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67화 (267/269)

제267화

여기가 지옥이다 #8

“흠. 놀랍군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시현은 태연했다.

그의 반응으로는 지금 한 말이 맞는지 틀린지 분간할 수가 없다.

상대가 자신을 떠보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라면 대단히 훌륭한 포커플레이어가 될 수 있으리라.

류하리는 너무나 태연한 시현의 태도 때문에 자신이 혹시 틀린 게 아닐까하는 미혹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추리를 믿어야 했다.

“타자기의 악마의 취향 때문이죠. 그는 아버지를 데드맨으로 만들 때, 아버지가 김원식 회장을 친부라 믿고 헌신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걸 받아들였어요. 그런 식으로 계약자를 골랐던 악마가 이제와서 돈 때문에 영혼을 파는 계약자 따위에 만족할 리가 없지요.”

“그건 참, 허세로 추리를 하는 저로서도 긍정해주기 힘든 비약인 것 같군요.”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죠?”

류하리도 자신의 추리가 허장성세라는 걸 인정했다.

그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요.”

류하리는 자신의 손을 들어 허공의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처음 이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저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그냥 누르고 들어왔단 말이죠.”

“…….”

“그리고 미카엘이 악령의 형상으로 이 사무실에 들어올 때 당신이 아니라 제 허락을 구했고요.”

“흠.”

“아마 이곳의 등기는 원래 제 것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계약이 당신에게 건너갈 때 타자기의 악마의 힘으로 등기가 조작되어서 법적으론 당신의 소유가 되었지만 악마들 사이에서 이 곳의 진정한 소유자는 여전히 저인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되는 군요.”

“호오?”

시현은 류하리의 추리를 듣고 놀라워했다.

“그건 참으로, 재밌는 가설이군요.”

“그 외에도 수상한 점은 많아요. 당신이 저희 아버지에게 학비를 지원받고 영사 아저씨의 제자였다면 어째서 저와는 아예 면식이 없지요? 그런데 비해서 저는 여기 건물에 대해서 너무 자세히 알고 있는 걸요? 지금까지 한 번도 여기 3층에 들어온 적 없지만 3층 구조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에요.”

“그게 당신의 추리를 입증해주진 않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아버님이나 할머님께서 당신에게 주입한 기억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자신을 의심하면 끝이 없지요. 저에게 말장난 걸지 마세요.”

류하리는 시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외에 궁금한 게 또 있어요. 아버지도 김원식 회장에게 반기를 들려고 최형림 선배와 힘을 합치는 마당에 왜 당신에겐 협조를 구하지 않는 거죠? 은혜와 이익 때문에 데드맨 계약까지 떠맡을 사람을 왜 협력자에서 배제하는 건가요?”

“타자기의 악마와 상종하기 싫어서가 아닐까요? 전직 데드맨은 후임에게 관여해선 안된다.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뇨. 제 추리는 이래요. 누군가가 제가 데드맨이었던 기억을 바꿨다. 아마도 다음 계약자가 계약의 대가로. 그리고 그게 당신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당신간엔 청산되지 않은 은원이나 정 따위 없어서 아버지도 당신에게 조력을 구하지 않는다. 어때요? 제 추리가 틀렸나요?”

“흐음. 이거 참.”

시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100점 만점에….”

“100점 만점에?”

“80점 드리죠.”

“……”

사실상 인정이다.

시현은 류하리의 추리가 맞았다고 사실상 인정해버린 것이다.

* * *

류하리는 자신의 추리가 맞았다는 것에, 그리고 그걸 시현이 인정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사실 시현이 억지로 부정하고 더 이상 대화를 거부할 까봐 걱정했었다.

그렇게 시치미를 떼면 진실을 밝힐 방도가 없으니까.

그러나 시현은 그렇게하진 않았다.

아니 못한 건가?

“의외로 점수가 짜군요.”

“제가 너무 정보를 흘리고 다녔으니까요. 이제와서 맞추는 걸 보니 역시 감이 떨어진 것 같군요.”

