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5화 (15/181)

2. 세계 유일의 강령술사 (5)

나름 이름값이 있는 베르자인은 암시장을 꽉 쥐고 있는 암거래 상인들 중 하나다.

그녀가 운영하는 ‘황금달’이라는 조직체는 수십의 암거래 상인들과 지속적으로 거래를 주도하고 있으며, 조직체 휘하에 있는 자객들의 숫자만 내가 알기로 50이 넘는다.

아마 내가 이 은신처로 오기까지도 베르자인을 호위하는 자객들이 그림자 속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리라. 이를테면 건물의 지붕이나 창문에서 말이다.

「기척을 숨겨도 탐지 2계 앞에서 대충은 보이지.」

나는 탐지 2계 덕분에 자객의 숫자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새벽에도 그녀의 곁에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너를 감시한 자객은 세 명.」

「그리고 지금은 문밖에 둘.」

양초가 밝히는 실내에서 꽃내음이 난다. 부드러운 카펫과 푹신한 의자가 비치된 이곳은 베르자인의 집무실이다.

4층 높이에 위치한 집무실의 창문은 새까만 커튼으로 살짝 가려져있다.

“꺼내봐. 잿빛세계에서 가져왔다는 주물.”

“이걸 너한테 보여주기 전에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내가 자고 있을 때 찌르면 후회할 거라고.”

그렇게 경고하자 베르자인은 책상에 팔꿈치를 기댔다.

그대로 턱을 괴고는 눈알 모양의 귀걸이를 요염하게 만지작거렸다.

「이 뱀 같은 년이…!」

‘괜찮아. 내 목숨엔 관심 없을 거야.’

베르자인의 귀걸이는 평소에 순백의 귀와 함께 금발 속에 숨어있는 것인데, 그녀가 가진 재산 중에서 가장 비싼 주물이라는 소문이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공급자를 내가 왜 죽이겠어?”

나는 답답한 방독면을 벗어서 목에 걸쳤다.

“넌 탐욕적인 면모가 있으니까.”

“그래도 계산은 확실히 하잖아.”

그녀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정이라곤 티끌만큼도 기대할 수 없는 자다. 대신 그만큼 이해관계에 있어 합리적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이 여자한테 네 정체를 밝혔잖아. 너 그냥 황금달이랑 같이 가기로 한 거 아니야?」

‘그렇다고 너무 쉬운 상대로 보이면 약점을 잡힐지도 몰라.’

나는 잿빛세계의 주물을 실재세계로 가져올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공급자다. 그래서 혹시 모른다.

‘약점을 잡아서 날 평생 이용해먹을 생각도 하고 있을 거야.’

베르자인은 절대 선의 축에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뿐만 아니라 뒷골목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페인…. 우리가 이렇게 삭막한 관계였니?”

“거의 타인이지.”

“여기엔 너랑 나밖에 없으니까 안심해. 물건만 확인하고 정직하게 계산할 테니까.”

“안심하고 싶지. 그런데 문밖에 자객 두 명이 신경 쓰이네.”

그러자 베르자인은 귀걸이를 몇 번 더 만졌다.

「문밖에 두 명이 물러났어.」

“됐지?”

나는 대답 대신 품속의 주물을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렸다.

불결한 살가죽으로 봉합된 부두인형이다.

“그렇게나 뜸 들이던 물건이 고작 이거야?”

너무 평범한 주물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부모가 사준 인형이다.”

“없잖아.”

“나 말고.”

나는 부두인형을 그녀 앞으로 밀어냈다.

“잘못된 아이라는 이물이 들고 있던 부두인형이야. 그리고 이 주물의 이름이 ‘부모가 사준 인형’이라고.”

“이물?”

“그런 게 있어. 잿빛세계의 악령 같은 존재들.”

내가 앞쪽으로 인형을 밀어내자 베르자인은 인형을 만져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인형을 집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 책상 한쪽에 앉혀 놓았다.

