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37화 (37/181)

7. 과도기 (2)

바닥에 혈흔이 낭자했다. 팔다리, 머리 따위가 굴러다녔지만 베르자인에겐 피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대낮에 시끄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뒷골목에서의 비명은 잠깐 시선만 끌뿐인 사건이었다.

그렇게 세 명이 죽고 마지막 한 명이 한쪽 다리부터 잃기 직전이었다.

“가문입니다…!”

“가문?”

그녀의 시선을 등으로 느낀 페인은 도끼질을 멈추었다.

“무슨 가문?”

“승천자에게 매수되었던 가문이 한두 곳이겠습니까…! 어떤 가문에서 승천자의 뒤를 봐줌과 동시에 엔도르크 씨의 뒤까지 겸사겸사 봐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문 이름이 뭐냐고.”

“죄, 죄송하지만 거기까진….”

페인은 도끼를 치켜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제가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안에 반드시 알아내서 직접 황금달로 찾아가 보고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저는 이쪽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풋내기란 말입니다…!”

“알겠어. 그럼 승천자가 엔도르크한테 맡긴 것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건 엔도르크 씨가 알고 있었… 아, 아니, 그것도 그쪽 가문을 통해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 건물에 없는 건 확실합니다!”

페인의 변조된 음성이 섬뜩하게 울렸다.

“어쩔까? 베르자인.”

“정보를 바치겠다는 사람인데 죽이면 손해지.”

“가, 감사합니다…!”

베르자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페인은 도끼에 묻은 흥건한 피를 시신의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번거롭게 널 다시 쫓아서 죽일 필요가 없게 해줘.”

“물론입니다! 제가 반드시 오늘 안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페인의 안에 있는 악령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진짜 살려주는 거야? 이 버러지만도 못하게 약한 놈을?」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것도 강한 거야.’

페인은 베르자인을 따라서 회의실을 나갔다.

「일방적으로 밟는 참이라 재밌었는데….」

‘엔도르크까진 나도 속 시원했어.’

「저 사기꾼 죽이는 건 시원하게 즐겼으면서 용병 죽이는 건 별로라니, 참 까다롭네.」

* * *

슬슬 해가 저물고 있다.

나는 엔도르크를 끝장내고 계속 베르자인과 함께 이동했다. 이어서 찾아간 두 곳은 각각 소규모 상인들의 연합. 그리고 검은 돈을 관리하는 암흑가 교역소였다.

- 벌써 소식은 들었습니다. 웬 새파랗게 어린놈이 주제도 모르고 거금을 삼키려다 탈이 났다고 하더군요. 허허.

소규모 상인들의 연합에도 그들을 대표하는 머리는 있었다. 그들의 머리라고 하는 중후한 남자는 베르자인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들을 잘 부탁하겠다며 무거운 금괴들을 보여주었다. 승천자가 맡긴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 뒷골목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재산의 주인도 바뀌는 게 이곳의 이치입니다. 하하하. 때마침 이 재산을 물려받을 직계 자손들도 ‘우연히’ 소식이 끊어진 것 같고요.

그리고 좀 전에 만난 암흑가 교역소에서는 어떤 문서를 베르자인에게 넘겼다.

베르자인은 빙긋 웃으며 내게 그 문서를 보여줬지만 워낙에 글자와 숫자가 많은 문서라 알아보긴 힘들었다.

아무튼 그녀는 교역소에서 준 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상당한 거금을 황금달의 이름으로 받은 것 같았다.

“앞서 너로 인해 있었던 사건들이 뒷골목 전체에 소문나있던 덕분이야. 그 사기꾼을 처형한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고.”

나와 베르자인은 암흑가 교역소의 근처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주점에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와 무장한 여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발을 들일 수 없을 법한 분위기였다.

베르자인은 귀걸이를 몇 번 만지더니 내게 알렸다.

“낮에 봤던 용병이 좀 전에 찾아와서 다 불었대.”

“그럼 이용 가치가 없어졌네.”

“있지. 내 자객이 그자에게 소정의 금품을 전달하면서 고맙다는 말도 해줬어.”

“그건 손해 아니야?”

“너도 썼던 방법이잖아.”

나는 방독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낸 채다. 이제는 그래도 되고,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베르자인은 그런 시선들이 익숙한 것 같다.

“공포가 충성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야. 아주 작은 계기 하나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면 되지.”

“너는 사람을 이물 다루듯이 하는구나.”

“그런 건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오늘 황금달로부터 금품과 감사의 인사를 받은 그 풋내기 용병의 마음이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너한테 극심한 공포를 느끼던 사람이 얼마나 안심이 되고 내게 고맙겠어. 아마 그 풋내기는 오늘 잠을 자면서 얼굴에 웃음까지 만개할걸?”

베르자인.

몇 번을 보아도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간혹 그녀의 이런 부분들은 내가 배우기도 한다.

