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3화 (13/181)

2. 세계 유일의 강령술사 (3)

주조소의 장인들은 당황했다.

그들의 표정으로부터 호기심과 미지의 두려움이 뒤섞인 혼란을 엿볼 수 있다.

나도 안다. 나름 손보긴 했어도 지금 내 옷차림과 방독면이 결국 어떤 느낌인지는.

「온다.」

호기심을 못이긴 젊은 신참이 장인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누구시죠…?”

나는 실재세계로 돌아와서 첫마디를 내뱉는다.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목적이 아니라는 걸 알리면 일단 경계심을 한층 누그러뜨릴 수 있으리라.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방독면으로 변조된 목소리가 심히 이질적이었는지, 다들 경계심은 그대로인 것 같다.

“아, 찾으시는 분의 성함이…?”

선생의 아들.

“로나디입니다. 나이는 스무 살쯤이고요.”

“댁은 누구신데 대뜸 찾아와서 사람을 찾소?”

홀른.

내가 비록 음지에서 활동하는 해결사였다고는 해도 나름 그쪽 업계에서 실력은 있던 편이었다.

그래서 실재세계에 몇몇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 홀른은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 괴팍한 목소리랑 가면이 뭔지부터 밝히지 않으면 알려줄 수 없겠소.”

“아저씨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홀른이네만.”

「홀른이 로나디를 알고 있나?」

‘모를 거야.’

정직하고 의리 있지만 성격은 제법 드센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나보다도 인간관계의 폭이 좁은데, 그런 그가 스무 살의 로나디라는 청년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저기 있는 신참이 로나디가 아니라면 말이다.

“혹시 이 근처에만 비를 내리게 한 것이 댁의 소행이오?”

여기선 그렇다고 하고 싶지만 모른다고 대답하는 편이 좋겠다. 혹여나 정말로 이 근처에만 비를 내리게 한 장본인이 있다면 언젠가는 탄로날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괜히 꼬리를 잡히긴 싫다.

“우연입니다. 저도 이곳 하늘의 상태를 보고 놀란 입장이죠.”

“어디서 왔소? 그 가면은 뭐고 왜 그런 넝마를 걸치고 있소?”

이 질문에 대한 변명은 준비해왔다.

“저는 ‘외부’에서 왔어요. 고향도 없고 나라도 없죠. 이름도 없고요.”

그러자 장인들이 홀른의 뒤에서 수군댔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감각 증폭이 있는 내게는 다 들렸다.

“외부?”

“외부에서 왔다면 저런 차림새도….”

“어떻게 홀몸으로 살아서 왕국까지 들어온 거지?”

이곳은 세인트 왕국.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실재세계에는 왕국과 제국 등 다섯 나라와 수십 개의 정착지가 있다. 그중에 세인트 왕국은 어엿한 나라로서 인정받는 다섯 나라 중에 하나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섯 나라와 수십 정착지를 제외한 모든 땅을 ‘외부’라고 부른다. 외부에는 법도 질서도 치안도 없으며, 나라에서 추방된 온갖 미친 인간과 악령들이 활개치는 무법지대다.

나는 지금 그런 외부에서 세인트 왕국으로 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방독면은 외부에서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제가 직접 만든 것이지만…. 악령의 저주에 걸려서 잘 벗겨지지 않게 되었어요.”

“아이고, 저런….”

“쯧쯧….”

“바깥에서 고생 좀 했겠네.”

저주를 가하는 사람은 모두의 질타를 받는 악인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주를 당한 사람은 쉽게 동정심을 살 수 있다.

세인트 왕국은 그런 나라다.

“성문은 제대로 통과했소?”

“통과했어요.”

“무슨 목적과 무슨 이름으로…?”

드디어 이걸 물어봐 주는구나.

지금 내가 내뱉을 말이 앞으로 실재세계에서 나를 가리킬 이름이자 표현이 될 것이다.

“저는 강령술사입니다.”

“강령술사?”

“악을 이용해 악에 대항하고 공격적인 퇴마를 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선 해결사라는 비슷한 직종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다들 대충은 알아들었다는 눈치다.

이제 본론이다.

“저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나디라는 자를 찾고 있는데 제 의뢰인은 그 사람이 세인트 왕국에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홀른은 로나디를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어느새 마른하늘의 단비가 그쳤다.

