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여기가 지옥이다 #7
“당시 나는 김원식 회장이 내 아버지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가 조국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어머니가, 너에게는 할머니 되는 그녀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지. 뭐 당시에는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을 거다. 김원식 회장은 분명히 이 나라를 위해서 고군분투 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김원식 회장은 한국 최대의 재벌기업인 SH그룹을 운영하며 사법기관과 경제 관료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살포해 그야말로 정경유착의 끝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애국자라고?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살리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이라 여겼다. 위대한 영감과 통찰을 가진 지도자,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버지라고 여겼지. 어머님도 그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분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류하리는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녀가 사탕을 갖고 다니는 것은 할머니로 인해 생긴 버릇, 언제든지 저혈당 쇼크로 사망할 수 있는 할머니는 항상 사탕을 가지고 다녔었고 그것이 류하리에게 옮길 정도로 류하리는 할머니를 사랑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할머니는 오직 김원식 회장만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를 위해서 자신의 자식을 악마의 계약자로, 데드맨으로 바쳤다는 소리가 아닌가?
류하리는 자신이 믿고 있던,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붕괴하는 느낌에 현기증이 났다. 마치 발밑의 토대가 무너져 몸이 추락하는 것 같다.
한없이 떨어지는 그 부유감 속에서 류장천 회장은 계속해서 진실을 속삭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람들의 수명을 징수하고 김원식 회장에게 그 수명을 바쳤지.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단다. 하지만 전혀 거리낌이 없었지. 나라의 미래, 그리고 내 아버지를 위해서라고 믿었으니까.”
“죽였다고요?”
류하리는 경찰인 자신의 앞에서 살인을 고백하는 아버지의 말에 당황했다.
“그래. 대의를 위해서 희생은 불가피한 법 아니겠느냐?”
류장천 회장은 살인에 대해서 일말의 가책조차 없는 듯 했다.
“문제는 타자기의 악마를 만족시켜주기가 점점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김원식이라는 거대한 계약자의 하청, 부품에 불과하고 스스로 의지가 없었지. 그리고 악마가 흥미를 잃으면 우리는 그대로 영혼을 징수당해 영겁의 고통을 받게 된다. 심지어는….”
류장천 회장은 혀를 찼다.
“‘진인’이 될 수도 있지.”
“진인?”
“아, 저는 정말 그리 된다면 바랄게 없는데 말입니다.”
영사는 ‘진인’이라는 말을 듣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끼는지 몸서리를 쳤다.
류장천 회장은 그런 영사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영사를 은인으로 취급하던 그였음에도 ‘진인’이라는 걸 흠모하는 영사의 모습만은 참아줄 수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진실을 알게 되었지. 나는, 김원식 회장의 아들이 아니라 입양된 고아였다. 어머님은, 김원식 회장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고아인 날 입양했던 거지. 그 사실을 알게된 후로 나는 더이상 김원식 회장을 위해서 일하고 싶지 않아졌다. 마침… 김원식 회장의 통찰도 끝을 보이고 있었고 말이지.”
“통찰이라면?”
“조국이 풍전등화일 때 그는 열정적이고 강력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조국이 안정화되고 나서는 색욕에 물들고 정경유착으로 나라를 썩게 만드는 괴물이 되었지.”
“그래서 데드맨 계약에서 어떻게 해방되셨나요?”
“너도 알지 않느냐?”
“시현. 그 사람인가요? 하지만 왜?”
“그건 모른다.”
“모른다고요?”
“아마도 계약에서 어떤 조건, 소원 때문이겠지. 그가 소원을 달성하는 조건으로 계약이 승계되었고 나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계약에서 해방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김원식 회장의 노예다. 현재로서는 말이지.”
“그럼 최형림 선배를 지원하는 건 김원식 회장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로군요?”
“아니.”
류장천 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의를 위해서다. 사적인 복수심 때문이 아니야.”
“하하.”
듣고 있던 류하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김원식 회장이 나이가 들면서 그놈의 대의인지 뭔지를 배신했다면서요? 그럼 아버지의 대의는 누가 보장하는 데요? 아버지가 지금 정신이 온전하다는 건 누가 증명하는데 살인과 강요를 양심의 가책 없이 마음대로 저지르나요?”
“뭐라고 해도 좋다. 최형림과 너의 약혼이라는 관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결혼을 재촉하진 않으마. 하지만 약혼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제가 싫다면요?”
“싫다고 하면 너는 이상한 여자가 되겠지. 가족들도, 최형림도 부정하지 않는 약혼을 오직 너 혼자만 부정하는….”
“제가 만약 아무나 붙잡고 결혼해버리면요?”
“오. 그거 참 재미있구나. 해봐라. 너와 결혼하려는 남자가 어찌 될 것 같으냐? 너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마음대로 갖고 놀 셈이냐? 적어도 내가 아는 하리는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었다.”
류하리는 대놓고 협박하는 아버지의 말에 이를 악 물었다.
확실히,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만으로 아무나 결혼하자고 붙잡으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그녀의 아버지도, 영사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결혼대상으로 물색한 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겠지.
“아니 지금 제 인생을 마음대로 갖고 노는 건 아버지잖아요?! 아버지가 김원식 회장에게 반감을 가지는 짓을 고스란히 제게 똑같이 저지르고 있는 거 아닌가요?”
“다르다. 왜냐면 나는 대의를 위반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실제로 내 친 딸이니 말이다.”
“아, 말이 안통하네.”
류하리는 고집이 황소심줄 저리가라인 류장천 회장의 반응에 고통스러워했다.
