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과도기 (1)
복수를 하려면 무덤을 두 개 준비하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이라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살아있을 땐 분노하였고 그가 죽은 다음엔 공허했다.
- 하늘에서 지켜볼게! 남은 인생 멋지게 살다가 오라고!
하지만 리인의 유언이 날 채웠다.
- 오빠가 내 오빠라는 게 나한텐 축복이었어!
이 모든 세계가 밉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가야만 한다. 리인이 내게 남기고자 했던 건 분명 그런 것이었다.
“날 왜 여기로 보냈지?”
실재세계로 가려던 참에 아라나크가 다가왔다.
“잘 싸우고 있었는데 왜 날 잿빛세계로 돌려보냈냐는 말이다.”
“네가 발키리의 낙뢰에 맞아서 죽을 뻔했으니까.”
“그럼 내 아가들도 같이 살려주지 그랬나.”
“전부 다 살려서 잿빛세계로 보내기엔 영력이 부족했어.”
“그래서 승천자는? 죽였나?”
“죽었지.”
아라나크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번에도 물었다.
“비첸크로이 제국은 언제 멸망시키나? 내 소원은 언제 들어줄 심산이냔 말이다. 네놈의 복수를 이뤘으니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닌가. 나는 네놈한테 힘을 빌려줬다. 네놈도 내게 마땅히 힘을 빌려줘야만 한다.”
아라나크에게서 얼마 전까지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혼자서 제국을 상대로 어떻게 전쟁을 걸란 말이야? 제발 좀 닥치고 기다리라 해.」
“그건 바로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좀 기다려.”
그러자 아라나크는 여덟 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내 코앞까지 바짝 붙었다.
“나는…! 제국을 증오한다…!”
그리고 거미의 턱을 좌우로 쭉 벌려서 순식간에 내 목을 위협했다.
“네놈이 승천자를 증오했던 것처럼 나도 제국을 증오한단 말이다! 정말 모조리 학살하고 불태워 파괴하고 싶어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단 말이다! 너라면 날 이해하지 않느냐!”
나는 그 거대한 턱을 한 손으로 잡아서 밀어냈다.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아라나크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버티려 했지만 다리가 흙바닥에 쓸리면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곳의 900만 인간들은 질병이다…! 그 역겨운 자들이 갖고 있는 악이란 질병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다스릴 수 있다!”
“……급한 일이 정리되면 외부로 나갈 거야.”
“외부?”
실재세계에서 성벽의 바깥세상. 어느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모든 영토. 무법지대.
“혼자서 제국을 상대할 수는 없어. 외부의 정착지를 돌면서 그곳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날 따를 사람들을 모아야 해.”
“그래서 어느 세월에…!”
“그러니까 작작 보채고 악귀 군단이나 착실하게 모으란 말이잖아 이 새끼야!!!”
“….”
“누가 네 소원 안 들어준다고 했냐? 그 조급함에 휩쓸려서 일 틀어지면 너만 손해야! 알아?”
나는 처음으로 아라나크에게 화를 냈다.
「하루에도 두 번씩은 널 죽이려고 드는 악귀인데 너무 참긴 했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승천자가 뒈졌으니 우리한테 아라나크의 힘 따위는 딱히 없어도 되는데.」
이제 아쉬운 쪽은 아라나크다.
“나는 뭐 씨발 아무 준비도 없이 승천자를 죽일 수 있었던 것 같아?”
“…알았다.”
아라나크는 기가 죽어서 스스로 물러났다.
“…뒤에서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을 테니, 지금 내뱉은 그 말은 꼭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 * *
실재세계의 푸른 하늘에 새로운 해가 떴다.
이른 아침부터 기사 두 명이 이곳으로 찾아왔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화재로 홀랑 타버렸잖아.”
승천자의 저택.
그의 가족, 성기사, 성녀, 하녀들이 있어야 할 저택.
승천자와 세인트교의 선함을 표방하듯 하얀 벽돌로 지어진 저택이었다.
그런데 그 새하얀 저택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타버린 폐건물처럼 변하고 말았다. 인기척은 없고 금방이라도 악령이 출몰할 것처럼 스산한 분위기다.
“뭔가 꺼림칙한데….”
“그래도 조사는 해야지. 가자.”
두 기사는 열려있는 정문을 지나 정원에 들어왔다.
곳곳에 핏자국이 흥건하다. 잘 보면 누군가의 찢어진 옷자락, 살점, 내장 따위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시신은 온데간데없다.
마치 끔찍한 괴물이 휩쓸고 지나간 현장 같다.
“야, 야. 나가자.”
“어떻게 나가?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하게?”
“여기 심상치 않으니까 지원 좀 데리고 오자고.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잖아. 나, 나는 화재인 줄 알고 왔다고!”
“아이씨….”
