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52화 (252/269)

제252화

죽음 이상의 벌 #10

늙은 나이에 귀한 막내딸을 얻은 류장천 회장은 딸을 속박하지 않았따.

다정다감한 부모였던 건 아니지만 가부장제가 강한 대한민국의 부모들 중에서는 상당히 부러워 할만한 좋은 아버지였다.

게다가 인물이 빼어났다.

잘생긴 외모를 가진 성공한 사업가인 류장천 회장을 부모로 둔 류하리를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부러워 했고 그녀 역시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잘난체 안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린 시절에는 잘난체 하고 남들이 자신을 부러워 하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곤 했었다.

어린 나이에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설마 그 자랑스럽던 아버지가 이런 범죄자일 줄이야.

아니 영사와의 끈끈한 관계를 생각하면 범죄자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계약이나 악마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에게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그녀가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아니 애초에 뭘 물어봐야 하지?

류하리가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자 성신아가 말을 걸어왔다.

* * *

“자자, 무시하지 말고 이야기해봐. 안에서 무슨 이야기였어? 저 남자 누구에게 습격당한 거야?”

성신아가 물어보자 류하리가 힐끔 시현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시현에게 뜻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가 칼을 맞은 건 한강건재 영업이사 양원일이라는 사람의 사주입니다.”

“어? 그래?”

성신아는 시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시현이 상당히 순순히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잠깐, 한강건재라고?”

성신아도 류하리의 집안이 어떤 사업을 하는지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수사하면…..”

“공식적으로 저 사람은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증언도 없이 어떻게 수사할 겁니까? 게다가 그에겐 검사와의 연결끈도 많으니까 괜히 영장청구했다가는….”

시현이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해보였다.

“성 경위님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희가 처리할 테니 관여하지 마시지요. 경찰로서는 손댈 수 없는 일입니다.”

“한강건재면 류하리 너네 집안이잖아?”

성신아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류하리의 집에서 설마 날 죽이기까지 하겠느냐?

그런 기대감에 물어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류하리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지.”

“아.”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성신아는 류하리의 반응에 당황했다.

류하리는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 그 말인 즉 당신은 잘못이 없다?”

그때 사이다패스가 류하리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 말을 들은 성신아가 사이다패스에게 맞장구를 쳤다.

“퍽이나 그러시겠지요. 난 연좌제 싫다는 놈들이 웃겨 죽겠어. 상속은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왜 연좌제는 싫은데? 부모가 더러운 짓으로 돈 벌어서 그걸로 자식을 키웠으면 그 시점에서 이미 공범아냐?”

사이다패스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네. 맞아. 이쪽 경찰은 이치에 맞는 말만 하네.”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는다.

‘이쪽 마음도 모르고.’

류하리는 마음이 무거워서 눈 앞에서 잘 놀고 있는 성신아와 사이다패스를 흘겨보았다.

“오호호. 그런데 당신은?”

“.........”

성신아와 죽을 맞추던 사이다패스가 입을 다물었다.

사이다패스라고 하면 난리가 나겠지?

“저희 스탭입니다.”

시현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어쩔건데?”

사이다패스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조금 뒤에 양지희 씨와 데이트 약속을 잡았습니다.”

“음. 어. 데이트?”

“네.”

시현이 그리 말하자 류하리가 깜짝 놀라서 물어보았다.

“사전적 의미의 그거요?”

“사전적 의미가 뭘 뜻하는 겁니까?”

“어디서 만나는데요?”

“헥사곤 입니다.”

“아니 대체 왜 철천지 원수의 입 안으로 들어가나요?”

“영사 일당이 손 안쓸 곳이니까요. 차라리 거기가 낫습니다.”

영사를 만나지 않기 위해 헥사곤을 선택하다니.

즉 시현이 영사를 피한다고 봐도 좋으리라.

천방지축에 세상 무서울 거 없어보이는 시현이 이렇게나 의도적으로 영사를 피해다니다니?

그런데 사이다패스가 궁금해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거기 유흥가잖아. 설마 뭐, 데이트 하고 나서 호텔 가자고 하면 갈 거야?”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호텔을….”

류하리는 노골적인 말을 하는 사이다패스의 태도에 당황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양지희가 그런거 따질 것 같아? 양지희 그건 오늘만 사는 인간이야.”

“잘 아는 군요.”

“원수니까. 싫어도 잘 알게 되지.”

“그럼 준비해야 겠군요.”

“뭘 준비해? 호텔 가서 할 준비?”

“그럴리가요.”

시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몸 상태로 그걸 버티겠습니까?”

“그래도 당사자는 죽더라도 요구할 수도 있겠는데요. 아니 오히려 죽으려는 거 아닐까요?”

류하리가 보기에 양지희는 죽으려고 환장한 인물이다.

왜 죽고 싶어서 환장했는가?

삶이 즐겁지 않아서? 불만스러워서? 하지만 양지희는 남들보다 월등히 유복한 환경 아닌가?

그런데 불만스럽다면 그것은 아버지와 집안에 대한 불만일 것이고 자식은 종종 자해함으로서 부모에게 보복하는 법.

이런 자기파괴적인 인물에겐 호텔에서 약물 중독으로 인한 쇠약사야 말로 최고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왠 몸상태 이야기가... 하자면 할 거에요?”

류하리가 당황해서 물어보았지만 시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류하리 대신 성신아 경위를 돌아보았다.

