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2화 (12/181)

2. 세계 유일의 강령술사 (2)

역병을 불러온 마녀. 줄여서 역병 마녀.

녀석은 다른 이물들과 마찬가지로 실재세계에서 죄악을 저지른 후 악한 영혼이 되어 잿빛세계를 방황하게 된 존재였다.

「전생에 주술사였어. 자기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쓴 주술사.」

오로지 신성한 힘으로 이루어진 마법은 사용자의 영력 그 자체를 이용하는 영적인 힘이다.

반면에 주술은 영력뿐만 아니라 주술적 힘을 가지고 있는 도구, 물건, 장비 등으로도 쓸 수 있다. 그런 것을 주물이라고 하며, 주물은 주술 발동에 있어 사용자의 영력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법사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교회나 귀빈의 밑에서 일하는 고귀한 자들을 떠올리고, 주술사라고 한다면 평민이나 그 이하의 사람들을 떠올리곤 한다.

「연모하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한테 애인이 있던 거야.」

그래서 역병 마녀는 주술의 힘으로 그 남자의 애인을 저주해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애인을 잃고 몇 년이 지나고도 다른 사람을 사귀지 않았어. 역병 마녀는 계속 추파를 던졌지만 그 남자는 사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거지.」

주술은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주술을 공부한다면 스승에게서 배우거나 비싼 서적을 구매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역병 마녀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자신만의 주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마녀는 주술의 힘으로 남자의 사지를 석화시켰어. 그리고 남자의 친구, 가족, 지인들도 모조리 저주했지. 그런데 그 저주가 역병처럼 퍼질 수도 있던 거야. 결국 같은 마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역병에 걸려 죽어버리고 말았어.」

「와중에 남자는 마녀의 보호를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사지가 석화되었지. 그래서 일도 할 수 없고 혼자 힘으로 밥을 먹거나 볼일을 보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신생아 수준의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되었어.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서 그 남자를 돌봐줄 사람도 필요했고.」

그래서…….

「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별 짓을 다 저지른 거야. 그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마녀에게 키워지다시피 삶을 연명했고, 그러면서 마녀에게 감사했어.」

마녀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둘은 사랑에 빠졌어. …마녀는 이미 사랑에 빠져있었으니 이 경우엔 남자가 사랑에 빠졌다고 할까.」

「노년기의 남자는 역병 마녀의 무한한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늙어 죽었어. 주변인, 가족,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고 자신의 사지가 석화되었을 때는 절망했지만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며, 정말 행복하게 죽었지.」

「그 남자는 끝까지 진실을 모른 채, 마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며 행복하게 숨을 거둔 거야.」

그리고 역병 마녀는 남자가 죽은 그 날에 자살한 것이다.

* * *

나는 교회 앞에서 역병 마녀의 사체를 불태웠다.

타는 냄새와 검은 연기가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 이물들이 몰려들 가능성이 있었지만 나는 그런 일이 되기 전에 폐허로 들어왔다.

이제 웬만한 이물은 두렵지도 않다.

「71의 악을 갖고 있었고. 344를 추가 획득했어.」

내 안의 악령이 머금고 있던 악은 492.7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성장에 투자한 것과 비슷한 정도의 악을 좀 전에 한 번의 전투로 획득한 것이다.

「쓰지 않고 비축한 악은 415야.」

탐지 2계, 재결합 1계, 영력 발산 1계, 목줄 1계, 감각 증폭 1계, 철인 1계, 고속화 1계, 지적 활동 1계, 저주 저항 1계.

그리고 좀 전에 역병 마녀를 해치우면서 운 좋게도 녀석이 갖고 있던 고유한 주술을 하나 알아낼 수 있었다.

「존재 추적.」

존재 추적은 특정한 대상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이건 고유한 능력이라 ‘계’가 없어.」

고민할 여지가 없다.

나는 실재세계로 돌아가서 승천자를 죽일 것이다.

「그럼 개방만 할까? 필요한 악은 144야.」

‘개방해.’

그리하여 원하는 대상을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능력을 개방한 직후 내게 그런 능력이 생겼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존재 추적을 개방하고 남은 악은 271.

나는 거미 악귀 여덟 마리와 자살기도자까지 다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목줄로 묶은 악귀가 한 마리도 없는 상태다.

