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25화 (25/181)

4. 당신에게 도달하는 길 (5)

본래 악명은 혐오의 대상.

내가 거미 악귀라 부르는 것들은 무고한 아라나크로부터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모든 거미 악귀들은 아라나크의 피와 살로부터 만들어진 육체를 가지고 아라나크에게서 받은 악과 영혼의 조각들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거미 악귀들은 전생도 거미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냥 잿빛세계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었지.」

반면에 아라나크는 전생에 인간이었다. 비첸크로이 제국의 소외된 소국(小國)들을 돌며 활동하던 성녀였다는 것이다.

세인트 왕국이 세인트교를 따르는 종교적 국가라면 비첸크로이트 제국은 비첸 신앙을 따르는 군사적 국가다.

그래서 비첸크로이트 제국은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주변국들을 침략해 영토를 넓혀온 대표적인 강대국이기도 한 것인데, 영토가 넓은 만큼 나라 안에 있는 소국들이 모진 핍박과 소외 속에 살아간다고 한다.

“나는 좋은 일만 했다…. 좋은 의도였다고….”

그런 제국에서 그녀는 소국들을 돌며 자신이 가진 신성한 마법을 베풀었다.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질병이나 악에 병든 자들을 치료하며 다닌 것이다.

누가 봐도 여신을 쏙 빼닮은 듯 미녀의 얼굴에 마음씨까지 좋았다고 하니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인생의 나락에 예고는 없었다.

이미 악령이 되어버린 자가 그녀의 교회에 불을 지르고 만 것이다.

“그날 내 얼굴이…. 녹았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심한 화상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끔찍하게 눌어붙고 말았다. 한쪽 눈꺼풀은 눈알을 다 덮어버렸고 코끝은 녹아내려서 인중에 붙었고, 머리와 얼굴에 있는 모든 털까지 없어지고 만 것이다.

“지나가던 애새끼가 내 꼴을 보고 그리 지껄이더구나….”

괴물.

“어려서 그런 거라고 이해는 했다. 이해는 했는데. 이해는, 했는데….”

그 어린아이의 짧은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해갔다고 한다.

그녀는 얼굴이 녹았어도 변함없이 소국들을 돌며 성녀의 신성한 치료 마법을 베풀고 다녔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앞에서만 고맙다고 하고 뒤에서는 징그럽게도 생겼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다가 날 거부하는 자들도 생겼다.”

아무리 아파도 ‘당신’의 치료는 받을 수 없다면서.

마음은 고맙지만 아이들이 보기에 흉측하다면서, 하늘이 내린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어서, 정말 고맙지만 이 땅에서 사라져달라고.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다음날부터 가뭄이 심해진 것이다.”

가뭄이 심해진 그 해에 소국들은 새로운 황제를 하늘이 거부한다면서 비첸크로이 제국에 반발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황제는 이들의 원성을 돌리기 위해, 자신의 공포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수많은 성녀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내가 치료해서 살렸던 사람들도 내가 산 채로 타죽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땐 내 얼굴이 더 징그럽게 보였겠지….”

그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흉측하게 생긴’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혐오의 대상. 무고한 아라나크.」

「어쩌면 둘 다 거미의 모습을 한 게…」

익충이지만 해충이었다.

* * *

아라나크가 선생의 목줄에 묶였던 이유는, 언젠가 선생의 목줄 능력이 실재세계로 돌아갈 발판이 되리라 희망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아라나크에게 알려줬다.

나는 지금도 실재세계와 잿빛세계를 오가고 있으며, 실재세계에서 내가 원한다면 목줄로 묶인 악귀를 소환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랬더니 아라나크는 목줄 능력에 묶여주었다. 묶이면서도 내게 계속 강조했다. 인간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거미 악귀 천만 마리를 언제 다 모으고 비첸크로이 제국의 900만 인구는 또 언제 다 죽여? 터무니없는 걸 너한테 바라고 있잖아.」

‘그래서 그런 일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진 않았어. 그냥 준비되었을 때 실재세계로 데려다줄 수 있다고만 했지.’

「준비가 되면 네 뒤를 쳐서 목줄 능력을 빼앗고 제국을 침공하겠다고 하잖아. 너한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녀석을 안고 가도 되는 거야?」

‘아주 먼 나중의 일이야. 그때 가서 무력을 쓰든 대화로 설득하든 방법이 있겠지.’

