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29화 (29/181)

5. 되먹임 (4)

여기가 어딜까.

발밑에 짙은 먹구름이 바닥처럼 깔려있고 온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듯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해도 구름도 없이 어두운 남색의 배경만 칠해놓은 것 같다.

“애옹.”

폭신한 감촉이 느껴져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고양이 일곱 마리가 내 발치에 있었다. 어떤 녀석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어떤 녀석은 내 발목에 몸을 비비적거리는 것이다.

“뭐야.”

실재세계는 아닌 것 같고.

잿빛세계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저승일까.

그러나 이곳이 저승이라면 천국이나 지옥에 와야만 했을 터. 그 어떤 세계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 같은 주변 풍경이 혼란스럽다.

‘여기가 어디야? 난 방금 죽었잖아.’

그러나 내 안의 악령은 대답이 없다.

일곱 고양이들만이 대답할 뿐이었다.

“이야아옹…”

“나는 다시 부활해야 하잖아. 저번에 이런 적은 없었는데…?”

“애오옹…”

“도대체 무슨…”

그리고 시야가 꺼졌다.

내 신체의 감각과 눈앞에 보이는 것이 어딘가로 사라져서 까맣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 * *

정신을 차려보니 돌계단이 앞에 보인다.

나무 재질의 바닥과 벽이 불에 그을렸고 시체와 살점이 나뒹구는 실내다.

나는 이곳에 서있다. 서있는 것이다.

「추억 속의 리비카.」

「이제 네 추가 목숨은 일곱 개 남았어.」

내 안의 악령이다.

난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이 돌계단을 내려가기 직전의 위치로 말이다.

‘나 방금 이상한 걸 봤어. 고양이 일곱 마리가 먹구름 위에서….’

「나도 봤어.」

‘넌 없었잖아.’

「내 입장에서도 너는 없었어.」

방금 본 것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일종의 환상이야. 네 안에 살고 있는 고양이 일곱 마리의 영혼이 보여준 환상.」

‘99마리의 한은 모두 성불한 거 아니었어?’

「그중에 아홉 마리가 너를 위해 남아줬다는 거지. 네가 죽을 때마다 한 마리씩 이 세계에서 사라져 새로운 생명으로 윤회하는 거야.」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도 방금 알았어.」

「녀석들이 경고를 해준 거야. 네가 목숨을 너무 빨리 소모하니까 네 환상 속에 나타나서, 일곱 개가 남았다고 알려준 거라고.」

나는 건물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황금달 자객들이 길거리에 널린 시신을 치우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익숙한 금발을 찰랑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여서 다가갔다.

그녀도 배후의 낌새를 느꼈는지 내가 뭐라고 말을 걸기도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페인? 벌써 처리하고 온 거야?”

달란트 상회의 달란트 의장을 조속히 살해하는 일.

그 일을 제대로 처리했는가 묻는 것이다.

‘존재 추적.’

나는 지하로 의식을 집중하여 달란트라는 존재를 찾아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승천자라도 죽은 자를 되살리진 못하지.」

그래서 승천자의 존재도 추적해봤더니,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중앙교회에 있는 것이다.

이러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달란트는 죽었어.”

“확실해?”

“확실하게 죽였어.”

베르자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엉망진창이 된 거리를 한번 둘러보았다.

“…상회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황금달이 집어삼킬 거야. 그들의 빈자리를 대체할 조직이 있기야 하지만, 감히 승자한테 이의를 제기할 조직은 없겠지.”

“축하한다.”

“승천자는?”

“중앙교회로 돌아갔어. 지금쯤 천리안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거야.”

“천리안?”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마법.”

그러니까 이 정도 했으면 승천자도 별 수 없다는 것이다.

세인트교는 왕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소위 뒷골목이라 일컫는 이곳 음지의 검은 돈과 영향력은 왕국의 입장에서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왕족과 가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돈과 힘을 원하는 법이고 그중에 일부는 잘못된 취미를 가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래서 세인트교나 승천자가 황금달의 승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더라도, 당장 그들 입장에서는 어찌할 수단이 없다.

