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4화 (14/181)

2. 세계 유일의 강령술사 (4)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악의 기운도 많아진다. 그건 실재세계도 잿빛세계와 같고, 실재세계의 사람들은 밤이 되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 내일의 해가 뜨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밤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저녁 기도를 위해 순회하는 신도들이나 거리를 순찰하는 기사들이 대다수다.

「그리고 밤엔 극소수의 미친놈들도 있지.」

나는 해가 떨어지고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다음엔 뒷골목의 의뢰소에 방문할 것이다. 그곳의 의뢰소에서 선생의 아들인 로나디라는 청년을 수소문하고 암시장에 연줄이 있는 자를 만나는 것.

그게 오늘 새벽의 계획이다.

「대낮에도 험악한 뒷골목이잖아. 그런 곳을 새벽에 홀몸으로 가본 적은 없지 않아?」

없다.

‘불필요한 시비나 싸움에 휘말려서 소동을 일으키는 건 피해야 해.’

새벽의 뒷골목은 확실히 위험하다. 하지만 지금 내 처지라면 사람들이 많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것보다 차라리 밤에 활동하는 편이 안전하리라.

「그래도 그곳에 있는 미친놈들보다는 네가 훨씬 위험한 놈이야.」

‘내가 아니라 너겠지.’

새벽까지 잿빛세계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잿빛세계에서 실재세계로 가든 실재세계에서 잿빛세계로 가든, 다차원 능력 발동에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은 지켜야 한다.

그래서 난 주조소를 나와 거친 흙길을 걸어왔다.

「그 옷은 피가 묻어도 티가 안 나겠어.」

잿빛세계의 소재로 만든 누더기 로브는 버렸고 대신에 홀른이 준 검붉은 로브를 입었다.

‘질기고 두꺼운 소재야. 땀도 잘 마르고.’

「홀른이 신경 좀 써줬네.」

숲을 통과하는 숲길이 나왔다. 나는 푸른 숲으로 들어와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여러 번 확인했다.

잿빛세계의 숲은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앙상해서 시야를 가리는 나무나 나뭇잎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실재세계의 숲은 자칫 대낮에도 길을 잃어버릴 수 있을 만큼 울창했다.

풀벌레와 이름 모를 새의 울음이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다차원 능력을 발동했다.

‘선생의 오두막 근처로 가야겠어.’

키이잉!

울창했던 숲이 순식간에 시들어버리고 맑은 공기는 잿빛으로 탁해졌다.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고 모든 세상이 죽어버린 무채색이 되었다.

이윽고 세 가지 조건이 성립하여 이곳에 설 수 있다는 걸 인지한다. 그러자 시야를 혼탁하게 하는 뿌연 안개가 걷어지고 풀벌레와 새의 울음이 죽은 듯 사라졌다.

가죽 신발의 밑창으로 바스러진 나뭇잎이 밟힌다. 이 감각이 익숙하다는 게 싫다.

「벌써 그 늙은이가 보고 싶은 거야?」

‘오두막을 나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무슨 소리야.’

그렇게 대답하다가 의문점이 떠올랐다.

그 의문점이란 실재세계와 잿빛세계 사이의 시간 흐름이다.

「잿빛세계는 차원의 균열로 인해 찢겨서 나가떨어진 세계야. 본래 있던 정상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지.」

‘잿빛세계에서는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나?’

「느리고 빠르고를 알 수 없어. 실재세계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인과율들은 잿빛세계에서의 비상식이니까. 반대로 잿빛세계에서의 상식이 실재세계에서 비상식이 되기도 할 거야.」

‘뭔 소리야?’

「알 수 없다고.」

「잿빛세계와 실재세계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무엇 하나 정의할 수 없어. 애당초 두 세계 사이에 어떤 연결점들이 있는지도 불투명해.」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런 세계를 두려워하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니까.」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거미 악귀의 흔적을 찾았다.

‘지금 내겐 악귀가 한 마리도 없어.’

「악귀가 사냥보다 중요해?」

목줄 능력이 있는데 악귀가 없으면 그 능력이 무슨 소용인가.

