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39화 (39/181)

7. 과도기 (4)

베르자인의 집무실에 파보크가 찾아왔다.

물을 다루는 온화한 마법사인 그는 중후한 인상에 하얀 로브 차림이다.

“강령술사는 어젯밤에 떠났어요.”

“왜 떠난 겁니까?”

“일이 있다고 해서요.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몰라요.”

“그럼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은 있었습니까?”

“일이 끝나면 세인트 왕국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는 했어요. 근데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죠. 한 달이 될지 한 해가 될지….”

“그자가 홀몸으로 외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건 익히 압니다만. 두 다리가 달린 사람이라면 마차나 말을 대동하지 않았겠습니까.”

“거미 악귀를 타고 갔어요. 그게 말보다 훨씬 빠르니까요.”

“거미 악귀는 뭡니까?”

“잿빛세계의 괴물이죠. 강령술사는 잿빛세계의 존재들을 부릴 수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강령술사의 목적지는 압니까?”

“저기요.”

베르자인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지금 절 심문하시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제 태도가 무례했다면 그 부분은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베르자인 님.”

“파보크 님께서도 말씀해 주시죠. 강령술사의 행방을 왜 찾고 계시는 건가요? 순수하게 본인이 궁금하신 건가요? 아니면 위에서 시켜서 그러시는 건가요?”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렇게 파보크는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승천자라는 거대한 전력의 공백, 그 공백을 노리고 있는 비첸크로이 제국, 왕국의 입장에서 당장에 가장 신속한 해결책인 강령술사에 대해서 말이다.

“승천자를 살해한 강령술사의 힘을 그렇게 빌려도 되는 거예요?”

“결정적으로 승천자의 목을 벤 자는 전 신관님들의 영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도 말씀하셨지만 승천자는 악령이었고, 타락한 그가 저지른 일들이 수면 위로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강령술사는 오히려 세인트교의 타락을 무찌른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역겹네요.”

그녀의 직설적인 발언에 파보크는 내심 당황하였다.

“언제는 그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사람들은 그를 악령이라며 욕하고 매질하고. 파보크 님과 다른 마법사들은 그를 추방하려 했죠. 그런데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그에 대한 평가가 바뀔 수도 있다는 건가요.”

“무슨 뜻입니까?”

“강령술사는 승천자 때문에 누명을 쓴 사형수이자, 추방자였어요.”

그 진실을 전해들은 직후 파보크는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 실토해라! 이 사악한 악령아! 무슨 목적으로 그 청년의 몸을 빼앗은 것이냐!

- 저는……. 악령이 아닙니다…….

- 끝까지 거짓말을 하다니! 성수를 더 가져와라!

- 듣자 하니 저자와 같은 핏줄인 동생은 마녀라고 하더군. 사람은 밑바닥에 떨어질수록 추해지고 추해진 사람은 악령이 되기 쉬운 법이지. 참으로 안타까운 집안이로구나.

- 모친은 쇠약해져 죽었고 아비는 악령이 되어서 자식의 손에 죽었다…. 그는 제 아비를 죽이면서 적성을 깨달은 것이야. 그런 환경에서 평생을 자라온 자식들이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파보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꾹 눌렀다.

- 추방해라!

- 추방해라!

- 추방해라!

- 이미 악령화가 끝난 자는 육체도 영혼도 구제할 길이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 답이로다!

- 이건 악령이 인두겁을 쓰고 있음이 틀림없구나…!

- 마법사들! 어서 이 저주받은 육체를 죽이고 악한 영혼을 잿빛세계로 추방하라!

눈부신 빛이 사라진 후 그 단두대에는 시신이 남지 않았었다.

- ……추방되었군.

- 승천자님? 사형이 아니었…

- 추방된 것이로다. 맨몸으로 잿빛세계에 떨어진 악령에겐 사형이 선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지.

쾅!

베르자인은 책상을 내리쳤다.

“당신들이 추방했잖아. 페인을.”

‘페인….’

“그의 여동생 리인을 그가 보는 앞에서 불태워 죽였잖아. 군중들은 환호했고 페인은…. 나는 당시에 그가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요.”

“….”

“이상하지도 않았어요? 승천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당신들 네 마법사는, 승천자가 언제부터인가 이상하게 변했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냐고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승천자는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자리를 비우고, 세인트교와 큰 관련이 없는 자들을 만나러 다니고, 또 그런 자들이 중앙교회에 자주 찾아오게 되고, 중앙교회가 부유해지고 세인트교의 교회들 전체가 부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수의 생산량이 급증하였다.

승천자는 뒷골목에서 유명한 인물인 달란트와 접촉하고, 중앙교회에 있던 전 신관들의 조각상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성수가 많아졌다.

교단이 부유해졌다.

가난한 자들이 성수를 받았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승천자가 있었다.

승천자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감히 그런 존재를 의심하는 건 세인트교의 근간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파보크 님은 네 마법사의 머리 격인 분이시잖아요. 아, 한 명은 페인이 살해했으니까 이제 세 마법사의 머리인가.”

파보크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말았다.

승천자만 잘못한 게 아니었다.

“…변명할 수 있으면 해보세요.”

“미안합니다.”

“누구한테요?”

“승천자의 탈을 쓴 악령에게 당한 모든 피해자들…. 그런 승천자를 맹목적으로 따른 우리 마법사들로 인하여 피해를 본 모든 이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때 베르자인의 훈련된 눈은 파보크의 얼굴에서 죄악감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자괴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나중에 꼭 사과하세요. 페인한테도.”

