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귀소본능 (2)
344.
나는 실재세계에 있었을 때도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녀석은 상대해본 적이 없었다.
크드드드드!
‘역병을 불러온 마녀’는 벽 너머에서 나를 쫓아오고 있다. 이대로라면 주조소의 어디로 나가든 녀석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못 이기지?!’
「저건 못 이겨! 절대 못 이겨! 전에 저거랑 싸우자고 해서 진짜 미안해!」
역병 마녀가 가지고 있는 악은 344다.
잡히면 죽을 것이다. 죽지 않더라도 끔찍한 짓을 당할 것이다. 정말 끔찍한 짓을….
쾅!
나는 뒷문을 박차고 나와서 미친 듯이 뛰었다.
지직! 지직! 지직!
내장 따위를 질질 끌며 기어 오는 소리가 등골을 간질였다. 차가운 손가락이 등줄기를 훑는 것 같은 오싹함이다.
- 이리 와!!!
역병 마녀의 호통이 잿빛세계의 밤에 있는 이물들을 불러 모을까 두렵다.
-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나는 정말 죽도록 뛰었다. 일단 방독면 덕분에 쉽게 호흡할 수 있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헉, 헉, 헉…!”
숨을 헐떡이며 계속 뛰었다. 별도 달도 문명의 빛도 없는 잿빛세계의 밤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발바닥의 감각과 낮에 보았던 풍경의 기억에 의지해 내달렸다. 주조소에서 벗어나 폐허가 있지 않은, 아무것도 없는 숲을 향해서 뛴 것이다.
깊은 어둠을 헤치며 계속 뛰다 보니 뒤에서 들려오던 끈적한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뒤를 돌아볼 수 있을까.
폐가 타들어갈 것 같다. 그래도 조금만,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멈춰서 쉬고 싶다.
그래서 뛰는 와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
조금 멀리에 별이 두 개가 있었다. 그 별 두 개가 위아래로 움직이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역병 마녀가 소리를 죽인 채 쫓아오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뛰었다. 계속 뛰었다.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으면 온 힘을 다해서 다리를 때렸다. 억지로 혈액이 돌게 하고 공기를 포식하다시피 호흡했다.
얼마나 뛰든, 뒤를 돌아보기가 무섭다.
얼마나 뛰든, 따돌리는데 성공한 건지 확신할 수가 없다.
언제 이 도주가 끝날지도 모르는 채 악몽과도 같은 칠흑 속을 그저 내달렸다.
‘왜 그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몰랐던 거야?!’
「너무 어두워서 탐지 범위가 줄어든 탓이야! 지금은 어둠에 맞서는 능력이 하나도 없잖아!」
맞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이런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었다.
해결사였을 때 나는 먼저 의뢰를 받아서 목표 장소에 찾아가 악령을 퇴치했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악령의 습격을 받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상대의 위치를 먼저 알고서 싸웠다는 것이다.
* * *
뛰다가 도저히 못 뛸 것 같으면 조금 걷고 그러다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 히히, 히히히히.
그리고 이 세계의 심연 같은 밤을 배회하는 존재들이 느껴졌다.
「괴롭히는 아이. 65.」
「왼쪽으로 돌아서 이동해.」
나는 어둠 속에서 내 안의 악령이 시키는 그대로 이동했다. 역병 마녀는 따돌린 것 같지만 이 어둠 속에서 난 여전히 위험하다.
- 아무도…. 아무도 없나…. 아…….
「이유 없는 살인마. 121.」
- 아아아악! 아아악! 아아아악!!
「시체 강간범. 104.」
잠시나마 잿빛세계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던 내가 오만했다. 밤에 출몰하는 이물들은 내가 상대하기에 너무 강한 것들 천지였다.
“허억…. 허윽….”
밝은 대낮에조차 폐허는 위험해서 깊게 들어가지도 못하는 내가, 이 끔찍한 잿빛세계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다니.
그리고 내가 열심히 거리를 벌리고는 있지만, 역병 마녀는 이 순간에도 날 추적하며 거리를 좁히고 있을 것이다.
난 적응하지 못했고 절대 안전하지도 못하다. 방독면, 방어구, 쇠도끼가 생겼다고 얻은 자신감은 환상이었다. 그저 도망치듯 이 어둠을 헤매고 있으면 잿빛세계의 커다란 벽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 잿빛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명백한 약자였으며 피식자였다.
