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귀소본능 (3)
* * *
잿빛세계에 떨어지고 5일째 아침이다.
내 안의 악령은 실재세계로 돌아갈 능력이 있지만 선생의 안에 있는 악령은 그럴 능력이 있어도 말을 안 듣는다고 한다.
그건 악령들이 모두 각각의 특성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악령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기준이 없으니 말이다.
“지옥에서 잿빛세계로 넘어온 악령은 대체로 실재세계까지 넘어갈 수 있다네.”
잿빛세계는 실재세계와 지옥의 사이에 있다. 악과 영혼이 모이는 차원의 틈새 같은 세계가 바로 잿빛세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잿빛세계는 실재세계와 지옥의 이면이며,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엄연히 다른 차원이라고 한다.
가령 실재세계의 누군가가 이 오두막에 있어도 그들은 같은 오두막에 있는 다른 차원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는…. 같은 장소에 있어도 서로를 알 수 없다는 개념이었다.
뭐, 어차피 나도 알고 있는 개념이었지만 선생까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녀석이 자네와 융화가 잘 되어있다면 실체가 있는 자네의 몸도 악령과 함께 넘어갈 수 있을 것이야. 충분한 성장이 요구되겠지만….”
“선생의 악령과 제 악령은 무엇이 다른 거죠?”
“근본적으로 내 악령은 자네의 것처럼 대화가 통하질 않네. 그리고 자네는 자네의 영혼과 악령이 공존하고 있다 하였지?”
“네.”
“나는 목줄을 채워서 사육하고 있네. 내 영혼이 목줄이고, 내 안의 녀석이 사냥개라는 소리지. 나는 녀석의 능력을 강제로 빼앗아서 사용하는 것이야.”
선생은 악령을 일방적으로 이용해 다른 악을 사냥하는 사람이었다.
* * *
나는 이틀 전부터 이곳, 오두막 앞의 조그만 마당에서 가르침을 받는 중이다.
투두두두. 투두두.
커다란 거미 같은 이물이 나와 선생 사이에 섰다.
“내가 내 안의 녀석에게 목줄을 채우고, 내 안의 녀석은 실체가 있는 이 악귀에게 목줄을 채웠네.”
잿빛세계의 이물에게 목줄을 채우면 그건 편의상 ‘악귀’라고 구분한다.
“결국 목줄이란 선생과 선생의 악령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라는 뜻이죠?”
“그렇지. 손 좀 이리 내보게.”
나는 두 손바닥이 잘 보이도록 선생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선생은 내 손바닥에 뼈칼을 댔다.
“실체…. 이렇게 몸뚱이가 있는 악귀는 먹이를 필요로 하지. 그리고 먹이란 악귀의 종류에 따라서 시체가 될 수도, 산 사람이 될 수도, 피가 될 수도, 무언가의 영혼이 될 수도 있다네. 먹이 자체가 필요 없는 경우도 있고.”
거미를 닮은 악귀는 어떤 존재든 구분하지 않고 체액을 먹이로 삼는다. 그중에서도 신선한 혈액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 악귀에 한해선 굳이 자신의 것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자네의 피를 보려고 하는 이유는 녀석을 감동시키기 위함이지.”
“악귀가 감동이라는 걸 합니까?”
“악귀, 이물, 악령. 어떤 세계에서든 악을 머금고 존재하는 것들은 제각각 특성이 있네. 그러니 이렇게 말해두지. 이 녀석은 원래 그런 녀석이라고.”
“윽!”
선생은 뼈칼로 나의 두 손바닥을 그었다. 오른손부터 왼손까지 가로로 쭉 그어서 일직선의 붉은 선혈을 낸 것이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악귀가 내게 다가왔다.
“케그기기그긱기기긱…!”
“지능이 짐승에 가까운 녀석들에게 회유나 거래란 통하지 않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는가?”
“….”
지금 악귀는 내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를 맛보고 싶어 한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개처럼 말이다.
“이 피를 맛보러 달려들 것 같아요.”
“확신하나?”
“확신까지는 아니지만요.”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지능이 낮은 존재들은 학습이나 훈련 따위보다 본능이 최우선이다.
그러니 이 악귀는 곧 달려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원하는 건 자네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먹을 것밖에 없겠군. …그게 자네를 위험하게 만듦과 동시에, 자네가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해준다네.”
그러자 내 안의 악령이 코웃음을 쳤다.
