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28화 (28/181)

5. 되먹임 (3)

뜨거운 열과 연기를 뒤집어쓴 배척자가 루소에게 명령했다.

“투항하라. 세인트교와 무고한 백성들을 위해.”

루소는 배척자를 보고 격하게 반응했다.

“페인…. 네놈은 전대 신관님을 본뜬 조각상으로 인형극까지 벌이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배척자는 진짜 전대 신관의 영혼이 들어간 존재인데 그걸 말할 힘이 없다. 일단은 복부에 생긴 상처부터 봉합하는 중이다.

“원래는 적당히 시간만 끌다가 건물을 무너뜨리고 빠지려 했다…. 그런데 이건…. 이건 다 네놈이 자처한 일이다. 페인.”

아무래도 회유는 실패한 것 같다.

루소는 같은 편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루소. 그러면 나도 널 죽일 수밖에 없어.”

“쓰레기 새끼가…! 이런 극악무도한 만행을 벌이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넌 현생에서도 사후에서도 천벌을 받을 것이다!”

퍼펑! 퍼펑!

루소의 검 두 자루가 이제는 폭발 그 자체를 머금어버린 것이다.

“이 자리에서 널 죽이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죄악이다!”

…라고 외치던 루소의 두 눈알이 앞으로 빠져버렸다.

“아…?!”

비어버린 눈에서 한 줄기의 선과 함께 혈액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회로 삼은 배척자가 앞으로 내달려 루소를 산 채로 들어 올렸다.

으직!

배척자의 힘은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다. 루소는 배척자의 무릎에 떨어져 허리가 꺾이고 만 것이다.

그는 등과 엉덩이가 붙은 채 즉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방금 얘 눈알이 뽑힌 건…」

루소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의 주술을 받게 될 줄은, 바깥 상황이 이토록 빨리 정리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거미 악귀들의 위력도 오늘 처음 알았을 테니.

마침 내 뒤에서 베르자인과 자객들이 등장했다.

“바깥 것들은 다 죽었어.”

그녀의 주술이 루소의 저주 저항보다 높은 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 죽었다니, 무슨 말인가.

“시신이 40구는 나왔어. 다른 거리에 쌓인 것들까지 합치면 70구는 넘을 거야.”

“전투는 끝난 거냐…?”

“우리가 일방적으로 숙청하는 중이야. 항복을 받아줘도 후환이 될 테니까.”

기습을 당한 달란트 상회는 전장의 지휘관까지 잃어버린 채 거미 악귀들과 황금달을 상대하게 되었다.

「역시, 실재세계의 인간들은 잿빛세계의 이물들한테 뼈도 못 추리는 거야.」

“네가 소환한 괴물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어. 우리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고. 두려울 정도로….”

베르자인은 실내의 처참한 광경을 둘러보더니 루소의 검 한 자루를 주워들었다.

「저건 네 전리품이잖아!」

‘어차피 폭파광 능력이 없으면 다루지도 못해. 저 검이 특별한 게 아니라 루소의 능력이 특별한 거야.’

「아깝다고…. 루소가 이물이나 악령이었다면 그 능력을 뺏어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좀 전까지 스스로 폭발하고 있던 검은 주인이 사망함과 동시에 평범한 검처럼 잠잠해진 채다.

베르자인은 감정이 사라진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이젠 정말로 돌이킬 수 없어. 돌이킬 생각도 없지만.”

거리에 시신이 70구나 쌓여있고 황금달이 이대로 상회의 주요 인물과 암살자들을 계속 죽인다면 시신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원래 평상시 뒷골목의 무력 다툼이란 각 세력이 소수 정예로 인원을 보내서 표적을 살해하거나 무언가를 훔치거나 파괴하는 식인데, 오늘 밤에 이런 식으로 전쟁이 터졌으니 내일 해가 뜨면 왕국의 이목이 집중되는 걸 피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왕국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승자는 분명하게 가려져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금달이 외압에 의해 ‘악’으로 규정되어 역으로 학살당할 것이고, 상회는 부활할 것이다.

