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1부 에필로그
김유라의 외조모, 박순임씨는 차분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앞으로는 여기서 지내시면 됩니다.”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 시현이라는 탐정은 그리 말하고 전등을 켰다.
생활용 집기와 간단한 가전이 전부 갖춰진 풀옵션의 주택이다.
안은 깔끔하고 창밖으로는 어린이 놀이터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주택가의 모습이었다.
“여기서요?”
“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정직원으로 이 업체에서 일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슬슬 방송시간이 되었으니 TV를 켜볼까요?”
시현이 TV를 켜자 특집 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건의 진실이란 TV프로에서 ‘무소불위의 폭군 Y양’ 편이 시작한 것이었다.
방송작가 유정미가 피해자들을 모아 만든 프로그램이 염산 테러 사건 때문인지 세간의 관심을 사 본래는 케이블이나 지방방송등에서 방영하려 했던 것이 공중파를 타버린 것이다.
양천용 의원이 사이다패스에게 살해당해서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진 것도 있었다.
이제 매스컴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양지희를 물어뜯을 준비가 끝나있는 것이었다.
무수한 피해자들이 양지희의 폭거에 대해서 말하고 스탭은 실제로 그 학교나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며 소문의 진상을 파헤치고 피해자들이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추적했다.
양지희는 자신의 신경에 거슬리는 이들을 가차없이 학대했으며 그들의 가족조차 심각한 피해를 입어서 다들 겁에 질린 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천용 의원이 살아있을 때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겠지만, 타이밍이 잘 맞았군요. 어떻습니까?”
“…….”
박순임 여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내용을 보고 싶진 않군요. 딸 아이와 손녀가 겪은 고통을 생각나게 해서. 아 오해하지 마세요. 방송이 싫다는 건 아니니까. 이 방송이 되어서 그 악종의 짓거리가 세상에 밝혀지는 건 너무나 속이 후련하네요.”
박순임 여사는 그리 말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손녀가 살아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렇다면 이 방송을 보고 기뻐했을텐데요. 손녀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게 너무 애석하네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건 아닙니다.”
“네?”
“그녀의 고발이 뿌린 씨가 지금 이렇게 나무가 되어 자라지 않았습니까?”
“네 맞아요… 적어도 이제 저 악종에게 더 희생당할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그럼 이제 전 뭘 해야 하죠?”
“살아가야지요. 이런 놈들에게 당하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말입니다.”
“…도와요?”
“일단은 여기서 지내시고 제가 마련한 직장에서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훈련을 하도록 하지요.”
“훈련이라니요? 무슨, 전 그런 거 해본 적 없어요. 늙고 병든 몸이라 이 한 몸 가누기도 힘든데….”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지요. 안심하세요. 당연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시키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싫으시다면 안하셔도 됩니다. 굳이 강요하진 않아요.”
시현은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온 가족을 잃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사람은 반드시 뭔가 삶의 원동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그것을 찾을 수 없다면 시현이 제시하는 삶의 원동력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설령 그게 위험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녀의 경우는 별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어쨌건 이대로라면 자살할 지도 모르니 삶의 동기를 부여해줘야 겠지.’
시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박순임 여사의 머리 위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현이 부여한 삶의 원동력이 실제로 그녀의 수명을 늘려준 것이다.
“하겠어요. 아니 하게 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청소 아줌마를 훈련시켜서 도청기를 달 수 있게 한다면 시현의 앞으로의 일들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이렇게 시현은 사람들에게 삶의 동력을 제공하고 또한 자신의 조직력, 역량을 강화해나갔다.
* * *
“으음.”
성신아 경위는 뒤숭숭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 제길. 또 어린시절의 꿈이네.”
사탕 한 봉지를 들고 동생과 함께 버스정류장에 버려졌던 어린 시절의 꿈을 꿨다.
더 이상 엄마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건만 꿈 속에서 많이 울었다.
“왜 하필 이런 꿈을 꾸는 거야?”
성신아는 투덜거리며 전화를 들었다가 전화가 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동생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아니 군대 간 놈이 미쳤나. 이 시간에 어떻게….”
성신아는 당황하며 전화를 받았다.
“완전 빠졌구나. 이 시간에 전화를 하고.”
[아니 내가 왜 군대 근처도 안간 누나에게 군기 문제로 한소리를 들어야 하지?]
“경찰 우습게 보지 마. 난 군대로 치면 위관급이란다.”
