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59화 (259/269)

제259화

죽음 이상의 벌 #17

“젠장.”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차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가며 리모컨으로 차량 문을 잠갔다.

병원의 입구는 정전 때문에 불이 꺼져있고 대신 비상등이 밝혀져 있었다.

응급을 요하는 병원 시설들을 돌리기 위해 ups와 비상발전기가 있겠지만 이건 보통 냉장고나 생명유지 장치등 가장 우선되는 것들의 전력만 돌리기에도 버겁다.

“........”

시현은 차에서 내리며 병원을 바라보았다.

교통지옥을 뚫고 겨우겨우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그의 눈앞에서 마커 하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 안일했군.’

시현은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지은재도 안전한 곳에 피신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지은재는 중환자라서 병원에서 옮길 수도 없고, 또한 동작경찰서의 경찰들이 감시하고 있었기에 시현이 함부로 접촉할 수도 없었다.

괜히 지은재에게 접촉하는 걸 경찰들에게 들켰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미운털 박힌 몸인데 어떻게 될 지도 모르고.

성신아 경위가 있을 때 그녀와 아는 사이인 걸 이용해서 말을 나누었을 뿐이지 아마 그냥은 만나서 말도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은재를 노릴 줄이야.

시현에게 농락당해 자신의 손으로 양천용 의원을 죽인 최형림이 선을 넘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나.’

시현은 지은재의 숨이 끊어지는 걸 확인하며 병원 쪽으로 향했다.

* * *

병원 전체가 정전이 되었는지 일반 등은 꺼지고 곳곳에 비상등이 밝혀져 있었다.

불이 꺼진 병원 안에서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비상 등이 켜진 빛과 어둠의 교차점에는 검은 머리칼의 여성 경호원이 사이다패스를 바닥에 짓누르고 있다가 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데드맨….”

“음 이것 참. 동네 방네 얻어 터지며 다니시느라 공사다망하시군요.”

시현이 빈정거리자 사이다패스가 신음했다.

“알겠으니까 그만 놀리고 도와줘.”

“.........”

여자 경호원은 잠시 당황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데드맨과 어지간하면 맞서지 말라고 과거에 명령했었기 때문이었다.

데드맨과 싸우지 말라는 명령과, 최형림을 도와 그의 지시에 따르라는 명령이 둘이 상충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얼굴에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시현이 플래쉬를 꺼내서 그녀와 사이다패스를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시현이 가지고 다니는 라이트는 굉장히 밝은 것이어서 스마트폰의 플래시 모드와는 차원이 다른 밝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덕분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그쪽에 쏠렸다.

여성 경호원은 즉시 사이다패스를 놓아주고 일어났다.

“........”

사람들의 시선을 조심해라. 그런 명령도 있었으리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는 마치 고장난 기계처럼 움직이려다 말다 하며 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중앙 홀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두 사람이 천천히 내려왔다.

최형림과 남성 경호원이었다.

“아. 이제 오셨나보군요. 시현씨.”

최형림은 시현을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독액이 점점이 떨어지는 독사의 이빨을 연상케 하는 미소였다.

“최검사님.”

시현은 사이다패스와 최형림의 사이를 자르듯 서며 말했다..

“너무하신거 아닙니까? 그래도 검사라는 분이.”

검사가 사람을 직접 죽이면서 다녀야 쓰겠는가? 시현은 그 점을 따졌다.

“애초에 신사협정을 먼저 깬 건 당신 아닙니까? 당신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데 저 혼자 원칙을 지키라고 하시면….”

최형림으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트집일 뿐이다.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다 동원해서 신경을 거스르는 탐정 놈이 이쪽의 직업윤리를 따지고 들다니.

“하아. 이렇게 고객을 잃게 되다니. 저희 사무소의 명성에 먹칠을 해주셨군요.”

“뭐?”

듣고 있던 사이다패스가 간신히 몸을 회복하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고객을 잃다니? 설마?”

사이다패스는 시현에게 물어보았지만 시현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행동이 곧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설득했습니다만 어쩔 수가 없더군요.”

최형림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자식, 이 살인자….”

“스스로 말하고도 우습지 않습니까?”

최형림은 사이다패스를 쏘아보았다.

연쇄살인마, 그것도 확신범인 사이다패스가 누군가의 살인을 가지고 남을 비난할 처지가 되는 가?

최형림은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저는 또. 사이다패스가 양천용 의원을 살해한 사건을 수습하러 가봐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에 언제 시간되면 그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윽.”

사이다패스는 그 말을 듣고 이를 갈았다.

최형림은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죽여놓고선 사이다패스의 핑계를 대고 있다.

그러나 시현이 사이다패스를 말리고 최형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형림의 얼굴을 최단거리로 꿰뚫는 섬광 같은 주먹이었다.

하지만 최형림이 손으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팍!

굉음이 울렸다.

“........”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이 시현의 공격을 막는 걸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저걸 보통 인간이 막을 수 있을리가 없다.

사이다패스도 당해봐서 안다.

시현은 과거 주먹으로 간단히 그녀의 육체를 꿰뚫었다.

보통 사람은 칼을 쥐어줘도 도마위에 올려둔 고깃덩이 하나 단칼에 못써는 법이다.

계약자인 시현의 힘은 맨손으로 생살을 찢으며 그 위력은 설령 격투기 챔피언이나 올림픽 운동선수라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걸 최형림이 받아냈다는 건….

“계약자…?”

방금 전까지는 일반 인간이었던 그가 그 사이에 계약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뭐하는 겁니까?”

최형림은 시현의 주먹을 받아내고 태연하게 물어보았다.

“아 별거 아닙니다. 혹시 사탕 드시겠습니까?”

시현이 주먹을 날렸던 손을 펴자 안에는 사탕이 있었다.