“홀른 씨. 아니면 다른 분들도…. 로나디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말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러면서 젊은 신참의 얼굴이 선생과 닮은 점은 없는지 슬쩍 훑어봤다.

「쟤는 하나도 안 닮았어.」

“로나디? 그게 누구인가?”

“자네는 아나?”

“금시초문이네.”

“나는 모르겠군.”

이들은 로나디라는 자에 대해서 모른다는 반응이다.

「썅, 홀른한테 한 방 먹었네.」

아는 척을 하다가 금방 난처해진 홀른은 괜히 뒤를 돌아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신참이 눈치껏 입을 열어주었다.

“어쨌든 강령술사 님께서는 로나디라는 사람을 찾는다는 거죠?”

“네.”

“양지의 인물이면 교회나 번화가에서 찾으시고…. 제가 강령술사라는 게 어떤 직종인지는 잘 모르지만 해결사랑 비슷하다고 하셨으니까, 음지에 관련된 일이라면 의뢰소에 가서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말은 고맙지만 이미 내가 아는 방법이다.

일단 나는 로나디가 양지의 인물인지 음지의 인물인지조차 모른다. 그래서 마음 같아선 나와 면식이 있는 가게나 교회에서 찾아보고 그쪽에서 모른다고 하면 의뢰소에 방문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꼴로는 양지를 돌아다니기 불안하다.

「네가 맨날 가던 뒷골목 의뢰소 말고는 선택지가 없네. 거긴 너처럼 수상한 인간들 천지니깐 양지보다는 나을 것 같고.」

‘복장을 개선해야 돼.’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장인들의 동태를 살폈다.

“흠, 흠.”

“…비도 그쳤으니 일하러 들어가야겠구먼.”

“어서들 가자고.”

홀른과 주조소 장인들은 성격이 드세지만 언제나 자기 일에 열중인 사람들이다. 단비도 그쳤고 미지의 외부인에 대한 호기심도 대충 해소됐으니 다들 일하러 돌아가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이건 내가 홀른의 성격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홀른 씨.”

가장 마지막으로 주조소에 들어가던 홀른이 나를 돌아봤다. 도대체 자기한테 무슨 할 말이 더 있냐는 표정이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둘이서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남정네한테는 관심 없소.”

“그쪽이 이 주조소에서 가장 오래 일하신 분 같아서요.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딱히 거절할 일은 아니다.

“잠깐이라면야….”

그리고 참견 좋아하는 홀른의 성격이라면 궁금할 것이다. 대뜸 단비와 함께 찾아와서 자신을 정확히 지목하는 외부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 * *

나는 홀른과 함께 주조소 마당의 구석에 섰다.

‘탐지.’

「이 근처에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홀른은 대뜸 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요?”

“아저씨.”

“…?”

“저, 페인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홀른의 눈이 큼지막하게 변했다.

“무슨 개소리를…”

‘나 지금 방독면 벗어도 될까?’

「앞은 절벽이고 뒤는 건물벽이니까. 얼굴만 잠깐 비추는 거면 괜찮아.」

나는 누더기 로브의 뒷머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방독면과 머리를 고정하는 이음매를 조금 풀어서 홀른에게만 슬쩍 얼굴을 보여줬다.

“맙소사, 어찌 이런 일이….”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저씨밖에 없었어요.”

라고 구슬렸지만 거짓말이다. 내가 이 세계에서 진정 신뢰하는 사람은 리인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함으로써 홀른이 내게 갖고 있던 신뢰감은 배가 되었으리라.

“정말로 눈이 빨갛군. 지금 상태는 괜찮은가?”

나는 다시 방독면을 쓰면서 대답했다.

“네. 멀쩡해요.”

동시에 목소리도 변조되었다.

“어떻게 돌아온 거냐? 광장의 제단에서 추방당했다고 들었건만.”

“추방이요?”

“승천자님께 추방 술식을 맞지 않았는가?”

난 사형수다. 추방자가 아니다.

악령화가 끝난 완전한 악령은 육체를 죽이고 영혼을 잿빛세계로 추방한다. 그게 이 왕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심판이자 법이다.

그날 승천자도 군중들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내 육체는 단두대로 죽이고 영혼은 추방 술식으로 추방한다고. 나는 악령이라 너무 늦었다고.

「말 바꿨네.」

아.