악귀는 전투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 전투 이전에는 미리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이동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앞으로 계속 잿빛세계에서 살아갈 거라면 더 강력한 악귀를 다루기 위해, 그 악귀들을 순조롭게 제압할 영력 발산 능력에 악을 투자함이 옳다.

하지만 이제 난 실재세계로 돌아간다.

‘철인 능력에 200을 투자해.’

「그 정도면 힘을 잃기 전 수준까지 한방에 복구하는 거잖아. 전체적으로 균등하게 강화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

‘나는 앞으로 실재세계와 잿빛세계를 오갈 거야.’

잿빛세계의 이물들은 실재세계의 악령들보다 훨씬 많은 악을 가지고 있어 성장의 효율이 좋다.

그리고 목줄 능력에 필요한 악귀는 잿빛세계에 있으니, 나는 어찌되었든 잿빛세계도 자주 방문하게 될 것이다.

‘골조 살인마, 혓바닥 주동자, 나무꾼, 역병 마녀를 차례로 상대하면서 뼈저리게 느꼈어.’

「뭐를?」

‘이물한테 한 대 맞고 뼈가 부러지는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최소한 맨손으로 이물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물리력은 있어야 한다. 강령술사이기 이전에 말이다.

「철인 능력에 200. 알겠어.」

전신에서 힘이 차오른다. 영력이 육체로 연동되면서 몸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 방독면 앞으로 뜨거운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하아아……”

「이제 쇠로 만든 무기에 맞아도 안 죽고, 쇠로 만든 도구 따위는 그냥 맨손으로 부숴버릴 수 있겠네.」

그리하여 철인 2계에 도달했다.

남은 악은 71.

‘71은 아껴둔다.’

「왜?」

나는 상가의 깨진 유리창에 비친 내 옷차림을 보았다.

쇠도끼를 등에 매고, 까마귀를 닮은 기괴한 방독면을 쓰고, 누더기로 된 옷과 철제 방어구에 검은 가죽 신발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차림으로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 들어갔다간 분명 수상하게 보이리라.

그래서 실재세계로 돌아가면 옷부터 사 입어야 한다.

「네 장비를 승천자가 몰수했잖아. 걔만 죽이면 끝나는 일 같은데.」

‘승천자는 상성상 최악이야.’

승천자는 천사의 대리인 정도로 여겨질 만큼이나 신성한 마법을 다룬다. 오죽하면 그가 천사의 권능을 빌리고 있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오늘날 세인트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면 단연코 승천자를 뜻하는 것이리라.

「천사의 대리인, 신성한 힘…. 그런 새끼가 정말로 선한 축에 속하는 인물이 맞나?」

나는 모르지만 어쨌든 세계는 그를 선하다고 정의한다.

만약 그가 악인이었다면 진작 악령화의 증상을 조금이라도 보였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악인으로선 마법을 다룰 수가 없다.

‘그래서 놈을 죽이기 전에 묻고 싶은 거야.’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말이다.

그는 내가 악령에 씌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 날 고문하고 퇴마의식을 강행하고 날 죽이고 내 영혼을 추방하려 했다.

도대체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어째서 그런 짓을 벌인 놈이 신성한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는지를 미친 듯이 알고 싶다.

「만약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래도 죽일 거다.’

어떤 이유가 있어도 용서할 수 없다. 그건 세계가 정의하는 선악과 별개의 문제다.

만약 내가 승천자를 죽이고 해치는 것이 악한 행동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하긴, 어차피 넌 죄악이 쌓여도 웬만해선 버틸 영혼이니까.」

나는 어느덧 광장에 도착했다.

이 폐허에 널린 기이한 뼈다귀들이 모두 역병 마녀의 희생자들이며, 사방에 짙은 안개처럼 깔린 공기는 전부 흩날리는 재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후 버려진 듯한 무채색의 세계지만 엄연히 살아서(혹은 죽어서) 활동하는 이물들이 도사린다.

「우리는 지금 836.7의 악을 머금고 있어.」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보면 놀랄 정도로 많은 악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그렇게나 성장한 악령이, 심지어 이성도 갖춘 악령이 실재세계로 넘어가는 일은 이제 별 것도 아니야.」

나는 네모난 제단 위에 올라섰다.