[지금 이런 허튼 소리 하려고 전화건거 아냐. 누나 그 이야기 들었어?]
“뭔 이야기?”
[부모님들이 가게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신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깜짝 놀란 성신아는 동생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양부모님들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그리고 곧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아 그 탐정….”
류하리가 전담하고 있는 탐정이 자신이 운영하는 요식업체를 이용해서 지방 소멸 때문에 장사가 잘 안되고 있는 양부모님의 가게를 접게 하고 대신 자신의 직영점에 그녀의 양부모를 매우 좋은 조건으로 채용한 것이었다.
“아 이 자식 이거 걸리면 뇌물인데.”
시현은 성신아가 최형림 쪽에 가지 않으면 자신이 책임져 준다고 했었다. 그때는 반신반의했는데 이렇게 하는 걸 보니 확실히 경제력이 꽤 있는 것 같았다.
성신아는 경찰을 그만둘 생각이 없으니 그의 조수가 되진 않겠지만 경찰인 지금 매수할 셈인지 그녀의 양부모를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뭐지 이놈? 혹시 나 좋아하나?”
성신아는 화장대를 보고 으쓱하고 자세를 잡아보았다.
“흠 하긴 내가 좀 인물이 괜찮지.”
* * *
“류하리 경위.”
마포경찰서에 새로이 부임한 여성청소년 과장인 김자련 경정은 류하리를 불렀다.
“예. 경정님.”
“이야기는 들었어요. 저희 쪽으로 배속을 원한다고….”
“아, 아닙니다.”
“흠 그럼 설마 서장님이 헛소리를 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가요?”
류하리는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여성청소년과로 옮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친이 난리를 피워서 어째 그녀가 원해서 전과하려 한다는 이미지가 박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쩌죠. 아무래도 T.O.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지금 그대로여도. 아니 지금 정보 3팀이 좋습니다.”
“그래요? 아니 하지만 내근직 하고 싶다고 부모님까지 불러서 난리쳤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김자련 경정은 류하리를 바라보며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제가 잘못들었나보네요. 오호호. 이거 참. 보청기 달아야 겠어요.”
“아닙니다. 그건 부모님이 멋대로….”
“경찰대학교 홍보 모델도 했다지요? 그런 아가씨가 임관과 동시에 출산휴가도 아니고 한 달을 그냥 쉬어버리더니만 원하는 과로 제깍제깍 옮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알겠어요?”
“…….”
류하리로서는 바라던 바다.
그렇지만 김자련 경정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하는 걸 보니 속이 상한다.
아니 뭐, 상관 입장에서는 갑자기 새파랗게 어린 것이 부잣집 딸내미라고 지 부모 데려와서 소란을 부렸으니 곱게 보일 리가 있나.
서장이야 평소에 류장천 회장에게 이것저것 받아먹었는지 모르나 기름칠이 되어있지 않은 김자련 경정은 자기 쪽 라인도 아닌 사람이 귀한 내근직 자리를 내놓으라고 들이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는 진심으로 정보 3팀에 남고 싶습니다.”
“흠 알겠어요. 그럼 뭐 우리 사이 별 문제없지요? 설마 저도 류경위님 부모님이랑 면담하는 일 생기는 거 아니죠?”
“아, 아닙니다!”
“네. 알겠어요. 좋아요. 그럼 가서 박진감 팀장이랑 일하세요.”
김자련 경정은 그제야 겨우 류하리를 놓아주었다.
류하리는 상사의 갈굼에 너덜너덜해져서 힘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고. 류 경위 고생많네.”
박진감 팀장이 그런 류하리를 맞이해 주었다.
“괴, 굉장하신 분이네요.”
“아 김자련 경정님 말인가. 경찰대학 출신이 아니라서 경찰대학 출신을 싫어하시거든.”
“그, 그래요?”
“아무래도 한동안은 그냥 나랑 같이 일하자고. 서장님께도 이야기 해두지.”
“아, 한동안이 아니라 쭉 부탁드립니다.”
“허허. 혼백이 나갔나 보구만. 그런 소리도 하고.”
박진감 팀장은 류하리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하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 *
최형림은 천용덕 검사를 따라 검사복을 벗고 정계에 나가기로 했지만 그전에 소정의 성과를 내기로 했다.
사이다패스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
사이다패스의 범죄는 정상적으로는 입증할 수 없고 최형림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종종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못하고 무능하단 이미지를 달고 정계에 진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이다패스에게 부탁해’ 청원 사이트를 박살냈다.
