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여기가 지옥이다 #3
‘네가 괜히 날 조종해서 양천용 의원을 죽이게 한 결과다.’
그렇게 으스대는 것 같았다.
최형림의 손으로 양천용 의원을 죽이게 만든 건 기발했지만 그 다음에 최형림이 선을 넘어버리는 걸 통제할 수 없었다.
시현의 실수다.
그러나 설령 그 점에서 뭐 최형림을 자극하지 않고 따로 양천용 의원을 제거했다 한들 어차피 최형림과 영사가 사이다패스와 지은재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별로 휴전하러 오신 분 같지 않군요.”
시현이 웃으며 물어보았다.
“그래서 휴전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게 뭔가 더 원하는게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앞으로 당신같이 유능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와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네?”
놀란 것은 시현이 아니라 듣고 있던 류하리였다.
설마 지금 이 시점에서 최형림이 시현에게 손을 잡자고 요구하다니?
‘미, 미쳤나. 이 인간?’
류하리는 최형림의 대담한 짓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흥미가 동했다.
* * *
최형림은 괜히 빈말로 시현에게 손을 잡자고 하는 게 아니었다.
“양천용 의원을 잃으셨을텐데 정계에는 어떻게 진입하실 생각이십니까?”
“천용덕 검사 님이 이번에 법복을 벗게 되었습니다. 그 분과 함께 정계에 진출할 생각입니다.”
“본인 혼자 진출하는 게 아니라요?”
“제가 경찰대생 출신이고 검사 경력이 일천하니 저를 좋게 봐주고 같이 끌어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검사들이 절 지지하겠습니까?”
정계에 나가더라도 검사들의 지지와 협력을 받고 싶다. 하지만 최형림은 너무 어리고 검사도 잠깐 스쳐지나가는 것 같아서 그가 정계에 진출한다고 현직 검사들이 그를 지지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양천용 의원을 대신해 천용덕 검사를 같이 정계에 진출시키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계획보다 비용과 인적자원이 많이 들겠군요.”
“윤회장과 류회장 님이 후원자로서 도울 겁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 SH그룹의 김원식 회장이 제 적이 될 예정이지요. 지금보다도 더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최형림은 놀랍게도 진심으로 시현을 회유하러 왔다.
비록 사이다패스나 지은재 건에서 최형림은 시현의 고객을 죽게 했지만 그것과 지금의 회유는 전혀 관계없는 독립된 건으로 치부한다.
그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시현을 스카웃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놀랍군요. 이 상황에서 절 채용하시겠다는 겁니까?”
“네. 만약 승리한다면 부와 명예, 그 모든 것에서 상당한 보상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물론 과정 중에도 정당한 보수를 드리고요.”
“…….”
류하리는 최형림과 시현의 말을 들으면서 장례식장에서 준비한 과일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놈들이 제정신인가?
분명히 방금 전까지 적이던 놈들이 ….
그러나 생각해보면 시현은 바로 얼마전에 목숨걸고 싸우던 사이다패스도 고객으로 받아들였다.
연쇄살인마인 사이다패스를 고객으로 받아들였다면 최형림도 고객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애석하게도….”
시현이 운을 뗐다.
“저희 시현 탐정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객께 불쾌할 수 있는 일을 저질러야 하는 경우 고객님으로 서비스할 수 없다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불쾌할 수 있는 일? 무슨 뜻입니까?”
“사적인 일입니다만….”
시현은 그리 말하고 류하리를 바라보았다.
“제가 류하리 씨를 좋아합니다.”
“…네?”
사과를 먹고 있던 류하리가 깜짝 놀라서 사과를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아니 이 사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제가 고객님의 약혼자를 좋아한다면 아무래도 고객서비스에 차질이 생기겠지요? 고객님이 만족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최형림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시현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최형림은 영사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시현에게는 류하리가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며… 설령 류하리 본인이 모르더라도 그는 류하리를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최형림이 야심과 복수를 위해 살인조차 불사하는 괴물이 된다면 그는 류하리와 최형림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최형림이 자신을 회유하자 그점을 들고 나선 것이다.
“만약 약혼을 파혼하신다면… 그때는 고객님으로 모시며 서비스에 집중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어떻습니까? ”
시현은 강수를 던졌다.
류하리와의 약혼을 파혼하고 그녀를 놓아줘라.
그렇다면 최형림의 의뢰를 받아줘도 괜찮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녀를 좋아하는 군. 아니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시현은 류하리에게 사랑이라고 쉽게 말할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류하리는 그가 과거에 사랑했던 여성의 그림자다.
그렇다고 죽고 남은 망령 같은 존재라서 언젠가 성불시켜줘야 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고….
엄연히 류하리는 피와 살로 이루어져있으며 지금도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다.
실제로 둘이서 같이 일하다 보면 신체접촉도 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 했던 시간의 기억이 없고 데드맨으로서의 기억이 없는 지금의 류하리는 시현이 사랑했던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육체는 같을지 몰라도 그 안의 정신과 영혼이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최형림은 시현이 납득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녀와 파혼하면 제 의뢰를 받겠다. 그런 뜻입니까?”
“네.”
“…….”
듣고 있던 류하리가 당황했다.
시현의 감정이나 내막을 잘 모르는 그녀로서는 시현이 최형림에게 수작을 부리는 걸로 보였다.
‘뭐지? 배알이 꼴려서 그냥 내 핑계 대고 어깃장 놓으려는 건가? 그렇지만….’