시현은 류하리가 어렵사리 추리한 것을 이제 알았냐며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아니 보통 상식적인 사람이 악마니 뭐니 그런 걸 믿겠냐고요.”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류하리 자신의 번뜩이는 영감을 칭찬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데 박한 평가를 주니 류하리로서는 답답했다.

뭐 100점 만점 중 80점을 박한 평가라고 느끼는 건 그녀가 학창시절에 워낙 성적을 잘받아온 탓도 있다. 보통 사람이면 80점이면 호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과 저는 무슨 관계죠? 어째서 당신은 절 대신해 데드맨 계약을 거둬갔고 왜 당신은 제 기억을 지웠나요?”

류하리는 문득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류장천 회장은 시현이 사랑 때문에 가만히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설마 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해서?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른다.

“…하아.”

하지만 시현은 장탄식을 했다.

“네. 당신이 원래 이곳 사무소의 탐정이었습니다. 당신이 셜록이고 저는 왓슨이었습니다.”

“네?”

“저는 당신의 장난감이었죠. 부잣집 아가씨의 취미, 탐정놀이에 끌려다니는 조수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수명이 오갔으니까 탐정놀이라고 폄하하기엔 너무나 무겁고 묵직한 것이었습니다만… 아직 어린 학생시절, 미성년자이던 시절부터 탐정이랍시고 사무소를 차리고 의뢰를 받아서 해결했단 말입니다.”

“그, 그건 확실히.”

류하리는 미성년자인 주제에 불법으로 사건을 수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다.

경찰인 지금의 그녀가 생각하기론 정말 당돌하고 황당한 이야기다.

“그래도 당시의 당신에게는 빛나는 재능과 추진력, 자기 긍정이 빛나고 있었지요.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의 추태를 알게 된 후로는 번민하고 갈등했습니다.”

“…….”

“그때 제가 당신에게 계약을 승계받았습니다.”

“승계받았다고요?”

“네. 그래서 저는 당신의 흉내를 내며 당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품에서 동전을 꺼내 손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코인 롤, 마술사들이 손을 풀기 위해 즐겨 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코인롤을 보이던 시현이 동전을 움켜쥐자 우직하고 동전이 구겨졌다.

“이런 초능력도 있고 재산도 넉넉해졌으니 의지할 데 없는 고아에겐 더 바랄나위 없는 출세지요. 아주 만족스러운 거래였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군요.”

류하리는 시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물론 전부 다 말한 건 아닙니다. 네. 저는 당신을 사모했었습니다. 사춘기 소년이 또래의 어여쁜 소녀를 보고 좋아하지 말라는 게 무리였겠죠. 하물며 제 모든 걸 쥐고 흔드는 폭풍같은 존재 아닙니까? 제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알고 대담하게 허풍을 떨기도 하고, 상대의 비밀을 꿰뚫어보고 공기권총 선수이며 여성의 몸으로도 거구의 괴한을 제압하고, 문무겸전에 빛나는 미모, 남부럽지 않은 재산까지… 당신을 사모하고 동경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또 열등감을 자극해서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이 저주에서 해방시켜주되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그 힘을 빼앗고 싶었습니다.”

“………”

사랑과 동경과 질투와 열등감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계약을 대신했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런 감정이라면 악마가 좋아 죽겠구나.

하지만 류하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날 사랑해서 내 대신 계약의 저주를 짊어쓴 로맨틱한 이야기는 아니구나.’

류하리는 자신의 추리(?)를 다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안도했다.

말했다가는 평생 쪽팔릴 뻔했다.

“그래서 저는 왜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요?”

“네. 당신은 너무 어린 나이에 계약자가 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인생 많은 기억들이 대체되어버렸고 그 충격으로 당신은 경찰 임관과 동시에 기절한 겁니다.”

“아.”

류하리는 별다른 외상 없이 경찰대학 졸업 후 바로 폐인이 된 자신을 떠올렸다.

‘맞는 것 같은데?’

시현의 말은 류장천 회장과 영사의 말과 일치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가 모든 걸 다 말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하지만 류하리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서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제 제 민낯을 보셨으니 만족하셨습니까?”

잘나가던 탐정이자 계약자였던 류하리의 눈부신 재능이 탐나서 그 자리를 빼앗았다.