「승천자가 말을 바꿨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영혼이 추방당하더라도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했으면 그 자리에 ‘시체’는 남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차원 능력을 발동했고 직접 잿빛세계로 떨어졌다.

따라서 그 당시에 실재세계에는 내 시체가 남지 않았으리라. 추방 술식의 눈부신 빛과 함께 내 존재 자체가 그곳에서 사라졌으리라.

이러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승천자는 내가 내 의지로 잿빛세계에 갔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이런 걸 왜 생각도 못하고 있었을까.

「생사가 오가도록 바쁜 상황이었잖아.」

혹시 승천자는 내가 이렇게 실재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까.

때마침 홀른도 뭔가 생각이 났는지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래서 사람들의 말이 갈리는 거였어.”

승천자는 악령이자 사형수인 나를 죽이고 영혼은 추방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추방했더니 내 시체는 남지 않았다.

따라서 승천자는 말을 바꿨다. 나를 추방했다고.

그리고 이 왕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승천자의 말을 무조건 신뢰한다. 그는 천사의 대리인이니까.

“저는 실재세계와 잿빛세계를 오갈 수 있어요.”

“가는 건 몰라도 돌아오는 건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아니더냐?”

“제 안에 정말로 악령이 있기는 하거든요. 그렇지 않고서야 악령의 눈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홀른은 땀에 젖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하게 말하지. 나도 자네가 악령이랑 모종의 연결점이 있을 거라고 의심은 했네.”

다행히 홀른도 내 말에 납득한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본인 입에서 진실을 들어보니 정말 놀랍군. 그럼 승천자님께서 오판을 내리신 건 아니었다는 말인가.”

“저는 퇴마의식을 견뎌내면서 계속 주장했어요. 제 안에 악령이 있는 건 맞지만 제가 악령에 씐 것은 아니라고요. 오히려 저는 제 안에 악령을 가두고 녀석을 이용하는 중이라고…. 퇴마술사나 마법사들이라면 몰라도 승천자라면 제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거예요.”

눈이 빨갛게 변하는 건 악령화의 흔한 증상이다.

그런데 나는 눈만 빨갛게 변했을 뿐, 아무리 퇴마의식을 당하고 갇혀있었어도 그 이상의 악령화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군중들에게 매질을 당하고 순순히 승천자에게 잡혀가서 일관된 해명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새끼는 끝까지 제 말을 듣지 않았죠. 저를 발가벗기고 고문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악령으로 몰아 사형하려 했어요. 그걸 실패하니까 사형이 아닌 추방이라면서 말을 바꾼 거네요.”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을 뿐인데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천사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승천자님이 아니시냐. 그런 분께서 무슨 명목이 있어 네게 그렇게나 호된 짓을 한다는 말이지?”

“저도 그걸 제발 좀 알고 싶네요.”

“필시 이유가 있을 걸세. …안 되겠다. 지금 함께 찾아가서 물어보자고. 내가 널 변호해 주마.”

“그럴 수 없어요.”

“그럼 평생 그 가면…. 까마귀 머리 같은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강령술사라는 사람으로 살아갈 셈이냐?”

“승천자를 죽이고 진실을 알아냈음에도, 사람들이 저의 그런 행동을 죄악으로 취급한다면요.”

“뭣, 잠깐, 승천자님을 어쩌겠다고?”

“죽일 겁니다.”

홀른은 혹여나 누가 대화를 엿들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 나는 못 들은 걸로 하겠네. 지금 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것이야. 알겠나?”

당연한 반응이다.

“아저씨가 휘말리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건 저와 승천자 둘이서 해결할 문제니까요.”

“그러지. 그래. 그러면…. 우선 새벽이 될 때까지 어디서 시간 좀 보내다가 뒷골목에 찾아가 보게. 로나디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찾는 사람이라면 말이지. 그러면 되겠어. 그쪽의 어두운 세계는 나보다 자네가 훤하지 않나.”

나와 쌓은 의리와는 별개로, 자신은 이 이상 자세한 것을 알기 두렵다는 뜻이었다.

「인간이 다 그렇지.」

‘인간이 다 그런 게 아니라 승천자의 권위가 높아서 그런 거야.’

세인트 왕국.

이 왕국의 모든 교회는 왕의 아래에서 관리된다. 그리고 각각의 교회에는 신관들이 있으며, 그 모든 신관들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승천자다.