“화재가 발생하고 전부 죽임당하고 몇 시간 안에 시신들을 다 치워버리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심지어 성녀와 성기사들도 있었을 텐데!”
“전부 죽었다는 건 너무 갔어. 생존자가 있을지도 몰라.”
“없다니까! 있는 게 이상해!”
“그럼 1층만 확인하고 나가자. 2층이랑 3층은 나중에 다 같이 확인하고.”
“미치겠네….”
두 기사는 피로 물든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의 현관문까지 왔다.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어보았다.
그 너머엔 자객들이 있었다.
“당신들 뭐야?!”
스르릉!
두 기사는 동시에 검을 뽑아들어 내부의 자객들에게 겨누었다. 그러면서 저택 내부를 보니 난장판이다.
멀쩡한 가구는 하나도 없고 바닥부터 시작해 벽과 천장까지 온통 불에 그을린 채다. 그리고 저 깊은 안쪽에서는 시신의 두 다리를 붙들어 질질 끌고 가는 자들도 보인다.
게다가 온통 핏자국이다. 정원보다 훨씬 심하다.
“잠깐, 이 사람들 옷이…”
“황금달이냐? 황금달에서 승천자님의 저택을 급습한 거냐?!”
하지만 기사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의심했다.
뒷골목의 떠오르는 조직체인 황금달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힘으로선 승천자의 저택에 있는 수많은 성기사와 성녀들을 몇 시간 안에 소리 소문도 없이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달란트 상회의 빈자리를 황금달이 차지하게 되지 않았나. 그러면 황금달의 입장에서도 승천자가 죽는 건 손해가 아닌가.
“저희 입장에서 승천자가 죽는 건 확실히 손해이긴 합니다.”
그런 기사들의 생각을 예상이라고 하고 있었다는 듯 자객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가 앞으로 나오자 주변에 있던 자객들이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혼자서만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자객들 중에서도 나름 직위가 있는 인물인 것 같다.
“그럼 당신 자객들이 왜 이런 짓을…?”
“승천자가 죽는 게 손해이긴 한데, 원래 승천자는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는 대담하게도 기사의 검을 맨손으로 슬쩍 내리눌렀다.
“정상적인 승천자는 음지와 아무런 접선이 없어야 하는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승천자들이 그랬듯 말입니다.”
어느덧 두 기사의 예리한 검이 바닥을 향했다.
“역대 그 어느 승천자가 뒷골목의 조직체들을 만나고 검은 돈을 끌어모아 영향력을 행사했답니까?”
“그럼 승천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당신들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겁니까? 아니, 그가 타락한 승천자라도 그의 가족들은 무슨 죄로 죽임당한 겁니까?”
“….”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타락한 승천자를 잡아 정의를 구현하기 위함이라고 하기엔…”
“미안하지만 정의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딱히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 것도 아니고요.”
“뭐라고요?”
“그냥 이건…. 일종의 커다란 재해였습니다. 그 재해를 만든 장본인은 타락한 승천자였고요.”
“이 저택 사람들을 당신들이 죽인 게 아니라는 겁니까?”
자객은 대답을 보류했다.
그리고 다른 자객이 나서서 두 기사에게 보따리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화재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시신이 없는 이유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댁들이 상부에 보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또 어딘가에서 화재가 발생할 수도, 그냥 미궁으로 남겨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기사들은 보따리를 열어보았다.
금은보화가 있었다.
“이 저택에서 벌어졌던 일이 댁들에게 생겨선 안 되겠죠. 안 그렇습니까?”
“….”
자객의 살벌한 경고보다 그 보따리 안에 담긴 금은보화가 그들의 입을 다물도록 하였으리라.
* * *
베르자인은 새로운 건물에 집무실을 마련했다. 건물은 뒷골목의 중심에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건물 앞에는 황금달의 표식과 자객들이 항시 배치되어 있다.
이제 은거지는 아니게 된 것이다. 더는 숨을 필요가 없으니까.
“승천자의 저택에서 상당한 현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사람을 시켜 세어보는 중인데 족히 4만 루아는 가뿐히 넘는다고 합니다.”
“놈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해왔겠지.”
또한 지금 베르자인이 읽고 있는 것은 승천자의 저택에서 발견된 비밀문서였다.
“이쪽 뒷골목에도 승천자의 돈이 썩어나고 있었어. 여기 목록에 적힌 소규모 조직들이 승천자의 재산을 분산해서 숨기고 있던 거야.”
“그중에는 절대 판매되어선 안 될 신성한 주물도 있었습니다.”
비밀문서의 내용을 전부 외워버린 베르자인은 그것을 양초에 가져다 댔다.
그렇게 세상에 하나뿐인 비밀문서는 태워지게 되었다.
“베르자인 님? 그 비밀문서가 없으면 증거로 제출할 수가….”