“…한 놈도 예외 없이 다 죽여야만 해. 상회의 높은 자리에 있는 상인들도 죽이고 그 밑의 암살자, 해결사, 용병들도 모조리 처리해야 해. 그리고 비밀리에 그들을 후원하는 자들은 협박해야겠지.”

“해가 뜨기 전까지 할 일이 많다는 거구나.”

“너한테 몇 명이라도 좀 붙여주고 싶은데 여유가 없어.”

“괜찮아.”

나는 처참한 현장을 등지고 까맣게 타버린 출입구로 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출입구다.

“이게 원래 계획이야. 너는 너 할 일 해.”

그렇게 돌계단을 내려가려 하는데 베르자인이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달란트까지 끝나고 나면…. 그걸로 끝이 아니겠지?”

칼이 어디까지 닿는가.

달란트 상회의 달란트.

그들 뒤에 있는 세력.

그 세력의 머리이자 내 목표물.

승천자.

“너……. 네가 추방당하기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너는 달란트가 죽으면 끝이고.”

“….”

“나는 나대로 다른 끝장을 봐야겠지.”

나는 베르자인의 손을 뿌리치고 돌계단을 내려왔다.

* * *

복수를 성공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복수를 할 때는 무덤을 두 개 파야 한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복수하는 자와 복수 당하는 자는 모두 파멸을 맞게 된다,

그런 탁상공론 같은 생각은 접어뒀다.

승천자는 죽어야 한다.

그 뒤는 지금 생각하지 않겠다.

어차피 뒤를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이유까지 기억났으니.

나의 내일은 관심 없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과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나는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지옥 속에 평생 갇힌 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승천자를 죽여야 한다.

「승천자가 널 지켜보고 있다는 게 사실이었어.」

「배척자가 알려줬어. 승천자에겐 천리안이라는 고유 능력이 있어. 세인트교가 영향을 주는 지역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해. 마치 하늘의 눈처럼.」

‘위에 천장이나 땅이 있으면 볼 수 없다는 건가?’

「그런 어정쩡한 능력이 아니야. 천사에게서 받은 고유한 마법이라는 거지. 단, 천리안으로 볼 수는 있지만 소리는 들을 수 없다고 했어.」

루소는 내 이름을 대놓고 부르며 정체를 확신했다.

그 장면을 승천자가 내려다볼 수는 있을지언정 들을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아직도 다차원 능력 발동이 안 돼. 놈은 지금도 천리안으로 널 지켜보고 있는 거야.」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점점 더 깊어지는 돌계단의 밑바닥에는 지하수로가 있었다.

오랜 가뭄 탓에 아주 얕은 물만 흐르고 있는, 축축하고 각진 고대의 유적 같은 느낌이다. 만약 가뭄이 없었다면 나도 달란트도 이런 길을 이용하진 못했으리라.

「오늘 영력을 많이 소모했어. 달란트를 죽이는데 너무 낭비하진 않도록 조심해.」

키이잉!

나는 거미 악귀를 소환하여 말처럼 탔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지하수로를 빠르게 내달리며 몇 번씩 방향을 전환하고 다시 달렸다.

찰박찰박찰박!

밟힌 물이 튀어 올라 내 옷을 적시기도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 앞으로 내달릴 정도로 거미 악귀는 빨랐다.

그래서 달란트가 아무리 죽기 살기로 뛰어봤자 거미 악귀보단 느린 것이다.

「존재 추적 능력으로 달란트의 위치를 계속 확인하는 중이야.」

「놈은 아직 지하에 있어. 중앙교회로 가려면 멀었어.」

밤눈으로 보인다. 저 멀리서 부리나케 뛰고 있는 달란트와 그 옆의 암살자 한 명이.

