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Prolog. 낭떠러지 (2)
허름한 광장.
더러운 오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들.
내 앞에서 침을 튀겨 가며 지껄이는 승천자.
“보아라! 이 어찌나 사악한 눈을 하고 있는가!”
광기 어린 군중들이 나를 보며 외치고 있다.
- 추방해라!
- 추방해라!
- 추방해라!
그런 군중들의 허름한 복장과 이질적일 정도로 대비되는, 새하얗고 깨끗하게 늘어지는 신도복의 승천자.
그는 내게 손거울을 들이밀었다.
손거울에 비친 초췌한 몰골의 청년. 속옷도 없이 발가벗겨진 나체에 채찍질로 인한 피멍과 고문의 상흔이 빼곡하다.
그 청년은 네모난 제단 위의 단두대에 묶여서 심하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는데, 그 눈동자가 붉은색이다.
그게 지금 내 모습이었다.
“이미 악령화가 끝난 자는 육체도 영혼도 구제할 길이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 답이로다!”
더는 목소리를 낼 의지도 화를 낼 기력도 없다. 며칠을 굶으면서 퇴마의식이라는 이름의 고문을 받았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그래도 멍한 머릿속을 더듬어 떠올려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퇴마술사들에게 퇴마의식을 받으면서 거듭 주장했었다. 내 안에 있는 악령은 내가 통제 가능한 것이며, 난 아주 멀쩡하다고.
그리고 승천자라면 내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 눈치챘으리라. 다른 누구도 아닌, 존재를 꿰뚫어보는 눈이 있는 승천자라면.
하지만 그보다 악령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지 무슨 이유가 있던 건지, 오늘의 결과가 이렇다.
“나는 악령이 아니야….”
남은 힘을 쥐어짜서 군중들에게 주장했지만 승천자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악령이 아니라고……!”
살의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봤지만 그뿐. 나는 승천자에게 아무 위협도 가할 수 없었다.
“승천자, 당신도 알고 있잖아…. 내가 만약 진짜 악령이었다면 사람들에게 붙잡힌 시점에서 그들을 모조리…”
“아, 아아!”
그러자 승천자는 기겁을 하였다. 내가 화내고 저주하고 울부짖어도 아무 반응도 없던 놈이 방금 같은 말에는 기겁을 하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설마 내 말을 끊으려고 한 걸까.
“이건 악령이 인두겁을 쓰고 있음이 틀림없구나…!”
개새끼가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승천자는 내가 정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내가 정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군중 앞에서는 너무도 크게 반응하고 있다. 같은 말을 내뱉어도 얼마 전까지와는 너무도 다르게, 극명하게 반응이 바뀌었다.
퇴마술사들을 모아서 날 고문하고 군중을 선동하더니 이젠 나를 사형하려고 한다. 나를 대신해서 군중들에게 해명하고 내 무고함을 알려야 할 사람이 말이다.
알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차라리 날 죽이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악령을 퇴마하여 쫓아내겠다고 한다면 이해라도 하겠다. 그런데 사형집행이라니.
“마법사들! 어서 이 저주받은 육체를 죽이고 악한 영혼을 잿빛세계로 추방하라!”
- 와아아아아!
다들 미쳤다. 눈앞의 승천자도, 저기 애를 업고 있는 여인도, 마차 속의 늙은이도, 수레를 끌고 있는 노인도,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어린 것들도, 지금 네모난 제단의 각 모서리에 올라와 추방 술식을 구축하는 네 마법사들도 모두 미쳐버렸다.
스릉!
얼굴을 가린 처형자가 넓적한 칼을 뽑아들었다. 그가 단두대의 어딘가로 이어진 밧줄을 끊으려고 한다.
저 밧줄이 끊어지면 내 목 위로 칼이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내 육체가 죽으면 승천자와 마법사들이 추방 술식을 써 내 영혼을 잿빛세계로 보내버릴 것이다.
‘이대로 뒈지고 영혼만 갈 바엔…’
번쩍!
이윽고 눈이 멀 것 같은 신성한 빛이 제단 위로 솟구쳤다. 동시에 처형자가 밧줄을 끊자 위에서 칼이 내려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목을 베이기 전, 빛의 중심에서 몸이 어딘가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로 끌려감을 느꼈다.
* * *
숨 막힐 듯 고요하다는 말은, 내 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주변이 조용하다는 뜻이었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면서 기절이라도 했던 걸까. 기절을 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던 걸까.
“….”
정신을 차려보니 구전으로만 들었던 잿빛세계가 펼쳐졌다. 사방에 짙은 안개라도 깔린 줄 알았는데 전부 흩날리는 재였다.
그 어떤 생명의 기척도 찾아볼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후 버려진 듯한 무채색의 세계다.
내 아래에는 네모난 제단이 있고 주변은 폐건물에 둘러싸인 광장이다.
