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24화 (24/181)

4. 당신에게 도달하는 길 (4)

무고한 아라나크는 숲속의 동굴에 있었다.

동굴의 입구 근처에서는 거미 악귀들이 배회하고 있었는데,

배회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배회하고 있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설마 방금…?」

‘죽었던 것 같아.’

추억 속의 리비카.

99마리의 한이 성불하면서 내게 남긴 선물.

죽음의 문턱에서 아홉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고유 능력. 주술.

「시간을 되돌린 걸까?」

‘그건 신만이 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부터 보았다.

거의 변화는 없지만 알 수 있었다.

‘죽기 전에 해의 위치는 아니야. 시간은 되돌려지지 않았어.’

따라서 지금쯤 아라나크는 날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깊숙한 어미의 방에 내 시신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고양이들이 아니었다면 난 저 동굴에서 예기치도 못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였으리라.

‘역병 마녀에게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강함이야.’

「하나도 안 강해! 아라나크는 약하다고!」

내 안의 악령은 씩씩댔다.

「동굴이라는 위치, 수적 열세, 기습, 그것들만 아니었으면…!」

‘아니면 뭐?’

「간단히 굴복시킬 수 있는 이물이었어! 진짜로 안 봐주고 처음부터 죽이려고 했으면 한방에 죽였지!」

내 앞에는 동굴과 거미 악귀들이 있다.

떠올려보자. 나는 좀 전에 저 동굴로 들어가서 무고한 아라나크와 조우했다.

「그 늙은 이물이 성불했다고 하니까 어째서, 어째서, 이 지랄하더니 널 죽였잖아.」

나를, 두고, 혼자서.

아라나크는 분명 그렇게 말하며 날 속박했었다. 그리고 내게 살의를 품더니 내 목에 독니를 박아 넣었고, 인간은 죽어야만 한다고 했다.

「죽일까? 가서 죽이자!」

아직 그런 결정을 내리기엔 이르다. 아라나크를 죽여서 악을 취하는 건 최후의 수단이다.

나는 아라나크를 목줄로 묶고 싶다. 그 녀석에게 거미 악귀를 무한히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면, 나는 그 녀석을 목줄로 묶는 것만으로 미래의 거미 군단을 소유하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까지 목줄로 묶고 싶은 이물은 처음이야.’

어두운 동굴이 야수의 목구멍처럼 나를 위협하는 듯하다. 저 축축한 어둠 속에 한번 발을 들이면 그 끝자락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괜찮다. 난 이미 저 동굴을 겪고 한번 죽었으니.

‘내가 갖고 있는 악이 얼마지?’

「…성장으로 축적된 건 2194.7이고 남겨둔 건 957.」

‘발화를 2계까지 강화해.’

「발화 능력 강화에 222를 썼어. 남은 악은 735.」

발화 1계는 특정한 위치에 약한 불을 낼 수 있다. 그리고 발화 능력이 2계까지 강화되면 그 화력에 차이가 생긴다.

‘목줄도 3계까지 강화하려면 얼마나 필요하지?’

「좀 비싸. 450이나 필요해.」

한때는 철인 능력 개방에 필요한 350의 악을 얻겠다고 전전긍긍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450은 별로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강화해.’

그렇게 목줄 능력이 3계까지 강화되었다.

목줄 1계는 의존하는 이물을 악귀로 삼을 수 있고, 2계는 굴복하는 이물까지 악귀로 삼을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편해진다.

그리고 목줄 3계에는 또 새로운 기능이 있었다.

「악귀를 움직여서 다른 이물을 악귀로 삼을 수 있어.」

어느 이물을 목줄로 묶기 위해선 반드시 내가 그 이물의 앞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키이잉!

나는 거미 악귀 두 마리를 동굴 앞에 소환했다.

‘들어가서 아라나크에게 전해라. 동굴이 불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나와서 대화에 응하라고.’

두 거미 악귀를 전령으로 삼아 동굴로 들여보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거미 악귀를 통해 소식이 들려왔다. 거미 악귀가 보고 들은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동굴에서 나갈 생각이 없다고 하네. 무엇보다 인간의 말은 듣지 않겠다고….」

내가 인간이라서 내 말은 듣지 않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생은 이물이었으니까 목줄에 순순히 묶여준 걸까.

「방독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이상하네. 그 늙은이도 너처럼 팔다리 두 짝씩 가지고 있는 인간의 형태였는데 말이지.」

일단 아라나크가 어떤 존재를 보고 그 존재가 이물인지 악령인지 인간인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은 있다는 것이다.