「지랄하고 있네.」

‘성녀였던 시절의 마음이 남아있을 거야. 뒤집힌 신관이 신관이었던 시절의 신앙심을 남겨두고 있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아라나크의 근본이 결코 사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아라나크가 정말로 천만 거미 악귀를 준비하고, 정말로 내 뒤를 치는데 성공하고, 실재세계의 제국까지 침공할 수 있게 된다면 또 그때 생각을 달리할 수 있다.

900만 인간들을 제 손으로 죽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존재는 악마밖에 없으니까.

‘어쨌든 난 아라나크의 힘을 이용할 거야.’

* * *

실재세계의 새벽.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중앙교회의 정원에는 성기사들이 교대로 밤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중앙교회의 내부, 일렬로 나란히 배치된 나무의자들의 맨 앞줄에 승천자와 달란트가 단둘이 황금 십자가를 보고 앉아있다.

“뭐든지 돈이 있어야 베풀 수 있다. 달란트 의장.”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하.”

커다란 황금 십자가는 찬란한 조명을 머금어 밝게 빛났다.

“그런데 오늘은 그대가 보낸 정화수들이 모두 오염되어 있더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라.”

“저도 정말, 진심으로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 상회에서 기부한 정화수에는 하늘에 맹세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뒷골목에서 바깥으로 납품될 때만 하더라도 그 정화수들은…”

“깨끗했다고?”

“예. 제가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아마 유통 과정에 누군가 뚜껑을 열고 오염시켰거나 주술을 건 것이라 의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조사해봤는데 주술을 건 흔적이나 뚜껑이 열린 흔적은 없었네. 따라서 그대가 기부한 정화수들이 처음부터 오염되어 있던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군.”

달란트는 난처하다는 듯 두 손바닥을 다 보이며 대꾸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정화수를 만드는 자도 납품하는 자도 매일 성수로 영혼의 악을 정화하는 선별된 인원들만 쓰고 있습니다. 그건 승천자님께서도 천리안(千里眼)으로 지켜보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은 옳다. 난 전부 지켜보고 있었지.”

“제가 내부적으로도 조사를 해봤는데 모두 무고한 이들뿐이었습니다. 정말 저희도 멀쩡한 정화수가 오염된 원인을 알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란 말입니다.”

그러자 승천자는 천천히 일어나 황금 십자가로 걸어갔다.

조명에 의해 빛나는 황금 십자가 앞에 승천자가 서자, 그의 그림자가 천장의 조명을 막고 황금 십자가를 까맣게 뒤덮었다.

“어젯밤 천사가 내게 속삭이셨네.”

“천사요?!”

“아무래도 세인트 여신님께서 직접 내려보낸 천사였던 것 같군.”

달란트는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세인트교의 천사가 강림한 겁니까?! 승천자님의 간절한 기도에…!”

“내 꿈에 나타나셨지. 강림은 아니네.”

“실로 경탄스럽습니다! 저는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천사의 형상을 눈에 담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시더구나. 우리가 있는 세계에, 있어선 안 될 존재가 있는 것 같다고.”

“있는 것 같다는…. 그 말씀은…?”

승천자는 달란트를 돌아보았다.

황금 십자가 앞에 선 승천자가 천장의 조명을 대신 받아서, 달란트의 눈엔 그의 새하얀 신도복이 성스럽게도 빛나는 듯하였다.

“천사께서 의심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양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인지라, 음지에서 자유로운 자의 도움을 구하라고 내게 조언하셨지.”

그가 알리는 천사의 소식에 달란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를 칭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달란트 의장. 그대라면 나와 천사를 도울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네. 나 역시도 어젯밤 내 꿈속 나타난 그분이 자네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

승천자는 달란트에게 다가갔다.

달란트의 동공이 희미하게 떨렸다.

“페인.”

“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이름이었다. 엄청 유명하진 않지만 뒷골목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의뢰소에서 들을 법한, 딱 그 정도의 인물이었을까.

“녀석의 시신이 없었어….”

승천자는 페인을 사형하려고 했던 그 당시를 떠올렸다.

“자신의 의지로 도망친 것이지. 그리고 이 신성한 중앙교회에 이물들을 몰아넣고, 실재세계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거나 이미 돌아왔을 것이야. …멀쩡한 정화수가 오염되었던 이유도 그것 말고는 없을 터.”