잿빛세계에 떨어진 첫날, 나는 이 제단 위에서 알몸으로 역병 마녀에게 쫓겼었다.

「이제 다차원 능력을 발동할 수 있어. 충분히 성장한 덕분에 다차원 능력에 대한 이해까지 끝났고.」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주론에 따르면 태초에 세계란 실재세계(현계), 천국과 지옥으로 총 세 종류였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도록 차원이라는 개념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신이 그렇게 창조한 것이다. 실재세계의 인간들이 선행을 쌓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죄악을 쌓으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다. 태초에 그렇게 세계를 만들고 나눈 것이 신의 의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옥의 악마들은 천성이 지독하게 사악해서, 악한 사람을 벌하는 것에 질려 선한 사람들까지 악하게 변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정한 악행에 대한 악마들의 갈망은 기어코 신의 의도를 해쳤다.

지옥 그 자체이자 만악의 근원인 악마.

‘샤’가 차원의 틈을 열어버린 것이다.

차원의 틈이 열리면서 모든 세계의 인과율이 혼돈의 시기를 겪었다고 한다. 인류는 그런 시기에도 살아남고 적응하여 새로운 달력을 만들고 각지에서 똘똘 뭉쳐 몇 개의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그 시기에 차원의 틈으로부터 생겨난 세계가 바로 잿빛세계였다. 잿빛세계가 생기면서 지옥으로부터 홍수처럼 흘러들어오던 악이 줄었고, 망가졌던 인과율이 잿빛세계에 버려져 각각의 세계들이 오늘처럼 안정화된 것이다.

악마가 지옥에서 창조한 악령은 일방향으로 차원을 건널 수 있다. 지옥에서 잿빛세계로, 잿빛세계에서 실재세계로 말이다.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내 안의 악령은 실재세계에서 잿빛세계로도 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역시나 악령이라는 존재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물도 마찬가지고.

「나도 지옥은 못 가. 그 세계가 어디에 있었는지 내겐 기억조차 없거든.」

내 안의 악령은 성장하기 전에 단순한 악이었다. 혹은 악과 악령의 사이에 있는 무언가였다.

그 당시의 녀석은 이성도 없었고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는 지능조차 없었다. 어떤 존재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그런 상태였다.

「다차원은 숫자를 보는 능력이나 존재 추적처럼 내가 고유하게 가질 수 있는 능력이야. 마법도 아니고 주술도 아니기 때문에 계가 없지.」

모든 악령들에겐 원초적인 욕구가 있다.

내 안의 악령이 가진 욕구는 ‘힘’이다.

그저 강해지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난 살아남기 위해, 삶을 보다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오랜만에 다차원 능력을 확인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 이제야 이 능력을 완벽하게 파악해냈어.」

「세 가지 조건을 지켜서 네가 원하는 장소에 떨어질 수 있던 거야.」

「첫 번째 조건은 기억 법칙. 네가 알고 있으며 실제로 가본 경험이 있는 장소여야 할 것.」

「두 번째 조건은 그림자 법칙. 그 장소에 네가 나타나거나 그 장소에서 네가 사라질 때, 아무도 너의 다차원 능력 발동을 목격하거나 인지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

「마지막 조건은 인과율 법칙. 그 장소가 마법이나 주술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

‘그럼 승천자의 추방 술식에 맞았을 때는 어떻게 발동된 거야? 그것도 마법인데.’

「맞기 직전에 발동된 거지.」

그랬던 것이다. 아무튼 이제 난 다차원 능력을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변두리에 있는 주조소를 선택했다.

키이잉!

목줄 능력으로 악귀를 소환했을 때처럼 내 발밑에 부정한 소환진이 전개되었다.

검붉은 핏물이 두 개의 원을 그리면서 원과 원 사이에 고대의 달력을 순식간에 써냈다. 이어서 두 원을 가로지르는 역오망성이 나타나고 붉은빛이 내 발밑으로부터 살아있는 연기처럼 피어올라 온몸을 핏빛으로 감쌌다.

그 모든 과정이 순식간이었다.

이윽고 다차원 능력이 발동됐다.

