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죽음 이상의 벌 #11
“훌륭하군요. 어린 나이에 벌써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까?”
시현은 솔직히 감탄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래. 나 대여배우가 될 몸이야. 머리가 좋다고. 우리 아빠가 괜히 검사겠어? 아버지가 내게 해준 게 뭐 별로 없지만 좋은 머리를 물려준 건 고맙게 생각해. 뭐 방탕한 생활로 다 거덜내고 있지만 말야.”
양지희는 그리 말하고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마음에 들어. 오늘 밤은 같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볼까?”
양지희는 거리낌 없이 먼저 시현을 유혹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양지희의 코에서 코피가 터졌다.
“아.”
“이런.”
시현은 티슈를 가져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녀의 코를 막아주었다.
“쳇. 코로 흡입도 안하는데.”
그녀가 말하는 것은 마약 중독자들이 점막흡입을 위해 코로 마약을 쑤셔박는 짓을 말한다.
코로 마약을 흡입하지도 않고 먹어서 약물을 흡수하는데 코피가 난 것을 원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평소에도 코피가 많이 터지나 보군.’
아닌게 아니라 지금 양지희의 몸은 술을 마시는 게 가능한 건가 싶을만큼 약해져 있었다.
각성제의 힘으로 그녀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좋아. 고마워. 아주 잘했어. 칭찬해주지. 그럼 이제 자리를 옮길까?”
“피를 흘리는 데 괜찮습니까?”
“괜찮아. 그보다 하러 가자고. 난 길게 질질끄는 거 딱 질색이니까. 어차피 당신도 그게 목적일 거 아냐? 이정도면 이야기도 나눌만큼 나눴으니 말야.”
“그렇지만… 괜찮습니까?”
“뭐야? 내 팬이라면서 나에게 매력이 없다는 거야?”
“아니요.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은데….”
시현은 그리 말하고 양지희의 곁에 다가와 그녀의 목을 잡았다. 그것 만으로도 갑자기 양지희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시현은 그녀를 부축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보세요.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 * *
시현은 양지희를 부축한 채로 헥사곤을 나섰다.
헥사곤의 직원들은 그런 시현을 알아보고 흠칫 놀랐고 몇몇 웨이터들은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냈지만 매니저가 그들을 말렸다.
“열심히 일하고 있군. 데드맨.”
그리고 그런 시현의 앞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미카엘이었다.
“요새 재미 좀 보시는 모양이군요. 미카엘.”
“아 재밌지. 인간이란 참 재밌단 말야. 아 그리고 나 드디어 이번 시즌에 다이아 리그에 들어갔는데.”
“축하드립니다.”
시현은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휴대폰을 들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거지 데드맨. 시간이 좀 부족하지 않나?”
“……”
시현은 대부분의 일들을 한달 이내,, 간단한 것들은 첫주만에 끝내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일은 꽤 복잡해서 과연 한 달 안에 수명을 접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실례.”
시현은 블루투스 헤드셋을 꺼내서 귀에 끼웠다.
류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큰일났어요. 시현. 지금 헥사곤 밖에 영사의 패거리들하고… 검찰 수사관들이 와 있는데요?]
영사와 최형림이 손을 쓴 모양이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았을까?
‘매니저인가?’
시현은 양지희의 매니저를 통해서 정보가 샜음을 눈치챘다.
헥사곤 클럽을 약속장소로 정하자 양지희는 매니저를 떼어놓고 혼자 왔다.
데이트에 매니저를 달고 오진 않겠지만 어디 갔는지 지인들에게, 특히 양천용 의원에게 말해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반응하다니.
‘영사나 최형림 검사가 양천용 의원과 상당히 돈독한 사이인가 보군.’
예상은 했지만 상황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점을 미카엘 역시 알고 있는 듯 했다.
* * *
“보아하니 일이 어려워졌나 보군. 그래서 이제 수명이 얼마나 남았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기한내에 하기엔 좀 어려운 일 아닌가? 나와 계약하지. 타자기 녀석 대신 내가 널 거둬주겠어.”
미카엘이 시현에게 제안했다.
“계약을 갈아타라는 겁니까?”
“그래. 나는 너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빡빡한 시간 제약 때문에 최형림과 네 사이가 이렇게 맥빠지게 결판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자신이 지원하는 최형림과 데드맨, 시현 간의 알력을 무슨 경주마 보듯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자기 그녀석이 널 이용해서 다른 이들 계약을 엿먹이고 깨버리는 게 많아서, 본인도 당해봐야지?”
“다른 악마라면 다들 매력적인 이야기겠지만 당신만은 안됩니다.”
“응? 왜?”
“당신 처럼 흥미본위에 따라 휙휙 오가는 존재와는 계약하면 안됩니다. 당신은 지금 그 제안을 내건 순간 가장 흥분하고 있을 겁니다. 이 제안으로 내 안에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을 즐기고 있는 거지요. 하지만 제가 갈등을 하다가 마침내 당신에게 굴복한다면 당신은 그 순간 즉시 내게 흥미를 잃고 날 쓰레기통에 던져넣을 겁니다.”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처럼 말하는 데?”
“당신이 그만큼 자신을 많이 보여주었으니까요.”
“…흠.”
“그래서 말인데 무사히 보내주시겠습니까? 덤으로 영사 패거리들에게서도 좀 지켜주시고요.”
시현은 갑자기 뻔뻔한 요구를 던졌다.
계약은 하지 않겠지만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미카엘은 순간 화를 내려고 하다 멈칫했다.
시현이 괜히 이렇게 뻔뻔한 요구를 할 리가 없다.
틀림없이 미카엘을 납득시킬 뭔가를 준비하고서 요청하는 것이리라.