“……네?”

승천자는 알록달록한 아치형 창문의 사이마다 세워진 역대 신관들의 조각상을 흘깃 쳐다보았다.

총 네 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그중 두 조각상의 표면에 아주 미세한 금이 가있었다.

“달란트 의장. 만약 어느 사형수가 스스로의 힘으로 잿빛세계에 가서 더욱 ‘사악한’ 힘을 얻어 실재세계로 돌아온다면, 무엇이 마땅한 도리일 것 같나?”

달란트는 즉답했다.

“죽여야만 합니다!”

“그런 사악하고 강대한 힘을 얻은 존재가…. 지금 자네가 활동하고 있는 음지에 있다면, 천사는 그대에게 무엇을 바랄 것 같나?”

“죽여야만 합니다! 찾아내서 죽여야만 합니다!”

“선하구나. 그 깨끗한 손에 기꺼이 피를 묻히기를 자처하다니. 그렇다면 천사는 그대의 헌신을 보며 눈물 흘릴 것이고 나는 마땅히 기도할 것이네.”

“아, 아아! 기억이 났습니다! 페인! 며칠 전에 광장에서 추방당했던 해결사 아닙니까! 눈을 빨갛게 만들고도 끝까지 악령이 아니라며 고집부리던 젊은 해결사가…”

“그러니까.”

승천자는 달란트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서 그가 말을 멈추게 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천사께서는 페인이라는 악령이 음지에 있음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네. 그리고 녀석이 잿빛세계에서 사악한 힘을 모아 돌아왔다면 아주 강력한 주술과 육체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 또한 있네.”

달란트는 눈을 반짝였다.

“누, 누,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의심되는 자가 있는가?”

“마침 전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자는 황금달의 주요 전력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번 전쟁을 기회로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진정하게.”

“아, 송구합니다….”

“그대가 페인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자의 인상착의를 말해보아라.”

달란트는 부하들로부터 보고받은 그대로 술술 내뱉었다.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암살단의 말로는 아주 기괴하고 불결한 차림새였다고 합니다.”

의심이 번져간다.

“피를 뒤집어써도 티가 나지 않는 검붉은 로브에 투박한 쇠도끼를 등에 멨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가관인 점은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이라 합니다.”

“가면?”

“예. 그자는 까마귀를 닮은 추악한 가면을 쓰고 있는데, 아…! 그, 그래서 가면을…!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 가면을 벗겨 얼굴을 보일 수 있도록 하게. 내가 언제 어디서든 상회의 손발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 * *

나는 실재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케베크 주조소로 가서 작은 은괴와 강철 주괴를 한 덩이씩 구매했다. 시간대가 늦은 저녁이라 다들 퇴근하는 분위기였지만 홀른이 끝까지 남아서 날 상대해 주었다.

그리고 장인의 방으로 들어가서 홀른과 밀담했다.

“제가 예전에 주문했던 손목쇠뇌를 다시 주문하려고요.”

“싼 가격에 해주긴 어렵다. 그때 주문했던 손목쇠뇌는 왕국에서 제일 탄성 좋은 실을 썼으니.”

“좋은 실이 생겨서요. 손목쇠뇌 본체만 주문할게요.”

“그럼 은화살은? 이번에도 직접 만들어 쓸 테냐?”

“네. 그냥 제 손에 맞는 손목쇠뇌만 만들어주세요.”

나는 주물을 팔아서 수중에 목돈이 생겼다. 부모가 사준 인형과 위경 여섯 권을 전부 베르자인에게 팔아치우고, 이렇게 은과 철을 사고도 1034루아가 남은 것이다.

손목쇠뇌에 쓰일 탄성 좋은 실은 아라나크에게 직접 받을 것이다.

「그 거미들의 실만 팔아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팔면서 실의 출처는 뭐라고 설명하게?’

「베르자인한테 팔면 되잖아.」

‘그래봤자 베르자인도 실의 출처를 설명해야할 거야. 주물 몇 개를 얻어다 적당히 이유 붙여서 파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물론 나중에 주머니 사정이 궁해지면 실이라도 뽑아서 팔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큰 현금이 있어봤자 둘 곳도 쓸 곳도 마땅치 않다.