「네가 느끼는 벽을 넘어야 실재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다차원 능력은 아주 고급 능력이라고.」
몇 시간을 걷고 뛰기를 반복했을까. 때로는 이물을 피해서, 때로는 뒤에서 뭔가 쫓아오는 것 같아서, 때로는 어둠 속 시선이 느껴져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잠을 청하기엔 불안하고 잠을 청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여기가 어딜까.
바스락….
나뭇잎이 밟힌다. 나는 어느새 좁은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계속 숲속으로 진입하니 몇 번의 언덕과 경사면이 나왔고 나는 내가 산을 오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도망쳐온 방향을 다 떠올려보고 거리를 대충 가늠해보면, 그리고 이 위치에 산이 있다면….
터벅.
그러다 흙이 밟혔다.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내가 밟고 있는 땅은커녕 내 다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눈이 어둠에 적응했음에도 그 정도로 어두운 것이다.
「지형지물의 형태를 느껴보면 이건 숲길인 것 같아.」
‘숲길….’
실재세계에서도 이쯤에 숲길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계속 경사면을 올라왔고, 그렇다면 이 숲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갔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그것이다.
「오두막?」
‘사냥꾼의 오두막.’
실재세계에서 의뢰 때문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는 사냥꾼의 오두막.
젊은 사냥꾼이 부인과 세 딸을 데리고 소박한 가정을 꾸렸던 곳이다. 하지만 세 딸 중 장녀가 악령화를 일으켰고, 사냥꾼은 치료사와 성녀를 불렀지만 이미 사태는 악화되었던 것이다.
결국 사냥꾼의 가정은 무너졌다. 이후 실재세계에서 내가 들었던 소문에 의하면 그 오두막은 버려졌다고 했다.
만약 실재세계의 오두막이 철거되지 않았다면 이 잿빛세계에서도 그 오두막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숲속에 마련된 은신처로, 적어도 오늘 하루를 넘길 수 있는 공간으로 삼을 수 있겠다.
「그 장녀가 뭐 때문에 악령이 된 건지는 사냥꾼도 알려주지 않았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충동이 불효로 죄악이 된 경우였나? 막내를 향한 시기와 질투도 있었던 것 같고.」
‘부모는 자기 자식의 모난 부분을 떠벌리고 싶지 않은 법이야.’
「악령화의 원인만 알려줬으면 더 쉽게 죽였을 텐데. 멍청하게 계속 숨기니까 너 같은 해결사들이 고생하는 거잖아.」
악령.
내 안에 있는 녀석도 엄연히 악령이다.
‘말이 심하네.’
「난 너한테만 잘해주고 너한테만 친절하면 돼.」
‘그러다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건 그때 가서 즉흥적으로 생각하면 되지.」
‘그게 네 단점이라고 저번에도 말했잖아. 너는 사람 불편하게 매번…’
핏!
뭔가가 내 발목을 휘감았다.
“엇…!”
그 감각을 느낀 순간에 내 시야가 거꾸로 뒤집혔다. 아니, 내 몸 안에 있는 혈류가 머리 쪽으로 쏠려서 내가 뒤집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난 거꾸로 매달려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올가미인가?」
아무래도 동물을 잡는 전형적인 올가미에 걸린 것 같다. 설마 실재세계에도 이 위치에 올가미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숲길이다.
불순한 목적이 아니라면 사람이 다니는 숲길에 올가미를 깔 리가 없다.
손을 뻗어서 발목을 감고 있는 밧줄 같은 것을 만져보면…
‘뭐야, 이게?’
밧줄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뭔가 더 점성이 있으면서도 불쾌한 액체가 묻어나는 끈이었다.
‘거미줄…?’
이건 위기다. 거미라는 포식자에 대해 생각해보면 지금 난 사냥감으로서 거미줄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거미줄의 두께를 기준으로 예상해보건대, 이만한 두께라면 사람보다 몇 배는 큼지막한 이물일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내 불안한 상상은 현실로 닥쳐왔다.
「존재가 다가오고 있어.」
투두두. 투두두두.
괴상한 박자의 연속적인 발걸음 소리.