아주 복잡하게 해외로 서버가 옮겨져 만들어져있는 청원 사이트의 서버를 기어이 찾아내어 무력화시키는 성과를 낸 것이다.
물론 애초에 자신이 만든 것이니까 그걸 없애는 건 땅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쉬웠지만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하지 못한 일이었으니….
다들 최형림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 * *
“그래서. 이번에 법복을 벗고 새롭게 정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규제를 풀고 제도를 혁파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지원 부탁드립니다.”천용덕 검사, 아니 이제는 천용덕 대변인이 된 그는 다가올 지방선거를 앞에 두고 후원을 부탁하기 위해 SH그룹에 참석했다.
명분은 강연회 강사.
SH그룹 신입사원들의 오리엔테이션에 강사로 참여해 강연을 하고 신입사원들은 회장을 빠져나가 호텔 식당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강연회 강사인 천용덕과 그 보조인 최형림은 아직 회장에 남아 SH그룹 사장단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최형림은 자신을 알아보는 SH그룹 사장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선진당이 향후 시행할 정책들을 홍보하고 그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때… 비서들이 다가와 사장단의 사람들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회장님께서 오십니다.”
“뭣? 아니 회장님께서 신입 사원 OT에 무슨 일로?”
사장단이 술렁이고 있었다.
이정도 행사에는 회장이 직접 참석하지 않는 불문율이라도 있었나 보다.
하지만 천용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했다.
“회장님께서 오시나 보군. 나도 법무부 발령 이후로는 처음 뵙는 거네. 아주 뵙기 힘든 분이니 주의하게. 자네에게야 외조부이지만 공식석상에서 그분이 갖는 위상은 친인척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거야.”
네가 회장의 친척이지만 김원식 회장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니까 공사를 구분해라.
천용덕은 행여나 최형림이 실수할 까봐 그렇게 말해주었다.
호색한인 김원식 회장은 자식이 많아서 외조손 쯤 되면 그 숫자가 매우 많다.
하지만 최형림은 김원식 회장이 자신을 알아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친 강간은 김원식 회장에게도 드문 일일테니까.’
그런데 그때 휠체어를 탄 노인과 그 노인을 끄는 젊은 여성이 회장에 들어왔다.
“…어?”
그 순간 최형림은 당황했다.
노인의 휠체어를 끄는 젊은 여성은 검은 베일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여성을 보니 최형림의 감각이 비명을 지른다.
‘미카엘이 붙여뒀던 경호원과 비슷한 느낌이….’
최형림이 그 꺼림칙한 느낌에 당황할 때였다.
-끼익….
휠체어가 최형림의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노인이 눈을 빛냈다.
“아. 여기까지 왔구나. 외손자야.”
“최형림입니다. 외조부님. 장성한 이후로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절 아시는 지요?”
“물론이고 말고. 후후. 직접 보지는 않았다만 젊은 나이에 검사가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주 건강해보여서 좋구나.”
“다 외조부님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최형림은 빈정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보살핌이라.
정작 김원식 회장은 최형림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최회장에게 떠넘기고 오욕칠정으로 더러워진 자신의 삶을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지.
하지만 김원식 회장은 정녕 자신이 최형림을 보살펴주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 한영건설그룹이면 충분히 보살필 수 있었겠지.”
한영건설그룹을 있게 한 것도 자신, 그러니까 그 재산으로 자란 최형림 또한 자신이 보살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오만방자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SH그룹이 대한민국에서 벌이는 사업들, 그로 인해서 벌어먹는 임직원과 그로 인해 사는 협력사 직원들, 그 모든 사람들을 김원식 회장은 자신이 ‘보살피는’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이 끔찍하게 호혜적인 발상은 교정된다는 게 불가능했다.
누구도 김원식 회장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하니 교정될 리가 있겠는가?
‘이 오만한 괴물이….’
최형림은 나이들어 메말라 있는 김원식 회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계약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그라면 단번에 이 늙고 쇠약해진 몸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휠체어를 끄는 여자가, 그리고 이 회장 안에 곳곳에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다른 이들이 거슬린다.
‘영사가 걱정한 대로로군. 상당히 기괴한 놈들이 많은데? 뭐 좋아. 무력으로 처리한다는 건 애초에 생각해두지 않았다. 당신을 파멸시키자면 역시 사회적 지위를 박살내고 무일푼으로 내쫓는 게 그럴싸하지. 그 나이 먹고 여태 살아줘서 고맙군.’
