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44화 (244/269)

제244화

죽음 이상의 벌 #2

레반테스 호텔의 소연회장에는 캐스팅 매니저와 투자사 관련자들, 그리고 예의 그 투자자가 나와 있었다.

하지만 양지희는 약속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양지희의 매니저가 대신 사과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그게, 양지희가 건강이 안좋아서요.”

아마도 따로 새서 또 어디서 약을 하려고 하는 것이리라.

양지희의 매니저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년이 미쳤나. 이제 아무데서나 약을 하네.’

금단증상이 너무 강력해서 토사곽란을 일으킨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또 약을 밀어넣는단 말인가?

게다가 주사하는 것과 달리 먹어서 흡수하면 흡수량을 조절하기가 어렵고 배드트립이나 토하는 등의 부작용이 자주 일어난다.

한국에서 여배우인 양지희가 공공 화장실 등에서 마약을 먹고 토하기라도 하면 아무리 양천용이 든든한 뒷배경이 된다고 해도 파국을 막을 수가 없다.

양지희의 매니저가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구를 때 호텔 볼룸의 문이 열리고 드레스 차림의 양지희가 들어왔다.

아까 전과 달리 얼굴에 생기가 도는 걸 보니 약을 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드레스 차림의 그녀의 몸은 앙상하다.

거식증 걸린 패션모델같은 모습이다. 그래도 옷을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마약을 집어넣어서 생기가 도니까 숙소에서처럼 말라죽어가는 모습은 아니지만…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바로 알겠는 걸.’

과연. 관계자들 몇몇이 자신들끼리 속삭이는 게 보였다.

“...양지희?”

이번 파티의 주최측에서 데려온 여성 한명이 양지희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다른 이들 다들 지각한 양지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특히 그녀의 눈빛이 이상하다.

‘뭐지? 양지희의 지인인가?’

매니저는 긴장했지만 그때 파티의 호스트가 일어났다.

“오셨군요. 양지희씨. 이거 참 반갑습니다. 뵙고 싶었답니다.”

“...아 네.”

양지희는 파티의 호스트를 보고 놀랐다.

잘생겼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말쑥하고 잘생긴 인물이다.

게다가 아직 젊어보이는 데, 그녀보다 약간 연상 정도에 불과한 것 같은데 어째서 이정도의 부를 쌓았을까?

“아 제 소개부터 해야겠지요. 비서?”

그는 옆에 있는 여성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비서라고 불린 여자가 명함을 꺼내어 주었다.

“제 명함입니다.”

“음… TE 캐피탈? 하시는 일이 요식업이라고 들었는데요?”

“하하. 그건 뭐 운영하는 사업체들이고 OA기기 납품이나 건설중장비 대여, 물류업체, 고물상 등등 다양한 사업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그중 그나마 좀 명함으로 내밀어서 부끄럽지 않은 사업체를 내민 건데 저에 대해서 알고 계셨군요. 이거 부끄러운데요. ”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전혀 부끄러워 하는 기색 없이 당당했다.

말을 잘하고 능청도 잘 떠는 모습이 그렇게 밉지 않았다.

“흠.”

양지희는 호스트 곁에 있는 여성들을 보았다. 둘 다 상당한 미녀들이다.

‘뭐야? 벼락성공한 부자가 여자에 굶주려서 부른 것 같지는 않네.’

남자가 잘생겼고 옆에 미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지희에게 감출수 없는 호의를 보내고 있는 모습에서 양지희는 호감을 느꼈다.

돈많은 놈이 무작정 쉬운 여자로 보고, 성욕해소의 대상으로 보고 들이대는 게 아니라 정말 여배우로서의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촬영하신게 '기연황후' 였지요? CTV의?”

“음. 네.”

“정말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감명받았어요. 이번 '하늘의 맹약' 각본을 받아봤을때 이걸 소화할 수 있는 젊은 정극배우는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

처음엔 대체 어떤 돼지같은 새끼가 보자고 하는 건지 어디 한번 꼴이나 보자고 왔었는데 예상과 달리 이 청년 사업가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 * *

‘와. 징하다.’

‘....대단하네.’

류하리와 사이다패스는 눈빛으로 서로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시현은 이미 드라마 각본을 다 읽었고 그것만이 아니라 양지희가 출연했던 드라마들도 다 보고 온 것 같았다.

정말 열성팬을 자처하면서 그녀의 연기에서 그녀가 스스로 분석하고 캐릭터를 재해석한 부분을 추켜세우며 칭찬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치였던 양지희였지만 구워삶는데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돈이 많은 청년사업가라는 놈이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싹 외워서 배우로서 그녀가 고민했던 부분들을 쪽집게 처럼 짚어서 칭찬해주는 데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현이 말할 때마다 양지희가 그냥 빨려들려고 하는 게 만만치 않다.

“야, 오늘 호텔 키 넘겨줘도 따라오겠다.”

사이다패스가 그렇게 평했다.

“마, 말도 안돼요.”

류하리는 당황했다. 양지희를 꼬셔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면 분명히 이후 그들을 조종하기 좋겠지만 그런 짓까지 할까?

‘...아니 정말 그러진 않겠지?’

그때 시현이 류하리 쪽을 바라보고 슬쩍 눈치를 주었다.

‘아 지금 설정상 내가 비서지.’

정신차린 류하리가 다가와서 시현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 지금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시간이….”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럼 저 먼저 일어나야 겠군요.”

“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파티를 즐기도록 하세요. 아 그리고….”

시현은 만년필을 꺼내서 양지희에게 주었던 명함의 뒷면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이건 제 개인 번호입니다.”

시현은 그렇게 전화를 넘겨주고 류하리, 사이다패스와 함께 자리를 떴다.

