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43화 (243/269)

제243화

죽음 이상의 벌 #1

양지희의 매니저는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대형 연예기획사인 AT기획의 캐스팅 매니저가 그녀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오늘 밤에 제작위원회 파티있는 거 알죠? 그 틈에 투자자 중 한 명이 양지희 씨를 직접 뵙고 싶다고 하는데요?]

“네? 뭐라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팬이라서 투자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급적이면 양지희 씨를 보고 싶다고 하네요.]

“아 진짜 미치겠네.”

양지희의 매니저는 각성제의 반동으로 시체처럼 호텔 침대 위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양지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투자자들 중에는 종종 어떤 여배우를 후원한다는 느낌으로 접근해오는 이들이 있었다.

아직 연예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시절, 영화나 드라마가 직접적인 판매수익보다는 그 부수입으로 먹고 살아야 했던 시절의 악습이다.

그때 음반이 아무리 팔려도 가수에게 돈 한푼 안주고 밤무대 뛰어서 벌어야 했고 여배우들은 자연스럽게 투자자들에게 가서 아양을 떨어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영화는 관객수입만으로 투자금액을 뽑고도 남으며 드라마 역시 방영료, 재방영료, 해외판권수익으로 제작비를 거뜬히 뽑고도 남는다.

이제와서 이런 쌍팔년도 식 미팅을 요구하다니.

“이봐요. 그딴 무례한 요구를 하다니. 저기 양지희가 어떤 앤지, 그 아버지가 누군지 아시죠? 그런 거 안하는데요. 말만 꺼내도 오히려 당신들 고소할 거에요. 제가 중간에서 걸러주니까 망정이지.”

만약 양지희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주 노발대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무리 개떡같은 이야기를 들고 왔다 해도 AT기획은 초대형 기획사. 그 AT기획이 양지희에 의해 산산조각 난다면 한국 연예계의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리라.

하지만 전화를 걸어온 쪽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이 투자자 말이죠… 잘생겼어요.]

“네?”

[잘생긴 젊은 남자라고요. 늙은이가 아니라.]

“흠?”

매니저는 그 말을 듣고 흥미가 동했다.

관심이 있어서 만나고 싶다는 게 접대하라는 게 아니라 정말 한 번 보고 싶다는 정도인가?

같이 돈많은 스폰서, 투자자 라고 해도 젊고 잘생긴 남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뭐하는 사람인데요?”

[여러가지 사업체를 운영한다고 하더군요.]

“아니 그런데 왜 양지희를 굳이?”

매니저 스스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양지희는 분명히 여배우를 할 정도로 용모가 빼어나다.

그러나, 그래서 굉장하냐면 그건 아니다.

더 예쁘고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다.

양지희를 그나마 다른 이들과 차별하는 건 그녀가 정극 위주의, 본격파 여배우라는 것이다.

‘뭐 양지희의 연기력에 감동받은 개인 팬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상할 게 없다.

“일단 이야기는 해보지요. 하지만 딱히 잘 해주라고 하진 마세요. 그냥 일정에 있으니까 가보는 거니까요. 지금 양지희가 기분이 많이 다운되어 있거든요.”

[‘다운’ 말인가요?]

“.....”

양지희가 약을 한다는 건 연예기획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매니저는 그냥 일반용어로 말했는데 상대는 양지희가 마약쟁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

‘아. 이게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건가.’

아마도 ‘양지희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느냐?’, ‘너희들 다 박살낼 수 있다.’ 그런 취지로 말한 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캐스팅 매니저와 싸우는 건 아무리 잘나가는 부모를 둔 쪽이라 해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애 씻기고 깨우고 하느라 좀 지각할 수도 있으니까 양해부탁드려요.”

* * *

약에서 깨어난 양지희는 지독한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퀭한 눈을 한 채 변기를 끌어안고 토를 계속한다.

