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여기가 지옥이다 #6
“젊은 자네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네.”
천용덕 검사, 아니 이제는 천용덕 대변인은 자신을 따라온 최형림에게 고마워 했다.
재벌가의 자식이라 검사에서의 영달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을 거라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금력을 갖춘 자들이 두려워 하는 건 사법제도에 의해서 공격당하는 것이니 사법제도를 다스리는 검찰에 자신들의 사람을 심어두는 것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가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형림이 그걸 마다하고 천용덕을 따라 법복을 벗는 걸 선택한 것이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원하던 일이었습니다.”
최형림은 정작 이 일을 꾸민 장본인이면서 태연히 시치미를 뗐다.
아무래도 경륜과 나이를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 젊은 그가 바로 당내 중진으로 올라가기는 힘들다.
당에 공헌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당내 중진들 다 새치기 하고 혼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선진당은 오래전부터 검사 OB들의 조직과 커넥션이 있었으니 검사 OB들의 인정을 받을 만한 인물, 천용덕 같은 사람을 내세우면 당의 핵심을 장악할 수 있다.
천용덕은 인품은 있으나 조직력이 없으니 필연적으로 최형림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양천용 의원의 꼭두각시로 정계에 입문하는 것 보다 훨씬 나으리라.
“그럼 잘되었군. 그런데 혹시 내일 저녁 시간 낼 수 있겠는가?”
“선배님께서 시간을 내라면 결혼식 당일이라도 가야지요.”
“하하하. 그거 참 파격적이군. 결혼식보다 우선할 필요는 없네만…. 말만이라도 고맙네. 자네를 꼭 데려가야 하거든.”
“저를 꼭 데려가야 한다고요? 대체 어떤 일인가요?”
“마침 후원자 분이 뵙자고 하시는 데 그분이 자네에게도 관심을 보이시거든. 그래서 자네를 데려가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네. 사실 거절당할까봐 걱정했었는데 따라와주겠다니 고맙구만.”
보아하니 천용덕도 후원자 앞에서 큰소리는 뻥뻥 쳤는데 그게 어긋날까봐 가슴 졸였던 모양이었다.
최형림이 결혼식보다 천용덕의 부름을 우선하겠다고 하니 빈말이라도 고마워 할 수밖에.
그런데 천용덕에게 후원자가 있었단 말인가?
“후원자 분 말입니까?”
“그렇다네. 이거 참, 아주 훌륭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기대를 많이 하시는 모양이야.”
“어떤 분이신가요?”
“자네가 오히려 더 잘 아는 분일 걸세. SH그룹의 김원식 회장님일세. 자네에게는 외조부님 아닌가?”
“……….”
최형림은 그 이름을 듣고 눈앞이 번쩍이는 충격을 받았다.
김원식 회장이라고?
* * *
류하리는 자신의 아버지 류장천 회장과 약속을 잡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아무래도 약혼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 하기 위해서였다.
남들 앞에서는 할 말, 못할 말 다 하는 류하리였지만 부모에 대해서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말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부모에게 상궤를 벗어난 주장을 할 때마다 큰 실패를 겪었던 것이다.
학창시절에 공기권총 선수로 많은 지원을 받았는데 원인모를 부상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 부상을 입었음에도 경찰대학을 고집해서 갔다가 막상 임관할 때 또 의문의 컨디션 난조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자신이 뭔가 고집할 때마다 사고가 일어나 그 길을 막으니… 류하리는 부모님께 자신을 증명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준 부모님에게 이제와서 강하게 저항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혼 문제까지 흐지부지 넘어갈 수는 없었다.
최형림에게 호감이나 호기심이 가지 않냐면 그건 아니다.
우습게도 그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법을 뛰어넘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류하리에게는 외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강건너 불구경, 소가 닭보듯 했던 최형림의 외모와 지성이 이제와서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약혼이라는 족쇄로 그와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범죄자라서 흥미가 가긴 하지만 그런 작자랑 결혼을 할 수는 없다.
나중에 일이 터지면 가족에게도 폐를 끼칠테고.
그래서 그녀는 류장천 회장의 자택, 부모님의 집으로 향했다.
고급 빌라들이 즐비한 곳에서 류장천 회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류하리… 왔구나.”
그의 곁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와 있었다.
바로 영사였다.
“후후후. 오셨군요. 아가씨.”
영사는 뻔뻔스럽게도 류하리를 환영했다.
“오래간만은 아닌 것 같군요.”
“네. 요새 바쁘시지요?”
“잠시만요. 아버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집안 일인데 영사 아저씨는….”
“집안 일이기 때문이다.”
“네?”
“그는 우리 가문의 은인이기 때문이란다. 아주 깊이 관여되어있지.”
“은인이요?”
류하리는 영사와 얼굴을 마주치고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영사에 대해서 고용인이다, 부하다, 아는 동생이다 정도 까지만 이야기했었지 은인이라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류하리. 네가 계약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걸 그에게 들었다. 불쌍하게도. 이번에는 모르고 지나기를 바랐는데….”
“네?”
“하지만 시현 그 녀석도 얄궂구나. 널 사랑해서 놓아줄 줄 알았는데 역시 집착을 버리지 못했나.”
