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여기가 지옥이다 #4
시현의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현은 전화를 받지 않고 자신의 맞은 편에 있는 최형림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남자에게 눈을 떼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경계심이 느껴졌다.
‘이 남자는 살인예술가인 지은재를 죽이고 그 계약을 승계했지?’
최형림은 이제 계약자다.
사람들에게 트릭을 건네고 살의를 증폭시키는 지은재의 능력은 그대로 전해졌을까?
아니면 달리 최형림의 개성에 맞게 변형되었을까?
남에게 살인을 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면 지금 여기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받으시지요. 급한 일일텐데.”
최형림이 시현의 전화기를 대신 걱정해주었다.
“네. 그럼 실례.”
시현은 상복의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아 이봐! 큰일났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방송작가 유정미의 전화였다.
“큰일이라니요?”
[우리가 양지희의 피해자들 모아서 다큐멘터리 찍고 있었잖아? 그런데 그 양지희 아버지가 죽어버렸고.]
“그래서요?”
[그 피해자 중 한 놈이 갑자기 돌아버렸어. 그 장례식장에 찾아갔어! 글쎄 염산을 들고 갔다지 뭐야?]
“염산이요?”
[그래! 만약 일 터지면 어쩌지?]
“피해자 중 한놈이라고 했는데 남자입니까?”
[그래.]
“들고 간 건 염산이고요?”
[그렇지.]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다행은 무슨!]
“일단 진정하시죠.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염산 투척이 좀 어렵습니다. 하물며 현역 거물 정치가가 죽은 장례식장이에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거고 그건 이제 거대한 종심방어진입니다. 게다가 양지희 양은 약물 중독자라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닐텐데 사랑하지도 않는 아버지의 상을 그렇게 열심히 치를 것 같지는 않군요. 그녀가 다칠 확률은 한없이 낮습니다.”
[하지만 안심할 수가 없잖아? 만약 상해라도 입혔다가는....]
“죽이지 않고 옷 정도 태우고 끝나면 방송은 오히려 아주 잘 팔릴 겁니다. 욕은 좀 먹겠지만... 그 정도는 각오한 거 아닙니까?”
[개새끼네. 이거. 나만 독박쓰는 거잖아!]
“대신 방송이 대박나면 혼자 독식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현재로서는 어찌할 방법도 없으니 결과를 기다려보지요.”
시현은 당황하는 유정미를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모습을 본 최형림은 시현의 배짱에 놀라움을 느꼈다.
“정말 실패할 거라고 믿는 겁니까?”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만약 이 사람이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훈련받은 자고 미리 현장을 답사하고 수차례 리허설까지 했다 하더라도 단독으로 투입되었다면 당연히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건 탁상공론이 아닙니까? 성공할 수도 있는데요.”
“뭐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한 배를 탄 사람들에게는 안심을 시켜줘야 하지요.”
“만약 틀리면요?”
“욕먹고 끝내야죠.”
“무책임하군요.”
“그럼 책임을 져볼까요? 저랑 내기라도 하시겠습니까?”
시현의 제안에 최형림은 흠칫 놀랐다.
확률이 좀 높다고 걸고 나오는 것도 모자라 아예 내기까지 제안하다니.
“아니. 안하겠습니다.”
최형림은 시현의 제안을 거절했다.
애초에 그는 도박을 하는 성격의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을 시현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최검사님이 앞으로 가려하는 길도 순탄하지만은 않을텐데 무작정 안전하게 돌다리만 두들기며 갈 수는 없을 겁니다. 때로는 도박도 해야 할텐데 여기서 가볍게 연습 정도 안하시렵니까?”
“제가 도박은 잘 모르지만... 한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도박에 능숙한 사람과는 도박하지 말라.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과대평가를 하시는 군요.”
“그런데 만약 내기를 하겠다고 하면 뭘 거시겠습니까?”
“글쎄요? 지은재 씨를 죽인 살해범에 대해서 피값을 받아볼까요?”
가볍게 연습삼아 내기를 해보자면서 그런 걸 건다고?
“누구의 의뢰로 하실 겁니까?”
최형림은 그점을 지목했다.
시현은 의뢰인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
그 자신의 욕심대로, 스스로의 욕구에 따라 사람을 죽이거나 파멸시키는 짓을 하게 되면 시현의 원칙을 깨게 되고... 원칙을 깨버리면 결국 자신을 지킬수 없게 될 것이다.
“흠. 최형림 검사님. 좋은 걸 지적해주시는 군요.”
시현은 최형림이 그의 아픈 점을 지적했다는 걸 인정했다.
사이다패스, 김유라는 양지희에 대한 복수를 시현에게 의뢰했다.
양지희의 아버지가 죽고 그녀의 피해자들이 조직되어 본격적인 고발을 하게 됨으로서 복수는 성사될 것이다.
시현에게 부탁한 김유라의 의뢰는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받을 것도 이미 받아버렸고.
문제는 지은재의 죽음이다.
시현이 김유라와 계약할 때는 지은재가 살아있었으니 그에 대한 복수는 계약에 들어있지 않았다.
김유라가 살아있었다면 지은재의 복수도 갈망했을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지은재의 복수를 계약에 덧붙이기 전에 삶의 기력을 전부 소진하고 사망해버렸다.
즉 지금의 시현에겐 최형림을 칠 명분이 없다.
“하지만 최형림 검사님. 당신이 균형감각을 잃고 실수를 범한다면 결국 저는 계약자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계약자 말입니까?”
“예.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절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그때는 너를 처단한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형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아무리 시현이 강력한 계약자라 하더라도 이제 최형림 역시 계약자이며... 최형림이 손에 넣을 힘은 시현과 비교가 안되는 막강한 것이었다.