“왕궁이나 세인트 교단이 그 비싼 것들을 꿀꺽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베르자인은 승천자의 숨겨진 재산을 법적으로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가문과 왕궁 관계자들을 매수해 저희 쪽 사람을 늘리기만 해도 벅찬 상황입니다. 작게 분산된 그 많은 조직들로부터 승천자가 남긴 재산을 회수하기엔 일손이 부족합니다.”
“일손이 부족한 것도 돈만 있으면 해결돼. 우리 사람을 늘리는 일도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고. 게다가 신성한 주물까지 돌아다니고 있다며?”
“예. 그렇습니다.”
“돈은 우리가 먹고, 신성한 주물은 손수 회수해서 교회에 반납할 거야. 그러면 더 많은 기회들이 생기겠지. 나는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어.”
“승천자의 재산을 숨기고 있는 놈들 입장에서는 적잖은 돈이라 순순히 내놓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일전에 화염술사 카누스로 인한 인적 피해가 막심하여 자객의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써서 용병을 구하자니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지?”
“예. 적잖은 돈이니까요. 믿을 수 없는 자를 쓰면 중간에서 가로챌 위험성이 있습니다.”
“너도 말하면서 떠올리고 있잖아.”
끼익.
그녀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집무실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한 명뿐이다.
“좀 괜찮아? 페인….”
“돈이 많이 필요해. 최대한 빨리.”
“갑자기 왜?”
“한동안 외부로 나가서 여행을 좀 할 것 같아.”
베르자인은 자객에게 눈짓했다.
“나가서 일봐.”
“….”
“괜찮아. 페인이잖아.”
자객은 베르자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페인의 옆을 지나갔다. 그러면서 페인의 안색을 살피려고 했지만 방독면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페인은 고개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서, 마치 자객이 안 보이는 것처럼 서있었다.
끼익.
“여행은 왜? 공허해서?”
“그것도 있고.”
베르자인은 그가 실내에서라도 방독면은 벗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잘 오긴 했어. 안 그래도 널 부르려던 참이야.”
“괜찮은 일이라도 생겼나?”
“잠시 나랑 움직여줘야겠어. 방문할 곳이 많거든.”
“널 호위하라는 말이구나.”
베르자인은 책상 위를 대충 치운 뒤에 일어나서 겉옷을 챙겼다.
“…그것도 있고.”
* * *
창문이 크고 커튼이 활짝 열려있는 개방적인 공간.
햇빛으로 환하게 밝혀지고 있는 실내에 긴 책상 하나와 의자들이 놓여있다.
뒷골목의 작은 조직에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밝은 분위기로 치장된 회의실이다.
“그래서 비밀문서의 목록이라는 걸 보고 찾아오셨다는 말씀이군요.”
평범한 상인 차림의 젊은 남자가 베르자인을 마주 보고 앉았다.
그의 뒤에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자들이 넷. 베르자인의 뒤에는 페인 한 명뿐이다.
“수고스럽게 찾아오셨는데 이를 어쩌나…. 죄송하지만 저희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서요. 그 목록이라는 것도 금시초문이고요.”
그러자 베르자인은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술술 말했다.
“엔도르크. 29세. 조직의 이름은 없지만 뚜렷하지 않은 집단을 운용하고 있음. 의뢰소보다 싼값에 용병을 알선해주며 중간에서 소개료라는 명목으로 이득을 취함.”
“잘 아시네요.”
“…그렇게 활동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사기. 용병과 목적지에서 합류하는 방식으로 거래를 마치고 돈만 챙긴 후 모른체하는 방식. 의뢰소보다 싼값에 용병을 구하려는 자들은 대체로 힘이 없는 약자들. 그래서 그들 모두가 엔도르크의 사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그 푼돈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음.”
거기까지 말한 베르자인은 엔도르크의 표정을 관찰했다.
“황금달의 정보력이 무섭긴 하네요. 그런 부분까지 알고 계시다니, 하하.”
여유롭다는 투의 반응이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하다.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찌그러져서 대칭이 맞지 않고 가식적인 미소가 섞인 얼굴의 근육으로부터 한순간이지만 미세한 떨림이 엿보였다.
“더 무서운 거 알려줄까요?”
“뭐가 또 있어요?”
“지금 나는 엔도르크 씨를 추궁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하. 그럼요?”
“명령하고 협박하는 거죠. 무력을 써서.”
엔도르크는 그녀 뒤에 서있는 페인을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횡포잖아요.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시면 적만 늘어나지 않겠어요?”
“엔도르크 씨는 적이 되어도 무섭지 않을 것 같네요.”
“저 말고도 다른 자들이 있잖아요. 다들 귀가 있고 눈이 있는데, 오늘 행동에 내일은 생각 안 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기꾼한테 충고를 들어도 별 감흥은 없네요.”