「쉽잖아. 생각할 머리가 있는 녀석도 아니니까 무력으로 해결하면 되겠어. 안 그래?」
“케에에엑!!!”
계속 피를 보다가 참지 못한 악귀는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대비하고 있었다.
등에 있던 쇠도끼를 꺼내서 봉을 휘두르듯 단단한 손잡이 부분으로 녀석의 머리를 친 것이다.
퍼억!
“키에엑…! 키그그극…!”
녀석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는지 벌어진 턱에서 타액을 늘어뜨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악귀들이 사람 말을 알아듣나요?”
“알아듣는 녀석도 있고 아닌 녀석도 있지. 악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특성을 하나로 정의하려 하지 말게. 우리는 결코 그것들을 정의할 수 없다네.”
“하지만 어지간히 미물이 아닌 이상, 상대의 감정은 알 수 있겠죠.”
“그렇다면 자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실행해보게.”
나는 쇠도끼를 든 채로 녀석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녀석은 내게 분노했다.
“키그그가가아아…!”
퍼억!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번 더 강타했다. 그 일격을 끝으로 멈춰서 녀석을 가만히 노려봐주었다.
“키이익….”
「적의는 사라졌지만 두려움은 느끼지 않는 것 같아.」
‘영력 발산(發散).’
예전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영력을 발산한 것이지만 눈앞의 악귀에게는 또 새로운 형태의 위협이 될 수 있다.
물리적인 위협에 이어서 영적인 위협까지 가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위협이란 곧 존재 자체의 격차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키이잉…….”
「쫄았네.」
분노가 가라앉은 다음엔 공포를,
공포가 가라앉은 다음엔 자비를 구한다.
그리고 상대가 자비를 구할 때 매몰차게 대하지 않고 선뜻 손을 내밀어 주면 열에 아홉은 일단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아무리 머리가 나쁜 짐승이라도 그 정도 처세술은 할 줄 안다.
“….”
난 피가 흐르는 두 손 중에 왼손만 녀석에게 내밀었다.
“이쪽만 핥아서 먹어라.”
그렇게 말하면서 쇠도끼를 뒤로 뺐다.
그 일련의 행동과 침착한 목소리는 녀석이 아무리 멍청한 악귀라 하여도 무슨 뜻인지 대강 알아차릴 수 있게 하였다.
“키그극…. 그그그그그극….”
거미를 닮은 악귀는 내 왼손에 입을 대고 피를 핥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16개의 눈알들 중 8개 정도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녀석은 계속 피를 핥으면서 그 맛에 심취했는지, 나를 쳐다보고 있던 8개의 눈알들이 하나씩 하나씩 밑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챱…. 챱…. 챱….
그래서 나는 녀석의 눈알 16개 중 15개가 밑으로 향했을 때 손을 뺐다.
“그만.”
그러자 녀석의 눈알이 전부 동그랗게 변하면서 멀뚱멀뚱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다.
「이 늙은이가 했던 말이 이거구나….」
목줄 능력을 개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선생에게 배웠다.
이제 그 조건이 다 만족된 것 같은데.
‘목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너한테 빌붙고 싶어 해. 이젠 적의도 경계심도 느껴지지 않아.」
바로 그때 선생이 조언했다.
“근본은 악한 존재라네. 언제든 배신할 수 있고 언제든 널 잡아먹고 싶어 하기 때문에 악귀지. 녀석들에게 충성심은 기대도 하지 말고 네가 가진 정을 주지도 말게. 이 능력은 양날도끼와도 같으니까.”
하마터면 사람이 키우는 개처럼 여길 뻔했다.
비유만 사냥개였다. 실상은 어디까지나 악한 존재였다.
“페인. 네가 오늘 목줄을 채운 존재는 악귀라네.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말게.”
* * *
거미를 닮은 악귀는 내게 목줄이 채워졌다. 이로써 내가 내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악귀가 한 마리 생긴 것이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악은 45.
오두막 주변의 숲에 거미줄을 치고 다른 이물들이 접근하면 그것들을 사냥하는 역할이었다. 녀석이 가진 악명은 ‘혐오의 대상’이라고 하는데, 그런 거미 같은 악귀들이 오두막 주변에 아주 많다고 한다.
현재 내 능력으로는 녀석을 직접 죽여서 가지고 있는 악을 전부 빼앗는 게 아닌 이상 녀석의 정체나 기원을 알아볼 수 없다.