차라리 쇠귀에 경을 읽어도 이것보다는 보람차겠다.
저놈의 대의, 대의....
류장천 회장은 확고한 신념에 불타고 있어서 딸인 류하리가 그를 설득하려면 우선 저 신념부터 깨부숴야 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
“내가 할 이야기는 다 끝났다. 식사를 준비했다만, 보아하니 같이 겸상하면서 먹을 분위기는 아닌 것 같구나?”
“네. 그래요!”
류하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배웅하겠습니다.”
영사가 그런 류하리를 뒤따라나왔다.
* * *
워낙 큰 집이라 현관만 되어도 류장천 회장과 거리가 상당하다. 그곳에서 구두를 신고 있는 류하리에게 영사가 말을 걸어왔다.
“아버님을 이해하시지요. 김원식 회장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면 가족들 모두 위험해집니다. 그쪽에도 유능한 계약자나 일처리를 해주는 인간들이 많으니까요. 아버님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약혼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최형림 선배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거죠?”
“‘진인’이 그를 주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카엘 윤을 말하는 거군요?”
류하리는 저들이 말하는 진인이라는 게 바로 미카엘임을 깨달았다.
악마가 인간의 운명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를 대체해서 인간 세상을 즐기는 상태.
그걸 진인이라고 부르나?
“시현은, 그 사람은 저희랑 무슨 관계지요?”
“그건... 제 나름대로 추측은 갑니다만 아가씨가 직접 조사하시지요.”
“그럼 빨리 조사해봐야 겠군요.”
류하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현관 문 밖으로 찬바람을 남기며 사라졌다.
영사는 그런 류하리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류장천 회장에게 돌아왔다.
류장천 회장은 무뚝뚝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딸은 갔나?”
“예. 뒤도 안돌아보고 갔습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군요. 괜찮습니까?”
“언젠가는 딸도 이 대의를 이해하겠지. 그럼 이제 세상을 바로 잡도록 해볼까?”
“………”
사이다패스 사건도 그렇고 사람을 도구로 죽이면서 세상을 바로잡는다라.
류장천 회장도 자신의 감각이 뒤틀려있다는 걸 모르는 듯 하다. 하지만 영사는 말없이 웃을 뿐이다.
* * *
시현탐정 사무소는 근린상가 건물로 그 옥상은 온전히 거주자를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시현은 그 옥상에서 폭풍우가 청소해 맑아진 공기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내일 출근하셔야 할텐데?”
시현은 류하리의 출근을 걱정해주었다.
“이미 영사랑 아버지가 다 말했어요. 당신에 대해서 말이지요.”
류하리는 그렇게 허세를 부려보았다.
그러자 시현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간을 드릴테니까 어디 요약해서 말씀해보시지요. 몇 분 드리면 되겠습니까?”
“………”
“안 통하지요?”
“아니 이 얄미운 인간이!”
류하리는 시현이 자신의 허세에 안넘어가는 걸 보며 기막혀 했다. 이렇게 얄미울 수가!
“그런데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뭔가 짚이는 게 있나 보군요?”
“.......”
대답 대신 류하리는 서류를 꺼냈다.
시현에 대한 조사자료들이었다.
“절 뒷조사하셨습니까?”
“애초에 그게 제 경찰 첫 업무였으니까요.”
류하리는 그리 말하고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당신은 갑작스러운 부모의 실종 이후, 잠시 시설에 있었다가 저희 아버지에게 지원을 받았더군요. 그리고 아버지는 당신에게 데드맨 계약을 넘겨주었다고 말하셨어요.”
“흠 거기까지 이야기 하셨으면 영사와 류 회장님이 할 말은 다 하신 거 같군요.”
“그런데 납득이 되질 않아요. 아버지와 당신이 대체 무슨 관계기에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계약을 덥썩 이행하는 거지요?”
“역시 부잣집 따님이라 그걸 잘 모르시나 보군요. 생각해보세요. 쥐뿔도 없는 고아가 교육을 받고... 지금 여기 이 건물들이나 재산, 네트워크 등등 증여받은 것만 30억이 넘는데 30억이면 영혼을 파는 사람이 나올 법도 하지 않습니까?”
“30억까지 갈 것도 없겠죠. 당장 경마장 같은데 가면 돈 몇 백이면 영혼조차 팔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전 바보가 아니에요.”
류하리는 시현의 변명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타자기의 악마가 설마 돈 때문에 영혼을 파는 자를 좋다고 받아들이겠어요?”
류하리가 그렇게 말하자 아래층에서 타다닥 타닥 하고 요란하게 타자기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뭔가요? 저건?”
“아마도 당신의 말이 틀렸다고 타자기의 악마가 항변하는 게 아닐까요? 난 돈만 주면 그 어떤 비천한 영혼도 환영인 하찮고 비열한 악마입니다. 하고?”
-타다닥! 타다다다다닥!
그야말로 베토벤 교향악곡 운명의 하이라이트를 연상케 하는 폭풍같은 타자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상가건물이 아니라 집단 주택이었다면 층간 소음으로 살인이 나지 않을까 염려되는 소리였다.
“절대로 아닌 것 같은데요?”
“뭐 그럼 류 경위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추리를 해보죠.”
류하리는 심호흡을 했다.
“아버지의 계약을 이어받은 건 당신이 아니라 저일 거에요.”
“..........”
“그리고 제게서 당신이 계약을 이어받았다. 그렇게 생각되는 군요. 아버지 다음에 저, 그리고 당신. 데드맨 계약은 그렇게 이어진 거지요.”
류하리는 자신의 추리를 말하고 시현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