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Prolog. 낭떠러지 (1)
내가 알기로 이 우주에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악(惡)과 싸우는 실재(實在)세계.
다른 하나는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잿빛세계다.
이 세상에 밝은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살아가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저마다 크고 작은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내가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실재세계의 사람들은 대체로 50살을 넘기기 전에 죽으며, 이 우주가 사람들의 죄악을 지켜보고 악령의 힘으로 벌하는 구조라 한다.
사람이 살면서 저지르는 죄악들이 영혼에 쌓이면 잿빛세계로부터 악한 영혼이 흘러들어와 악령화(惡靈化)를 일으킨다.
사람들은 악령화를 일으키는 악한 영혼을 악령이라 부르며, 악령을 다루는 악마들은 잿빛세계 너머의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 * *
인생의 나락에 예고는 없었다.
- 잠깐, 저 사람 눈이 붉은데…?
- 악령이다! 악령에 씌었어!
- 잡아라!
그때 나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채 매질을 당하면서 생각했다.
지금 나를 때리고 있는 군중들을 죽여버릴까.
아니면 왕국에서 벗어나 어딘가 먼 곳으로 도망쳐 평생 은거를 할까.
- 이 사악한 악령아!
- 그 청년의 몸에서 나와라!
아마도 그들은 나를 때리며 욕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내 안에 있는 악령을 때리며 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추악한 군중심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당시에 나는 매질을 당하며 그저 버텼다. 군중에 맞서 자기방어를 해봤자 죄만 늘어날 테니.
어차피 내 몸은 철인 능력이 있어 군중의 매질에 아플지언정 죽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고 있으면 승천자(昇天者)와 퇴마술사들이 올 것이고, 그때 가서 내가 악령에 씌지 않았다는 걸 해명하면 되겠다고. 그러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이후 승천자와 퇴마술사들이 와서 나를 붙잡아 가두고 고문할 때도 계속, 계속, 리인을 생각하며 버티고 해명했다.
- 이건 악령이 인두겁을 쓰고 있음이 틀림없구나…!
어머니는 날 낳고서 쇠약해져 다음 해에 돌아가셨고 내 아비라는 자는 그런 나를 원망하며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휘두른 폭력의 죄악에 먹혀 악령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외톨이였다면 좋았겠다. 그러나 마지막 핏줄인 여동생, 리인이 있어 차마 도망칠 수가 없었다. 군중을 상대할 때는 도망칠 수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았고, 승천자에게 잡힌 뒤로는 버티며 해명하는 것 말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리 부유하지도 선하지도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몸뚱이다. 천한 핏줄이라 신성한 마법을 다루지 못하고 좋은 교육 또한 받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비록 사형수 신세지만 실재세계에서 내 직업은 나름 이름이 있는 해결사였다.
퇴마의식이나 축복 따위로 구제하기에 너무 늦은 악령들을 뒤처리하는 해결사였던 것이다.
말이 해결사지, 실상은 사람이었던 악령을 암암리에 의뢰를 받고 해치우는 일이었다.
대체로 손을 더럽히는 일이라 도살자 같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희망이라곤 없는 실재세계에서 분풀이와 돈벌이가 필요했던 내겐 나름 잘 맞는 직업이었던 것 같다.
만약 내 안에 숨겨서 키우고 있는 악령을 세간에 들키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해결사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그때가 기점이었던 것 같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인생의 나락이 새로운 기점이었다.
이 세계엔 악한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것들을 선(善)이나 정의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는 아름답지 않고, 나는 그렇게 강한 놈도 아니다.
군중이 나를 보고 그들과 똑같은 놈이라며 힐난한다면 당당히 묻겠다. 내가 음지에서 이렇게 피칠갑이 되는 동안 양지에 있던 당신들은 무얼 했냐고.
「나 배고파.」
나는 점점 더 거대한 악과 싸워왔던 것이다.
그것이 악마든, 이물이든, 악령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사냥하자.」
나는 그날 이후로 악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