시현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절 시기해서 계약을 대신했다 하더라도, 제 영혼이 당신 덕분에 구원 받은 건 사실이잖아요. 기억까지 지워진 건 좀 그렇지만 저는 당신께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 그렇게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어요. 게다가 저는 앞으로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 도움이요?”

“네. 제 아버지나 최형림 선배나, 김원식 회장이나, 그들이 마음대로 남을 암살하고 모략으로 파멸시키는 걸 용납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마인드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저 역시 모략이나 암살을 마음대로 저지를 셈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훨씬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굴면 결국에는 인간성을 잃어버립니다. 악마는 인간성에 매료되어 오는 존재지만, 그들에게 나의 영혼을 지킬 유일한 방벽 또한 인간성이니까요.”

데드맨 계약의 원칙, 자기 규제를 지키지 않으면 인간성을 잃어가고 결국엔 파멸하고 만다.

시현은 그 점을 들어서 류하리의 제안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 저들이 무슨 짓을 하건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그건 아니지요. 저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그만큼 저들과 연관된 의뢰인들이 나타날 겁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모략을 꾸미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뢰인들의 갈망을 대신 들어주면서 가야 한다는 거군요?”

“네. 그리고 그런 의뢰인들의 수명을 많이 적립해서 정상적인 인간의 수명을 아득히 넘는 수치를 적립한다면….”

시현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저는 데드맨 계약에서 승리하고 이 저주를 끝장낼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좋네요.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류하리는 시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럼 새삼스럽지만 다시 협력 잘 부탁드려요. 아 그리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류하리는 시현이 과거에는 자신을 좋아했었다는 이야기를 언급할 까 하다가 아무래도 그건 너무 부끄러워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대체 나와 이 사람 사이에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궁금하네.’

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지금의 류하리와 그때의 류하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류하리는 그래서 말을 얼버무리고 시현과 악수를 나누었다.

* * *

불꺼진 사무실에서 타자기가 혼자서 타닥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종이를 빼뒀는데. 이젠 아예 멋대로로군.”

시현이 불을 켜고 타자기를 노려보았다.

타자기엔 종이를 빼뒀었는데 어느새 종이가 끼워져서 열심히 글자를 쳐대고 있었다.

[잉크도 제 때 갈도록 하시오. 안그러면 피로 찍을 거니까. 혈서를 찍어대는 괴기 타자기를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이미 충분히 괴기 타자기인데.”

시현은 투덜거리며 타자기 앞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녀는 계약에서 떼어놓으라고 했는데 결국 알 거 다 알아버리고 말았군. 내 소원을 제대로 못들어준 것 같은데?”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들은 지키지 않았습니까? 당신 참 거짓말을 잘하더군요.]

“그 정도는 해야 탐정을 해먹지.”

시현은 타자기를 노려보았다.

“류하리가 다시 계약의 안으로 들어왔으니 네놈은 내 소원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어. 페널티로 진명을 토해내라.”

[그녀의 아버지나 주위에 영사가 있는데 어째서 제 책임입니까? 기각하겠습니다. 계약자와 악마 관련자들이 너무 많은 게 문제입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군. 그러니까 진명 토해내고 꺼지라고. 악마들이 드글거리니 여기가 지옥의 한복판이 되어버리잖아.”

최형림이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더더욱 혼란스러워 질 것이다.

시현은 그 점을 비난하며 악마에게 진명을 토해내거나 아니면 꺼질 것을 요구했다.

[다른 악마들과 달리 저는 오래전부터 정통성 넘치는 수단으로 계약을 승계해왔습니다. 이제 막 끼어든 놈들이 꺼져야지 어째서 제가 빠지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들이 개입하기 전부터 인간 세상은 지옥같았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다들 누군가의 지옥이니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지옥, 각양각색의 지옥이 득시글 거리는 인간 세상 이상의 지옥을 우리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이것들이 자기들 욕망대로 인간에 들러붙으면서 오히려 인간을 비난하네? 됐고 빨리 의뢰인이나 구해와.”

[비난이 아니라 칭찬입니다.]

타자기의 악마는 그리 대답하고 의뢰인을 찾는 지 잠잠해졌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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