「적당히 굴리다가 못 써먹겠다 싶으면 도살해버리자.」
어쨌든 나는 앞으로 이 목줄 능력을 조금 더 강화해야 한다.
지금은 그냥 목줄을 채우고 소환하고 복귀시키고 명령하는 일에 불과한 1계 능력이다.
선생은 이 능력을 2계까지 강화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이 능력을 2계 이상까지 강화하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더 강한 악귀를 이용하면 이론상 나보다 훨씬 강한 이물들도 해치워서 엄청난 악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
대신에 목줄을 채운 악귀들은 기본적으로 사냥 대상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로부터 내 안의 악령에게 먹일 악을 얻을 수는 없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
내 안의 악령으로선 탐탁지 않은 능력일 수밖에 없다.
「특별한 능력이나 가치가 없는 이물이라면 그냥 죽여서 먹자. 응?」
‘그럴 생각이야.’
근본적으로 주인인 내가 강해지지 않으면 목줄을 채울 수 있는 이물도 한정된다. 더 강한 이물들에게 목줄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집단 사냥을 통해 내가 성장하는 것이다.
「그럼 저기에 있는 거구부터 때려잡자.」
고요한 잿빛의 숲속을 걷고 있으니 제법 덩치 큰 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앙상한 나무들이 베어져서 처참하게도 쓰러져있는 가운데, 나보다 세 배는 키가 큰 이물이 큼지막한 도끼를 들고 배회 중이었다.
「부인과 아들을 토막 낸 나무꾼.」
악명만 들었을 뿐인데 정말 쓰레기 같은 전생을 산 이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저 대형 쓰레기를 치우면 35의 악을 먹어치울 수 있어.」
‘그래?’
「저거 먹고 싶어.」
방관자가 13, 혓바닥 주동자가 10.2였는데 이틀 만에 35의 악을 가진 이물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래도 해볼 만하다. 이제 내겐 장비가 있고 더 강화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목줄을 채운 ‘혐오의 대상’만 하더라도 45의 악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절대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방된 능력은 탐지, 재결합, 영력 발산, 목줄이야. 숫자를 보는 능력은 탐지 능력에 붙어있는 내 특성이라서 계가 없고.」
「탐지 2계. 거리는 서른 걸음. 특정한 범위에 대한 탐지까지 가능해졌고 웬만한 존재들의 악명 정도는 다 확인할 수 있어. 또한 상대의 의도가 노골적이면 그것도 보이지. 기본은 갖춘 것 같아.」
실재세계에서 나는 악한 존재를 보는 것만으로 그것의 악명과 기원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때가 탐지 3계였다. 물론 그조차 악명이나 기원이 없는 악령들도 많아서 언제나 쓸모 있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탐지 2계 정도면 제법 많이 되찾은 것이다.
「재결합 1계. 순도 높은 쇠를 녹여서 붙이는 수준까지 가능해. 지금은 평범한 대장간 정도겠네.」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재결합 능력은 4계로, 저주 속성을 거부하는 은제 무기에 간단한 저주를 붙일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재결합 능력은 지금보다 더 많이 강화해야 한다.
「영력 발산 1계. 그냥 네 존재감을 발산하는 정도야. 아주 가까이에 있을 때 우리보다 약한 상대에게만 위압감을 심어줄 수 있지. 사실상 없는 능력이라고 여겨도 무방해.」
영력 발산은 5계까지 강화해본 적이 있다. 5계까지 강화하면 파생적인 능력들이 생겨나서 상대에게 영력을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심거나 즉사시키는 수단들이 있었다.
소일거리 삼아 잡다한 의뢰를 해결할 때 요긴하게 썼던 능력인데, 역시나 갈 길이 먼 것 같다.
총평을 해보자면 저기서 35의 악을 가진, 빨갛게 녹슨 도끼를 들고 있는 거구를 잡기엔 시기상조라는 느낌이 강하다.
만약 지금의 내가 혼자였다면 말이다.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이 있으니까.’
「목줄.」
나보다 강한 사냥감을 잡아 성장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편법이 없다.
* * *
이물이 된 나무꾼의 덩치는 도무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산에서 사는 야만인처럼 털가죽 바지에 멜빵을 차고 있는데, 우락부락한 근육 위로 드러난 혈관이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흐음!”
콰직!