“왜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아무리 내가 인품이 좋다지만 계약도 하지 않고 공짜로 내가 널 도울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공짜는 아니지요. 당신은 이 헥사곤 클럽의 서비스 품질을 유지해야 할 영업이사 아닙니까? 명목으로는….”
미카엘 윤은 헥사곤의 영업이사로 등재되어서 꼬박꼬박 고액의 보수를 받는다. 재벌가가 자식이나 친지를 챙기는 데 쓰는 수법이니 영업이사라 해도 하는 일이 없는 신분이지만 시현의 말도 틀린게 아니다.
“그리고 다이아로 승급하지 않으셨습니까? 기분이 좋아지셨을테니 축하하는 의미에서 기분좋게 제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지요.”
“만약 내가 돕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물론 빠져나갈 겁니다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다치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널 편들어줘도 딱히 네 운명을 바꾸는 건 아니로군.”
“그럼요. 그저 그 과정에서 다칠 사람들 덜 다치고 이 클럽 입구에서 일어날 소요를 미연에 차단하는 정도 아니겠습니까? 아울러 화재도….”
“화재? 하….알겠어. 도와주지.”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화물은 어디에 숨겼지?”
미카엘이 그 점을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시현은 애초에 혼잡한 틈을 타서
“소화 펌프 박스입니다. 테르밋이라 조심해야 할 겁니다.”
산화제를 넣은 테르밋 소이탄은 물속에서도 탄다.
이걸 소화전에 넣고 터트리면 테르밋이 소화전 펌프를 녹여 터뜨리 물이 쏟아지고 그 물살 속에서 불타는 소이탄이 휩쓸려 불이 번진다.
뭐 인화점이 젖어있어서 불이 옮겨 타지야 않겠지만 클럽하나 폭삭 망하게 하기엔 충분하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우리 영업장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듣고 있던 웨이터가 분개해서 시현의 앞으로 나섰지만 그 순간 미카엘이 박수를 쳤다.
걸어나오던 웨이터가 앞으로 푹 고꾸라져서 입에서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내가 우습게 보이냐?”
“………”
“뭣들하고 있어. 손님들 가신다. 가시는 길 편하게 배웅해드려야지.”
“배, 배웅이요?”
“뒤쪽 서비스 통로로 가면 사복 수사관들이 있을거야. 그들 막아주고 정문으로 보내줘.”
“….네.”
웨이터들이 떨떠름해하면서 미카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뭐 별말씀을. 원래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하잖아?”
듣고 있던 류하리가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했다.
[여기서 진인사대천명을 들고 나오면 자기가 하늘이란 소리잖아?]
악마가 하늘을 참칭하다니 어이가 없다.
“뭐 여기 클럽이 터지는 건 나도 원하지 않으니… 이건 널 편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저 불필요한 인명 피해와 물적 피해를 줄이는 일이지.”
미카엘은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시현을 보내주었다.
* * *
“…부패경찰이네. 저 탐정놈 범죄 저지르는 걸 그냥 보고 넘어가?”
사이다패스는 헥사곤의 소화펌프 박스에 테르밋 소이탄을 설치하고 들어간 시현이나, 그런 시현과 손잡고 일하는 류하리를 보며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돈 안 받으니까 부패는 아니죠. 위법이긴 하지만….”
“돈을 안 받아?”
“네. 사실 그래서 여차하면 노동법위반으로 고소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그때 차의 문이 열리고 실신한 양지희가 차 안에 놓여졌다.
시현이 헥사곤 웨이터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복장으로 변장하고 차에 온 것이었다.
“후우. 자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출발하지요.”
“자, 잠깐만요. 양지희를 그냥 데려오면….”
양지희와 철천지 원수인 사이다패스가 가만히 있겠는가?
과연 사이다패스가 양지희를 발견하고 분기탱천해서 몸을 일으켰다.
“양지희! 이년이!”
“흠. 참으세요.”
지금 양지희를 해치우는 건 쉽지만 그런 짓을 하면 양지희의 아버지 양천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사이다패스는 눈이 뒤집어져 있었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눈 앞에 양지희가 있으니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못 기다려! 지금 갈기갈기….”
-투콱!
그 순간 차의 서스펜션이 들썩인다.
시현이 사이다패스의 얼굴을 대뜸 후려 갈겨서 머리통의 절반을 날려버린 것이다.
“잠깐 머리 좀 식히세요.”
“어… 하하. 머리가 절반이 되었네.”
보고 있던 류하리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야. 이… 아 진짜.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시현에게 대뜸 세게 맞은 사이다패스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어느 새 재생되었지만 혼란스럽다.
최형림의 경호원들, 미카엘이 보낸 자객들에게 당한 후 사이다패스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과거에 시현과 붙었을 때는 신체 스펙은 앞서지만 시현의 노련함에 당했다면 지금은 신체 스펙에서도 떨어진다.
“어차피 안죽잖습니까? 게다가 머리는 식혀진 것 같군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류하리에게 운전석으로 갈 것을 눈치주었다.
류하리가 운전석으로 가자 시현이 사이다패스에게 조수석으로 갈것을 손짓했다.
“알겠어. 머리 다 식었다니까. 손 안댈거야.”
“그래도 가세요.”
“쳇.”
사이다패스가 마지 못해 조수석으로 옮겼다.
류하리는 그걸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
* * *
양천용 의원은 곳곳에 고가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그날 그날 기분과 업무에 따라 머무는 곳을 달리 해서 그를 찾는다는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택중 하나에서 전화기를 끄고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그 누구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딸이 돌아와 마음이 복잡해진 그는 S동 고급주택단지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안마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자택에 벨이 울렸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