“보니까 저주 속성의 주술이 담긴 주물이네. 한 대상을 물리적으로 해할 수 있는 부두인형.”

“그렇지.”

“그거 말고는?”

“술식의 준비절차가 불필요해.”

그러자 베르자인은 한쪽 눈썹을 구겼다.

“대상의 손톱이나 머리카락 따위를 넣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맞아. 그냥 쓰면 주술이 발동하는 주물이야. 다른 부두인형들처럼 대상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저주의 위력도 증가해.”

내가 그렇게 당당하게 설명하자 그녀는 픽 웃었다.

“페인.”

“왜.”

“사기를 칠 거면 상대를 봐가면서 해.”

“너를 상대로 이렇게 허접한 사기를 칠 것 같냐?”

“어쩐지 잿빛세계에서 돌아왔다는 것부터가 찜찜했어.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봐. 승천자의 추방 술식에 오류가 생겨서 운 좋게 엉뚱한 곳에 떨어진 거지?”

“운 좋게 엉뚱한 곳?”

“너 잿빛세계 말고 실재세계의 다른 곳에 떨어진 거잖아. 사람이 어떻게 잿빛세계에서 돌아오냐고.”

“그럼 이 주물은 뭔데?”

“외부에서 가져온 거겠지.”

“한참 잘못 넘겨짚었어.”

“이러지 말고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해.”

나는 부두인형을 손에 들고 베르자인의 존재를 인식한다.

“너라면 싸게 빌려줄게. 대신 갚을 때 조금 더 얹어서 갚는 건 원칙이니까 그것만 주의하읍…? 읍…. 읍…!”

그녀의 입술이 제대로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손가락으로 부두인형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두인형 본 적 있냐?”

“……우읍?!”

“날 믿고 말고는 네 자유겠지만 선택은 확실히 해. 이 부두인형만 받고 끝낼 건지, 아니면 앞으로도 잿빛세계의 다른 주물들을 받아볼 건지.”

* * *

날이 밝았다.

멀쩡한 벽이 있는 공간에서 깨끗한 침대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은 그간 쌓였던 피로를 한 번에 풀어주었다.

방문은 제대로 잠겨있고 누군가 들어왔던 흔적은 없다.

그래서 지금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이런 안도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살았다.’

뒷골목의 조직체, 황금달.

신뢰할 수 없는 암거래 상인, 베르자인.

그런 그녀의 은거지에서 잠을 자고 멀쩡하게 눈을 떴다는 것부터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네가 잠든 사이에 자객이 몇 번 복도를 지나긴 했는데 단순한 순찰이었어.」

조그만 화장대 앞에는 방독면과 동전 네 개가 있었다.

「그나저나 베르자인의 은거지에서 무료로 저녁도 먹고 잠도 잘 거였으면…. 홀른한테 4루아는 왜 빌린 거야?」

‘베르자인이 거절할 경우도 대비한 거지.’

나는 검붉은 로브를 입고 방독면을 얼굴에 썼다. 방문 옆에 세워둔 쇠도끼를 등에 매고 품속의 단검도 멀쩡한지 점검해본다.

「나는 그 뱀 같은 여자 못 믿겠더라. 뒤에서 그 인형을 비싸게 팔고 너한테는 푼돈만 남겨주는 거 아니야?」

‘믿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자는 아니야.’

베르자인은 정이 없고 탐욕적이지만 이성적이고 철두철미하다. 자신의 강점과 매력이 무엇인지 알고 완벽하게 이용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필요한 관계만 맺고 필요가 없어지면 뒤탈이 없도록 교묘하게 버린다.

그런 그녀가 앞으로 나를 통해 수많은 주물들을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인데 사기를 친다는 건, 당장 눈앞의 일시적인 이익을 얻고자 미래의 이익을 팔아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다.

「네 능력 말고 네 몸에도 관심이 있던데. 네가 예전에 그 여자랑 한번 자서 그런가?」

‘그것도 내가 베르자인을 선택한 이유들 중 하나야.’