“...그럼 뒷일은 잘 부탁드립니다. 성신아 경위님.”

“아 네. 나참.”

성신아 입장에서 시현은 확실히 수상한 탐정이다.

그러나 그녀가 방황할 때 시현이 책임져주겠다고 했으니… 잠재적인 직장상사? 만약 경찰조직에서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갈 경우 노후를 위해 시현과는 잘 지낼 필요가 있었다.

‘아 이렇게 부패경찰이 되는 구나. 아니 부패 경찰은 최형림 선배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받아먹은 시점에서 부패경찰인가.’

* * *

양지희는 사춘기 시절에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 그녀가 유치원생이던 시절, 탤런트 스쿨에서 수업이 취소되어서 택시를 타고 혼자 집에 돌아왔을때.

그녀는 아버지가 보던 동성애자들을 위한 성인 비디오와 직면했다.

물론 그때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기억의 한켠에 무의미하게 쑤셔박았지만 그 기억이 그녀의 학창시절, 한창 바쁘던 때에 떠오른 것이었다.

“아이… 씨발…..”

갑자기 뇌리에 솟구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발작적인 욕설과 함께 앞에 있던 여자애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꺅.”

“등짝 펴. 조용히 해라. 응?”

그녀는 앞자리의 여자애에게 윽박지르고 갑자기 떠오른 이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거부하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게 그녀의 뇌리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 * *

“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눈 앞의 남자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양지희는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 보았다.

어지러운 음악과 조명 속, 헥사곤 클럽의 VVIP를 위한 룸 안이다.

아 그래. 나는 지금 투자자를 만나고 있었지.

빌어먹을 정신, 점점 시간감각이 무너진다.

정신분열증의 징조다.

그녀는 힐끗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투자자.

그녀의 팬.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흥미를 보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더라?

생각해보니 저 남자가 말을 꺼냈다.

‘당신의 연기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엿보인다. 상처가 있는 사람만이 우리 삶에 찾아오는 거대한 낙폭을 이해하고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법인데 당신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상처가 있는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낙폭을 그렇게 연기한다면 그것 또한 대단한 재능이다만.’

그런 말에 발끈한 양지희는 자신의 상처를 까발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말하고 나니까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그래. 이걸 누구에게 이야기 했겠어?

알고 보니 나는 부모에 대해서 하소연을 하고 싶었구나.

그리 생각한 양지희가 웃었다.

“불행한 집은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지. 유복한 환경이라고 해서 불행하지 않다는 건 아냐. 나는 부모님의 손을 거의 안타고 어린 시절부터 혼자 버려져서 학원과 학원을 떠다녀야 했지. 그러던 차에 알게 된거야. 아버지가 게이고 어머니와의 결혼을 본인의 위장으로 삼았고 나는 그저 아버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성행위의 산물이라는 걸. 그 모든 걸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에 알게 되었으니 유복한 환경이 별 위로가 되진 못했지.”

“상처 받았나요?”

“상처를 받지 않을 리가 없잖아? 왜 아버지가 나를 종기보듯 하는 지 좀 알겠거든. 남들 보라고 대를 잇기 위해서 취향도 아닌 살덩이에 올라타서 싸지른 결과물일테니까. 뭐 그래서 한 일주일은 방황했어.”

“흠 어린 나이에 그런 사실을 알았는데 고작 일주일만 방황했다고요? 놀랍군요.”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 * *

시현은 양지희를 추켜세우기 위해서 칭찬했지만 그게 또 완전히 빈 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양지희는 예술적인 재능이 있었다.

날카로운 통찰과 높은 감수성,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빠르게 세상에 절망했고 끔찍한 악을 자행하였으며 이제 그 칼날을 자신에게 돌려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서 이 삶이 부조리하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두개골 안에서 벌어지는 환상일지라도 그렇기에 예술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양지희가 약에 취한 채 하소연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아버지와의 정은 그 전에 이미 끊어져 있었으니까. 그야 1년에 한 두 번 얼굴 보기도 힘드니까. 엄마도 그렇고 말이지. 학원 강사 얼굴들을 더 오래 봤을걸.”

양지희는 그리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약은 약사에게 교육은 전문가에게. 부모님은 철저히 합리적이었지. 뭐 하긴 그들 인성을 생각하면 그게 나을 것 같아. 좋은 부모가 되는 교육은 전혀 안받았고 그저 자기들 커리어, 자기들 일과 사회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만 신경썼으니까. 철딱서니 없는 어린 여자애가 똥을 쌌는지 생리를 하는지 그런거에 관심이나 있겠어? 아니 딸이 초경하는데 아무도 관심도 안가지더라니까.”

양지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돈은 넘쳐나게 있었지만 아무의 도움 없이 첫 초경을 홀로 처리해야 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나는 이용하기로 했어.”

“설마 아버지를 협박하는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그런 짓은 바보짓이야. 어린애가 어떻게 협박을 해? 나는 연기를 했어.”

“연기요?”

“그래. 순진무구한 어린애가 되어서 화목한 가정을 바라는 척 하는 거지. 엄마 아빠, 동생 낳아주세요~ 이렇게. 그러면 아무리 자식에게 정을 못붙이는 아버지라도 죄책감을 느끼겠지.”

양지희는 낄낄대면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맹물처럼 들이켰다.

데드맨3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