“뭐라고요?”
류하리는 금시초문인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지금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버지도 계약에 대해서 알고 있다.
아니 시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무슨 소리지? 놓아준다니?
마치 언제는 잡혀있던 것 같지 않은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시현, 그사람을 어떻게 아버지가 알고 계시는 거에요? 그가 저희 집안과 관계가 있나요?”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영사의 음습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떤 관계인가요?”
“그건 제 입으로 말하기가 그렇군요.”
“지금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널 부른 거란다.”
“........”
류하리는 아버지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무뚝뚝하지만 딸이 해달라는 걸 뭐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던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던 그가 지금은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존재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류하리는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자네가 말해주게 영사.”
아버지, 류장천 회장도 난감해하고 있었다.
“예. 어디부터 말해드릴까요?”
“처음부터. 그래야 납득하겠지.”
“알겠습니다.”
영사는 쓴 웃음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하리는 그런 영사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의 머릿 속에서 뭔가 근질거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직접 갈고리로 그녀의 뇌수를 긁는 것 같은 기묘한 아픔이 동반된 가려움이었다.
“이 사진을 보시지요.”
그것은 빛바랜 흑백사진이었다.
젊은 여성과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서 카메라를 향해 바라보고 있고 그들 사이에 한 소년이 딱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주 옛날 유행하던 가족사진 같은 모습이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할머니와 이 소년은 아버지군요.”
류하리는 그 사진을 보며 당황했다.
왜냐면 사진의 뒤 배경에 그녀의 눈에 익숙한 기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타자기였다.
사진 속 할머니는 젊은 여성,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류장천 회장은 어린 소년인 걸 보니 못해도 50년 전의 사진일텐데….
“당신이 보신대로 이 타자기는 바로... 그 타자기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 사진의 남자는 SH그룹 회장 김원식입니다.”
“네?”
갑자기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와서 류하리는 깜짝 놀랐다.
“최형림 검사의 생물학적 친부이지요. 그리고 할머님께서 사랑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
류하리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했다.
사진속의 김원식 회장과 할머니는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흑백사진이 주류이던 이 시절에 아무 관계없는 남녀끼리 사진을 찍진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와 김원식 회장의 관계는 그럼....”
“네. 외람되지만....”
“첩이다.”
아버지 류장천 회장이 잘라 말했다.
“네?”
아니 그렇다면 설마 류장천 회장이 김원식의 아들이면, 최형림도 김원식의 사생아인데... 최형림이 류하리에게 있어서 숙부가 되는 게 아닌가?
설마 이들은 숙부인 최형림과 자신을 짝지우려는 건가?
“안심해라. 나는 김원식 회장의 핏줄이 아니니.”
“아, 일단 안심...이 아니라. 애초에 저는 그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아,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계속하세요.”
류하리의 머릿속에서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휘두르는 이 강력한 태풍은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김원식 회장은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투자했고 성공했으며 조국을 위해 헌신했지요.”
“세간의 평판은 그렇지 않을텐데요.”
김원식 회장을 무슨 구국의 영웅인양 칭송하는 발언에 반감이 들어서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지금에 와서는 다들 잘먹고 잘 사니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그랬다는 겁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조국을 위해서 그는 활기차게 사업을 벌여나갔고 정치인을 매수했고 필요하다면 암살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
“아가씨의 조모 께서는 그런 김원식 회장을 사랑하셨지요. 설령 자신이 첩실이고 자기가 보는 눈 앞에서 다른 여자들을 마구 품고 다녀도 그것조차 용납할 정도로요. 하지만 그런 김원식 회장에겐 한가지 커다란 약점이 있었는데....”
“호색한에 범죄를 저지르고 처첩과 사생아를 싸지르고 근친상간도 저지르는 것 외에도 말이지요? 약점이 한 가지가 아닌 것 같은데.”
“수명이 짧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명?”
“네. 왜냐면 애초에 김원식 회장님은 저 위대한 자들과 계약해서 이 강력한 힘을 얻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보통 사람 이하의 수명을 갖게된 그 분은 수명을 늘릴 방법을 찾아서 안달하셨지요. 마침 당시 제게는.....”
영사가 미소를 지었다.
“타자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
류하리는 시현의 사무실에 있던 타자기를 떠올렸다.
그거 말하는 건가?
그게 류하리의 집에 있었고 지금 영사가 이야기 하는 걸 종합해보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증이 류하리의 눈썹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저절로 표정이 구겨진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이야기 하도록 하지.”
영사를 대신해서 류장천 회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류하리. 난 데드맨이었단다.”
“...데드맨.”
류하리는 그 이름을 듣고 경악했다.
* * *
타자기의 악마와 계약한 사람은 데드맨이 된다.
그는 불사의 존재.
그리고 타인의 수명을 갈취하는 존재다.
타인의 수명을 갈취하는 방법은 계약자 개인의 개성에 의해 변화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계약은 수명에 관여되어있다.
하지만 수명을 다루는 그 힘은 필연적으로 계약자 자신에게 화를 미친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늘 죽음을 마주하는 자는 미쳐버리지 않을 수 없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