「25의 악을 가진….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이물이야.」
거미줄에 이어서 다리가 여덟 개면 그냥 거미라고 말하지.
투두두두두.
그래도 손에 쇠도끼는 꼭 쥐고 있다. 이번엔 몸이 공중에 붕 떴어도 쥐고 있던 무기를 놓치지 않았다.
「원초적인 적의가 느껴져….」
피가 쏠려서 이마의 혈관이 터질 것만 같다. 그래도 가까스로 쇠도끼를 움직여 발목을 휘감은 거미줄을 쳤다.
퉁…!
하지만 날이 무딘 쇠도끼로 거미줄을 쳐봤자 내 몸만 대롱대롱 흔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도끼의 날로 톱질을 하듯 쓱싹쓱싹 거미줄을 갈았지만 역시나 끊어지질 않는다.
또 죽을 위기다.
또, 또, 이번에도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잿빛세계에 떨어져서도 살아남으려고 그렇게나 발버둥 쳤는데 또 죽을 위기다. 기껏 목숨 걸고 싸워서 다리가 부러지고 손목이 부러지며 주조소를 다 정리했는데 그 보금자리조차 역병 마녀에게 빼앗기고, 잠도 못 잔 채 밤새도록 어둠 속을 내달린 끝에 이 꼴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리한 단검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품에 넣고 다닐걸, 손바닥이 다 까지도록 갈아서라도 예리한 단검을 만들걸, 멍청하게 쇠도끼만 만들고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좀 진정해. 심신이 지쳐서 그러는 건 이해하지만 지금 이성이 끊어지면…」
지쳤다. 피곤하다. 무섭다. 억울하다.
죽기 싫다.
“씨발…!”
슥슥슥!
날이 무딘 쇠도끼라도 미친 듯이 움직이겠다. 어떻게든 이 좆같은 거미줄을 끊어내야만 한다.
투두두! 투두두!
그러는 와중에 다리가 여덟 개나 달렸다는 이물의 발걸음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슥슥슥슥!
제발 좀 끊어져라. 제발 좀 끊어져라. 제발, 제발, 제발, 제발.
투두두….
“키그그케크그그그극….”
여신이시여.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시옵소서. 저는 가난하게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어려서 부모를 잃었지 않았습니까. 음지에서 해결사로 비루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발 이 가여운 인간을 한 번만 구해주시옵소서.
만약 당신이 날 이렇게 죽도록 내버려 둔다면 죽어서도 당신을 저주하고 원망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저를 구제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잃고 이렇게 잿빛세계에 떨어지기까지 했잖습니까.
“키익! 키익! 키그그극!”
…그래.
오직 악이 방황하는 잿빛세계에서 기도해봤자 여신은 응답하지 못한다. 게다가 난 축복도 받지 못한 몸. 심지어 악령을 품고 있는 영혼이니 여신에게서 영력을 빌릴 수도 없다.
…그러니까 발목을 자르자.
「진심이야?!」
‘의족을 달아야지.’
평생을 함께한 오른쪽 발목을 희생함으로써 평생의 길이를 조금이라도 늘리겠다. 그게 내가 내린 결단이다.
「출혈은 어쩌려고?! 야! 잠깐, 잠깐, 잠깐만…!」
어금니를 꽉 깨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눈을 질끈 감는다. 두 손으로 쇠도끼를 잡아서 내 발목을 향해 휘두를 것이다. 질긴 거미줄이라면 몰라도 내 발목은 끊어질 것이다.
그대로 쇠도끼를 휘두르기 직전이었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그 때문에 잠깐 망설이게 되었다. 방금은 진짜 자를 수 있었는데, 괜스레 원망스럽다.
이유나 들어보자.
「너를 향한 적의가 사라졌어!」
- 키그그….
직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어둠 속에서 내게 다가온 이물이 스스로 거미줄을 끊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퍽!
상반신에 갑옷이 있어서 충격은 적었다. 나는 즉각 일어나서 이물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쇠도끼를 들고 온몸의 감각을 귀에 집중했다.
“그만하면 됐다. 물렀거라.”
이물이 있는 방향의 조금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치직!
불이 켜지면서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앙상하게 죽은 잿빛의 나무와 건조한 나뭇잎이 쌓인 숲. 나는 숲길에 있었고 내 앞의 이물은 사람의 다섯 배나 되는 덩치를 하고 있는 거대한 거미였다.
