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존재감 (3)
소환진 여덟 개에서 떨어진 거미 악귀 여덟 마리.
놈들은 배척자의 필요악이라는 능력에 의해 도망쳤지만 다시 소환되었다.
자기들이 도망쳐서 뭘 어쩌겠는가. 이미 목줄로 묶여서 악귀가 되어버린 이상, 성불하거나 죽기 전까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녀석들의 필요악 때문에 거미 악귀들이 싸우기를 거부하고 있어.」
‘영력 발산 1계.’
총합 1403.7의 악이 내뿜는 존재감은 배척자들의 필요악보다 훨씬 강력한 공포였다.
결국 공중에서 우왕좌왕하던 거미 악귀들은 배척자보다 나를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놈들을 구속해라. 구속하되, 직접적인 싸움은 회피해라.’
“케엑!”
쯔읏…!
배척자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거미 악귀들은 육탄전을 벌이지 않고 허공에서 거미줄만 타고 다녔다. 자꾸만 사출되며 늘어지는 거미줄들은 배척자를 한 놈씩 묶어서 움직임에 뚜렷한 방해를 가할 수 있었다.
투두두둑!
배척자들은 몸을 옭아매는 거미줄을 괴력으로 뜯어냈지만 그보다 거미줄이 달라붙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제 다시 수적으로 우위다. 싸움의 주도권은 내게 넘어왔다. 배척자들은 회피하고 방어하는데 급급한 반면, 나는 지면으로 착지해서 놈들을 직접 노릴 수 있게 되었다.
타다닷!
나는 옴짝달싹 못하는 배척자 한 놈을 노려서 내달렸다.
「물리적인 타격은 안 먹히잖아.」
‘재결합 2계.’
나는 좀 전에 2계까지 강화한 재결합 능력을 발동했다. 이로써 눈앞의 배척자는 처음에 관절이라곤 없는 조각상의 모습 그대로 팔, 다리, 머리, 상체, 하체 따위가 강제로 붙어버렸다.
굳어버린 몸에 거미줄까지 칭칭 감긴 녀석은 절대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완벽히 구속된 녀석의 코앞까지 달려가 녀석의 가슴팍에 직접 손바닥을 댔다.
‘다시 재결합.’
투두둑!! 콰직콰직!
놈의 전신에 균열이 퍼졌다. 하지만 이걸론 부족하다.
‘갈라진 틈에 거미줄을 집어넣어라.’
쯔즈즈즉…!
그 즉시 놈의 균열마다 거미줄이 파고들었다.
이건 단단한 바위에 잔뿌리가 내리는 것과 같다. 거미줄은 재결합의 지원을 받으면서 점점 더 깊숙하게 배척자의 몸을 파고들었다.
‘방혈.’
퍼걱!!!
이윽고 배척자 한 마리를 폭사시켰다.
성공이다.
「거미줄로 혈액을 대체하다니….」
200의 악이 내 영혼 속으로 강물처럼 밀려옴을 느낀다.
남은 배척자는 세 마리.
나는 계속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거미 악귀들은 배척자들을 구속하였고 나는 가까운 녀석부터 차례대로 폭사시켰다. 그렇게 재결합과 방혈을 두어 번 반복한 끝에 배척자를 또 쓰러뜨렸고, 이제는 두 마리만 남게 되었다.
“제단분쇄.”
콰콰콰콰콰!!
다시 부채꼴 모양의 폭발이 일어났지만 이렇게 활용할 공간이 많은 실내에서 내 움직임은 거미 악귀에 의해 자유로웠다.
츠츳…!
나는 내 몸에 거미줄을 붙였다. 공중에서 매 순간마다 거미 악귀에게 명령하여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렇게 공중에서 몸을 움직이니 제단분쇄를 피하는 것쯤은 어렵지도 않은 일이 되었다.
그리고 두 배척자는 흙먼지 속에서 달려드는 거미 악귀 여덟 마리를 상대해야만 했으리라.
놈들의 시야는 막혔지만, 거미 악귀는 시야가 막혀도 거미줄로 놈들의 움직임과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으니.