뭐가 되었든 배신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좋다.

그녀는 웬만해선 내 뒤통수를 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잿빛세계로 갈 거야?」

‘사냥하러 가야지. 주물이 필요하기도 하고.’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선생의 아들인 로나디를 찾아냄으로서 거래를 완료하는 것.

다른 하나는 승천자를 죽이는 것.

「왕국을 배후에 두고 신성한 힘을 휘두르는 승천자는 너한테 상성 최악의 강적이야.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할 텐데 그놈의 로나디한테 굳이 노력을 허비해야겠어?」

‘승천자를 죽이기 위해선 돈과 인맥이 필요하고, 돈과 인맥이 있으면 로나디를 찾는 노력도 크게 덜 수 있어. 내가 하는 일들은 다 연결된 거라고.’

「나 같으면 잿빛세계에서 1년 정도 사냥만 해서 강해진 다음에 그냥 다 쓸어버리겠다.」

‘혼자서 왕국과 전쟁이라도 하자는 소리냐?’

「시간만 있으면 가능하잖아.」

‘그 전쟁에 투입되는 기사들을 다 죽이고, 징병되는 사람들, 교회의 무고한 신관과 신도들, 모든 마법사들을 다 죽이면 나한테 뭐가 남는데?’

「더 강해지겠지!」

이런 멍청한 새끼가.

‘그런 식으로 전부 부수고 죽여서 끝내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뭐 남기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야?」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잿빛세계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던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요리를 하는 사람, 장비를 만드는 사람, 옷을 짜는 사람, 도로를 깔고 건물을 세우는 사람,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으면 홀로 남은 자의 삶은 어떻게 되겠는가.

‘푹신한 침대나 멀쩡한 저녁식사는 찾을 수 없게 된다고. 이렇게까지 풀어서 설명해야 알아듣냐?’

「아직 못 알아들었는데.」

나는 잿빛세계로 갈 채비를 마치고 방안에서 다차원 능력을 발동했다.

키이잉!

이제는 핏물로 그려지는 역오망성과 고대의 달력이 익숙하다.

* * *

천막으로 물품을 가린 쌍두마차가 세인트 왕국의 어느 광장을 통과하는 중이다.

말 두 필과 함께 마차를 끄는 상인은 여섯 명의 호위를 붙이고 있는데, 천막으로 마차 내 물품을 다 가린 모습과 호위가 여섯이나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수상하다.

“멈추십시오.”

상인은 고삐를 당겼다. 광장에 배치된 기사 두 명이 마차를 가로막은 것이다.

푸륵!

상인은 순순히 마차를 멈추고 기사들의 형식적인 검문에 응했다.

“예, 기사님들.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뭘 싣고 있습니까?”

기사가 그렇게 물으며 접근하자 호위들이 기사를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나 상인은 호위들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기사들에게 길을 터주도록 하였다.

“식자재를 옮기고 있습니다요.”

한 기사가 눈짓하자 다른 기사가 마차 뒤로 가서 천막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두툼한 보따리와 나무상자들이 쌓여있었다.

“….”

그리고 나무상자에는 용도가 제각각인 골동품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골동품들이란 검은 양초, 깨진 손거울, 심하게 휜 칼, 유리로 만든 해골, 표지가 없는 서적 등이었다.

마차 뒤에서 한 기사가 물건들을 확인하는 사이, 마차 앞쪽의 상인은 기사에게 슬쩍 일렀다.

“…황금달입니다만.”

기사는 잠시 광장의 행인들을 살피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식자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렴요. 요새 악령이니, 추방자니 하면서 흉흉한 건 압니다요. 하지만 재고가 너무 많이 쌓인 걸 어쩝니까. 위에서 자꾸 팔아치우라 하는데.”

“베르자인 씨가 그럽니까?”