나무꾼은 도끼질을 했다. 그런데 도끼의 날이 너무 무뎌서 나무를 벤다기보다는 부순다는 행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난 저 행위의 의미를 당연히 알 수가 없다. 아직은.
「빨갛게 녹슨 도끼가 아니었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다. 그냥 빨갛게 녹슨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녀석의 도끼가 빨갛던 이유는 피가 말라붙은 탓이었다.
이미 피가 묻어서 굳어버리고, 그 위에 다시 피가 묻어서 또 굳고, 그렇게 몇 겹이나 말라붙은 흔적이 도끼의 날을 붉게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빨갛게 녹슨 도끼라 착각한 것이다.
“흐음!”
콰직!
녀석은 이상한 기합 소리를 내면서 계속 나무를 쓰러뜨리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무를 베어낸 건지 녀석 주변에 있는 둥근 밑동들이 묘지에 늘어선 묘비들을 방불케 했다.
‘악귀는?’
「준비됐어.」
나는 숲속에 숨기고 있던 몸을 앞으로 내세웠다.
부스슥….
시든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내자 나무꾼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아아아아아!!”
무식한 이물이다. 상대를 분석한다거나 경계한다는 절차도 없이 무작정 뛰어오고 있다. 이 정도면 그냥 움직이는 게 눈에 보일 때마다 죽이려고 달려드는 습성이 있는 게 아닐까.
쿵! 쿵! 쿵!
울리지도 않는 흙바닥을 밟는데 발바닥으로 그 진동이 느껴질 정도다. 분명 몸무게도 적잖이 나가는 녀석일 것이다.
동시에 내 안의 악령은 탐지 2계로써 녀석의 의도를 느꼈다.
「살의.」
나는 왼쪽으로 왼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지면을 향하게 하고 활짝 펼쳤다.
그때 내가 왼손을 향한 곳의 땅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왔다.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핏물은 복잡한 선을 이루며 어떤 무늬를 그렸다.
‘놈을 구속해라.’
핏물로 새겨진 역오망성과 고대의 달력이 둥글게 펼쳐지며 붉은빛을 토해냈다.
키이잉!
그것은 선생이 내게 가르친 강령술이자, 악귀를 소환하는 ‘소환진’이었다.
* * *
실재세계.
대낮의 푸른 하늘에서는 구름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캉! 캉! 캉!
상반신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는 철을 쇠망치로 두들겨서 달구고 있다.
이곳은 세인트 왕국의 변두리에 있는 케베크 주조소다.
“요새 날씨가 쓸데없이 좋군.”
홀른.
그는 주조소에서 일하는 장인이다. 원래 그는 대장간에서 일하는 풋내기 대장장이였는데,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 피곤해서 도망치듯 주조소로 내려와 10년 넘게 철을 두들기고 있는 자였다.
그의 옆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땀투성이의 근육질 남자들도 창밖의 맑은 날씨를 곁눈질했다.
“우리 일이 날씨랑 상관이 있는가?”
누군가 묻자 홀른은 망치질보다 더 큰 목소리를 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자고로 날이 풀리면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는 법이 아닌가!”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런 돌대가리를 봤나.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면 무기점도 가고 방어구도 사고! 물건이 팔리면 우리 주조소에도 주문이 들어온다는 소리라고!”
한쪽에서 숯이 담긴 수레를 옮기던 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요즘에 외국에서는 악령화 사건도 많고…. 얼마 전에 여기 세인트 왕국에서도 추방자가 하나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자 장인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사형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추방이라고 말을 바꾸시지 않았나?”
“그 현장에 있던 얼간이들이 승천자님의 말씀을 잘못들은 거겠지. 단두대에 시체도 안 남았는데 사형은 무슨.”
“근래에 악이 너무 많이 돌고 있어! 날씨가 저렇게나 맑다는 건 필시 가뭄의 징조가 분명하네!”
“지금까지 계속 가뭄이었는데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군. 조만간에 농사꾼들은 피눈물을 흘리겠지.”
“차라리 먹구름이 떴어야 했어! 벌써 몇 개월째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그들의 부정적인 이야기에 홀른은 대뜸 소리쳤다.
“언제는 악이 안 돌았던 적이 있나? 그리고 내가 장담하는데 페인은 누명을 쓰고 추방당한 거라니깐!”
“또 시작이군.”