먹은 것도 없어서 위액을 토해내느라 치아는 부식되어 라미네이트로 덮었고 보정속옷으로 감추고 있는 몸에는 늑골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전형적인 중증 약쟁이의 모습이다.

한국에서는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버지의 간섭 없이 미국에서 지내면서 고삐가 풀린 그녀는 이제 막을 수가 없다.

매니저는 자신의 사촌여동생을 보며 문득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다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 때문에 정작 이 여자는 고독하다.

그래서 만약 정말로 그녀를 보고자 하는 팬이 그녀를 사랑해줄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얘는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해.

부모가 아니라 다른 대등한 사람이....

“그래서. 뭐? 투자자라고?”

변기에 위액을 토해낸 양지희가 퀭한 눈으로 돌아보며 물어보았다.

“그냥 그쪽에서 하는 말이에요.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가야 할 파티잖아요?”

“쳇. 귀찮아.”

양지희는 화장을 시작했다. 퀭한 눈동자, 앙상한 몸에 어떻게든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두껍게 컨실먼트를 바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 * *

“투자를 했다고?”

사이다패스는 김유라, 그러니까 자신의 몸을 돌보며 당황했다.

“네. AT기획은 각 드라마나 영화를 할때 주주들에게 따로 문화진흥채권을 발행하는데 마침 제가 AT기획 주식을 좀 가지고 있거든요.”

“부자네?”

“그렇게 부자는 아닙니다. 그냥 한 푼 두 푼 아껴 모으다 보니까. 여러 불륜남녀들이 모아주신 성의 덕분이지요.”

“아 여기 보지마.”

사이다패스는 자신의 몸을 벗기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는지라 시현이 행여 김유라의 몸을 볼까봐 부끄러워 했다.

“으…..”

앙상하게 말라 비틀어진 몸이다. 조금만 실수하면 부러질 것 같은 앙상한 팔다리, 이런 나신을 시현이 본다고 해서 기꺼워 할 이유가 없다는 건 사이다패스도 스스로 잘 알겠다.

다만 너무나 쇠약하고 안쓰러운 모습이라 누구에게 보이기 싫다. 다 큰 처자가 똥오줌을 못가려 기저귀로 오물을 배출하고 살아야 하는 모습을 어찌 이성에게 보이겠는가?

-칙칙.

시현은 차 안에 탈취제를 뿌리고 있었다.

“야. 지금 그 행동 뭐야?”

“아니,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지금 이거 냄새난다는 시위 아냐?”

“...알겠습니다. 나중에 실내 스팀 세차를 맡기도록 하지요.”

“야이….”

사이다패스는 시현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남자들 자기 차에 다들 진심인데 안에서 똥오줌을 싸고 있으니, 그나마 시현이 이렇게 물러나 주는 건 사이다패스가 난처해하고 수치스러워 함을 알기 때문이리라.

배려해준다고 하는 건데도 사이다패스는 막연히 화가 났다.

그때 시현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거, 그 여경 전화 아냐?”

“네. 그렇군요.”

“둘이 무슨 관계야?”

“그녀는 절 감시하기 위해 경찰이 붙인 끄나풀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사이가 좋아보이던데?”

“독재시절에 반정부 인사를 감시할 때도 그랬지요. 감시역과 피감시자는 서로서로 싫어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이 합의해서 어느정도 선을 그어두고 협력하지 않으면 서로서로 힘들어질 뿐이지요.”

“에이. 아무리 봐도 그 이상인데?”

“쉿. 통화해야 하니 조용히 해주세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류하리 경위님.”

[지금 어디에요?]

“괜찮으십니까? 이제 현장일은 못하시는 게?”

[뭐 바로 딱 하고 여청과에 자리가 나겠어요? 사람들이 내근직 하고 싶어서 줄서고 있는 판인데? 괜찮으니까 제 인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보다 이제 합류해요.]

“알겠습니다. 따로 약속 장소를 정해드릴 테니 1시간 뒤에 뵙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류하리에게 약속장소를 지정해주었다.