사람이 맞으면 죽어 나자빠질 주먹을 날려놓고 고작 사탕으로 눈가림하겠다고?

얄팍한 수작에 최형림은 저절로 웃고 말았다.

“후후. 뭐 주신다니 사양않고 받겠습니다.”

최형림은 시현의 손아귀에 있는 사탕을 받아들고 고개를 까딱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최형림은 그리 말하고 경호원들과 함께 병원을 빠져나갔다.

* * *

겨우겨우 회복된 사이다패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현이 병원의 위로 올라가지 않고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와 통화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하는 거야?”

“지금 그냥 위에 올라가면 귀찮은 일에 휘말려들게 됩니다. 경찰이 먼저 발견하고 사태를 수습하길 기다려야 합니다.”

지은재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사람이 죽었으니 경찰은 병원에 오가는 사람들을 조사해서 철저히 출입자들을 관리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병실까지 올라가서 지은재의 시체를 확인하다 경찰에게 걸려서 귀찮은 일에 휘말려드는 건 피하고 싶다.

사이다패스도 시현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난 내 눈으로 봐야겠어.”

사이다패스는 고집을 부렸다.

“별로 봐서 좋을 건 없을텐데 말입니다.”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지 말란다고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병실 앞에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다.

경찰 한 명이 병실을 지키며 난처해하고 있었다.

살인사건이나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사람들이 시체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게 경찰의 행동원칙이다.

그러나 정전 때문에, 그리고 양천용 의원이 살해당한 사건 때문에 현재 경찰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하루 만에 서울 각지에서 두 건의 살인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다니.

현장에 있는 경찰은 일반 순경에 불과해서 이런 사태를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저리 가라고 말만 할 뿐 달리 뭐라할 수 없었다.

“........”

사이다패스는 폴리스 라인 너머 지은재의 시신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지은재의 몸은 철저히 망가져 있었다.

그 모습이 그녀에게는 너무 익숙하다.

“으욱.”

사이다패스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에 입을 막았다.

지은재는 그가 죽여왔던 사람들의 모습과 똑같이 죽어있었다.

상대는, 최형림은 사이다패스의 수법을 이용해서 지은재를 죽였겠지.

사람들은 저 시체를 보면서 사이다패스가 죽였을거라고 생각하리라.

문제는 지금까지의 그녀였다.

그녀는 저런 처참한 시체를 보면서 웃었다.

전혀 양심의 가책따위 느끼지 않았다.

연민도 슬픔도, 가책도 그 어떤 것도 느끼지 않고 기꺼이 사람을 죽였었는데, 막상 지은재가 자신의 수법대로 죽어있는 걸 보니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지?”

그녀는 그저 이 세상에 부덕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었다.

힘있는 강자들에게 유린당하는 불쌍한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시원하게 쳐죽이고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사이다패스라는 존재는 그녀의 손을 떠났다.

저 살인 수법을 그대로 재현하기만 하면 , 고무망치를 인간이 휘두를 수 없는 속도로 때려박기만 하면 저들은 사이다패스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살인으로 부와 권력을 일구어낼 수 있는 놈들에게 최고의 수단이 주어진 것이다.

이제 앞으로 최형림은 그녀의 이름으로, 사이다패스의 이름으로 자신의 야욕에 방해되는 자들을 마구 죽여버리고 권력을 탐하겠지.

“윽… 미안해. 지은재….”

사이다패스. 아니 이제 김유라가 되어버린 그녀는 병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치기가 불러온 끔찍한 결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멍청한 계집. 뭐가 사이다패스야. 멍청한 것. 이런 별볼일 없는 치기어린 여자애가 저지른 짓을 보고 뭐 좋다고 살인예술가니 뭐니 하면서 따라했단 말인가.

“괜찮습니까?”

올라오지 않겠다던 시현이 올라와서 사이다패스의 뒤에 섰다.

“저도 실책을 범했군요. 이래서야….”

“닥쳐. 그렇게밖에 말을 못해?”

화가 난 사이다패스는 실책이니 어쩌니 하는 시현의 말에 짜증이 났다.

고객 만족이 최우선이라면서 고객을 죽게 내버려두다니!

무능한 녀석!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시현이 아니면 누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단 말인가?

“아, 아니 아니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애초에 내 잘못이야. 내가 멍청하게 이런 걸 바라니까.”

김유라는 눈앞의 일에, 지은재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했다.

복수심에 불타 악마와 계약까지 했던 그녀였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에 깊이 후회했다.

“상대가 천인공노할 범죄자들이라 할 지라도 초법적 수단에 의지하면 적들 역시 초법적 수단을 들고 나오지요.”

시현은 사이다패스에게도, 자신에게도 통용될 말을 하고 사이다패스를 돌아보았다.

“이제 저들은 양으로는 정치 권력과 금력의 힘을, 음으로는 당신의 이름과 살인예술가의 이름을 빌려 세상을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겠지요. 마음이 아프신 건 알겠지만... 여기서 포기하셔선 안됩니다.”

“뭐라고요?”

“당신이 일선을 넘은 시점에서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자격도 상실한 겁니다. 이제는 도망치기에는....”

그렇게 말하던 시현은 사이다패스가 아닌 김유라가 눈앞에 있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이치를 초월한 살인자로 날뛰던 그녀가 어느새 가련한 피해자, 불쌍한 소녀로 돌아와 있었다.

비겁하다.

하지만 인간이란 본디 비천한 존재인 것이다.

“물론 당신은 제 고객님이니 도망치셔도 됩니다.”

“...네?”

“제 운명은 이미 가혹하니 당신의 짐 하나 쯤 더하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시현 탐정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설령 그것이 연쇄살인마의 책무를 대신 짊어지는 것이라 할 지라도.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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