그는 권력과 금력, 합법적인 사법력을 장악하고 나라 전부를 빼앗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반면 시현은, 고작해야 탐정 한 명일 뿐이지 않는가?
“아시다시피, 저는 도박을 하는 걸 그다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
“반면 당신은 도박을 꺼려하시고요.”
“확실히, 그런 점에서 차이가 있겠군요. 네. 알겠습니다. 충고 감사히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최형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쪽 장례식장도 가봐야 해서요.”
이미 죽어 사라진 인물이지만 양천용 의원은 최형림에게 정치적인 배경을 제공했어야 할 인물이다.
설령 그와의 연결을 부정해야 할 처지라 해도 장례식장에 찾아가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최형림은 상주와 유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와 거의 동시에... TV에서 뉴스 속보가 떠올랐다.
* * *
이빨 깨진 남자는 품에서 염산병을 꺼내려다 주위 사람들에게 제지당했다.
시현의 예측대로 양천용 의원의 장례식장은 거대한 종심방어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지라 양지희를 찾아서 배회하는 이상한 눈빛의 남자는 원래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품에서 염산병을 꺼내고 병마개를 뽑으려 하자 다들 달려와 그를 제지한 것이다.
“놔! 이자식들아!”
남자는 악을 썼지만 화상을 입어 손상된 피부와 신경 때문에 운동능력이 낮은 그가 혼자서 여러 사람들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저년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느지 알아!? 썅! 날 산채로 태웠다고! 아주 개같은 년이야!”
남자는 악을 쓰며 몸부림쳤고 그 와중에 염산병이 날아가 바닥에 깨지고 파편들이 튀었다.
“꺄악!”
“아악!”
몇몇 사람들에게 염산이 튀었지만 옷이나 양말에 닿은 정도다.
그렇게 염산 테러를 하러 온 남자는 허망하게 제압당했다.
하지만 양지희는 사색이 되어있었다.
사방팔방에서 플래쉬가 터진다.
마치 피묻은 고기에 달려드는 피라니아 떼처럼 매스컴이 달려들어 저 자를, 아니 양지희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아버지의 부재가 무엇을 뜻하는 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저지른 과거의 과오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던 아버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 * *
염산 테러는 실패로 끝났지만 연예인인 양지희에게 원수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매스컴에겐 진수성찬이 공짜로 펼쳐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들 열심히 달라붙어서 벌써부터 온갖 추측성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양천용 의원의 수족이 되어 이런 사실들을 무마하던 검찰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양천용 의원이 죽어 이제 더 이상 검찰들을 위해서 의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겠지만 그 딸이 저지른 패악질을 무마해 준 것은 엄연히 권력범죄였다.
검찰 입장에서는 덮어 눌러야 할 치부인데... 매스컴이 잔뜩 모여있는 장례식장에서 염산테러라는 화려한 행동을 저질렀으니 무작정 덮어 누를 수도 없었다.
* * *
양천용 의원이 사망하고 그 장례식장에서 양지희에 원한을 품고 있던 이가 염산을 투척했다.
그런 소문이 돌자마자 제작사에서는 양지희에 대한 캐스팅을 급히 취소했다.
사실 양지희에 대한 안좋은 소문은 연예계 전체에 이미 알음알음 퍼져있는 상태였다.
그동안은 그녀의 아버지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양천용 의원이 사망한 지금 굳이 구설수에 오를 여배우를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끝났네.”
매니저는 솔직하게 소감을 말했다.
“뭐가?”
“연예계 커리어 말야.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유정미인가 하는 방송작가가 네 피해자들을 모아서 고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던데? 벌써 MNTV나 기타 방송국등에서 그 프로 파일럿 필름 달라고 PD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더라.”
“막아.”
“...야. 못막아. 유정미인가 하는 애 빽이 누군지 알아? 유PD야. 국민 예능 알지?”
양지희는 자신의 사촌 언니인 매니저의 태도에 발끈했다.
언제나 그녀 앞에서 공손하게 말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은연중에 반말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다들 날 너무 물로 보는데.”
“...넌 약점이 너무 많아. 숙부님 덕분에 그나마 누덕누덕 기워서 어떻게든 물위에 떠있었지. 숙부님 없으면 그대로 꼬르륵 가라앉을 배야.”
“뭐?”
“...사표 쓸게. 한국에 와서 일 터져서 다행이다. 마침 YN에서 경력직 스텝 뽑던데 거기 미팅이나 나가봐야 겠어. 네가 사고를 많이 친 덕분에 업계 사람들이 내 인내심은 다들 알아주거든?”
“웃기지 마. 언니! 나 이대로 끝 아냐!”
양지희는 그렇게 말하고 몸부림 쳤지만 누가 봐도 죽어가는 짐승의 몸부림이었다.
자기 몸조차 가누지도 못하는 양지희가 이를 갈며 사촌 누이, 자신의 눈앞에 사표를 던진 옛 매니저를 노려보았다.
“기다려봐.”
양지희가 휴대폰을 들었다.
“스폰서에게 직접 전화해보겠어.”
“...안하는 게 좋을텐데?”
“아니, 그 남자는 날 개인적으로 좋아한다니까! 이렇게 끝나게 할 리가 없어!”
“하지말라니까.”
매니저, 아니 전 매니저는 자신의 위치에 집착하는 양지희를 보며 혀를 찼다.
‘오냐오냐하는 걸 다 들어줬더니만 현실감각이 없나.’
스폰서가 사적으로 밀어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CF정도가 한계다.
그동안 드라마 등에서 유의미한 배역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은 양지희가 배경이 튼튼한 것 외에 본인의 배우로서의 능력이 상당했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지를 조져버린 지금 스폰서가 그녀를 받아줄 이유가 없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