실재세계로 가서 나를 강령술사라 소개하며 다닐 텐데 악귀도 한 마리 없어서야 되겠나.

‘지역을 탐지해. 거미 악귀를 찾아.’

「이 근방에 있는 거미 악귀는 없어. 역병 마녀랑 싸우느라 다 죽었잖아.」

계속 숲속을 걷다 보니 몇몇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의 울퉁불퉁한 지면을 살펴보면 거미의 뾰족한 다리로 찍은 듯한 발자국이 보인다. 전에 역병 마녀와 싸우면서 남겨진 발자국이라고 보기엔 그 흔적이 너무도 선명했다.

선명한 발자국은 숲을 가로질러 경사면 아래의 무너진 교회까지 이어져있었다.

「저기 한 마리 있네.」

역병 마녀에게 맞아죽었던 자살기도자의 사체.

쿠적쿠적…!

그것을 거미 악귀 한 마리가 파먹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좀 심상치 않다.

‘거미 악귀 뒤에 서있는 저건 뭐야?’

「쟤도 자살기도자야.」

이전에 목줄로 사로잡았던 자살기도자는 피멍이 든 목에 밧줄을 두르고 긴 혀를 늘어뜨린 형태였다.

그런데 지금 저 거미 악귀 뒤에서 가만히 서있는 자살기도자는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오른손에 작은 과도를 들고 있다.

「왼손을 봐. 손목에.」

녀석의 왼쪽 손목에는 칼로 그은 자국이 몇 줄이나 있었다.

비교적 예전에 그은 듯 일자로 남은 흉터가 있고 그 흉터 밑에는 일자로 자리한 피딱지가 있고, 또 그 피딱지 밑에는 방금 그은 듯 선명하게 피를 뚝뚝 흘리는 상처가 세 줄이나 더 있는 것이다.

‘…악은?’

「8.」

자살이 죄악인가.

해결사로 활동하면서 자살을 원하는 이들은 몇 번인가 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그들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거나 나쁜 짓을 한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부모, 가족, 지인들한테 죄라는 말이지. 세계가 정의하기론.」

그래,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든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는 행위니까. 어떤 관점에선 주변인들에게 괴로움을 무책임하게 떠넘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식으로 죽어서도 이물이 되어 영원토록 잿빛세계를 배회하는 자살기도자가 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저렇게 자살한 이들보다 훨씬 흉악한 자들이 실재세계에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자살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봤어?」

‘애가 자살해도 슬퍼하지 않을 부모는 있겠지.’

「나약한 자들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상대적으로 강한 자들이 살아남아. 그렇게 남은 인간들이 더 강한 인간을 낳는 법칙이지. 그렇게 창조된 거야.」

또 잡소리를 하고 있다.

‘그건 모독이야. 신이 무슨 이유로 사람에게 그런 끔찍한 법칙을 만들었겠어?’

「지옥과 악마들도 만드신 분인데 못할 거 있나.」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그런 법칙을 적용할 이유가 없다고.’

「이유가 없긴 왜 없어? 모든 인간들이 전부 착하고 완벽해선 안 되잖아.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왜.

「구경하는 재미가 없으니까.」

…라며 신의 의중을 주장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녹아들어 있었다.

「그런데 넌 신앙심도 별로 없으면서 왜 이럴 땐 신 편을 들어주는 거야?」

신에겐 선과 악이 없다.

선은 천사이고 악은 악마인 세계니까. 하지만 천사와 악마는 신처럼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전능한 신을 욕할 때도 원망할 때도 많았다. 불합리하고 괴로운 상황에 노출될 때마다 그렇게 신을 탓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다시 신에게 의지하게 되는 법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겪은 시련들은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들도 나중의 나를 만들어갈 것이니.

겪어봐서 안다. 인생에 준비된 시련들을 현명하게, 정답에 가까운 방법들을 골라 이겨내면 분명 돌아오는 것이 있다.