실재세계에서 내 목을 잡고 있던 단두대가 이 잿빛세계에서는 반쯤 부서진 채라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난 이제 죽을 때까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내 영혼의 무덤이 바로 이 잿빛세계가 될 것이다.
실재세계에서 잿빛세계로 가는 것은 가능해도 그 흐름을 거슬러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커헉…!”
기침이 나왔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탁한 공기 속에 재가 흩날리고 있으니.
“허억…. 허억….”
곳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된 건지, 애당초 어떤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뼈다귀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묘하게 사람의 뼈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야말로 이 세계 전체가 잿빛이다.
「아으으으!」
내 머릿속에서 소녀의 신음이 울렸다.
‘깼냐?’
「진짜 그대로 죽는 줄 알았네. 여긴 어디야?」
‘잿빛세계잖아.’
「진짜?」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라도 있나. 내 생각과 감정을 전부 알고 있는 녀석한테.
「나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거든? 정리 좀 해보자.」
간단한 이야기다.
‘승천자는 날 사형하고 내 영혼을 잿빛세계로 추방하려 했어.’
사형을 위한 단두대. 추방 술식을 위한 제단. 승천자와 네 마법사가 구축한 추방 술식.
‘그래서 급하게 다차원(多次元) 능력을 썼어.’
다차원 능력이란 실재세계에서 잿빛세계로 갈 수 있는 능력. 혹은 악의적으로 차원의 틈을 여는 능력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악령이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능력이었다. 능력 자체를 개방은 했지만 활용법도 위험성도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실재세계에서 잿빛세계로 가는 능력이었으니, 나는 여기서 실재세계로 돌아가는 방법도 모르는 채 금단의 능력을 사용해버린 꼴이다.
「뼈아픈 결단이네.」
‘단두대에서 그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고, 광장의 인간들이 다 지켜보는데 어떻게 다차원 능력을 발동한 거야?」
이론상 다차원 능력은 아무도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만 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승천자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능력을 발동했다.
‘추방 술식은 엄청난 빛을 뿜어대잖아.’
그 빛 속에 숨어서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날 가릴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다차원 능력을 발동하여 잿빛세계로 도망치듯 온 것이다.
「그것 때문에 좆됐네.」
‘왜?’
「우린 말도 안 되게 신성한 마법을 처맞았다고!」
‘그건 승천자가 주도하는 마법이었으니깐. 그래도 그 빛에 숨은 덕분에 무사히 도망칠 수 있던 거야.’
「갖고 있던 능력을 다 잃어버렸잖아!」
망치로 심장을 맞은 듯했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 말을 의심하고 싶었다.
갖고 있던 능력을 다 잃어버렸다니.
「다 잃어버렸어. 남은 게 없다고. 도대체 얼마나 신성한 마법에 당한 거야?」
끔찍하게 신성한 마법이었다.
그 승천자가 내 안에 있는 존재를 본 것은 틀린 게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내 안에는 이름 없는 악령이 나와 공존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이 악령에게 잡아먹힌다거나 씌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승천자와 퇴마술사들에게도 계속 실토했듯, 내 안에 있는 녀석은 내게 거스를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내 안의 악령이 너무 많은 악을 잡아먹고 성장한 탓에 내 육체로 그런 변화가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 동공이 붉어진 다음에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이 날 붙잡아 매질을 했고, 그러다 승천자를 불렀다.
승천자가 온 다음엔 퇴마술사들이 왔고, 나는 눈을 가려진 채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퇴마의식이라는 이름의 고문을 당했다. 성수를 뿌리고 신성한 물건을 몸에 대고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쓰는 등의 조치였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런 퇴마의식을 당하더라도 그리 큰 고통을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몸 안에 악령이 있는 나로선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엔 진이 다 빠진 채로 광장까지 끌려가서 제단 위의 단두대에 올랐다.
「추방 술식이 너와 나의 영혼을 일부 날려버린 것 같아.」
그래서 몸은 멀쩡하게 왔지만 영혼이 갖고 있던 능력은 잃어버렸다는 소리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 * *
내가 사는 왕국에서는 죄질이 나쁘면 죽이지 않고 육체까지 영혼과 함께 잿빛세계로 추방한다.
살아있는 몸으로 잿빛세계에서 떠돌다가 죽고, 그 영혼까지 잿빛세계에 남아서 영원히 죗값을 치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렇게 추방당한 추방자들은 대개 자기 집을 찾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집을 찾아간다고 한들 그곳에 가족이나 친구는 없다. 같은 공간, 같은 집, 같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아도 두 세계는 엄연히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추방자는 실재세계의 가족과 만날 수 없고 실재세계의 가족들도 잿빛세계에 있는 추방자를 만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강력한 처벌인 것이다. 그리운 사람이 바로 곁에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보고 듣고 만지고 싶어도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으니.