또한 거미 악귀들이 파악하면 나 역시도 그 정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재결합.’
지지지직!
결국 두 배척자는 움직임의 자유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배척자. 200.」
「세인트교에서 옛 세대의 신관들이 왕국의 안정과 대의를 위해 저지른 죄가 있어. 총 네 번의 세대에 거듭해서 그런 신관들도 네 명이라고 해.」
「사람들은 그들을 추앙했지만 정작 그 신관들은 끝내 자신들을 용서하지 못했어. 그래서 각 세대마다 그 세대의 승천자 앞에서 자결을 했지. 그러면서 세인트교의 천사들에게 자비를 구했던 거야.」
「하지만 신관들은 그렇게 죽어서도 본인들을 차마 용서할 수 없었어. 그들의 사념은 결국 천국으로 오르지 못해 잿빛세계에 갇혀버렸고, 자신들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에 흘러들어가서 이물이 되어버린 거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실재세계에서는 ‘필요악’이었어. 그래서 잿빛세계의 이물이 되어서도 필요악의 행세를 한 거야. 교단이 필요에 의해 저지르는 죄악이 부디 자신들 선에서 끝날 수 있도록, 다른 악이 중앙교회에 더 들어오는 일을 막고 싶었던 거야. 죽어서도 말이지.」
거미들은 천장으로 올라갔다.
바람은 흙먼지를 거두어갔다.
“배척자. 너희의 이야기는 대충 알겠다.”
“인가되지 않은 자. 성전에서 나가라.”
“그러는 너희는 이 중앙교회에 있을 자격이 있는 놈들인가?”
그러자 두 배척자의 적개심이 흐려졌다.
“…너는. 필요악인가?”
“나는 너희가 수십, 수백 년 전의 신관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물론 너희가 왕국과 백성들을 위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지.”
“왕국…. 무사한가?”
“무사해. 세인트 왕국은 악이 넘쳐나는 실재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나라가 되었어. 그렇다고 백성들이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왕권과 세인트교는 아주 안정적이야. 적어도 ‘외부’에 비하면 세인트 왕국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겠지. 이건 너희의 먼 후대가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
“문제가 있어. 난 지금의 승천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든.”
“무슨 일이?”
“날 악령이라고 하면서 죽이고 영혼까지 추방하려 했어.”
“너는. 악령이 아니다.”
배척자는 뭔가 생각이 있었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확실히. 너는 악령이 아니다. 그 사실을 승천자는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모르겠어. 나도 제발 알고 싶다고.”
배척자.
잿빛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이물이다. 과거사를 들어보니 근본은 악하지 않았지만 어떤 죄를 저지르고 이물이 된 과거의 신관들이니, 승천자와 관련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천사들이 실재세계의 성전에 내려가지 못한지 꽤 되었다.”
「…뭐? 천사?」
이건 심상치 않은 정보다.
“사실. 이번 세대의 승천자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천사들이 내려가지 못하는 것. 그는 타락한 승천자다.”
“역시 개새끼였구나.”
“그의 타락. 진작 의심했다. 그리고 오늘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확신했다. 그는 타락했다. 그의 악은 선을 넘었다. 따라서 심판이 필요하다.”
“천사들은 그 새끼를 심판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천사는 기도를 올렸을 때. 티끌 하나 없이 떳떳하고 선한 자의 앞에서만 강림할 수 있다. 역대 승천자들은 모두 천사를 강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승천자. 어느 순간부터 타락하여 그것이 안 되었다. 이는 세인트교에 위해를 가한다. 더 나아가 세인트 왕국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현 승천자를 죽이고 다른 올바른 신관이 그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야겠네.”
“너는. 필요악이다.”
이제 배척자들은 나를 향한 적개심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너는. 악에 맞닿은 육신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영혼은 그릇된 자를 처단하기 위한 복수심. 타오르고 있다. 육신과 영혼을 모두 악으로 바꿔서라도. …기꺼이.”