그리고 거미 앞으로 걸어 나온 노인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왼손에는 마법 등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깎아 만든 듯한 뼈칼이 들려있다.
「저 늙은이 눈깔이…」
노인의 눈을 들여다본 나는 온갖 상상과 잡념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
그는 악령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나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끼를 겨눈 채 물었다.
“다, 당신 정체가 뭐야?”
“넌 그것들이 아니구나.”
“그것들?”
노인은 말없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노인에게 도끼를 겨눈 나는, 어째선지 도끼를 휘두를 수가 없었다.
이윽고 노인은 날 포옹해 주었다.
그는 내가 뭘 판단하고 해보기도 전에 포옹부터 해버렸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쯧쯔….”
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노인이 날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실재세계에서 추방당한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없고, 그의 속내가 뭔지도 모르고, 방독면을 쓰고 있는데도 늙은이의 체취와 옷에 섞인 피비린내가 뒤섞여 썩 좋은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
그런데 이 순간에 자꾸만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건 왜일까.
“이제 괜찮네. 여기까지 살아서 온 것이 자네의 능력을 증명한 게야.”
그다음부터 나는 노인을 따라서 숲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를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그도 날 신뢰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무방비하게도 내게 등을 보인 채 앞서 걸어갔다.
이후 오두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법 등불이 밝힌 오두막은 낡았지만 판자를 덧대어 보수한 것처럼 보였고, 이 잿빛세계에서는 노인이 바로 이 오두막의 주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괴상한 가면은 벗지 않아도 괜찮겠나?”
“방독면입니다. 이게 없으면 숨쉬기가 불편해서….”
“그런가.”
노인은 1층에 남는 방을 내줬다.
“마녀에게 쫓기느라 피곤했을 테니 눈 좀 붙여두게.”
“저, 그게…”
“이야기는 날이 밝으면 하지.”
* * *
안심이 되었다.
안심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었지만 나는 잿빛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새벽에 바깥에서 괴이한 울음이 몇 번인가 들리긴 했지만 왠지 잠을 청해도 될 것 같아서, 복잡한 감정과 의심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묻어두고 그대로 푹 잤다.
…사실은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잿빛세계에 떨어지고 3일째.
심연 같은 밤이 지나가니 어김없이 밝은 해가 뜨고 아침은 왔다.
잠에서 깬 나는 오두막의 1층과 2층을 모두 살펴봤지만 노인은 없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보니 노인은 아담한 마당의 의자에 앉아서 뭔가를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 노인은 모닥불 앞에 앉아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남는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저기…. 어르신?”
노인은 내게 턱짓했다. 턱에 있는 덥수룩한 수염이 마치 손가락처럼 노인 앞의 의자를 뾰족하게 가리켰다.
그래서 묵묵히 의자에 앉자 노인은 토기로 만든 듯한 컵을 줬다. 그 따뜻한 컵에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식물이 풀어져있었다.
이게 뭘까. 준다고 넙죽 받아 마셔도 되는 걸까.
「저 사람도 똑같은 걸 마시고 있어.」
“마시고 싶지 않다면 안 마셔도 괜찮네.”
“아, 아닙니다.”
뱃속이 포근하게 데워졌다. 그냥 평범하게 향긋한 차였다. 잿빛세계에 살아있는 식물이라곤 없는 것 같은데 이 향긋한 것은 어디서 구한 걸까.
무엇보다 이 노인은 잿빛세계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걸까. 적어도 나보다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숙달하지 않았을까.
알고 싶고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입술이 떨어지질 않는다.
“자네 이름은?”
내 이름.
“…제 이름은 ‘페인’입니다.”
“페인?”
“가문도 없이 가난하고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너 지금 뭐 한 거야? 이 사람이 뭔 줄 알고 이름을 그렇게 쉽게 밝혀?」
정말 강력한 주술을 갖고 사람이라면 상대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해를 가할 수 있다.
‘나한테 보금자리와 마실 것을 내어준 사람이야.’
「그 말이 아니잖아.」
노인은 내게 물었다.
“나이는?”
“스물여섯입니다. …어르신은요?”
“나는 나이도 이름도 잊어버렸네.”