내 장비를 맞출 정도면 충분하다.

“알겠다. 그렇게 만들어주도록 하마.”

홀른은 그러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내가 문 옆에 둔 방독면과 쇠도끼를 두 손에 들고나간 것이다.

저 쇠도끼와 방독면은 이 주조소에서 흔적도 없이 처리될 것이다.

끼익.

그렇게 홀른이 나가면서 문이 닫혔다.

나는 장인의 방에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품질 좋은 강철과 은괴. 아주 좋은 재료야.」

본래 은제 무기는 마법으로 강화하는 것이 이 세계의 상식이다. 악령의 대다수가 십자가를 보고 거부하는 것처럼, 은이라는 것 역시도 악에 대항하는 성질이 있어 마법과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원한다면 은제 무기에 주술적인 강화를 더할 수 있다. 물론 마법처럼 신성한 힘으로 강화하는 것보단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어차피 나는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말이다.

철인 능력이 있어서 손잡이를 굳이 가볍게 만들 필요는 없다. 이 큼지막한 강철 주괴로 기다란 봉과 도끼날까지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재결합 2계.’

「도와줄게.」

재결합 2계부터는 고급 대장간 수준의 제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수준부터는 철, 나무, 돌뿐만 아니라 은까지 다룰 수 있게 된다.

꾸드드득….

작업대 위의 큼지막한 강철 주괴가 살아있는 진흙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해서 움직였다. 뜨겁게 달구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변형이 가능한 능력이기에, 재결합 능력을 터득한 극소수의 초짜 마법사들은 은퇴 후 대장간이나 제련소를 연다고도 한다.

「도끼날에는 은을 발라야지? 이번에도.」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지만 피로감은 없었다. 그보다 앞으로 내가 진짜 쓸 무기를 만든다는 생각에 오로지 몰입했던 것 같다.

흐물흐물 움직이던 강철은 조금씩 도끼의 형태를 갖췄고 그 도끼날의 표면을 은이 덮었다. 또한 나중에 주물을 달거나 주문을 새길 수 있도록 간단한 장식과 무늬까지 추가했다.

그리하여 예리하고도 묵직한 도끼가 완성되었다.

「밖에서 홀른이 네 쇠도끼랑 방독면 녹이는 소리가 나.」

나는 품속에서 여왕의 독니라는 이름의 단검을 꺼냈다. 뼈칼이었던 것을 철로 된 단검과 합쳐서 손잡이는 철, 칼날은 뼈로 된 단검이다.

철로 된 손잡이는 그대로 두고 뼈로 된 칼날 부분만 은으로 덮었다. 이러면 베이는 공포를 심는다는 주술적인 능력과 예리함까지 다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완성된 도끼와 단검의 날 부분에는 재 가루를 발라서 은이 쓸데없이 빛나지 않도록 조치했다.

「깔끔하게 다 쓸 수 있겠어.」

새로 만든 방독면은 강철만 써서 최대한 견고하게 하였고, 필요할 때 재결합 능력으로 부리 부분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네모난 박음질을 같은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눈 부분은 전에 했던 것처럼 바깥에서 검게 보이는 유리를 쓰되, 쉽게 깨지지 않도록 투명한 거미줄을 풀처럼 섞어서 만들었다.

그리고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전에 내가 쓰던 목걸이의 형태를 그대로 떠올려서 만든 것인데, 이렇게 장신구가 있으면 나중에 주술적인 강화를 할 수 있는 매체가 된다. 베르자인의 귀걸이나 세비우크의 머리띠처럼 말이다.

마지막엔 은화살을 만들었다. 이건 손목쇠뇌가 완성되면 그때 쓸 것이다.

그렇게 모든 장비를 착용하고 거울을 보았다. 구두쇠 같은 홀른이 주워다 놓은 거울이라 조금 깨져있지만, 그래도 이만한 너비의 거울은 찾기 힘들다.

깨진 거울 속 내 모습은 조금 더 숙련자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누더기 로브와 품질 낮은 철로 된 방독면을 썼을 때와는 외관이 사뭇 다르다.

때마침 홀른이 들어왔다.

“네 부탁대로 다 녹여서 없앴다. 잿빛세계의 소재라 그런지 이상한 거품이 많이도 나더군. 냄새도 고약하고.”

“수고 많으셨어요.”