최형림은 김원식 회장이 아직까지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먼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그의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김원식 회장이라는 이 대재벌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그걸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싶겠지. 외손자야. 내게 말만 한다면 내 기꺼이 지원해주마.”
“……”
김원식 회장은 최형림이 뭘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렇게 말을 해왔다.
* * *
류하리는 시현탐정 사무소의 문을 열었다.
“계세요?”
안에는 조용하다.
류하리가 혼자 들어오자 갑자기 타자기가 울기 시작했다.
[류하리, 전직 데드맨… 혹시 과거에 대해서 알고 싶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 순간 류하리는 타자기의 레버를 누르고 종이를 싹 뽑아버렸다.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닌데… 악마에게 속아 넘어가는 건 한 번이면 족해서.”
-타다다닥! 타닥!
타자기가 화났다는 듯 혼자 허공을 쳤다.
“음. 시현. 없나요? 샤워 중인가?”
류하리는 사무실 안쪽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간이 침대위에 누워있는 시현을 발견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 시현이 침대에 누워 잠들어있었다.
“…오.”
류하리는 잠들어있는 시현의 모습을 보며 깨우려다 멈칫했다.
잠들어있는 모습이 꽤나… 그녀의 취향이다.
“아 진짜.”
류하리는 잠들어있는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게 실례라고 생각되어서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틈으로 보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 시현이 천천히 깨어났다.
“으음. 오셨군요. 류 경위님.”
“여전히 딱딱한 어투로군요. 피곤했나봐요?”
“아니요. 그렇다기 보다는 흠… 최형림 씨가 오늘 김원식 회장과 만났군요.”
“네? 그걸 어떻게….”
“방금 전 까지 장충체육관에 있었거든요. SH그룹 공채사원 오리엔테이션에… 으음….”
시현은 기지개를 켜면서 투덜거렸다.
“사이다패스의 능력, 좋긴 좋은데 제가 워낙 잠이 적어서 억지로 쓰려고 하니 컨디션 난조가 오는 군요.”
“네? 아니 그럼 당신, 사이다패스의 능력을….”
“네. 그녀의 능력을 제가 승계했습니다. 처음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는데, 제가 잠이 워낙 적은 편이라서 궁합이 잘 안맞는 능력이군요.”
“아니 그래도….”
잘 쓰면 엄청나게 좋은 능력 아닌가?
류하리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려다 멈췄다.
타자기가 격렬하게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으음.”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타자기는 무시하고 우선 거울로 자기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머리위의 숫자가 줄어들어 22일 정도 남아있었다.
“아 이거 의뢰인 못구해오면 그냥 이기겠는데? 이제 얼마 안남았….”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타자기가 다시 격렬하게 울어댔다.
“뭐 하지만 고객만족이 시현탐정사무소의 가치이니… 어쩔 수 없군요.”
시현은 종이를 꺼내서 타자기에 끼워주었다.
그러자 타자기가 다급하게 의뢰인의 정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음… 40대 남성이군요. 이거 이런 의뢰들을 해서 언제 SH그룹과 최형림 선배를 잡겠어요?”
류하리는 타자기가 구해준 의뢰인이 이번에도 시시콜콜한 일이라는 걸 알고 아쉬워했다.
지금 이순간도 최형림은 정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자칫하면 너무 늦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런 걱정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다.
하지만 시현은 태연했다.
“뭐 꾸준히 해나가면 됩니다.”
“아니 하지만… 당신이 재산과 세력이 좀 있어도 여전히 주 업무는 불륜 조사인 탐정이잖아요? 어느 세월에…”
“역으로 생각해보세요. 이미 이렇게나 인연을 쌓아뒀는데 이제와서 아무런 접점없이 지나가겠습니까? 틀림없이 앞으로의 의뢰인들은 점점 최형림과 김원식 회장에 관련된 이들로 뽑아낼 겁니다. 제가 비록 타자기의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잡혀있는 신세지만 타자기의 악마가 그렇게 멍청하고 멋없는 놈이 아니라는 걸 믿습니다.”
“………”
류하리는 시현의 말이 어째 이상해지는 걸 보고 타자기를 바라보았다.
-타닥…다다닥?
타자기도 당황한 듯 했다.
[;;;;?]