이 자리 또한 그녀의 의도가 녹아있다. 만남을 갖는 많은 이들이 저녁에 오가는 장소인 주점. 이곳에서 내 맨얼굴을 알려, 혹여나 내 방독면을 모방하여 허튼 짓을 할 사기꾼이 있다면 그 불씨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 자리는 강령술사라는 자와 베르자인이 사석에서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친하다는 표시다.

세비우크, 카누스, 승천자를 쓰러뜨린 강령술사가 베르자인과 함께 하고 있으니, 강령술사라는 강자와 황금달이라는 강자는 서로를 등에 업고서 더욱 강력한 절대강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물론 베르자인은 이 자리의 그런 의도를 내게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서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서로가 알고서 서로를 이용하고 있다면.

“내일은 그 가문에 편지를 보낼 거야.”

“직접 찾아가지 않고?”

“이제부터 너랑 내가 발로 뛰어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다 사람을 보내거나 편지를 보내서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응. 그러려고 오늘 그렇게 들쑤시고 다닌 거야. 이런 일들이 있었으니까 알아서들 잘 하라는 뜻에서.”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끝난 것이겠다.

“내 돈은?”

“오늘 돌아가자마자 줄게. 3000루아.”

3000루아라면 어디에든 집이라도 하나 얻어서 정착할 수 있을 정도다. 딱 그만큼의 액수다.

잠깐, 그러면 이 액수는 무엇을 기준으로 계산된 것인가.

난 분명 여행할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건 그것보다 세 배 이상은 큰 액수가 아닌가.

“페인. 그냥 이대로 뒷골목에 눌러앉으면 안 돼?”

그게 액수의 기준이었구나.

“나중엔 그럴 생각이야.”

“나중에 언제?”

“내가 가지고 있던 복수심과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녀석이 있어서.”

무고한 아라나크.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사람이 아니라 악귀야. 성불시켜주려고.”

“아….”

방금 베르자인의 탄식은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많이 괴로워하고 있어. 근데 내가 걔한테 도움을 좀 받고 약속까지 한 입장이라서.”

“완전히 나쁜 놈이 된 줄 알았는데 예전 모습은 남아있구나? 그런 일을 벌였는데 악령한테 물들지도 않고 말이야.”

리인에게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죄. 그전에는 승천자의 저택에 있던 무고한 자들을 모조리 학살한 죄. 또 그전에는 달란트 상회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죽음을 방치한 죄. 그런 것들 말고도 이것저것 많은 죄악들이 내게 쌓여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죽어서 갈 곳은 지옥이다.

리인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는 벌로는 부족하다. 나는 내가 지옥에 보낸 자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벌까지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난 내 안의 악령에게 물들지 않는다. 나를 잃어버리고 악령이 되어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잿빛세계에서 날 거두고 가르쳐준 선생이 있었어. 그 사람은…. 아니, 그 ‘이물’은 향후 내가 어떻게 변할까 걱정하고 충고도 해줬지.”

“네가 너무 나빠져서 사람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셨나?”

“그래. 악을 받아들여도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생각은 없어. 내가 그렇게 망가졌다간 그 선생도 리인도 별로 기뻐하지 않을 테니까.”

근본이 악한 힘을 쓰되 내 근본이 악하게 변해선 안 된다.

마음이 공허하고 세상이 증오스러워도,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운명일지언정 죽기 전까진 살아갈 것이다.

“난 계속 강해질 거야. 승천자보다 사악하고 강한 존재가 또 있어선 안 되겠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겠지.”

「더 끔찍한 존재를 해치워서 더 강해지고, 더 강해져서 더 끔찍한 존재를 해치우는 거야!」

“그거 정의감에 갖고 있는 생각이야? ……아니면 네 안에 있는 악령의 영향을 받아서 자꾸만 더 큰 힘을 추구하게 되는 거야?”

“모르겠어.”

솔직히 모르겠다. 정의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옳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것뿐인 것 같아.”

그냥 이건 믿음이다. 내가 만들어낸 믿음.

“전설적인 인물이 되시겠네.”

“그것도 나쁘지 않지. 만약 네가 내 능력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쓸 건데?”

베르자인은 술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답했다.

“개척.”

그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잿빛세계를 개척할 거야. 그곳에도 사람이 있을 거잖아. 사람이 있으면 그 후손이 있을 수도 있고, 후손들이 있으면 그곳에도 정착지나 나라가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래서?”

“잿빛세계의 왕 같은 건 어때? 실재세계에서 왕이 되는 건 어렵겠지만 무질서한 잿빛세계라면 될 것 같은데.”

그냥 술에 취해서 내뱉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몇 잔 마신 정도로 취해서 무방비한 모습을 보일 사람도 절대 아니고.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다차원 능력이 있을 때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개척이라….’