이젠 엔도르크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졌다. 그의 뒤에 있는 자들은 검 손잡이를 쥐었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살기를 띤 적막함이 감돌았다. 서로의 상태를 읽는 시선들이 허공에서 차갑게 교차했다.
“아, 왜 그러세요…. 솔직히 베르자인 님 한 분으로도 어려운데 이건 아니죠.”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자는 엔도르크였다.
“뒤에 계신 분…. 강령술사 맞죠? 세비우크에 이어서 승천자까지 해치웠다는 그 사람이요. 아, 전에는 중앙교회의 마법사까지 잡았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페인은 묵묵부답이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기도 어렵다. 고개조차 움직이지 않고 있다.
“화염술사 카누스였나…. 내장이 흉하게 다 쏟아져서 죽었잖아요. 이거야 뭐, 앞에 계신 분은 눈알을 뽑아내고 뒤에 계신 분은 내장을 뽑아낸다는데 저희 같은 소인들이 뭘 어쩌겠어요?”
“알면 됐네요. 승천자한테서 받은 것들만 다 가져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정말요?”
“네. 그거만 다 뱉어내시면 볼일 없죠. 평소에 하던 대로 사기를 치시든 뭘 하시든 관심도 없으니까요. 받은 것만 다 가져오세요. 그게 다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는데요. 정말로 승천자한테서 받은 건 없어요.”
“왜 없는데요? 너도 목록에 있었잖아.”
“그 비밀문서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갈 경우를 대비해서 애꿎은 사람들 이름까지 써놓은 게 아닐까요? 전쟁에서 지휘관들도 그러잖아요. 지도에 일부러 다른 그림을 몇 개 그려 넣는다거나 그런 것처럼요.”
“목록의 일부는 진짜지만 일부는 눈속임이다?”
엔도로크는 손뼉까지 마주치며 긍정했다.
“네! 그거겠죠! 그리고 생각을 해보세요. 저희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 높으신 분의 귀한 재산을 숨길 수 있겠어요? 제가 승천자라면 저희한테 안 맡기죠. 심지어 사기나 치는 놈들인데. 하하하.”
그러자 엔도르크의 뒤에 있는 자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베르자인도 그들을 따라서 함께 웃었다.
그러다 그녀는 단번에 웃음을 멈추었다.
“엔도르크.”
“네?”
“나는 비밀문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어.”
“무슨 문서요?”
“목록이 있다고 했지, 비밀문서라고 얘기하진 않았다고.”
“목록이면 당연히 종이 같은 거에 적겠거니 싶어서 그렇게 말한 거죠.”
“아, 씨발.”
베르자인은 의자 등받이에 한껏 기댔다.
“바빠 죽겠는데 송사리 새끼가….”
그러면서 고개를 뒤로 젖혀 엔도르크와 시선조차 마주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피로감이 가득하면서도, 자다 깬 사람처럼 어딘가 무방비한 느낌의 목소리를 냈다.
“강령술사야. 쟤 아까부터 말하는 거 보니까 뒤봐주는 곳이 있어…. 여기 말고 거기를 찾자. 사람 타고 가면 찾는 거 금방이니까.”
앞에 사람이 있는데 관심이 없어졌다는 듯 의자에 축 늘어진 베르자인.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페인.
그런 이들을 상대하는 엔도르크는 자존심에 상처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무례하시네요. 아무리 제가 베르자인 님에 비하면 없는 사람이어도 최소한의 태도는 갖추는 게 기본 아닙니까?”
그러자 베르자인은 자세를 고쳤다.
책상에 팔을 기대어 두 손으로 턱을 받쳤다.
계속 지껄여보라는 식이다.
“하, 진짜….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나중엔 황금달보다 차라리 달란트가 좋았다는 소리가 나오겠죠. 베르자…”
으직!!!
그 순간 내던져진 도끼가 엔도르크를 벽에 고정하고 말았다.
엔도르크의 뒤에 있던 네 명이 검을 뽑을 틈조차 없었다. 네 명은 엔도르크가 도끼와 함께 벽에 처박힌 것을 확인하고는 이제야 검을 뽑아든 참이다.
이어서 페인의 한쪽 손아귀가 그들을 향했다. 그들은 그의 손아귀가 무언가의 주술 발동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 베르자인은 나지막이 말했다.
“피 묻으면 안 돼. 오늘 두 곳은 더 방문해야 해서.”
콰앙!
페인은 긴 책상을 발로 차서 동시에 네 명을 넘어뜨렸다.
“끄악!”
“커헉…!”
그리고 그는 말없이 걸어가서 엔도르크의 몸에 걸린 도끼를 쑥 뽑아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엔도르크는 가슴뼈 사이로 갈라진 심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벽에 고정되었던 시신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페인은 남은 네 사람을 책상과 함께 장작 패듯 쪼개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