“우리는 세인트교의 사념이 모여 잉태한 자들. 세대가 남긴 죄악을 떠안는다. 이 세계의 악으로부터 성전을 보호한다. 그렇게 씻을 수 없는 죄악의 굴레에 잡혀, 부서질 때까지 속죄한다. …기꺼이.”
“우리의 일면. 너와 같다.”
“우리는 심판을 원한다.”
* * *
「따지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한 놈당 갖고 있는 악이 무려 200이야.」
「그런 배척자 둘을 굳이 살려서 목줄로 묶은 이유가 뭐야?」
‘쓸모가 있으니까.’
나와 배척자들은 목표가 같았다. 그들은 승천자의 심판을 원하고 나는 승천자의 죽음을 원했던 것이다.
나는 배척자들에게 때가 된다면 실재세계로 소환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배척자들은 내게 ‘의존’하게 되었고, 자발적으로 목줄에 묶여주었다.
이후엔 배척자들의 필요악이라는 능력 덕분에 중앙교회 바깥의 이물들을 쉽게 몰 수 있었다. 그리고 배척자보다 강해서 몰아지지 않는 이물들은 거미 악귀들과 함께 사냥하여 악을 취했다.
오늘은 잿빛세계에서 하루 종일 그런 일을 하였다. 이물을 중앙교회로 몰아넣고 말을 듣지 않는 이물들은 사냥하기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나는 400에 195를 더한 값.
595의 악을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디에 쓸까?」
‘우선은 발화부터.’
불에 약한 악령들도 있으니 당연히 불에 약한 이물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불은 인간이나 짐승에게도 제법 잘 통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어떤 마법사들은 다른 능력 개방에 노력을 투자하지 않고 오로지 발화의 계를 높이는 일에만 전념하여, 불과 관련된 능력들을 개방한 후 자신들을 화염술사(火焰術師)라 칭하기도 한다.
「굳이 전투가 아니더라도 발화 능력은 여러 상황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거니까. 일단 111을 써서 발화 1계까지 개방했어.」
남은 악은 484.
주물, 주술에 의한 영적인 힘을 무언가를 해하기 위해 쓰면 그것을 저주라고 칭한다. 그리고 난 저주 저항 2계를 갖고 있다.
반면에 신성한 힘인 마법에 대해선 저항 능력이 없다. 그 취약한 부분을 이번에 개선할 것이다.
‘마법 저항 개방하고 2계까지 강화.’
「마법 저항 개방에 20을 썼고 2계까지 강화에 340을 썼어.」
어느 마법사가 저주 저항과 마법 저항을 각각 2계까지 강화하면 보통은 신성 저항이라는 능력을 개방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신성 저항도 결국 마법과 같이 신성한 속성이라, 아무 축복도 받지 못하고 영혼이 악령과 함께 있는 나로선 그것을 절대 개방할 수 없다.
내가 손댈 수 있는 건 신성함 하나 없이 주술과 관련된 능력들뿐이다.
「그래서 승천자는 상성 최악이라는 거지.」
대신 저주 저항과 마법 저항을 5계까지 강화하면 ‘영적 저항’이라는 상위 호환인 능력을 개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비록 신성한 힘에 육체나 정신의 상처를 입을지라도 영혼은 견뎌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적 저항은 개방해본 적 없는 능력이지만 말이야. 저주랑 마법 저항을 각각 5계까지 강화하는 것도 엄청난 악이 필요하잖아.」
예전엔 악령만 상대했으니 신성 저항이란 필요 없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저주 저항과 마법 저항이 각각 3계까지만 올라도 세인트 왕국의 웬만한 악령들은 다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과연 내가 승천자를 상대하기 전까지 영적 저항을 개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360을 쓰고 124 남았어.」
‘방혈. 2계까지.’
「120을 쓰고 4 남았어.」
방혈은 우리 둘의 영혼과 선천적으로 궁합이 좋은 능력이다. 재능이라고 할까, 그래서 방혈은 목줄이 있기 전에 내가 주력으로 삼았던 능력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방혈은 쉽게 강화할 수 있을 거야.」
잿빛세계의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지금까지 중앙교회에 온갖 이물들을 몰아넣었고 배척자 두 마리를 목줄로 묶었다. 그리고 발화 1계, 마법 저항 2계까지 개방과 강화를 속행했다.