류하리는 자신의 파혼을 조건으로 걸고 파혼하면 최형림의 수족이 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시현의 말에 당황했다.
아닌척 하지만 사실 시현에게 최형림의 수족이 된다는 건 수치일 것이다.
그 수치를 감내하면서 까지 이 약혼을 깨고 싶다는 건가?
만약 약혼을 깬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시현이 정말 최형림을 도와서 이 자를 대통령으로 만들때까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협력하게 되나?
류하리는 왠지 자신의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최형림의 대답을 기다렸다.
* * *
최형림은 시현에게 내심 감탄했다.
“다른 건 다 들어드릴 수 있는데….”
역시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그건 받아들일 수 없군요.”
최형림은 시현의 요구를 거절했다.
“의외로군요. 당신은 야심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실 수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제가 이런말 하긴 뭣하지만 최 검사님께는 제가 절실히 필요하실텐데요? 영사 이사가 있긴 하지만 김원식 회장 댁에도 유능한 계약자들이 많이 있답니다.”
시현은 최형림에게 물어보았다.
“저도 그녀를 아주 오래전부터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정략결혼 때문에 약혼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
최형림은 낯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듣고 있던 류하리가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애석하지만 고객님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하하하.”
최형림은 시현의 말을 듣고 웃었다.
“당사자 앞에 두고 잘하는 짓이군요.”
류하리가 시현과 최형림을 노려보았다.
“둘이 싸우고 싶어서 절 핑계로 삼각관계를 그리다니 당사자 입장에선 불쾌한데요?”
류하리는 최형림과 시현, 둘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고 기분나빠했다.
시현과 최형림은 서로서로를 마주 보았다.
‘진심인데. 이자식.’
‘진심일텐데? 이놈.’
둘 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 * *
“그래서. 사이다패스는, 그녀에게는 고객 만족을 선사해줬습니까?”
최형림은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흠 안 가실 모양인가 보군요.”
“네. 빈소를 하루 정도는 지키고 싶군요. 이래저래 그녀는 제 동료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최형림은 바쁜 와중에도 정말 사이다패스를 위해 하루정도는 시간을 낼 모양인듯 했다.
‘……’
류하리도 어째 남아야 할 분위기였다.
‘벌서기 근무 싫어서 도망쳤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하지만 김유라의 영정사진을 보니 이 불쌍한 사람의 빈소 정도는 지켜줘야 겠다는 의무감이 느껴졌다.
‘살인마인 그녀를 불쌍히 여기면 그녀의 피해자들에게 안될 일이지만, 하지만 그녀의 피해자들 대부분 그냥 죽어 마땅한 개자식들이었잖아?’
류하리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그때 최형림이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양지희 양은 아직 살아있지요?”
“….그녀는 살아있는 채로 내버려 둘 겁니다. 어차피 그게 가장 큰 고통일테니까요.”
“양천용 의원의 그늘이 없으면 그녀는 말라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추가로 손대지 않고?”
“그냥 말라죽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의 피해자들을 모아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지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서 세간에 영향을 주기 전에 드라마가 제작에 들어가면 투자자인 당신이 피해를 입지 않겠습니까?”
“........”
최형림의 질문은 날카롭다. 시현이 양지희에게 접근하기 위해 드라마에 대한 투자를 감행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것도 생각해뒀습니다. 방송계 지인을 통해서 도중에 각본을 수정해서 캐스팅을 바꿀 생각이었습니다만.”
“흐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계속 살려두실 생각이군요.”
“예. 앞으로 그녀는 살아가는 게 죽음보다 더 괴로울 겁니다.”
“이런…. 전 그것도 모르고 따로 손을 써버렸군요..”
“손을 썼다고요?”
류하리는 시현과 최형림의 대화를 듣다가 깜짝 놀랐다.
뭐야. 이 남자. 무슨 짓을 벌였나?
* * *
양지희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왔더니 갑자기 아버지가 사이다패스에게 습격당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그녀에게 그 죽음은 크게 와닿는게 없는 흔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장례식 일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자니 이미 매스컴에서 기사가 떴는데 딸인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다들 뭐라고 입방아를 찧을지 알수 없다.
허나 마약중독자인 그녀에겐 한국의 고된 장례 행사를 버텨낼 체력따위 없었다.
“썅. 대체 뭐야. 이 장례절차는? 유족들 괴롭히려고 작정했나?”
양지희는 새삼스럽게 대한민국의 장례 절차에 경악했다.
이건 유족들을 괴롭히려고 만든 게 틀림없다.
너무 괴롭혀서 유족들이 슬퍼할 틈새도 없게 만들겠다는 취지였겠지만 전혀 슬퍼하지 않는 대상의 죽음에 끌려다니며 고통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양지희를 짜증나게 했다.
게다가 조문객은 얼마나 많은지....
재상집 개 죽은데는 조객이 저자를 이루어도 정작 재상 죽은 데는 문전이 조용하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조문객들을 맞이하느라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한계에 다다른 양지희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저, 실례지만... 양지희 씨 맞습니까?”
“네?”
양지희에게 말을 걸어온 남자는 얼굴에 큰 화상자국이 있는 우중충한 느낌의 남자였다.
“아 맞군요.”
그 순간 남자는 히죽 웃었다.
화상으로 짓뭉개진 입술 사이로 깨진 이빨이 섬뜩하게 드러났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