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여기가 지옥이다 #5
“하지말라니까. 너 지금 그 몸상태로, 스폰서였던 남자에게 싫은 소리 들으면 쓰러진다?”
전 매니저였던 사촌 언니는 양지희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지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걸었다.
* * *
[네. 전화받았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양지희는 전화 너머의 상대에겐 보일리도 없는데도 몸가짐을 바로 잡고 목소리도 가다듬었다.
자세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배우인 그녀는 그걸 잘 알기에 전화가 이어지자 자신을 가다듬었다.
비록 지금 위기에 처해있지만 자신을 철저히 관리해서 매력을 잃어선 안된다.
“뉴스는 보셨나요?”
[예. 우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화환과 조의금은 보내두었습니다.]
“아 그건 감사해요. 제가 경황이 없어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네요. 그런데 제가 캐스팅에서 제외된다고 하던데….”
[네. 알고 있습니다. 실은 감독과 제작사의 적극적인 어필이 있었습니다.]
스폰서의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양지희는 목이 타는 듯 했다.
그녀의 커리어가 갑자기 풍전등화 상태가 되었다.
원래라면 반말하고 우습게 보았을 스폰서가 이제는 하나하나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존재다.
그녀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이 남자를 붙잡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저는 이번 역할에 진짜 열의가 있거든요.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안될까요?”
[죄송하지만 감독과 제작사를 설득해야 할 것같군요. 그건.]
“감독에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께서 그, 감독과 저를 대화할 수 있게 다리를 놔주시면….”
[….]
“부탁드려요.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이 은혜 잊지 않고….”
양지희가 그리 말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아버님이 제게 뭘 하려고 했는지 기억못하십니까?]
“…네?”
[돌아가신 양천용 의원님께서… 제게 약을 타려고 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평소 그 데이트 강간약 키트가 있어서 망정이지.]
“아….”
[돌아가신 분의 명예에 관련된 이야기라 더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않았지만 고발해야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겨서…. 저로서는 진짜 입다물고 조화를 보낸 것만으로도 사회인으로서 할 의무는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그건 죄송해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
[양지희 씨… 죄송하지만 당신을 보면 아무래도 그 날의 악몽이 떠오르니까 죄송하지만 연락을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여배우로서 당신의 재능은 응원하고 있으니까 한동안은 몸을 재활하면서 건강을 회복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연락 끊겠습니다.]
투자자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
“하. 미쳤네. 숙부께서 그 투자자에게 약을 타려고 했어? 그런데 거기에 전화를 했단 말야? 쌍욕 안 박은 것만으로도 정말 매너좋은 사회인이네.”
“…아.”
“지희야. 저사람 말이 맞아. 너 이 기회에 좀 쉬면서 건강을 회복….”
“웃기지 마!”
양지희는 휴대폰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화장대를 향해 집어던졌다.
화장대가 깨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편이 쏟아져내렸다.
“그 성질도 고치고. 이제 너 받아줄 그것도 없어. 한동안 자중해야 할 걸.”
“아아아악!”
양지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쯧.”
전 매니저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양지희를 내버려두고 방문 밖으로 나갔다.
* * *
방송작가 유정미의 자택, 그곳에서 시현은 전화를 끊었다.
“죽이네.”
시현이 전화를 끊자 그걸 지켜보고 있던 유정미가 키득키득 웃었다.
“양천용 의원이 약을 탔어? 알고 있었나? 그렇게 될 걸?”
장기정 기자가 미심쩍어했다.
시현은 어떻게 양천용 의원이 약을 탈 것을 알고 대비했을까?
자신이 잘생겨서 양천용 의원이 못참을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요. 솔직히 그 상황에서 약을 탈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계획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약을 타려고 했을 뿐이었죠. 그리고 아마 양천용 의원은 절 강간하려고 약을 타려고 한 건 아닐겁니다. 다만 뭐랄까. 신경쇠약처럼 처음부터 저를 의심했고, 약을 타서 절 쓰러뜨리고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했겠지요. 자신이 불신하는 대상을 통제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일종의 노이로제 상태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묶어둔 다음에는 꼴려서 강간하고 말이지?”
“…뭐 워낙 권력을 쥐고 이짓저짓 할거 못할거 다 해도 주위에서 넘어가주니까 균형감각을 잃은 거지요. 권력을 너무 오래 쥐면 다들 겪는 일이니까요.”
“어쨌건 이로서 양지희는 완전 개작살 내놨군. 꼴 좋은데.”
방송작가 유정미는 후련해했다.
아무래도 피해자들 인터뷰를 많이 따다 보니까 양지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잘 되었습니까?”
“뭐 사람들이 협조적이니까. 인터뷰는 다 땄고 이제 편집만 좀 하면 돼. 여기저기서 관심은 보이고 있어. 다만….”
“검찰 OB조직이 천용덕 검사와 최형림 검사에게 접근했더군.”
“슬슬 시작이군요.”
시현은 그 말을 듣고 혀를 찼다.
검찰은 기묘한 조직이다.
사법활동을 하면서 행정부에 속해있고 법학을 공부해서 입법부, 사법부와 가깝다.
경찰의 위에서 수사를 지휘하기까지 하니 그들의 권력은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하지만 그런 강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검찰은 언제나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정계를 좌우하려 한다.