“바빠지겠군요.”

시현이 전화를 끊자 사이다패스가 김유라에게 다시 환자복을 입혀놓고 그를 흘겨보았다.

“아직 돌아보아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는데? 보고 있었지?”

“옷입히는 소리를 듣고 작업이 끝났다는 걸 알았을 뿐입니다.”

“...개같은, 그 개같은 부녀를 똑같은 꼴로 만들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어.”

“음.”

시현은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자 그럼. 김유라씨를 잠깐 맡겨둘까요?”

“뭐? 무슨 소리야?”

“양지희 씨를 보고 싶지 않습니까?”

“....어?”

시현은 차량 밑에 트렁크에서 옷들을 꺼냈다. 거기엔 여성용 파티 드레스도 있었다.

시현은 그 옷에 탈취제를 뿌리고 사이다패스에게 건넸다.

“당신은 꿈이니 옷을 입지 않겠지만, 이걸 기반으로 모습을 바꿔주실 수 있겠습니까?”

“날 데려갈 셈이야?”

“네. 양지희씨를 직접 보도록 하지요. 그 동안 김유라 씨의 몸은 당신의 외조모에게 맡겨두도록 하지요.”

“이봐. 난 양지희를 직접 보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못참을 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제가 좀 공을 들이긴 했지만 뭐 그렇게까지 하면 어쩔 수 없지요.”

“.........”

“어쩌시겠습니까?”

“참아보지.”

“그럼. 가지요. 급합니다.”

* * *

“...약속장소가 여긴가요?”

류하리는 당황해서 시현을 바라보았다.

“네. 비바람이 불어서 사람이 좀 적길 바랐는데 사람이 많군요. 하지만 어쨌건 적당한 규모에서 품격있는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곳 아니겠습니까?”

시현이 약속장소로 정한 곳은 레반테스 호텔, 바로 헥사곤 엔터테인먼트의 윤회장 소유의 호텔이었다.

그 호텔의 볼룸 하나를 빌려 작은 연회장소를 잡은 것이다.

“용케도 예약을 했군요. 당신 여기랑 원수잖아요?”

“당연히 제가 예약한 게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획사인 AT기획에서 한 겁니다.”

“그래도 여기로 정한 건 당신이죠?”

“네. 사실 윤회장님이 그렇게 졸렬한 사람이 아닙니다. 호텔업은 호텔리어로서의 품격을 지켜야 유지되는 법이지요.”

“적인데도 후한 평가군요.”

류하리는 당황했다.

“양지희에게는 영사와 최형림 검사 쪽 사람들이 붙어있을 겁니다. 사이다패스가 그녀를 증오하고 있다는 건 그들도 알테니까요.”

영사 측 사람들이 경거망동을 못하도록 레반테스 호텔을 택했다.

그것이 시현의 의사였다.

“음…? 최형림 선배 스폰서중 하나 아닌가요? 윤회장은?”

“미카엘이 영사를 꼴보기 싫어하니까요. 이 호텔은 영사에게서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시현은 그리 말하고 류하리에게 옷을 내주었다.

“이건….”

“몸에 맞을 겁니다.”

원래 당신 옷이니까. 시현은 그렇게 말하려다 관뒀다.

“음. 그래요? 윽… 뭔가 탈취제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요?”

“그거 미안하네. 의류 관리기에도 넣고 막 돌렸는데 냄새가 덜 빠졌나?”

보고 있던 사이다패스가 한마디 했다.

그녀도 가벼운 파티 드레스 차림으로 머리를 틀어올려 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 옷 바꿔 입을 수 있었어요?”

“해보니까 되네.”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흥. 누구 놀리는 거야?”

사이다패스는 칭찬을 곱게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본체인 김유라는 거의 오늘내일하는 폐인이 되어 있으니, 지금의 자신이 예뻐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은재 그 자식에게는 의미가 있던 것 같지만.’

사이다패스는 문득 지은재를 떠올렸다가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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