「이 새끼 뭔가 구린내가 나잖아. 어떻게 자기 이름이랑 나이를 까먹니?」
그럴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고.
‘이분이 가지고 있는 악은?’
「안 보여. 하지만 악령의 눈을 하고 있으니까 내면에 뭔가 악한 것이 있긴 있을 거야.」
“보아하니 자네는 잿빛세계로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군. 추방당했나?”
“영혼은 추방당하고 몸은 사형당하기 직전에 제 의지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자의로 잿빛세계에 떨어졌다고?”
“고유한 능력이 있어서요.”
“어쨌거나 추방자는 아니고 사형수였겠군.”
“예. 보시다시피….”
나는 내 붉은 눈을 가리켰다.
그걸로 설명은 충분했는지 노인은 딱하다는 눈빛을 했다.
“나는 악마의 흑마법에 당해서 잿빛세계로 떨어졌다네.”
「지랄하고 있네. 악마는 실재세계로 오지 않아. 악령만 보내지.」
그 말에 나도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실재세계에도 악마가 있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 악마는 실재세계도 잿빛세계도 아닌 지옥에 있다고 들었는데요.”
“자네는 악마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분위기 좀 그만 잡으라고 해.」
‘넌 좀 조용히 해.’
뭔가 감상에 젖은 노인을 잠시 지켜보고 있으니 숲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노인이 보고 있는 방향을 똑같이 보았다.
어제 보았던 그 거미 같은 이물이 나무에 매달려있던 것이다.
혹시 노인이 저 이물을 통제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노인에게 시선을 옮겼더니 그는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심 흠칫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지…. 내 이름도, 출신도, 나이도 잊어버릴 정도로.”
“아…. 그렇군요.”
“그래도 자네를 만나 다행이지. 말동무 하나 없이 악귀들과 생활하는 것은 여간 지겨운 일이 아니니 말일세.”
「악귀가 뭐야?」
“악귀는 악령이랑 다른 건가요?”
“저것들.”
노인은 나무에 붙은 거미 같은 이물을 턱짓했다.
“잿빛세계에 널린 그것들과 구분할 필요가 있어서 내가 직접 악귀라는 이름을 붙여줬네. 자네도 그런 눈을 하고 있으니 알겠지만…. 저들은 실재세계에 존재하는 ‘악령’들과 다른 존재이지 않나.”
“저는 이물이라고 부릅니다.”
“이물이라.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저들을 이물이라 부르는 것도 괜찮겠군.”
노인은 나무에 붙은 이물(악귀)에게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녀석은 노인의 명령을 듣고 모닥불 앞까지 고분고분 다가온 것이다.
“젊은이…. 아니, 페인이라고 부르겠네. 그래도 괜찮겠나?”
“상관없습니다.”
“혹시 자네…. 실재세계로 돌아갈 능력이 있나?”
느닷없이 깊게 들어오는 질문이었다.
“네?”
“나는 이름도 나이도 잊어버렸지만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단 하나 있네. …그리고 자네를 보는 순간 직감했지. 나와는 다른 악령을 속에 품고 있다고. 그러니 나와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어?」
“…예?”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까.
“그 방독면은 얼굴을 필요 이상으로 가렸지. 그건 마치 가면처럼 자네의 얼굴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 다분한 것 같네. 그리고 그 말은 즉 자네가 얼굴을 감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그건 실재세계로 돌아갈 의향이 있다는 것이고,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 …내가 너무 넘겨짚었나?”
혹시 상대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내 방독면의 그런 의도와 내가 가진 목표는 지금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노인에 대한 호기심뿐.
아니면 상대의 기억이라도 엿볼 수 있는 건가?
「그냥 순수하게 자기가 추리한 것 같아.」
그렇다면 정말 예사롭지 않은 혜안을 가진 자라고 할 수밖에.
“내가 가진 것은 없지만…. 잿빛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하나는 훤히 꿰차고 있네.”
이게 본론이었다.
“이 혹독한 세계에서 살아남아 강해지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이 늙은이의 오래된 소원 하나만 이뤄주지 않겠나?”
그래서 가르침을 대가로 들어본 노인의 소원은.
…내 ‘선생’의 소원은, 실재세계에 있는 아들이 잘 살고 있는지만 전해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