「조건에 맞는 위치가 몇 가지 있어.」

실재세계의 주조소가 뿌옇게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내가 실제로 발을 디뎠던 곳곳, 내 눈높이에 맞는 실재세계의 모습이다.

「너는 지금 실재세계와 잿빛세계의 틈에 있어.」

실재세계와 지옥의 틈이 잿빛세계.

그리고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실재세계와 잿빛세계의 틈.

「적절한 위치를 찾으면 그곳에서 다차원 능력의 발동을 해제하는 거야.」

나는 뿌연 안개를 밟았다.

바닥이 없는 듯한 감각이지만 어째선지 잘 걸어갈 수 있었다.

뒷문.

이곳이 좋겠다.

무슨 이유인지 주조소 안에 있어야 할 자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 뒷문에서 조금 붉은빛이 나더라도 누군가 날 목격하진 못할 것이다.

「그 위치라면 조건에 맞아.」

이윽고 뿌연 안개가 걷어졌다. 내 발밑에 깔렸던 검붉은 핏물의 소환진이 붉은빛이 되어 흩어졌다.

“아….”

실재세계다.

돌아왔다.

이곳이 실재세계가 맞다. 항시 방독면을 뚫고 들어왔던 악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겨운 흙냄새로 바뀌었다. 비가 내릴 때 맡을 수 있는 흙냄새다.

무엇보다 눈앞에 보이는 세계의 색감이 뚜렷해서 일순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풀, 돌, 나무, 하늘, 구름, 벽.

다양한 색깔을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소중한 건지 몰랐다.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잠깐이지만 방독면을 벗고 싶다는 충동까지 있었다.

나는 녹슬지 않은, 지극히 멀쩡한 쇠로 된 손잡이를 쥐었다. 그대로 뒷문을 열어서 주조소 안으로 들어와 보니 좀 전까지 달궈졌던 철제 장비들이 있다. 바닥에는 장인들이 흘린 땀방울의 자국이 선명하다.

그야말로 생명력이 느껴진다. 내가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세계가 이렇게나 생명력 넘치는 세계였다니.

- 가랑비라도 좋다! 이 얼마 만에 내리는 빗물인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랜 가뭄이 풀린 것인가.

실재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좋은 소식을 접했다. 이러면 저 장인들의 마음도 한결 편한 상태라 내가 접근하기 용이하리라.

나를 조금 수상하다고 여길 수는 있어도, 내가 페인이라는 건 실재세계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 아저씨들! 저쪽 좀 보세요!

내가 모르는 청년의 목소리.

주조소에 신참이 들어왔나 보다.

「저기 홀른도 있네.」

반가운 마음에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나는 들어왔던 뒷문으로 다시 나왔다.

‘방독면에 목소리를 변조하는 기능을 추가해.’

「동굴처럼 울리면서도 늑대처럼 건조하게 끓는 목소리가 될 거야. 5 정도만 투자하면 돼.」

‘아무거나 좋으니까 빨리.’

- 여기, 주조소 근처에만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아요!

주조소 근처에만 비가 내린다고 해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먹구름은 없다.

먹구름은커녕 구름 한 점도 없는 맑은 하늘이다.

- …네!

날씨에 이변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어느 대단한 마법사나 주술사가 비가 내리기를 기원했나. 하지만 날씨를 바꾸는 건 승천자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어쨌든 나로선 비를 내려준 그 누군가에게 감사한 입장이다.

정말 천운이 따랐다. 신에게도 조금은 감사할까, 고생한 대가로 이렇게나 말이 안 되는 비를 노골적으로 이 근처에만 내려주는 일을 허락했으니 말이다.

「이렇게나 맑은 하늘에 어떻게 비가 내리는 건지 신기하긴 하네. 그것도 이 근처에서만….」

오랜 가뭄 끝에 찾아온 단비가 구름도 없이 이 근처에만 내리고 있는 상황.

이러면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에 제법 괜찮은 연출이 될 수 있겠다.

나는 벽을 따라서 주조소 앞으로 걸어갔다.

「천사라도 등장하는 줄 알았을 테지.」

「하하하! 쟤들 표정 좀 봐!」

「네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헷갈린다는 얼굴들이잖아!」

그들이 본 것은 단비를 맞으면서 등장한, 기괴한 차림의 방랑자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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