「어쩔래? 죽일 거야?」

내가 인간이라서 나와 대화를 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동굴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했지만 제 다리로 기어 나올 심산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라나크는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이물이다.

‘굴복시킨다.’

발화 2계.

악귀를 소환할 때처럼 손을 뻗을 필요조차 없다. 그저 동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발동하면 된다.

‘방사(放射).’

화르륵!

내 발치의 한걸음 앞에서부터 화염이 일어나 정면으로 뻗어나갔다. 방독면을 쓰고 있어도 화염의 열기가 얼굴로 느껴질 만큼 뜨거웠다.

「동굴 내부를 전부 불태울 화력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죽일 생각이었으면 발화를 더 강화하거나 실재세계에서 기름을 구해왔겠지.’

화아아아아…!

화염 방사는 계속되었다.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 아라나크가 있는 방까진 절대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화염이 만들어낸 매캐한 연기는 동굴 내부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키이이익!!”

동굴 주변을 배회하던, 내 목줄에 묶이지 않은 거미 악귀들이 으르렁댔다. 불을 피해서 달아났다가 내 측면이나 배후로 접근하는 것이다.

‘영력 발산.’

이것도 이물을 상대론 참 편리한 능력이다. 나와 내 안의 악령은 총합 2866.7의 악을 영혼에 머금고 있으니 말이다.

이만한 영력 발산을 가까이서 접한 거미 악귀들은 그야말로 존재적인 공포에 짓눌렸으리라.

‘다 묶어버려.’

그대로 공포에 짓눌린 녀석들은 알아서 내게 굴복한다. 그러면 목줄 3계에 의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키그그그….”

순식간에 11마리의 거미 악귀를 목줄로 묶어버렸다. 그래서 이제 난 13마리의 거미 악귀를 근처에 두고 다루게 되었다. 와중에도 화염 방사는 계속되어 동굴 속에 연기를 집어넣는다.

콰아…

이윽고 저 멀리 숲속 어딘가에서 땅이 폭발했다.

- 꺄아아아아아아아!!!!!!!

틀림없이 아라나크의 비명이다.

난 지체 없이 명령했다.

‘가서 너희의 어미를 구속해라.’

“케에에에엑!”

그러나 거미 악귀들은 거부했다.

아무리 내가 무섭고 내 능력에 묶여있다고 한들 자신들을 낳은 어미는 잡을 수 없다는 뜻인가.

「매번 느끼는 거지만 목줄 능력에 ‘절대적’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선생도 그렇게 말했지.’

정을 주지 말라고. 신뢰하지 말라고.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들은 언제든 내 뒤를 칠 수 있다고. 철저하게 이용하고 버려야만 하는 것이 악귀라고.

나는 이쯤에서 화염 방사를 멈춘다.

“아라나크를 못 잡겠으면 동굴로 들어가서 새끼들과 알집을 살려라. 그리고 너희 형제들을 목줄로 묶어라.”

“케게게그그그!!”

“지금이라면 모두 살릴 수 있다. 그러나, 너희 형제들 중에 거부하는 녀석이 있다면 모조리 죽일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그나마 이 명령은 받아들일 수 있었나 보다.

13마리의 거미 악귀들은 곧장 수긍하고는 앞다투어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내 목줄 능력에, 내 영혼에 더 많은 거미 악귀들의 영혼이 결속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지상으로 올라온 아라나크는 흰자위 없는 검은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아아아아…! 내 아가들…. 내 아가들이….”

거미인 몸의 큼지막한 턱에 알집을 하나 물고, 여성의 상반신에 달린 두 팔로는 알집을 하나씩 껴안아 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 때문에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아이들을 잃었다. 어미로서 그 상실감과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가 왔다.

더러운 사체나 탐하는 새를 닮은 방독면으로 낯짝을 가리고, 피가 묻어도 티가 안 날 것 같은 검붉은 로브를 두르고, 무자비한 쇠도끼를 오른손에 들고 있는 역겨운 인간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분명 독액을 주입해 죽였는데 그 시체가 사라져버렸으니 틀림없는 괴인(怪人)이다.

“네놈은…. 죽지도 않는 것이냐….”

좀 전까지 느꼈던 마음의 고통은 곧 살의로 먹칠된 불길이 되었다.

“살가죽을 벗겨 하루에 하나씩 살점을 뜯어내주마!!!”

바로 그 순간에 페인의 영력 발산이 아라나크의 정신을 덮쳤다.

그런 직후 어떤 단어가 아라나크의 뇌리에 스쳤다.

‘악마…!’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이었다. 말도 안 되게 악한 존재였다. 어찌 영혼에 저렇게나 악이 쌓여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저렇게 지옥에나 있을법한 존재가 잿빛세계에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또한 저자는 분명 인간이었을 터.