“예…. 뭐, 그분은 제 위의 위의 위에 계신 분이긴 하지만요…. 따지고 보면 그렇지요.”

그때 마차 뒤쪽에 있던 기사가 뭔가를 들고 왔다.

“그건 뭐야?”

“이거….”

부두인형이었다.

그것도 마치 사람의 살가죽을 뜯어다 봉합한 것처럼 보고만 있어도 불쾌한 인형이었다.

“이보십시오. 이건 형태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여길 무사히 통과한들 어딘가 거리에서 걸릴 겁니다.”

“앗, 그건….”

“압수하겠습니다. 이 물건은 그냥 보내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상인은 울상이 되었다.

“아이고…. 그 많은 것들 중에 하필이면 그걸 집어왔어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있지요. 그건 부모가 사준 인형이라고 하는 부두인형인데, 출처가 불분명하고 연구가 덜 된 주물입니다요. 맨손으로 만지면 저주에 걸릴지 어떤 해를 입을지 전혀 모른다는 말이에요.”

인형을 들고 있던 기사는 흠칫했다.

“상인. 딱 봐도 부두인형인데 연구가 덜 됐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그 녀석은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없어도 효력을 발휘한다는 말씀이지요. 술식이라는 준비과정이 필요 없어서 주술사가 아니라 일반인도 쓸 수 있답니다. 어쩌면 갓난아기도 써먹을 수 있을걸요?”

누구나,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부두인형.

한 마디로 지나치게 편리해서 도리어 위험하다고 여길 수 있는 주물이었다.

그래서 상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들고 거리를 통과 못한다는 걸 누가 모르나. 처음부터 네놈들한테 팔 생각이었지.’

그리고 매일 불명확한 상대와 싸울 가능성을 우고 살아가는 기사들로선, 그런 물건을 호신용으로 하나쯤 가지고 싶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불법이지만.

“…그래도 자기 주인은 기똥차게 알아보는 주물이라서, 한 사람이 제대로 구매해 소유하고 있으면 별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요. 그거 하나 불안한 점을 빼놓고선 참으로 완벽한 주물인데….”

“얼마입니까?”

“이게 말씀드렸듯이 참으로 완벽한 주물입니다요. 본디 주물이란 주술적인 힘을 갖고 있는 물건으로 가장 중요한 건 편리함과 위력이 아니겠습니까요. 그래서 이게, 누구나 쓸 수 있는 정말 좋은 주물이라 어쩔 수 없이 가격이 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일반인이 구매해서 일반인에게 쓴다면 소리 소문도 없이 한 사람을 죽이고 증거조차 남지 않을 주물.

황금달의 베르자인이 처음에 불렀던 값은 800루아.

그것이 오늘 새벽부터 암거래 상인들 사이에 돌고 돌아서 1360루아까지 뛰었다.

그리고 일단 희소성 있는 주물이 뒷골목에서 빠져나왔으면 말단 상인이 부르는 게 값이다.

“원래 2000루아인데, 기사님들 형편과 수고를 감안해서 1600루아로 깎아드릴 수 있지요.”

* * *

부모가 사준 인형.

베르자인은 그 주물을 800루아부터 유통을 시작하겠다고 했으며 800루아의 5등분 중 하나인 160루아를 가지겠다고 했다.

「황금달 상인들 수학으로는 그걸 20퍼센트라고 했지. 그 복잡한 걸 어떻게 계산하는 건지 모르겠네. 베르자인이 계산식을 보여주긴 했는데….」

결과적으로 난 그 주물을 팔고서 하루 만에 640루아라는 목돈을 벌었다.

「화장대 서랍에 있는 돈주머니…. 누가 훔쳐가진 않겠지?」

‘베르자인의 은거지엔 그럴 사람 없어.’

640루아나 있다. 이제 내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실재세계로 돌아가 은제 무기의 소재를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640루아로는 좋은 품질을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조금 더 돈을 모으기로 했다.