“설마 타자기의 악마가 간신히 데드맨 계약만 유지하면서 그때그때 의뢰인만 대느라 허덕이진 않겠지요. 틀림없이 저와 당신을 가혹하고 드라마틱한 운명으로 안내할 겁니다.”
“아 네. 기, 기대 되네요. 그거.”
류하리는 다시 타자기 쪽을 바라보았다.
-타닥… 다다닥…
[;;;;;;;]
“이야. 정말 기대되는 군요. 그럼 그동안은 우리 타자기의 악마를 믿으면서 눈앞의 의뢰인의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요.”
“시현 탐정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니까 말이지요?”
“네. 바로 그겁니다. 그럼 가보실까요?”
시현은 외투를 걸치면서 타자기에 꽂혀있던 종이를 쓱 빼버렸다.
평소라면 종이를 빼면 화냈을 타자기였지만 이번엔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 * *
“염병. 세상 정말 많이 변했네.”
시외버스터미널에 한 남자가 내려섰다.
교도소에서 이제 막 출소한 장기수 지경호였다.
본래 15년 형을 선고받은 그였지만 10년이나 장기복역했고 또 최근, 그의 아들이 사이다패스에게 사망함으로서 동정표를 얻어서 특별사면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왔어요?”
버스터미널의 벤치에는 초췌한 표정의 장년 여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휴. 이 여편네. 빨리 도망가지 뭘 기다리고 앉았어. 고생만 죽어라 하고… 나 같은 놈에게….”
지경호는 지난 10년간 자신을 뒷바라지 하던 아내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걸 막기 위해 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은재는… 어쩌다 그렇게 됐어?”
“서울로 취직했다고 했는데… 요새 떠들썩하던 사이다패스라는 살인자에게 죽었다지 뭐에요.”
“그래?”
“네. 그리고 여기 보험사의 보험료하고, 회사측의 위로금, 그리고 친구들이 성금을 모아왔다고 했어요.”
지은재의 모친은 그들이 성금을 전달한 봉투와 연락처를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지경호는 그것들을 뒤적여보고 혀를 찼다.
“그간 고생많았을텐데 정말 내가 해도 되겠어? 앞으로 더 고생시킬 수도 있는데?”
지경호는 아내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그동안 감옥에 들어가 있어서 아내를 괴롭혀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복수를 위해서 다시금 험한 짓을 해도 되겠는가?
그는 아내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관없어요. 은재를, 은재의 복수를 위해서니까요.”
“알겠어. 그럼 음.”
지경호는 성금 봉투에 붙어있는 명함을 하나 들어보았다.
“이 탐정 사무소라는 곳부터 연락해봐야 겠군.”
지경호는 시현 탐정사무소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겼다.
왠지 그의 눈에 빨려들어오는 기이한 이름의 명함이었다.
< 후기 >
저는 망상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서 도심에 솟구쳐 있는 타워크레인을 보면….
아 저기 가로바를 폭파시켜서 끊어버려서 타워크레인이 기울면서 이렇게 건물을 찌르게 한 다음에 그 위로 글라이드해서 건물에 침입하는 장면을 만들면 어떨까?
커다란 열리는 창문 프레임을 보면 아 저 창문 프레임에 매달려서 옆 창문으로 이동하면서 옛날 성룡 영화식의 액션합을 짠다면?
이런 식으로 액션을 과격하게 만들다 보니까 너무 천편일률인 것 같아서....
그래서 액션은 담백하게. 액션보다는 캐릭터의 말과 행동, 개성으로 승부하는 이야기를 해보자.
이런 취지로 시작한 게 데드맨이었습니다.
데드맨31은 궁극적으로는 무력도 쓰되 무력의 빈도, 액션의 과함을 덜어내고 대신 다른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하는 탐정의 이야기입니다.
고전적인 추리물의 트릭들은 사실, 법의학과 과학수사가 너무 발달한 현대에는 통용되지 않으니까 트릭보다는 캐릭터의 기지에 치중하자.
그래서 아예 고객을 속이고 사기를 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매 순간순간 기지를 발휘해서 사건을 처리하려 하니까 음….
한 화 한 화 쓰기가 너무 힘듭니다. 만족스러운 에피소드도 있고 그렇지 못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빠르게 써내야 하는 웹소설 판에서 매 순간순간 재치를 발휘해야 하니 아이디어의 고갈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부득불 1부 완결이라는 이름으로 일단 마무리를 짓고 재충전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에피소드 아이디어도 충전하고 트릭이나 기지도 좀 보충해서…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