철그렁….
십자가에서 뜯어낸 얇은 금판은 덤이다.
‘유의미한 하루였어.’
이대로만 가자.
* * *
널찍하고 어두운 창고에 빈 상자들이 쌓여있다.
“으윽…. 으윽….”
나체의 남녀들이 값싼 양초를 민머리에 붙인 채 가축처럼 바닥을 기고 있다.
이들은 달란트 상회의 노예다.
“으윽….”
도대체 누구의 기이한 취미일까. 머리에 붙은 양초가 녹아서 뜨거운 액체가 흐를 때마다 노예들은 신음했다.
그리고 그들이 고통으로 밝히고 있는 창고의 어둠 속에서는 밀담이 진행 중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의장님.”
달란트 상회의 달란트.
그는 세인트 왕국의 뒷골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암거래 상인이며, 황금달과 활동 영역이 자주 겹치는 경쟁 조직체의 실세인 남자다.
상당한 재물을 끌어안고 있는 중년임에도 복부는 늘씬하고 양쪽 뺨에는 깊숙하게 그어진 칼자국의 흉터가 있다.
“몇 놈이나 모였지? 거기 뒤쪽.”
달란트는 쌓인 상자들 너머의 어둠을 가리켰다.
“다 나와서 보기 좋게 서봐.”
그러자 노예들의 양초가 밝히지 못한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칼잡이들이 나타났다.
어두운 복장에 복면을 쓰고 단검을 장비하고 있는 암살단. 그들 가운데서 암살단을 대표하여 달란트를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보고했다.
“정예로 추려서 스무 명입니다.”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나는 암습(暗襲)을 하라고 했지 전쟁을 하라고 하진 않았는데.”
“저는 그 주변 골목들의 위치와 은거지의 병력 규모도 전부 꿰차고 있습니다. 동선은 완벽하니 염려 마십시오.”
“세비우크. 내가 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달란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한쪽 귓불을 두어 번 쳤다.
“베르자인 그년이 문제라고. 몰락한 가문이라고 해도 그 가문에서 물려준 주물은 절대 무시할 수 없어.”
“발렌잔타르 가문의 귀걸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달란트는 도끼눈으로 세비우크를 노려봤다.
“그건 원리도 조건도 알 수 없이 발동되는 주술이야. 오늘 네게 암살단 하나를 내어주고 이 일의 권한을 전임한 건, 네가 한때 황금달 소속의 자객이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귀걸이의 무시무시한 주술적 능력과 그녀의 타고난 계산을 수년간 곁에서 지켜봤는걸요.”
“알면 됐어. 너는 아주 오랫동안 그년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오늘 이 일을 맡게 되었으니, 뭔가 묘책이 있다는 말을 내뱉어야 할 거다.”
그러자 세비우크는 당당함을 내비쳤다.
“설마 제가 묘책도 없이 황금달의 목을 자르겠습니까.”
“네가 황금달의 자객들을 훤히 알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론 부족할 거다.”
“제 이마를 자세히 보시죠.”
얼굴을 포함해 머리 전체를 덮고 있는 복면 탓에 잘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세비우크는 복면 안에 뭔가를 쓰고 있던 것이다.
“어제 완성한 주물입니다. 주술을 방어하는 주물이죠.”
“방어를 한다면 어디까지 가능하단 말이지?”
“저주 저항 4계입니다.”
“허.”
달란트는 그 말을 듣고 감탄했다.
“그건……. 상당히 훌륭하군.”
“다만, 안구에 가해지는 주술만 그 정도 수준으로 방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그렇군. 안구에 가해지는 주술만 방어를 한다….”
달란트는 세비우크를 보며 그 말을 곱씹었다.
“한정적이긴 해도 무려 4계라면 해볼 만하겠어. 베르자인의 주술만 제대로 방어할 수 있다면…. 그것 하나만 해결이 된다면 나머진 네 실력으로 처리할 수 있으려나.”