「막말로 승천자가 마법사들을 보내 황금달을 밀어버린다면 그땐 뒷감당을 할 수 없겠지. 소문이 퍼질 테니.」

왕족과 힘 있는 가문들은 음지의 실세가 누구인가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달란트 상회의 빈자리가 하루라도 빨리 채워지길 원하고 있을 것이다.

달란트 상회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던 자들은 조급한 마음으로 황금달과 연결을 시도할 것이고, 평소 달란트 상회가 마음에 안 들었던 자들은 황금달의 승리를 달갑게 여기리라.

“승천자는 우리의 목소리를 엿들을 수 없는 거야?”

“천리안은 눈이니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없어.”

길거리의 시신들이 얼추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어두웠던 하늘도 조금은 밝게 변하면서 새로운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둥근 달은 희미하게 변해서 구름 너머로 숨기 직전이다.

“이제 어쩌려고? 바로 승천자를 치러 갈 거야?”

사실은 오늘 끝장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달란트가 갖고 있던 주물이 신경 쓰인다.

「소유자를 향한 악의적인 공격을 차단하는 십자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성능의 주물을 달란트가 갖고 있었다. 그 정도의 주물이라면 분명 승천자가 직접 달란트에게 준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승천자는 그런 주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그 십자가보다 더 강력한 주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런 주물들보다도 훨씬 강력한 마법을 얼마나 많이 구사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 하나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다.

“목숨이 백 개라도 모자라.”

나는 루소를 상대로 목숨을 잃을 뻔하고.

나는 주물 하나를 들고 있던 무능력의 달란트를 죽이기 위해 목숨 하나를 불태웠다.

그런 내가 승천자를 상대하려고 했다니, 목숨이 백 개가 아니라 천 개라도 천 번의 개죽음을 당하리라.

“나는 아직 약해.”

그러자 베르자인은 픽 웃었다.

“세비우크와 루소를 해치우고 달란트까지 죽인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루소는 네가 도와줬잖아.”

“내가 없었어도 이겼을 거야. 대신 부상을 좀 입었겠지.”

승천자는 나중에 죽인다. 내가 더 강해져야만 그를 죽일 수 있다. 또한 그를 상대하기 위해선 나만 강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군대가 필요할 수도 있다. 거기에 철저한 전략까지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당장 승천자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쳐도, 황금달의 앞날은 훤하게 뚫렸다고 봐도 되는 걸까.

“베르자인. 이제 황금달엔 아무 문제도 없는 거지?”

“그 거미를 닮은 괴물들 있잖아.”

“거미 악귀.”

“걔네들을 목격한 자들이 분명 있을 거야. 그래서 난 황금달에 ‘강령술사’가 있다는 소문을 뿌리려고 해. 아주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강령술사가 우리 편이라고 설명하는 거지. 그리고 네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기사들을 통해서도 왕궁이나 가문들까지 올라갔을 거야.”

“그래서?”

“결론은…. 맞아. 이제 황금달엔 아무 문제가 없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탄탄대로야.”

그렇다면 이제부터 황금달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이제 승천자만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계약 있잖아? 그거…”

“나는 계속 황금달을 이용할 거야. 지금부터는 그게 ‘의무’가 아니게 되었을 뿐이고.”

황금달이 암시장의 정점에 설 때까지, 나는 황금달을 통해서만 잿빛세계의 주물을 판매한다.

이제 그 계약이 끝나게 되었으므로 내가 굳이 황금달을 이용할 의무는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난 앞으로도 베르자인을 만날 것이다.

“어차피 이젠 너네가 제일 크잖아. 베르자인.”

“….”

이후 악귀들은 모두 잿빛세계로 돌아갔다. 길거리를 정돈하던 자객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 누구도 황금달을 위협할 수 없는 그날의 새벽, 나는 베르자인과 함께 은거지로 돌아가서 몸을 섞었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밝아지는 햇살을 맞이하며 눈을 감았고, 잠이 들기 직전에 그녀는 나긋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꼭 복수해야겠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잠든 척을 하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내가 대답을 회피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굳이,

굳이 승천자를 죽여야만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 흔들렸던 걸지도 모른다. 조금 살만해지고 조금은 일편의 행복을 느끼게 되어서, 그래서 그냥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는 달콤한 유혹에 흔들렸던 걸지도 모른다.