내 입장에서는 신이 나쁜 게 아니라 승천자가 나쁜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듣기 좋게 해석한 거 아니야?」

‘악마나 천사들은 또 달리 해석하겠지. 하지만 난 세인트 왕국에서 그런 상식을 배우며 자라난 사람이야.’

신은 그저 만들어놓고 지켜본다.

제대로 살다가 죽은 자는 천사들이 있는 천국으로, 그 반대의 경우엔 악마들이 있는 지옥으로 보낸다. 그밖에 다른 일들은 천사와 악마들이 치고받고 싸우며 처리한다. 그들은 그런 운명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천사나 악마들과 달리 자신들의 ‘선악’을 선택할 권리가 있도록 창조되었다.

날 때부터 악한 자도, 날 때부터 선한 자도 없다.

일단 사람이라면 모든 것이 선택이다.

‘나는 신의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야. 단지 선악의 경계가 없는 그분의 의도를…. 악마의 것처럼 해석하는 건 이상하다는 말이라고.’

「난 너처럼 그렇게 인간적으로 생각할 줄 몰라. 악령인 내 입장에서는 신이 악한 편에 속하는 것 같은데.」

이따금씩 내 안의 악령이 하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경계심이 생기곤 한다.

녀석은 악령이고 나는 사람이니까.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함께 싸운다고 하여도 우리 둘은 엄연히 다른 ‘족속’인 것이다.

「너 말고 다른 인간들이 어떤 죄를 저지르고 어떻게 뒈지든 관심 없어. 그냥 우리끼리 잘 살고 계속 강해지면 돼. 나한텐 그게 전부야.」

나는 숲에서 빠져나와 무너진 교회까지 내려왔다.

자살기도자의 사체를 파먹고 있는 거미 악귀와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또 다른 자살기도자.

둘은 내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력 발산.’

거미 악귀의 악은 45. 자살기도자의 악은 8.

반면에 내 영혼과 함께인 악령은 836.7의 악을 내재하고 있고, 그 악을 기반으로 발산되는 영력은 녀석들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키기기기….”

살점에 정신이 팔렸던 거미 악귀는 뻣뻣하게 위축되어서 뒷걸음질을 쳤다. 나를 보는 16개의 붉은 눈알 속에 두려움이 엿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자살기도자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 시선 속에는 무언가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거미 악귀는 널 두려워하고 있어.」

아직 목줄을 채우기 전이므로 ‘악귀’가 아니라 ‘이물’이겠지만.

어쨌든 목줄을 채우기 위해선 상대 이물이 내게 조금이라도 의존하도록, 내게 조금이라도 원하는 것이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목줄의 조건이다.

「이제 거미 악귀 정도는 쉽지.」

나는 헤집어진 사체로 다가가서 손으로 살점을 떼어냈다. 그렇게 손에 쥔 살점을 거미 악귀에게 대뜸 내밀었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먹었냐.”

“…키이익….”

“이리 와. 네 형제들도 나랑 함께였어.”

거미 악귀는 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영력 발산 탓에 녀석의 입장에서 나는 아주 거대한 존재처럼 느껴질 것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해주마.”

거미 악귀에게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지능은 없다. 그래도 녀석은 대충 내 뜻이 무엇인지 알아들었으리라.

결국 녀석은 내 손에 담긴 살점에 입을 대고 말았다.

이것도 영력 발산의 힘이 커진 덕분이다. 목줄을 채우기까지의 과정이 저번에 다른 거미 악귀를 상대했을 때보다 수월해졌다.

「걸렸어. 목줄.」

이제 나는 자살기도자에게 시선을 옮긴다.

손목에 상흔이 가득한 녀석은 우울하게 축 늘어진 눈으로 날 보면서 뭔가를 바라고 있다.

「생긴 건 달라도 영락없는 자살기도자야. 저번이랑 똑같아.」

간단하다.

녀석은 죽음을 원하고 있다.

자살기도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저주에 걸린 이물이다. 그래서 좀 전까지는 거미 악귀에게 죽임당하기를 기대했고 이제는 내게 죽임당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기도자에게 목줄을 채우는 건 이처럼 쉽다.