“인두겁을 쓰고 있는 악마구나…!”

“그 말은 듣기 좀 그렇네.”

아라나크는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입으로는 피를 흘렸다. 거미의 몸에 달린 거미의 머리에서는 타액을 흘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잡아서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다. 하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존재적인 격차가 너무 큰 압박이다.

솔직히, 두렵다.

“아라나크.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원하면 죽일 수도 있다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페인은 들고 있던 쇠도끼를 등에 돌려다 메고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내 동굴을 불태우고 아가들을 죽였어…! 네놈과는…!”

아라나크는 어미로서 가까스로 두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거미로 된 몸체의 주둥이를 벌렸다.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과는 협력할 수 없다!!!”

쯔으윽!

거미의 주둥이에서 가느다란 실이 사출되어 페인을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그 짧은 순간에 페인은 미동도 없었고 아라나크의 거미줄은 급격히 방향을 틀어 페인을 모든 방향에서 꿰뚫을 기세로 움직였다.

그대로 페인을 꿰뚫어버리면 될 터였다.

“네놈…….”

그러나 아라나크의 거미줄들이 페인의 옷자락에 닿기 직전, 일제히 정지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아라나크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나는 단 한 마리도 죽이지 않았어.”

페인의 배후에서 수십의 거미 악귀들이 잿빛세계의 뿌연 허상을 뚫고 나타난 것이다.

어떤 녀석은 알집을 물고 있고 어떤 녀석은 연신 기침을 해대는 중이다. 그것들의 다리 사이에는 사람보다 작은 크기의 새끼들까지 정신 사납게 빼곡하게도 붙어 있었다.

“아가들아…”

페인의 목줄에 묶인 거미 악귀 군단은 계속 기었다. 페인이 따로 명령한 건 아니지만 본능에 의해 제 어미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거미 악귀 군단은 페인을 지나쳐서 아라나크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제 대화라는 걸 좀 해보자.”

새끼 한 마리가 아라나크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아라나크는 제 팔에 붙은 거미 악귀를 자식을 보는 눈으로 한번 쳐다보고는 페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연극이었나…? 내 동굴을 불태우고 내 아가들을 다 죽인 것처럼…”

“멋대로 해석하지 마. 그냥 네가 동굴 바깥으로 나오길 바랐을 뿐이야.”

까마귀를 닮은 방독면 탓에 표정이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거미 악귀를 죽이긴 왜 죽여? 내가 거미 악귀들이랑 함께 사냥한 이물들의 머릿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냐?”

“너는…. 인간이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은 아닐걸. 그보다 난 네 힘에 관심이 있어.”

“목줄 능력을 갖고 있구나. 그 강령술사처럼.”

“맞아. 그래서 이번엔 네 이야기 좀 들어보자고.”

“그에게 했던 것처럼 날 성불시킬 생각은 그만두어라.”

그러자 페인의 방독면 너머에서 얼핏 붉은 안광이 보였던 것 같다.

화아아아…!

페인의 양옆으로 뜨거운 불꽃이 피어오른 것이다.

“케에에엑!”

“키기기그극…!”

그 빛과 열기를 느낀 거미 악귀들은 제 어미의 다리 밑과 품속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페인은 불을 끄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아라나크.”

「그 질문은 저쪽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림이 좀 이상한데.」

그리고 아라나크는 단칼에 질문을 끊어버렸다.

“넌 내가 원하는 걸 이루어줄 수 없다.”

“마음 바뀌기 전에 말해. 굴복하는 것보단 의존하는 편이 너한테도 좋을 테니까.”

“네놈은 할 수 없다고!”

화아아아아!

아라나크의 호통보다 큰 불꽃이 일어났다.

“키이익…!”

“마지막으로 묻는다.”

아라나크의 그늘에 숨은 수십 거미 악귀들이 제 어미에게 두려움을 호소했다.

“원하는 게 뭐야?”

「그 대사를 네가 하는 게 이상…」

“…멸망.”

페인과 페인 안의 악령은 침묵했다.

아라나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귀를 의심하게 하였다.

“뭐라고?”

아라나크는 새끼 거미 악귀들을 품에 끌어안으며 페인을 노려봤다. 그 살기 어린 눈빛은 페인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듯하였다.

“난…. 비첸크로이 제국의 멸망을 원한다.”

세인트 왕국과 같은 대륙에 있는 제국.

아라나크는 거미 악귀로 된 천만 군단을 이끌고 실재세계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다.

“나는 제국에 있는 900만 인간들의 떼죽음을 원한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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