「저 건물이야.」

나는 잿빛세계의 폐허를 돌아다니다가 다수의 발자국을 찾아내 추적했다.

「저건 황금달에서 후원하는 도서관이었나?」

‘맞아. 실재세계에서는.’

먼지와 재가 쌓인 도로 위에 사람의 발자국 같은 것이 여러 개 찍혀서 이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발자국들의 크기와 보폭은 이물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다.

이곳은 실재세계의 뒷골목이 있는 위치.

저 4층짜리 건물은 실재세계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정확히는 도서관인척하고 그 안에서 주술서들을 암거래하는 곳이었지. 이 세계에선 어떠려나.」

창문이 나무판자로 다 막혀있는데 출입문은 휑하니 열려있다.

‘깊게 들어가면 어두울 거야. 밤눈 좀 쓰자.’

「밤눈 개방. 남은 악은 24.」

밤눈이라는 능력은 영력 발산 1계, 감각 증폭 1계, 철인 1계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개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계가 없는 항시 발동 능력이라 강화는 할 수 없지만 일단 가지고 있으면 좋은 기본기가 된다.

「버려진 도서관 같은 분위기네.」

나는 건물의 출입문 너머를 가리고 있던 어둠까지 꿰뚫어보았다. 책장에 책은 하나도 없고 바깥처럼 먼지와 재가 수북하게 쌓인 공간이 일부 엿보인다.

그런데 책장 사이를 통과하는 희미한 발자국들이 더 깊은 곳으로 이어져있는 듯하다.

‘무언가의 소굴인가.’

「저 도서관에 지하가 있었어?」

‘지하 1층에 넓은 공간이 있어. 가끔 그곳에 주술사나 상인들이 모여서 황금달의 주술서를 경매하기도 해.’

나는 쇠도끼를 고쳐 쥐고 조심스레 도서관 내부로 진입했다. 영구적인 밤눈 능력을 개방한 덕분에 도서관 내부의 어둠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발자국을 따라서 소리 없이 이동해보니 역시나, 발자국은 2층이 아닌 지하로 이어져있었다.

이러면 지하로 가기 전에 2층, 3층, 4층부터 순서대로 확인해야겠다.

「그러다 고립되면 어쩌려고?」

‘지하에 내려갔다가 퇴로를 막히는 게 더 위험해. 대신 위쪽으로 가면 2층부터는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면 되니까.’

여차할 때 판자를 부수고 창문을 깰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건 철인 능력이 있기에 고려할 수 있는 일이다.

반면에 당장 지하로 내려갔다가 위쪽에서 무언가들이 내려와 내 뒤를 막아버리면, 그때는 선택 가능한 퇴로가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지하를 내버려 두고 2층부터 올라왔다.

1층과 똑같은 구조로 된 도서관이었고 책장에 책은 한 권도 없었다.

「여기엔 발자국도 없네.」

3층도 상태는 같았다. 마지막으로 4층에 올라와보니 도서관의 사서가 쉬고 생활할 수 있는 가정집 같은 공간이 나왔다.

물론 멀쩡한 가구도 물건도 없이 먼지만 쌓인 공간이었지만.

「확실하다니까. 몇 놈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탐지되는 놈들은 전부 지하에 옹기종기 모여있어.」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서의 방을 뒤적였다. 부엌, 거실, 화장실, 침대 밑, 수납장까지 모조리 열어보며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은 없는지 확인했다.

손에 잡히는 것 대다수가 쓰레기였지만 막판에는 옷장에서 나무 십자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범한 십자가. 주물은 아니야.」

‘이 도서관의 사서가 충실한 신도였나?’

「잿빛세계니까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해?」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해?」

‘충실한 신도라면 십자가를 옷장에 처박아둘 리가 없어. 불성실한 신도라면 애초에 십자가를 구매하지도 않았을 거고.’