“내가 널 죽여주겠다.”

이런 거짓말 한 마디면 자살기도자는 내게 의존하게 된다. 곧이어 나는 자살기도자에게 목줄이 채워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잠깐.」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내 영혼에 잠식을 시도하는 듯했다.

‘이게…. 뭐지…?’

무력하고 우울하다.

갑작스레 기분이 이상하다.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발악하는 내 처지가 불쌍하고 이미 죽어서 없는 사람들이 자꾸 생각나서 내 발목을 붙잡는 것 같다.

지나온 내 인생이, 과거의 기억들이 쓸데없이 떠올라서 현재의 나를 옭아매는 듯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딴 나약한 생각이나 하고 있지?

「이 녀석에겐 주술적인 능력이 있었어.」

이 감정에, 이 기억에, 이 불쾌한 느낌에 잡아먹히면 안 된다.

「자살 충동.」

그런 능력은 처음 들어본다.

「자신과 함께 같은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 다른 존재들에게 우울감과 무력감을 전파하는 주술이야. 항시 발동으로.」

이러고 있으니 반발심이 생긴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반발심은 무언가 공격적인 것이 되었다.

나는 자살기도자를 노려봤다.

“너한테 퍼줄 동정심은 하나도 없어.”

「빼앗아.」

자살기도자. 남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고 자신의 목숨을 끊은, 어찌 보면 불쌍하다고 여길 수 있는, 죽어서도 잿빛세계에서 방황하는, 세계의 지나친 엄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물.

「놈이 갖고 있는 능력을 빼앗아.」

그랬던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다. 아니, 틀렸던 건지 맞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부아가 치민다.

놈은 사악하다. 자살기도자 자체는 사악하지 않지만 놈의 존재가 다른 이들에게 해악이다. 그런 것 같다.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왜 나한테 좆같은 주술을 부리고 있어?”

꼴도 보기 싫다. 녀석이 갖고 있는 우울감과 무력감에 공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자비롭게 나누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지금 당장 녀석을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 죽여버리고 싶다.

나는 쇠도끼를 들었다.

「자살 충동. 놈이 갖고 있는 저주 속성의 고유한 주술.」

「탐나는 능력이야.」

어째선지 자살기도자는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게 어찌나 꼴 보기 싫은지. 나도 힘들지만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 새끼의 괴롭다고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말하는 눈빛이 사실은 나의 알량한 관심과 내 마음의 어떠한 소모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순간적인 위로의 감정을 가져봤자 내 마음에 새겨진 상처보다 제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몇 배는 더 깊다고, 병신처럼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도 몰랐고 이 정도로 화를 내게 될 줄도 몰랐고 내 입에서 이런 말이 금방 튀어나오게 될 줄도 모르면서 내뱉었다.

“…씨발, 그래서 네가 듣고 싶은 말이 뭔데?”

그러자 자살기도자는 대답했다.

“……죽고 싶다아….”

“뭐, 이 새끼야?”

“죽고 싶다…. 나는 죽을 거다…. 나는… 힘들다….”

내 질문에 돌아온 것은 솔직한 대답이 아니었다. 놈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다들…. 나를 봐……. 이 손목…. 봐….”

그건 자신의 비극을 거름으로 삼은 과시였다.

흉터 가득한 손목을 내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상처…. 나의 괴로움……. 너보다 내가 더……. 훨씬 더 큰 상처를…. 나는 이렇게나…….”

손목 좀 짼 것 가지고 염병할 새끼가, 누가 보면 전쟁터에서 얻은 영광스러운 흉터라도 되는 줄 알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불우하고 불행해서…. 커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가난…. 무시…. 무능력…. 엄마랑 아빠는 그런 나를 한심하게…”

쿠직!

나는 쇠도끼로 녀석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오.」

듣기 싫었다.

솔직히 반쯤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녀석의 주술에 대항하려고 키웠던 반발심이 분노로 이어져 버렸다.