「잿빛세계의 왕…. 사형수였던 사내가 훗날 잿빛세계의 왕으로 군림한다. 존나 멋진데? 리인이 멋지게 살다가 죽으라고 했잖아.」

일단은 생각 한구석에 밀어두기로 했다.

* * *

나는 세인트 왕국의 형태를 한 폐허와 그 근방의 숲을 거의 다 돌아다녔고, 아라나크의 악귀 군단도 항시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난 폐허와 근방의 숲에 도사리는 웬만한 이물들은 다 알게 되었다. 그중에 필요한 이물들은 목줄로 소유했고 필요가 없는 이물이나 불복종하는 것들은 모조리 사냥하여 악과 주물을 취했다.

‘잿빛세계의 주물은 희소성이 있어 대체로 비싼 가격에 팔려.’

하지만 웬만한 주물들은 내가 다 긁어모아서 팔아치운 것 같다.

「이건 뭐, 거의 다 파헤친 폐허에서 보물 찾기를 하고 있는 꼴이지.」

그래서 나는 잿빛세계에서 무언가를 가져다 실재세계에 판다는 관점을 뒤집어보았다.

실재세계에서 물건을 가져다가 잿빛세계에 팔아치울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혹독한 잿빛세계라도 씨앗을 심어서 농사를 하고 풍차와 물레방앗간을 건설해서 생산의 기반을 이곳에 마련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상상했다.

「그런데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건 심했어. 깨끗한 물이랑 거름을 줘도 열에 아홉은 다 시들어버리고….」

실재세계에서 물건을 가져다 이곳에서 판매한다는 것이 당장은 쓸모가 없다. 지금까지 나는 잿빛세계에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 근방의 주물을 찾아다가 하나씩 팔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폐허와 숲이라는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실재세계에서 여행을 하며 잿빛세계에서도 여행을 병행한다.’

「다차원 능력의 기억 법칙. 네가 알고 있으며, 실제로 가본 경험이 있는 장소여야 할 것.」

내가 실재세계에서 멀리 여행을 떠나면 다차원 능력의 지도가 넓어지는 셈이다. 그러면 잿빛세계에서 실재세계로 갈 때 선택할 수 있는 장소가 많아진다.

반대로 내가 잿빛세계에서 멀리 여행을 떠나면, 실재세계에서 잿빛세계로 돌아올 때 선택할 수 있는 장소 또한 많아진다.

세인트 왕국은 대체로 선한 축에 속하는 나라다.

사람들 모두가 믿고 있는 세인트교 자체가 권선징악을 추구하고 이타심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세인트 왕국은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악령화 빈도가 낮은 편이다.

세인트 왕국의 어두운 면이라면 왕권 자체가 눈감아주고 있는 필요악의 일부. 뒷골목이 대표적이다.

이는 세인트 왕국에 어두운 면이 뒷골목 말고는 딱히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곳 잿빛세계. 세인트 왕국 폐허의 주변에서 보이는 이물들의 숫자나 강함은 외부나 외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멀리 나가면 더 강한 이물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반대로 실재세계에서는 더 사악한 사람이나 악령을 만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세인트 왕국의 영역을 벗어나는 길에 올랐다. 물론 이곳은 잿빛세계라서 세인트 왕국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산을 끼고 있는 높은 성벽이 다 무너져있다. 성문을 지키는 기사도 없고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들도 없다.

휑한 거리를 나 혼자서 걷고 있다. 주변에 다양한 이물들의 존재가 느껴지지만 그것들은 지금의 내게 사냥할 가치조차 없는 미물들이었다. 영력 발산만 하여도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즉사하는 것들이다.

「비첸크로이 제국을 최종 목적지로 삼고, 가는 길에 정착지가 있다면 알아보는 거지?」

‘맞아.’

실재세계에는 다섯 나라와 수십 정착지가 있다. 다섯 나라의 위치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수십 정착지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은 편이다.

정착지란 외부로 추방된 자들이나 외부의 위험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모인 집단이다.

그런 자들과 그런 자들의 후손이 모여있는 정착지는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고 생존 유무가 불투명하여 소문으로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그 소문조차도 결국 정확성이 떨어지는 정보다.

‘외부’라는 환경을 건너서 나라와 나라를 오가려면 군대나 군대에 필적하는 개인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황금달이 얻어낸 외부 정착지에 대한 정보도 몇 세대 전에 세인트 왕국의 군대가 구조한 자들로부터 전해진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가장 가까운 정착지의 방향은 알아낼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지금 잿빛세계에 있으니.

이대로 가면 결국 잿빛세계에서 생존한 정착지를 발견하거나 죽은 정착지를 발견하게 되리라.

그리고 어차피 내 활동 영역을 제국까지 넓히기도 해야 한다.

「잿빛세계의 생존자 집단이라니…. 이런 세계에서 인간들이 문명을 유지할 수나 있을까?」

‘직접 가서 확인해보면 알 수 있겠지.’

나는 내가 안고 있는 희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출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