따라서 승천자를 적대한다는 건 곧 왕국을 적대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 지금 홀른의 반응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나조차도 승천자에게 당하기 전까지는 그가 천사의 대리인이자 왕국에서 가장 선한 인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용할 건 이용해야지.」

「원래 인간관계는 필요할 때 이용하기 위해 만드는 거잖아?」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아저씨. 옷이랑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홀른은 망설였다. 잠깐이었지만.

“…그 넝마 같은 로브보다 더 좋은 게 있지. 돈은 얼마나?”

부담스럽지 않게 빌려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만 먹고 잘 수 있을 정도면 돼요. 승천자가 제 돈이랑 옷이랑 장비까지 몰수했거든요.”

“그렇게나 악착같이 벌어놓고선 다 빼앗긴 거냐.”

“평생의 노동을 잃었죠.”

그건 겪어본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리인은 잘 지내고 있나요?”

“나 같은 촌놈은 모르지. 그 북적거리는 거리까지 들어갈 일이 없으니.”

리인은 집에서 옷을 만드는 일을 한다. 평상시 사람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아이라서 그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는 직접 집에 가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중하자.

이 상태로는 집에 갈 수 없다. 내 움직임이 도리어 리인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

「뭔…. 그게 왜 그렇게 돼?」

승천자가 내 행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고 있다면 더욱이 지금의 나는 리인과 접촉할 수 없다. 몰래 집으로 가는 것도 안 되고 다차원 능력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도 안 된다. 승천자가 리인의 몸이나 내 집안까지 마법으로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뒤처리 얘기였구나. 하긴, 승천자부터 처리하지 않으면 양지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네. 집에 돌아가는 것도 위험한 짓이고.」

그리고 그런 가정으로 생각해본다면 나는 반드시 승천자를 죽여야만 실재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을 벗어나 외부에서 평생을 은거할 게 아니라면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승천자는 언제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테니.

“일단 뒷골목 여관은 저렴하니까 4루아 정도면 되겠나?”

“충분하죠. 의뢰 하나 처리하면 바로 갚을 수 있어요.”

“됐네. 그런 푼돈 따위는 갚지 않아도.”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동으로 된 자그마한 동전 네 개를 넘겨주었다.

“아직 해가 중천인데 새벽까지 시간은 어떻게 때울 심산인가?”

“제가 아까 강령술사라고 했죠.”

“그렇지.”

“강령술사 나름의 할 일이 좀 있어서요.”

“무슨 일?”

이 이상 자세한 건 대답할 수 없다.

질문은 내가 해야겠다.

“혹시 요즘에도 암거래가 되나요?”

잿빛세계에서 사냥을 하면 실재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물들을 획득할 수 있다.

그 주물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악을 머금고 있는 물건들이며, 악의적인 목적으로 활용되기에 용이하다.

그런 주물들을 멀쩡한 시장에 내다가 팔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암거래를 이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암거래라, 아까도 말했지만 뒷골목 세계는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싶구먼.”

“그것도 그러네요.”

실은 주조소 장인들 사이에서 암거래에 관련된 특이사항이 있나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특별한 소식은 없다는 것 같으니 됐다.

“그래서 음지에다 뭐를 팔려고?

“뭐든지요.”

암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치울 것이다.

“그것도 죄야. 그러다 악령화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제 영혼에는 이미 악령이 하나 있어서요. 다른 악령이 들어올 빈자리가 별로 없어요.”

“난 네가 바르고 성실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면모가 있었군. 도대체 잿빛세계에서 무슨 일을 경험하고 온 건가?”

바르고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죽어서 천벌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직접 잿빛세계에 갔다 와보니 이 세계가 정의하는 죄악이란 참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게 죄악을 저지른 승천자는 멀쩡하게 살아있고, 죄라는 개념도 알지 못할 아기 새는 뒤틀린 이물이 되어서 잿빛세계를 방황하지 않았나.

그래서 어쩌면,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 세계가 정의하는 죄악이라는 게 선택적이고 편의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고 성실한 생활은 끝났지.」

“더러운 돈이든 깨끗한 돈이든 가리지 않기로 했어요.”

일단은 왕국의 음지에서부터 다리를 놓기 시작해, 승천자의 숨통을 밑에서부터 조금씩 조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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