그래서 좀 전까지 내가 녀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괜찮아. 잘했어.」

「목줄 채워봤자 딱히 써먹을 곳도 없는 놈이었어. 오히려 죽어야 쓸모가 있지.」

이후 녀석의 사체는 굶주린 거미 악귀가 우적우적 파먹었다.

* * *

세인트 왕국의 뒷골목이란 번화가의 특정한 골목들을 기점으로 들어갔을 때 나오는 특정 영역을 뜻한다.

이러한 뒷골목에서는 청부, 암거래, 마약, 매춘, 조직 활동, 접대, 결투장 등 왕국에서 죄악으로 규정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왕국은 이러한 뒷골목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왕은 뒷골목이 가진 기능이 자국에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인지,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죄악이나 온갖 범죄에는 기본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의뢰소는 신분, 직종, 목적, 적법함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의뢰를 처리한다.

고급 주점으로 위장한 의뢰소는 24시간 문을 열고 있다.

해가 떨어진 시각에 업무를 보는 이는 얼굴에 문신이 빼곡한, 늘씬하고 키가 큰 체형의 중년 남성이다.

그의 짧고 단순한 이름은 ‘헤로’.

의뢰소를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 헤로를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헤로 씨….”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적갈색의 비단옷에 매끈한 다리를 다 드러내고 있는 미모의 여성.

그녀는 헤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금발 사이로 찰랑거리는 보석 귀걸이는 산 채로 뽑은 듯한 눈알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귀띔이라도 조금만 해줘요. 나만 알고 있을게.”

그러나 헤로는 미소를 만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하. 송구하지만 저희는 모든 의뢰인에 대한 비밀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에이,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봐요?”

“제 귀에 들어오는 말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말을 제 입으로 직접 꺼내드릴 수는 없는 입장인 점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베르자인 님.”

순간 그녀는 표정을 구겼다가 다시 여유로운 얼굴로 구김을 덮어버렸다.

“오늘 낮에 케베크 주조소에서 이상 현상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런가요?”

“….”

베르자인은 헤로를 슬쩍 떠보려고 했지만 그는 얼굴에 철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아무 반응도 드러내지 않았다.

“됐네요. 됐어.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알아봐야 했는데 내가 괜한 기대를 했지.”

“원하시는 정보가 있다면 그것을 의뢰로 올려드리는 일은 가능합니다만. 그렇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그냥 내 힘으로 알아보…”

“베르자인.”

그녀는 흠칫하며 몸을 돌렸다. 자신의 뒤에서 기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그리고 헤로는 변함없는 표정과 말투로 그 기이한 자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손님. 이 의뢰소엔 첫 방문이신가요?”

“이 모습으로는 처음이지.”

기이한 목소리, 까마귀를 닮은 기괴한 방독면, 어두침침한 핏빛 로브, 로브 안쪽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방어구, 그리고 등에 매고 있는 커다란 쇠도끼.

“헤로. 베르자인 좀 빌릴게.”

“그건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 상관없습니다만, 손님께서 제 이름은 어떻게…”

“당신 누구야?”

시간대는 새벽. 음침한 뒷골목의 의뢰소.

이건 뒷골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암거래 상인인 베르자인이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리라.

“누가 보냈어?”

그녀는 자신과 경쟁하는 다른 상인이 살인청부라도 했는가 싶었다.

그러나 기괴한 방독면을 쓴 자는 헤로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툭 던졌다.

“…헤로. 왕국에서 입이 가장 무거운 너라면 내가 여기에 왔다는 걸 떠벌리고 다니진 않겠지.”

헤로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기괴한 차림새에 변조된 목소리지만 그 정체가 누구인지는 대강 알아차렸다는 표시였다. 그래도 능숙한 헤로는 대답을 한번 꼬았다.

“손님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물론입니다. 의뢰소에 누가 방문했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어떤 의뢰를 했는지. 이곳에서 오가는 모든 대화는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됩니다. 설령 ‘추방자’라고 해도 말이죠.”

그러는 사이에 베르자인은 자신의 귀걸이에 살금살금 손을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만둬. 내 눈알을 뽑을 필요는 없어.”