“키에에에에엑!!!”

거미 악귀의 울음이 지하수로를 울리며 그의 등을 오싹하게 긁었으리라.

마침내 그가 뒤를 돌아보며 얼굴을 보였다.

땀으로 헝클어진 머리칼, 일그러진 눈썹과 잔주름, 거친 호흡, 확장된 동공.

「공포.」

달란트는 반쯤 이성이 나간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저거 오잖아! 온다고!”

그는 그러면서 제 옆에 있던 암살자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암살자도 그와 표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히익…!”

퍽!

암살자는 달란트를 밀쳐내고 먼저 도망쳤다. 그 자리에 넘어진 달란트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도로 주저앉았다.

“세, 세인트 여신이시여 저 악마로부터 날 구원하소서…!”

거미 악귀가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나는 거미 악귀의 머리를 밟아 그의 앞으로 빠르게 도약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겠다. 이대로 5초 안에 목을 벨 것이다.

“여신이시여 날 구원하소서…! 여신이시여 날 구원하소서…! 끔찍해, 너무 끔찍해, 히이익…!”

그는 날 보는 것조차 무서웠는지 눈을 질끈 감은 채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오지도 않을 여신만 부르짖으며 두 손바닥을 싹싹 비벼댔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내 도끼가 그의 목을 측면에서 치기 직전이었다.

지잉…!

갑작스레 도끼가 밀려났다.

「무슨…?」

“살려주… 엇, 어어? 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달란트의 목을 치려고 했는데 도끼가 그의 목에 닿기 직전, 무언가 투명한 힘에 의해 밀려나버렸다.

지잉!

지잉!

마치 서로 붙지 않는 자석을 억지로 붙이려는 것과 같은 감각이다. 그런 감각으로 도끼가 계속 밀려난다.

‘방사…!’

화아아아아!

“으아아!”

그에게 화염을 방사했지만 그 화염조차 그의 몸에 닿기 직전 이상한 방향으로 휘어서 천장이나 벽에 부딪히기만 했다.

‘방혈!’

그가 투명한 구슬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공기가 일렁였다. 그렇게 방혈조차 보이지 않는 힘에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

“히, 히, 허, 허억…! 하…! 하하!”

달란트는 급하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호흡이 안정되기도 전에 눈물과 침까지 흘려가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 이런 씨발새끼! 그렇지, 이게 있었지, 야 이 개새끼야! 하하! 하아…! 하…!”

그러더니 품속에서 은으로 된 십자가를 꺼내 보이는 것이다.

“넌 나 못 죽여! 이 씨발놈아!”

저 십자가 주물이 원인이었다.

‘죽여…!’

“키에에엑!”

지잉!

거미 악귀가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거미 악귀의 다리도 턱도 거미줄도 달란트에게 닿을 수 없다.

‘재결합…’

달란트가 깔고 앉은 바닥으로부터 가시라도 돌출시키려고 했는데 통하지 않는다.

「영력이 부족하다니까! 이만하면 안 통하는 거 알았잖아!」

“씨발 그럼 어쩌라고!!!”

「단순히 저주 저항 같은 걸 올려주는 주물이 아니야! 저 십자가가 지금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어!」

가만 보니 십자가의 정중앙에 눈을 표현한 무늬가 있었다. 그 동그란 무늬의 중심에 있는 까만 보석이 마치 살아있는 동공처럼 날 쳐다보는 듯하다.

“하하…! 넌 이제 좆됐어…!”

내가 해결사였던 시절, 악령의 눈앞에 십자가를 흔들어댔던 날들이 떠오른다.

지금 달란트가 내게 하고 있는 짓이 딱 그렇다.

“사악한 새끼, 넌 이따가 승천자님께 심판을 받을 거다…! 하하하!”

승천자가 천리안으로 지켜보고 있다.