스스로 고시를 패스해서 관직에 오른 이들이 선출직의 권력까지 장악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찰 OB나 현직들을 위주로 선출직 쪽에, 국회의원 쪽에 진출하려는 세력이 만들어져있고 그 세력의 선두주자가 바로 양천용 의원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이다패스 사건에서 양천용 의원이 제거당했으니 이제 그들은 새로운 기수가 필요하고 거기에 천용덕 검사와 최형림이 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사이다패스가 그동안 죽인 검사나 검사 OB는 그 조직의 일원들이었다는 거지요.”
최형림은 검찰의 OB조직을 공격해 그들을 약화시켜 그들이 더욱 간절하게 새로운 인재를 원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자신이 그들의 지원을 받아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자네는 정말 그걸 방치할 건가?”
장기정 기자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악마와 계약해서 초능력을 휘두르는 자가 단지 사적인 이유로 공권력을 장악하려고 한다.
암살과 모략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최형림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그것은 시민들에게 참으로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그 끔찍한 짓을 알면서도 가만히 놔둘 셈인가?
장기정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이래서 장기자님을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요.”
시현은 그런 장기정의 분노를 느끼고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현실에 지쳐 나가떨어진 척 하면서 남에게는 성실한 희생을 바라는 그 비열한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그렇게 비꼬지 않아도 스스로 비열하다는 건 잘 알고 있네.”
“무슨 소리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현은 유정미 방송작가를 피해 밖으로 나가자고 장기정 기자에게 손짓했다.
* * *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오자 흡연자인 장기정 기자는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뒤 깊게 빨았다.
마음이 초조해서 그런지 담뱃불이 타오르며 그의 얼굴에 음영을 깊게 드리웠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나?”
“최형림 검사에게 사이다패스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흠?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는 사이다패스가 살인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총구는 최형림 검사가 겨누더라도 방아쇠를 당기는 의지는 그녀의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최형림의 의지로, 접 방아쇠를 당겨야 하지요. 사이다패스의 살의가 아니라 그의 살의로.”
“양천용 의원이 균형감각을 잃고 폭주하는 것처럼 그 역시 그럴 것이다?”
“예.”
“하지만 그건 참… 주변사람들의 고통 아닌가.”
“어차피 권력자가 권력을 사유화 하면 민중은 다 고통받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권력자 자리에 어지간한 사람을 올려놓아도, 아무리 선한 사람을 올려놔도 민중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장기정 기자님도 학창시절엔 학생운동을 하셨지요?”
“그렇지. 뭐 내때는 이미 학생운동도 끝물이었지만….”
“그때의 친구들은 다들 좋은 세상을 만들었던가요?”
“아니….”
“현실적으로 그렇지요. 지혜가 부족하면 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쓸모가 없고 지혜와 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추어도 잠깐의 욕심이나 권력에 눈이 멀면 사고 치기 딱 좋지 않습니까?”
“어차피 사람들은 고통받으니까 최형림이 무슨 짓을 하건 내버려두겠다는 건가?”
“저는 고객만족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 원칙을 제 손으로 깨면 저 자신도 이내 줄에서 떨어져 날 기다리는 저 악마의 손에 떨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자네도 인간으로서 원하는 바가 있을 게 아닌가.”
“아….”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도 원하는 바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고객으로 삼아 일을 해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제 이전의 데드맨들이 잘 보여줬지요. 그런 실패는 두 번이면 족합니다.”
“두 번?”
“네.”
시현은 그리 말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 안심하시지요. 최형림 검사, 그가 균형을 잃고 굴러떨어지는 건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시현은 마치 미래라도 보고 온 것처럼 그렇게 단언하는 것이었다.
* * *
사이다패스 수사본부의 천용덕 검사는 결국 법복을 벗고 대신 선진당의 대변인에 위촉되었다.
현역 의원도 아니고 아직 초선도 겪지 않은 이를 당내 중진으로 올리는 그 파격적인 인사에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용덕 검사 역시 놀라워 했는데 검찰 출신의 인력들이 선진당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 파벌도 아니었던 그에게 이런 좋은 자리가 제안될 줄 몰랐던 것이다.
결국 천용덕 검사는 선배들의 설득에 응하며 대신 협력자로 젊고 유능한 인재를 추가로 선발했는데….
그게 바로 최형림 검사였다.
이는 사이다패스 수사본부의 검사 둘이 동시에 옷을 벗은 사건이 되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행정부와 현정부에 대한 검찰 조직의 항명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에 검찰에서는 최형림에 대한 지지가 오히려 상승했다.
‘재벌 아들이라 다 무시해도 상관없는 입장인 사람이 검찰을 위해서 행정부에 항명하는데 같이 법복을 벗었다.’
그 사실 만으로 최형림에 대한 믿음과 동질감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천용덕 검사야 수사 본부장이었으니 책임이 있다 쳐도 그 밑의 검사인 최형림이 법복을 벗으니… 검찰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위해 최형림이 희생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최형림의 선택이었다.
언젠가는 법복을 벗고 정계에 나서야 하는데… 검사들, 관료조직의 지지를 잃지 않으면서 법복을 벗기엔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였기 때문이었다.
현 대통령은 관료계급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민중당계 대통령이어서 그가 이끄는 행정부에서 항명한다는 건 기존 관료 세력들에게는 오히려 예뻐보이는 효과를 불러일으켰으니 차후 정계에 진출할 때 귀중한 재산이 될 것임에는 분명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