베르자인은 그에게 간파당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귀걸이가 주물이라는 점. 그리고 그 주물로 어떤 주술을 부릴 수 있는지도 말이다.

“나야.”

마침내 그는 방독면을 벗고 얼굴을 보였다.

헤로는 입모양만 ‘오’하는 표정을 지었고 베르자인은 긴장이 풀려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뭐야, 너 뭔데?!”

페인은 난처하게 손짓했다.

“쉿…! 목소리 좀 낮춰.”

“도대체 어떤 얼간이의 미적감각이지? 그 새대가리 같은 가면은 어디서 주웠어?”

“내가 만든 거야. 이런 설계에는 다 이유가…”

“아하하하하!”

그녀는 배를 붙잡고 괴롭다는 듯 웃었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페인 씨.”

“내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물어보지도 않네.”

“누구에게든 신기한 능력은 있으니까요. 하하. 어차피 베르자인 님께 정체를 밝히실 예정이었다면 제가 말을 숨길 필요도 없었네요. 다시 해결사로 활동하실 예정인지요?”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알겠습니다.”

드디어 웃음을 멈춘 베르자인이 끼어들었다.

“페인! 그래서 나는 왜 찾는 거야?”

“잠깐 바깥으로 나와. 제발 목소리 낮추고.”

“짧은 이야기면 여기서 하지?”

“너 살고 있는 은거지에 신세 좀 지고 싶어.”

베르자인은 돈이 되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팔아치우고, 만들고, 빼앗고, 수집한다.

페인은 그런 자에게 접근한 것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의뢰소의 문 앞으로 나왔다.

칙칙하게 노란빛을 내는 마법 가로등이 거리를 듬성듬성 비추고 있다.

그리고 당장 거리에 보이는 이는 없다.

“아무리 하루라도 추방자 신세인 너를 내 은거지에 숨겨주는 건 꺼림칙한데.”

그녀도 나를 사형수가 아닌 추방자로 알고 있다. 이쯤 됐으면 왕국 사람들 모두가 날 추방자로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 은거지에 잠시라도 널 들이는 건 각오가 필요한 일이야. 아무리 뒷골목이라도 추방자는 추방자잖아.”

“알아.”

“내가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을까?”

베르자인은 그러면서 페인의 전신을 음흉한 시선으로 훑었다.

“나랑 몇 번 잠자리 갖는 걸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안다니까.”

페인은 베르자인을 포함해 주변 모든 것들을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베르자인은 오랜만에 반가운 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말이 많아진 모양이다.

“무료로 내 의뢰를 처리해 준다고 해도 거절할 거야. 요즘 왕국이 흉흉해서 다들 사정 안 좋은 거 알지?”

“그게 아니라 너를 통해서 팔아치울 물건들이 있어. 앞으로 계속 내 손에 들어올 것 같으니까 거래처랑 연줄까지 필요해. 그래서 여러모로 날 들이면 이득일 거야.”

“본격적이네. 암시장은 뒷맛이 찝찝하다면서 날 내칠 때는 언제고?”

“생각이 바뀌었어.”

“곧 죽어도 불법은 안 된다던 친구가 무슨 바람이 들었을까. 이제부터 나쁜 놈 행세라도 하려는 거야?”

“너 본론부터 말하는 거 좋아하잖아. 농담 따먹기든 친한 척이든 본론 끝나고 해.”

“우와, 사람이 왜 이렇게 흑화 됐지? 눈동자까지 빨갛게 변해가지고 살벌하네.”

“….”

“알겠어, 알겠어.”

베르자인은 페인이 무슨 일을 겪었는가 묻고 싶었지만 꾹 삼키기로 했다.

얼핏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그는 정말 추한 몰골로 붉은 눈까지 보이며 군중들 앞에서 추방당했다고 하였으니.

그의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천천히 알아봐도 된다.

“좋아. 네가 팔고 싶다는 게 뭔지 말해봐.”

페인은 혹여나 누가 들을까 작게 대답했다.

“주물.”

베르자인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평범한데?”

“…잿빛세계의 주물.”

그 순간, 베르자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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