’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래도 너는 특별하다 뭐 그런 소리인가?
“아무래도 날이 흐리니 너무 감상적이 된 것 같군요. 그럼 작업을 해볼까요?”
최형림은 성신아가 보내준 파일을 열어보고 데이터 검토에 나섰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