반면에 나는 추방자가 아닌 사형수였다.
승천자는 나를 ‘죄인’이 아니라 ‘악령’이라고 말하면서 내 육체는 죽이고 영혼은 추방하려 했다.
「사형수 신세를 면하고 추방자가 되기를 택한 건 잘했어. 일단 살았으니 됐네.」
‘너 때문이야.’
「야, 그건 네가 잘 숨기고 다녔어야지.」
“악령의 눈을 하게 만든 건 너잖아!”
원망 섞인 고함을 질렀더니 고요한 광장에 처량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녀석은 침묵하더니.
「…존재가 느껴져.」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저쪽. 저기 5층짜리 건물에 뭔가 있어.」
내 안의 악령은 나와 모든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내 시야 안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이란 분명 저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내가 알기로, 실재세계의 모두가 아는 바에 의하면 잿빛세계는 오로지 죽고 버려진 세계다. 또한 이곳은 실재세계와 지옥 사이에 있는 차원의 틈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만약 이 세계에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방금 추방당한 추방자나 악령들밖에 없을 터.
‘설마…’
설마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잿빛세계로 떨어진 자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과거에 추방을 당하고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저곳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있어.」
그렇게 상상했던 내가 바보였다.
녀석이 말하는 먹을 것이란 순수한 악을 뜻한다.
「빨리! 힘을 되찾아야 한다고!」
‘힘을 되찾아서 어쩌게? 어차피 난 계속 이 세계에 있을 운명인데.’
죽기 싫어서 잿빛세계로 왔지만 실재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삶을 연명하면서 어떻게든 승천자를 저주하고 리인을 응원하는 일뿐이다.
이젠 해결사라는 직업도 없으니 악령을 사냥해서 돈을 벌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내 잃어버린 힘이나 능력을 되찾을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나는 악령에 대해선 전문가이고 그것들의 습성은 다 꿰차고 있다.
그러니 악령은 피하면 그만이다. 더는 싸울 필요가 없다. 간신히 살았는데 또 목숨 걸고 싸우기도 싫고, 평생토록 얻은 힘을 처음부터 다시 키우는 짓도 두 번 다시는 하기 싫다.
「그게 뭔 소리야?」
‘자리부터 옮겨야겠어.’
이제부턴 방랑자 생활이다. 어디 들어가 쉴만한 집이나 찾아보자.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뭐?’
「어서 실재세계로 돌아가야지!」
‘돌아갈 수가……’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보고 있던 건물의 1층 정문이 열렸다. 그리고 뭔가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의 형태를 눈으로 보고 뇌로 인식하기까지 많은 괴리감이 있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무언가의 다리만 보인 것이다. 아주 길쭉한 다리가.
「저거야! 저거!」
저게 뭔데. …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턱 너머에 기괴할 정도로 긴 다리만 보여서, 그래서 그것의 상반신이나 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문틀의 꼭대기까지 다리만 보이는 게 아닌가.
이윽고 그것이 다리와 허리를 한껏 굽혀서 얼굴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불쾌한 음성과 함께.
- 남… 자……?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섬찟한 미소가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저게 알몸인 나를 보면서 뭐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 남자…!!
처음 보는 악령이었다. 실은 악령인지 뭔지도 모를 ‘이물’이었다. 살면서 저렇게 기괴한 육체를 가진 존재는 본 적이 없다.
녀석은 지나치게 길고 가느다란 다리로 자신의 커다란 머리를 지탱할 수 없는지 하반신을 기괴하게 질질 끌며 다가왔다.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보행 방식이다. 아니, 저런 걸 보행이라 할 수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악몽에서도 저런 건 못 볼 것 같다.
찢어진 넝마를 걸친 몸과 얼굴을 보아하니 절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존재다.
…쿠직!
자세히 보니 다리가 으스러지고 갈비뼈가 넝마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내장까지 질질 흘리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팔의 힘은 어찌나 센지 기괴하게 기면서 그악스러운 이빨과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한 것이다.
“…!”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이 그렇게 뛰라고 소리쳤다. 저건 악령이 아니라고. 악령 같은 게 아니라고. 그런 것들보다 훨씬 사악한 무언가라고.
「야! 어디 가?!」
지직!
뒤에서 끈적하게 기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등골이 서리고 땀이 흐른다.
지직! 지직!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린다. 만약 지금 뒤로 고개를 돌려보면 내 몸뚱이보다 면적이 큰 얼굴이 날 응시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는 행위만으로 내 달리기가 조금이라도 느려진다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아니, 사실은 붙잡히면 무슨 짓을 당할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온몸의 털까지 곤두서는 듯하다. 그래서 절대 붙잡혀선 안 될 것 같다.