「누가 선물했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고 버리자니 양심에 찔려서 대충 옷장에 던져둔 거 아니야?」

‘대충 던져두고 걸어둘 곳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십자가를 가질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라서 이유를 모르지만, 신도들이 주장하기를 십자가는 가능하면 높은 곳에 걸어두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야 하늘의 천사들이 십자가를 보고 내려와서 가정의 악을 퇴치해 준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이건….’

버리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어딘가에 걸어두지도 않은 십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옷장 속에 굳이 십자가를 넣어놨다.

‘숨겨둔 거야.’

이건 모종의 이유로 십자가를 급히 숨긴 것이다.

「왜? 이 근처에 십자가를 혐오하는 이물이라도 있나?」

모르겠다.

악령들은 제각기 특성에 따라서 십자가를 혐오하기도, 두려워하기도, 십자가를 보는 것만으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내 안의 악령처럼 어떤 녀석들은 또 십자가에 지극히 무덤덤하기도 하다.

「누가 왜 숨겨둔 걸까?」

‘지금 이곳 지하에 있다는 놈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

* * *

베르자인은 자객들과 함께 어느 방으로 들어왔다.

“여기가 페인이 썼던 방이라고?”

“그렇습니다.”

마치 아무도 이용하지 않은 듯 깔끔하다.

그리고 베르자인은 오늘 새벽부터 아침까지 자객들을 시켜 페인의 출입을 확인하라고 지시했었다.

“그자는 분명히 이 방에 있었고 새벽부터 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창문도 열리지 않았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제 눈을 걸고 맹세합니다.”

베르자인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작은 화장대가 눈에 밟혀서 그 화장대의 서랍에 손을 댔다.

드륵.

서랍을 열어보니 오늘 새벽에 줬던 돈주머니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돈주머니를 직접 열어보았다.

은으로 된 동전과 동으로 된 동전이 수북하다.

“…대충 640루아도 그대로 있는 것 같은데.”

“그자가 정말로 저희가 아는 해결사 페인이라면, 지금은 모든 것을 잃고 돈과 실력만 남은 자입니다. 그런 자가 이렇게 적잖은 돈을 두고 떠났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걔는 어디 갔지? 새벽부터 방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났어?”

그러자 문 근처에 있던 자객이 손을 들었다.

“그래, 너. 말해봐.”

“날이 밝자마자 방에서 해괴한 소리가 나긴 했습니다.”

“어떤 소리였는데?”

“그건….”

자객은 그 해괴한 소리를 무엇으로 설명할까 잠시 고민했다.

“심각한 악령에게 당해서 순식간에 악령화를 마치는 자들이나, 아주 신성한 마법에 당해서 순식간에 잿빛세계로 추방당하는 자들 말입니다. …그렇게 영혼의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 들리는 소리와 유사했습니다.”

베르자인은 그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을…. 추방시킨 건가…?”

그때였다.

“베르자인 님!”

또 다른 자객이 방으로 난입한 것이다.

“무슨 일이야?”

“페르메트 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베르자인의 얼굴에 짜증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황금달에 한 푼도 안 쓰는 찌질한 돼지 새끼가 행차하든 말든.”

“그분께서 대뜸 황금달의 주술서를 대량 매입하고 싶다고, 베르자인 님을 급히 모셔오랍니다!”

“웬 주술서?”

부유한 가문의 젊은 장남인 페르메트는 주물을 모으는 악취미가 있다.

그런데 그는 예전에 베르자인에게 잠자리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후 그것에 앙심을 품었는지, 황금달의 경쟁상대인 조직체들만 의도적으로 이용해왔다.

베르자인으로선 달갑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주술서를 대량 매입하는 건이라고 하니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킬 수 없다. 주술서의 대량 매입은 보통 액수가 아니니까.

‘이래놓고 장난질하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아무리 싫어도 이건 얼굴 보고 흥정이라도 해봐야 하는 일인 것이다.

좋은 일이 될지 나쁜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 베르자인 님?”

“알겠어. 그 새끼 지금 어디에 있는데?”

“도서관 지하 경매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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