나는 작업대 위에 은으로 된 동전 하나를 올렸다. 정확히는 은이 아니라 세인트 왕국에서 마법으로 굳힌 수은 동전이지만, 그냥 은으로 된 동전이나 은화라고도 부른다.

“여기 100루아 두고 갈게요.”

“그 방독면이랑 도끼는 새로 만든 건가?”

“네.”

“전보다 훨씬 낫군. 이참에 손목쇠뇌도 직접 만들지 그러냐?”

“정교한 기계는 아직 못 만들어서요.”

“재결합 능력인가 그게 부족해서?”

“네. 아무튼 늦은 밤에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둘러 가볼게요.”

홀른은 하품을 하며 내게 가라고 손짓했다.

“조심히 가라. 내가 만들 손목쇠뇌 구경도 못하고 죽진 말라고.”

* * *

나는 케베크 주조소의 뒷문으로 나왔다.

「그래서 달란트 상회는 언제 치는 거야? 그쪽이 교회에 줄을 대고 있으면 먼저 공격해서 단숨에 끝내야 유리할 것 같은데.」

‘지금쯤 베르자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또한 상회 측에서도 머리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쉽게 볼 수 없다. 일단 베르자인과 빨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

‘아라나크도 있으니까, 우리한테 전략적인 선택지가 많다는 걸 알려줘야지.’

「거미 군단을 소환할 수 있지. 이런 게 강령술사의 힘인가? 홀몸이지만 사실상 군대잖아.」

그래봤자 쓸 수 있는 거미 악귀는 새끼들을 포함해 40마리가 채 안 되지만 말이다.

‘다차원 능력으로 건너서 가야겠어.’

「영력 소모가 클 거야.」

‘어차피 오늘은 큰 싸움도 없었잖아. 영력은 많이 남았어.’

「그렇긴 하지.」

이곳에서 다시 잿빛세계로 건너간다.

잿빛세계로 건너간 다음엔 다시 실재세계의 뒷골목, 베르자인의 은거지로 간다.

그러면 이동하는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다.

「…왜 안 되지?」

그런데 이상하다.

다차원 능력이 발동되질 않는다.

‘이 주변에 주술이나 마법이라도 걸렸어?’

「탐지 2계로 봤는데 그건 아니야.」

‘홀른인가?’

「홀른은 장인의 방에 있을 거야. 바깥으론 나오지도 않았다고. 게다가 여긴 뒷문인데? 앞은 산이 가리고 뒤는 주조소 벽이 막았는데….」

다차원 능력의 발동 조건.

첫 번째 조건은 기억 법칙. 내가 알고 있으며, 실제로 가본 경험이 있는 장소여야 할 것.

두 번째 조건은 그림자 법칙. 그 장소에 내가 나타나거나 그 장소에서 내가 사라질 때, 아무도 나의 다차원 능력 발동을 목격하거나 인지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

마지막 조건은 인과율 법칙. 그 장소가 마법이나 주술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

‘기억 법칙은 지켰어. 그림자 법칙은… 이 주변에서 내 능력 발동을 목격하거나 인지할 사람도 없고….’

「홀른 말고는 아무 존재도 없다니깐.」

‘인과율 법칙. 이곳이나 잿빛세계의 이곳이 마법이나 주술에…’

「이 근처엔 그런 거 없어. 그리고 지금 잿빛세계와 실재세계의 틈은 열리지도 않는 상태야. 네가 잿빛세계의 어느 장소로 갈 지는 선택조차 못한 상황이라고.」

다차원 능력의 발동 자체가 안 된다.

난 양옆을 확인하고 다시 뒷문을 열어서 주조소 내부에 누군가 있나 확인했다. 그래도 아무도 없어서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밤눈으로 숲을 면밀하게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아무도 없다. 밤에 우는 벌레들의 소리만 들린다.

‘곤충이나 짐승에겐 보여도 괜찮잖아?’

「네가 능력을 발동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는 존재. 곤충이나 짐승은 네가 능력을 발동하는 걸 봐도 그게 뭔지 모르지.」

그런데 안 된다.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널 보고 있지 않은데 왜 이러지…?」

아.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왜?」

저절로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입술이 닫혔다.

목구멍까지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왜? 뭔데?」

이건 강렬한 직감이다.

‘승천자가 날 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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