* * *

레반테스 호텔을 무사히 빠져나온 그들은 폭풍우가 쏟아지는 거리로 차를 타고 나왔다.

“...기분나빠.”

사이다패스는 창밖에 부서지는 빗방울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뇌리에 양지희의 몸이, 팔뚝이 떠올랐다.

양지희를 자신과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는데 앙상한 양지희의 팔과 다리는 김유라의 몸을 떠올리게 했다.

병상에 누워있던 김유라보다는 더 상태가 양호하긴 했지만 마약이 그녀를 좀먹고 있음은 분명해보였다.

“확실히 마약을 많이 하긴 했나보군요. 그래서야 연예계 관련자들은 아마 이미 알고 있을 듯 하네요.”

류하리도 양지희의 몸을 떠올리고 있나보다.

마약을 해서 생기가 돌고 있긴 했지만 거식증 환자처럼 말라있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이 아니었다.

“양천용 의원이 무서워서 모르는 체 하고 있는 거겠지. 연예계 사람들은 누가 약한다, 누가 젊은 애들 건드린다 그런건 빠삭하게 다들 잘 알고 있으니까.”

만약 드라마 촬영중이나 광고가 나가고 있는 와중에 배우가 구설수에 오르게 되면 연예게 전체에 큰 파장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연예계에서는 추문에 다들 민감하다.

아역 배우 출신이던 김유라도 그 생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수를 직접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이걸 보여주려고 이 일을 벌인 거야?”

사이다패스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이미 양지희는 약에 절어있으니까. 이대로 살려두는 게 더 고통스러울 거라고? 그래서 날 설득하려고 보여주었나?”

“별로 기쁘지 않은가보군요?”

“...좀 그래. 날 작살내놓은 놈이 멀쩡하면 멀쩡한 대로 열받았을 것 같은데 저렇게 스스로 자멸하는 꼴을 보니까 그것도 화가 나는 군.”

“흠. 감상은 그게 끝입니까?”

시현은 코웃음쳤다.

“그녀를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들 다 파멸시키고 스스로 자멸한 거니까요. 타의에 의해서 파멸한 사람과 자멸한 사람을 같은 선상에 놓는다는 건 구역질나는 균형감각입니다.”

“.......”

“그런 구역질나는 균형감각으로 저 여자를 동정한다면 또 고구마패스라고 불러드리지요.”

“동정 안했어.”

사이다패스는 그렇게 항변했다.

“그리고 이미 고구마패스를 언급하는 시점에서 날 놀리는 거 아냐?”

“그나저나 무섭네요. 아니 그렇게 미워하면서 어쩜 그녀 앞에서는 입안의 혀처럼 굴었어요? 막 드라마 이거에서는 이렇게 했고 저기에선 저렇게 했고. 진짜 팬인 줄 알았잖아요.”

류하리는 시현이 양지희를 구워삶던 걸 생각하며 물어보았다.

“그녀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줘야 마음에 들 거 아닙니까.”

“마음에 들어서 뭐하게요?”

“기분을 좋게 해줘야 나중에 파멸시킬 때 그 낙차가 커서 고통받지 않겠습니까?”

“.........”

“뭐 제가 그녀를 미워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고객이 만족하도록 하는 말이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꺼내놓았는데 그건 젤리빈즈였다.

“아 뭐에요. 사탕 먹으라고요?”

“아 이건 드시지 마시지요.”

“네?”

“양지희에게서 훔친 겁니다. 아마 안에는 THC와 코카인, 그리고 펜타닐이 들어있을 겁니다.”

“...해괴한 조합이네요?”

각성제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마약류를 업 계열이라고 부르고 이완제나 진통제처럼 사람을 진정시키는 마약류를 다운 계열이라고 하는데….

양지희는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약의 부작용인 배드트립을 억제하고 도파민 수용체를 복합적으로 자극시키는 그녀 특유의 블렌드 마약을 사용하고 있었다.

상당히 맛이 간 상태임을 알수 있었다.

“아니 그런데 성분 조사도 하지 않고 어떻게 알았어요?”

“조사했으니까요.”

“조사?”

“네. 사전 조사했습니다. 사이다패스의 정체를 알았을 때부터 조금씩… 그녀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한인 갱단에서 마약 거래를 하는 마약상에게 구매하는데… 참고로 이 블렌드로 김유라씨에게 투약해봤는데 일시적으로 언어장애가 해소되더군요. THC가 간질환자에게는 치료약으로서 쓰이는 데 아마도 그래서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듣던 사이다패스가 깜짝 놀랐다.

“이 미친 놈이 제정신인가?! 내 몸에 투약한 게 그거였다고?”

연쇄살인마인 사이다패스가 기겁할 정도였다.

“네.”

“아니 잠깐만요. 그럼 당신, 양지희에게 훔치기만 한게 아니라 따로 직접 마약상에 연락해서 구매했다고요? 같은 성분의 약을?”

류하리도 듣고 당황했다. 경찰인 그녀 앞에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만약 훔쳐내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서 따로 구해뒀지요.”

“.......”

즉 시현의 계획중에는 양지희가 가진 마약을 훔쳐내지 못하면 같은 곳에서 구입한 같은 성분의 약으로 양지희에게 함정을 판다. 뭐 그런 계획도 있었던 것 같았다.

“알다시피 시현탐정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위해서 물밑에서 열심히 물장구치는 백조처럼…..”

사전에 준비를 다해두고 여러가지 복안으로 미리 옵션을 정해두고 준비해두었다가 그중 하나 운좋게 얻어 걸려서 성공하면 마치 자신의 추리능력이나 실행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 처럼 으쓱대며 고객에게 유능함을 어필한다.

그게 시현의 탐정으로서의 허세지만 이정도 되면 허세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다.

그 실체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고객인 사이다패스가 기겁하고 있지 않은가?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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