내가 승천자라면 당장 지하수로로 내려올 것이다. 사람들 보는 눈이 없는 이 지하수로에서 지금 당장, 소리 소문도 없이 날 처리할 것이다.

‘승천자! 존재 추적해! 당장!’

달란트에게 걸어놨던 존재 추적 능력을 승천자에게 옮겼다.

「망했다.」

그가 오고 있다.

그가 우리와 같은 높이에 있다.

그도 지하수로에 내려온 것이다.

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난 죽더라도 부활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 순간에 달란트를 죽이지 못하면…

“페인! 네놈은 베르자인 그 씨발년이랑 쌍으로 죽여줄게…! 아니, 아니지…! 그년 젖탱이만 보면 환장하는 새끼들이 많이들 있었지! 그 씨발년의 도도한 면상까지 무너뜨린 다음에 불태워주겠어…!”

방법을 찾자.

「저 존나 신성한 십자가는 소유자에게 향하는 악의적인 공격을 차단해! 그게 물리적인 무기가 되었든 주술이 되었든 마법이 되었든 전부 차단한다고!」

방법을 찾자.

「저런 말도 안 되는 주물을 왜 저딴 새끼가 갖고… 설마 승천자가 준 건가?!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으하하! 그게 좋겠다! 한 번 더 화형식을 치르는 거야! 이번에도 네놈은 단두대에 묶인 채 그년이 화형 당하는 꼴을 지켜보게 되는 것이지! 네놈의 여동생이 그리 당했던 것처럼…!”

방법을 찾자.

방법을 찾자방법을찾자방법을찾자방법을찾자방법을방법을방법을이새끼를당장죽일방법을찾아야한다승천자가오기전에빨리이새끼라도죽여야한다.

「도망쳐!」

‘재결합.’

달란트의 배후, 그리고 내 배후에 돌과 흙으로 된 벽을 올려서 이 공간을 폐쇄한다. 그리고,

‘발화 2계. 방사.’

쿠와아아아!

내게 남은 영력을 전부 쥐어짜내서 온 사방에 화염을 쏜다. 재결합으로 생매장을 해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그럴 영력이 없다. 그러니 이게 최선의 선택이다.

「뭐하는 거야!」

“뭐, 날 이렇게 가둬서 질식시켜 죽이려고?!”

계속, 계속 화염을 쏜다.

“미친 새끼가…! 이러면 너도 뒈지잖아…! 내가 뒈지기 전에 네가 먼저 뒈져 이 새끼야!!”

“알아….”

뜨겁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불에 타고 피부에 열기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럼 뭐! 동반자살이라도 하려고?!”

「멍청아! 네가 먼저 죽으면 무의미한 자살이야!」

그렇다. 내가 질식하거나 불에 타서 죽는다면 더는 ‘방사’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달란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병신 같은 새끼…! 여기엔 태울 것도 없어! 이래서 못 배운 새끼들은 무식하게…”

“태울 거 있어.”

“키그그그….”

거미 악귀가 슬금슬금 앞으로 나왔다.

“살점…!”

거미 악귀는 흙과 돌로 된 벽에 머리를 처박고 방혈을 당했다. 그렇게 체내에 있는 모든 체액을 쏟아내고는 간신히 숨만 붙은 몸이 되었다.

녀석은 그대로 내가 만든 화염 속에 몸을 던졌다.

“케에에에에에엑!!!”

“이러면 계속 ‘방사’하고 있을 필요가 없잖아.”

“뭐, 뭔…”

녀석은 인간보다 몇 배는 덩치가 큰 이물이며, 뱃속에는 불에 잘 타는 거미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또한 동족상잔을 해도 맛있게 먹을 정도로 기름지다.

이어서 나 역시도 벽에 손을 찔러 넣어 피를 모조리 빼냈다.

시야의 테두리가 흐릿하고 몽롱한 기분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 산 채로 불타는 고통을 느끼기 전에 죽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새끼가 뭔 개짓거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뜨거운 불길 속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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