「잿빛세계라서 무서워? 왜 도망쳐?」
‘도와줄 능력도 없으면 닥치고 있어!’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기도에 고운 재가 들어간 탓일까, 너무 오래 굶은 탓일까, 고문에 기력이 다한 탓일까, 아니면 등줄기로 느껴지는 낯선 이물의 공포 탓일까.
「그냥 덩치만 크고 멍청한 악령 같은데.」
‘저게 어딜 봐서 악령이냐고!’
「어차피 이판사판이잖아! 그냥 싸워보자니까!」
‘나 지금 알몸에 맨손이야 미친년아…!’
「……아.」
「그래서 쫓아오는 건가?」
* * *
나는 폐허를 빠져나와 잿물이 흐르는 강까지 달려왔다. 그제야 기어 오는 이물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헉…. 헉…. 허윽….”
그러고 보니 실재세계에서도 정확히 이 위치에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형태의 육체.
아무리 악령화의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러서 완전히 잠식당한 사람이라도 그렇게까지 육체가 뒤틀리진 않는다.
「여기서 성장한 다음에 실재세계로 돌아가면 재밌겠다. 실재세계의 고난 따위는 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거 아니야.」
설령 실재세계로 돌아간다 하여도 평생 얼굴과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하리라. 소문은 바람보다 빨라서 왕국의 수많은 이들이 내 이야기를 씹고 있을 것이다.
「널 추방시킨 녀석에게도 복수는 해야 하지 않겠어?」
승천자.
‘만약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승천자 새끼부터 잡아족칠 거다. 그 새낀 내가 정상이라는 걸 알면서 왜…….’
그렇게 희미해졌던 원망과 강렬한 의문을 상기해보니 다른 끔찍한 상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여기서 죽었다간 억울함 때문에 사람이 아닌 다른 것으로 태어날 것만 같다.
이 정도의 억울함은 위험하다.
이러면 죽어서 천국에 갈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곳에서 내 육체가 죽으면 내 영혼이 이곳, 잿빛세계에 갇혀서 영영 떠돌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가슴에 담긴 복수심이 삶의 원동력이자 죽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독이 되고 말았다.
「승천자는 너무 강하지만…. 그래도 목표는 크게 잡는 게 좋겠지.」
승천자를 죽이고 싶다. 죽여야 한다.
「걔 숨통을 쥐고 물어보자. 왜 그랬냐고.」
‘그리고 리인이 슬퍼하고 있을 거야.’
「지금쯤 자기 오빠도 죽은 줄 알고 절망하는 중이겠지.」
그 말이 가슴속 응어리를 붙잡고 징징 울리는 것만 같다.
* * *
잠시 바위에 앉아서 잿물이 흐르는 강을 보며 숨을 골랐다. 그러고 있으니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것만 같다.
이제 어쩌지.
「힘을 모아서 실재세계로 돌아가야지.」
참, 아까 못다 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보다 잿빛세계에서 실재세계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냐? 그건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잖아.’
「나는 악령이야. 넌 악령을 품은 사람이고.」
「잿빛세계에서 실재세계로 끝도 없이 ‘악’이 넘어가는데 우리라고 못 넘어가겠어? 이건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절대 아니야. 너와 나라면 아주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서 돌아가는 것도 다차원 능력에 포함되는 거야.」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고 전례 없는 능력이 아닌가.
‘진작 좀 말해주지.’
「좋은 생각이 났어. 이참에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여행자로서 부와 명예를 끌어모으는 건 어때? 누구든 널 고용하려고 거금을 바칠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나 좋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오히려 화가 날 지경이다.
‘인생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왜 이제 알려주냐고. 너랑 내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난 머리가 나쁘거든. 다차원 능력에 대해선 이번에야 자세히 알게 되기도 했고.」
정말이지 완벽한 변명에 한숨이 다 나온다.
그리고 내뱉은 한숨이 내 가슴을 쓸고서 사타구니에 닿았을 때, 난 내가 아무 장비도 없는 알몸이라는 걸 재차 인지했다.
‘옷은 어쩌지?’
「대충 주워서 입어.」
‘옷은 그렇다 쳐도 장비가 없잖아.’
「네가 소재만 확보하면 만들어줄게.」
‘먹을 건?’
「뭐라도 사냥해서 먹어야지.」
‘마실 건?’
「음…. 강물을 마시면 되지 않을까?」
강물인지 잿물인지, 나는 회백색의 탁한 물을 손에 받아서 입에 머금어보았다.
아무 냄새도 맛도 안 나지만 왠지 모르게 불쾌하다. 하지만 메마른 입술과 목구멍이 젖어서, 내 몸이 이 물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듯하다.
그래서 삼키려는데 하필이면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불어 터진 사체가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웨에엑!”
전부 다 잃고 토악질부터 시작하는 새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