“그 청년은 왕국에 악이 많이 돈다고 추방당할 녀석이 아니라는 말일세!”
“걔는 눈이 시뻘겋게 변했더니만 형씨는 아직도 그 소리를 하나. 이제 그만 좀 잊게.”
터엉!
홀른은 쇠망치를 거칠게 내려놓고 버럭 호통을 쳤다.
“페인이 어떤 녀석인 줄 알고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나?!”
터엉!
이에 맞서는 다른 장인도 쇠망치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그래, 말 잘했네! 어디 한번 들어보자고! 홀른!”
지켜보던 젊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아저씨들은 왜 이렇게 화가 많아….’
“페인이라고 했지! 승천자님까지 직접 나서서 심판한 그 녀석! 왕국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놓고 악령의 눈을 하고 있던 그 녀석이 무슨 누명을 썼다고?! 이런 빌어먹을!”
“선한 녀석은 아니더라도 죄라는 건 모르는 놈이었어! 아주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고!”
“그런 바른 녀석이 대낮에 눈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군중들에게 매질을 당하나?”
“바른 녀석이니까 매질을 맞아준 것이겠지! 만약 페인이 진짜 악령이었다면 그날 군중들은 그 자리에서 학살을 당했을 것이야! 페인은 단지 해명을 하기 위해 기다렸을 뿐이라는 말이네! 내 말이 틀렸나?!”
“허, 참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멍청하게 거기서 왜 매질을 당하고 있나? 군중을 죽이지 않더라도 자기 힘으로 방어는 할 수 있던 게 아닌가? 그러다 승천자님께서 오시면 당당하게 해명하면 될 것을, 무슨 죄인처럼 처맞다가 얌전히 끌려나갔다고 하더군! 필시 자기도 찔리는 것이 있던 게야!”
그러자 홀른은 입에서 침까지 튀겨가며 호통쳤다.
“지금까지 페인이 우리 왕국을 위해 음지에서 손 더럽혀가며 처리한 악령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나?!”
이에 맞서는 다른 장인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평소에 그런 더러운 일을 하니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집어삼켜진 것이겠지! 다들 까놓고 말해보게!”
“뭐를?!”
“말이 해결사지, 그건 누군가의 가족이나 지인이었던 사람들을 돈 받고 죽이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페인은 천벌을 받은…”
“이런 개자식이!”
홀른은 페인을 모욕하는 장인에게 불같이 달려들었다.
“그 불쌍한 녀석을 두고 뒤에서 이런 소리나 지껄이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홀른, 네놈은 하늘과 천사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나? 악령을 감싸고돌다니 말이야!”
“이 새끼…!”
두 장인이 주먹다툼을 하려던 찰나,
“어!”
수레를 끌고 주조소 바깥으로 나온 청년이 느닷없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주조소 안에 있던 장인들의 이목을 한순간 끌어모은 것이다.
끼리리리리…
청년은 수레를 끌고 후다닥 주조소 안으로 들어왔다. 급한 일이 있으면 그냥 들어오면 될 것을 왜 굳이 수레를 끌고 들어왔을까.
이윽고 청년은 장인들에게 큰소리로 알렸다.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비가 내려요!”
좀 전까지 언성을 높이던 장인들은 그 놀라운 소식에 주조소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다들 언제 싸웠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일단은 저마다의 눈으로 직접 하늘을 보고 싶던 것이다.
구름이 없어서 원래는 비가 내리지 않아야만 한다.
그래서 계속 가뭄일 거라고, 가뭄이 더 심해질 거라고 예상했다.
지금도 여전히 구름은 없다.
“내 평생 이런 해괴한 경험은 처음이군….”
구름이 없는데 비가 내리고 있다.
장인들은 너도 나도 말할 것 없이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입을 벌렸다. 뜨겁게 타오르던 목구멍과 찝찝한 몸이 조금씩 정화되는 듯하다.
그야말로 축복과도 같은 단비였다.
“가랑비라도 좋다! 이 얼마 만에 내리는 빗물인가!”
“천사께서 세인트 왕국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셨네…! 이건 천사들이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것이야…!”
와중에 눈썰미 있는 청년은 조금 더 먼 곳을 유심히 내다보고 있었다.
“아저씨들! 저쪽 좀 보세요!”
그는 왕국의 도심이 있는 방향을 가리킨 것이다.
“여기, 주조소 근처에만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아요!”
“주조소 근처에만?”
“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