“할 수 있습니다. 의장님께서는 제 실력 잘 아시지 않습니까.”
“너는 황금달에서 나온 뒤로 더 많은 실전을 치르며 비밀리에 강해졌지. 주술을 부리는 악령까지도 해치우는 놈이 되었으니.”
세비우크가 아직 음지에서 이름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의 실력은 달란트 상회의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거친 일에 익숙한 뒷골목 사람들도 악령이라면 경계하고 피하는 법이다. 그런 악령들 중에서도 주술을 부리는 악령이 있다면 그건 중앙교회에서 직접 마법사를 보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세비우크는 순수하게 본인의 실력으로, 주술을 부리는 무시무시한 악령을 해치운 강자였다.
“대신에 이번 일 성공하면 성수 좀 구해주시죠.”
“평생을 먹고 살 돈과 암살단의 높은 자리도 준다는데 그것까지 필요하다고?”
“베르자인에게 대항하는 주물을 완성하느라 더러운 서적들을 다 뒤적였거든요. 길고양이 눈알만 백 번은 뽑아낸 것 같습니다.”
“길고양이의 눈알을?”
“예.”
“죄악이 적잖이 쌓였겠군.”
“간당간당합니다. 그래서 성수로 온몸을 씻을 수 있을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세비우크. 네 정도의 실력자를 써서 베르자인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그건 아주 싼값이야.”
성수는 비싼 물건이지만 달란트는 흔쾌히 승낙했다.
“네가 만약 이번 암습을 성공시킨다면 성수로 목욕까지 할 수 있게 해주마.”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너처럼 실력 출중한 녀석이 악령화를 당한다면 오히려 우리 상회에 손해일 테니. 이번 일이 끝나고도 나와 함께 가자고. 알겠지?”
“이번 일이 끝나고도 계속 베풀어주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아직도 날 못 믿나?”
“번지르르한 말이나 의리보다는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을 추구할 뿐입니다.”
“그런 사고방식도 그년에게 배운 것 같군. 사람을 계산하는 것 말이야.”
“하지만 베르자인이 저를 계산하진 못했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나? 하필이면 페르메트가 그쪽 도서관에서 헛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그년도 털끝을 곤두세우고 있을 건데.”
그 물음에 세비우크는 황금달에서 보낸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싸울 때도 있었고 슬퍼할 때도 있었고 기뻐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그녀를 보며 사랑과 욕정까지 느꼈을지도 모른다. 결코 나쁘지만은 않은 나날들이었고 그 기억을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추억이라 답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당사자인 저조차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뭐를 몰랐지?”
뿌리칠 수 있으나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삶에 있어 버릴 수 없는, 때때론 반드시 필요한 탐욕.
그것은 돈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제가 베르자인을 배신하게 될 줄은 저 스스로도 몰랐으니까요.”
적당히 큰돈이라는 유혹은, 탐욕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큰돈은 뿌리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런 최악의 변수엔 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너의 자신감엔 설득력이 있군.”
“해 뜨기 전에 그 여자의 머리를 가져오겠습니다.”
밑바닥의 밑바닥을, 끔찍하다 못해 잔인한 가난을 겪어봤기에 더더욱 뿌리칠 수 없었다. 이미 그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상상해버리고 말았기에, 다른 추억이나 감정이나 의리나 마음 따위는 걸리적거리는 허상이 되었다. 추억을 그런 허상으로 만들기를 선택했다.
큰돈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게 독약이라고 해도 삼킬 능력이 있고 삼켜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삼킬 것이다.
“머리는 됐고 그 귀걸이나 가져오라고. 내가 너한테 그만한 보수를 약속할 수 있는 것도 결국 발렌잔타르 가문의 유산 덕분이니까.”
“예.”
“깔끔하게 암습으로 끝내고 와라. 전쟁까지 가면 피곤해질 테니.”
“완전무결한 결과를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늦은 새벽.
오로지 그녀의 목숨을 노리기 위해 만들어진 암살단이 숨죽여 출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