대체로 사람이란 안정과 정착을 원하는 동물이니까. 나도 위험한 모험보다는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이고.

「미루면서 생각해도 되잖아.」

「승천자가 널 죽이려고 달려들지만 않는다면 계속 미룰 수 있으니까.」

「솔직히 말이야.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나도 승천자는 좀 두려워. 달란트의 주물을 보니까 그는 우리 생각보다 많이 강한 놈인 것 같아.」

뜨겁게 끓었던 복수심은 잔잔하게 내려앉았다.

이후 남은 복수심은 내가 악착같이 살아서 움직이기 위해, 스스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잿빛세계를 오갈 수 있는 나는 계속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미루자….’

조금 더 강해지고 나서 죽여도 되는 게 아닌가.

세인트교의 마법사들 전체가 내게 달려들어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괴물처럼 강해진 다음에 철저하게 짓밟는 복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존재 추적이라는 능력도 있으니 우선은 승천자의 동태를 살피면서 차근차근 내 힘을 키우는 것이 옳다. 그러다 결국엔 내가 이길 것이다. 확실하다.

그러나 그날 대낮에 일어나서 잿빛세계로 향한 나는 다시금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흔들렸던 마음과 합리적인 선택을 후회하며, 그날 침대 위에서 결정한 것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싫어어…….”

이곳은 잿빛세계.

숯처럼 바짝 말려진 몸으로, 머리카락도 눈알도 입술도 없이 까맣게 타버린 몸으로, 십자가에 묶인 이물이 중앙교회 앞을 서성이는 것이다.

발끝으로 두 뼘 정도, 공중에 붕 떠서 서성이는 것이다.

“너무 미워……. 죽어어….”

그 괴로운 목소리를 귀에 담고,

그 처참한 모습을 눈에 담은 나는 마음이 부서지고 말았다.

“승…… 천… 자아…”

리인.

그 아이는, 그 아이의 영혼은, 그 아이의 영혼과 목소리와 체구를 닮은 그 가여운 존재는 홀로 잿빛세계를 방황하며, 텅 빈 눈으로 하염없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죽어서도 뒤틀려서도 차마 사라지지 못해, 그 가증스러운 자를 하염없이 부르고 있었다.

“승…… 천… 자…”

“리인!!!”

나는 리인을 구속하고 있는 십자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드드드드득!!!!

그 자리에서 무릎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억지로 무릎을 꿇렸기 때문이다.

잿빛세계의 리인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할 수 없다.

“나 좀 봐! 리인! 너…!”

“미워어어…”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저 아이의 눈이 없다.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 허공만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스스로의 어둠 속에 갇혀있는 것 같다.

「저주하는 여인.」

“아니야…. 아니야, 얘는 이물이 아니야….”

하지만 안다. 리인은 이물이 맞다. 저 이물은 리인이다.

「가지고 있는 악은 85.」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녀석은 실재세계의 존재에게 악의를 품고 있어. 반대로 잿빛세계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지.」

그래선 안 됐다.

이 아이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선 안 됐다. 안 된다.

「네가 차마 쟬 죽이지 못하겠다면 성불시켜야겠지. 그래서 쟤가 성불하는 방법이라면 뭐…. 명확한 것 같네.」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승천자.

“씨발! 아라나크!!!”

키이이잉!

커다란 몸집의 거미 악귀가 부정한 소환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렀느냐.”

“군대를 모아야 해…!”

“벌써 날 위해 비첸크로이 제국을…”

“몇 명이 죽더라도 상관없어…! 왕국이 어떻게 망가지더라도 상관없어…!”

“잠깐, 왕국이라고?”

미루긴 뭘 미루는가.

악귀로 이루어진 사악한 군대를 만들어서.

왕국에서 가장 선하다는 승천자를 죽인다.

왕국이 혼란에 빠져도 세인트교가 무너져도 그 과정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러서 지옥에 떨어진다 하여도 그를 죽인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리인….”

내가 그의 머리를 가져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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