“그럴 겁니다.”

그녀는 마른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비볐다. 그렇게 격양된 감정을 다스린 후 본론으로 돌아왔다.

“페인은 비첸크로이 제국이 있는 방향으로 여행을 갔어요.”

“…제국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입니까?”

“네. 가는 길에 이런저런 일들도 처리하면서 모험하듯이 다녀온다고 했어요. 거미 악귀의 속도라면 아마 지금쯤 능선에 도달했겠죠.”

“돌산 능선….”

“차원을 오갈 수 있는 사람이라서 원한다면 언제든 왕국에도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당장 오늘 밤에도 왕국에 돌아왔다가 내일 다시 돌산 능선에서 이동을 시작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아예 잿빛세계에서 밤을 보낼 수도 있고요.”

“저희 교단에서는 신출귀몰한 그를 만나기 위해 베르자인 님과 접촉하라고 명했습니다.”

“그 성격이면 왕국까지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낮에는 실재세계에서 모험하고 밤에는 잿빛세계에서 모험하기를 계속하겠죠. 웬만해선.”

그러자 파보크는 서둘러 일어났다.

“듣고 싶은 건 다 들으셨어요?”

“서둘러 추적대를 편성해야겠습니다.”

“비첸크로이 제국이 그렇게나 이른 시기에 전쟁을 걸어올 거라 예상하고 계세요?”

“그것도 문제지만 하나가 더 있습니다.”

“뭐죠?”

“바로 어제, 제국의 정찰대가 망원경으로 왕국을 관찰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강령술사…. 페인이 돌산 능선에 있다면 절벽길에서 제국 정찰대와 마주칠 가능성이 큽니다.”

베르자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페인이 정찰대와 마주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제국은 왕국과 달리 외부의 생존자들에게 적대적입니다. 그래서 정찰대가 페인을 공격한다면 그는….”

“그들을 몰살하겠네요.”

“예. 그렇게 된다면 제국 측에서는 자신들의 정찰대가 세인트 왕국에 의해 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전쟁은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예방할 수 있다면 예방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

“전쟁 위기에서… 전쟁 확정이 되는구나….”

“결국 사신을 보내어 외교로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지는 겁니다.”

* * *

나는 잿빛세계에서 보았던 정착지의 폐허를 실재세계에서도 보기 위해 찾아갔다.

「불나방이 그립다. 망할 성기사들이 죽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우린 하늘을 날고 있었을 텐데.」

나는 바위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정착지를 상상하며 거미 악귀의 여덟 다리를 바쁘게 재촉했다.

그리하여 잿빛세계에서 보았던 장소에 정확히 도착하였지만, 이곳 실재세계에 있는 정착지의 상황은 잿빛세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곳의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만이 잿빛세계와의 차이점이었다.

「사람 뼈다귀만 널려있네. 오래돼서 다 부서져있잖아.」

황폐하게 말라비틀어진 텃밭과 유골들만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은 허상이었다는 듯이.

‘정말로 여기서 식인 행위를 벌였구나.’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 잔뜩 기대했건만.」

‘이동하자.’

나는 미련을 버리고 정착지 폐허를 벗어나 계속 움직였다.

나무와 풀은 사라지고 길이 점점 좁아졌다.

절벽길.

돌산들이 점점 뾰족해지더니 거의 수직적으로 깎인 절벽이 되었다. 사실상 나는 지금 돌산의 갈라진 틈새에 있는 길에 오른 것이다. 바로 이런 길들이 절벽길이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절벽길을 실제로 이동하는 건 신선한 느낌이었다. 길목이 좁은 탓에 마차 행렬이 들어온다면 한 줄 내지 두 줄로 가야 할 길이다.

이런 길에서 도적이나 악령들이 습격이라도 해온다면 피하기 어려우리라. 게다가 야영을 하기에 마땅한 공간도 없어서, 강한 악령이 도사리는 밤이 되더라도 위험하게 계속 이동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도 이런 절벽길 덕분에 적군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지.」

‘저것들은 뭐야?’

그러던 도중, 저 멀찍이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앞서가고 있는 행렬이 보였다.

말, 마차, 갑옷에 창검을 든 자들이 절벽길을 앞서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목격함과 동시에 그들의 후미에서도 나를 목격했다.

행렬의 후방을 경계하는 자들이 있던 것이다. 저렇게 훈련된 움직임과 멀쩡한 장비들을 보니 외부의 평범한 생존자 집단은 아닌 것 같다.

「도적도 아닌 것 같고.」

어딘가 구색을 제대로 갖춘…. 군대라는 느낌이다.

하지만 세인트 왕국의 군대는 아니다. 세인트 왕국의 군대라면 하얀 갑주와 성검을 든 성기사가 있어야 한다. 그보다 애초에 세인트 왕국에서는 외부로 군대를 보내는 일이 없다.

“웬놈이냐!”

그들은 멈췄다.

나도 그들의 뒤에서 멈췄다.

“키이이이….”

내가 타고 있는 거미 악귀가 으르렁댔다.

「이런 제기랄.」

후미에서 나를 보고 있는 인원들이 소리쳤다.

“악령이다!!!”

내 옷차림과 방독면, 사람보다 덩치가 큰 거미 악귀를 보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심지어 외부에서 마주쳤으니 누군들 저렇게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겠는가.

서둘러 해명하자.

“저는 여행 중인 강령술사입니다!”

쐐액…!

내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나를 노려 날아들었다.

‘재결합!’

우선은 내 앞에 흙벽을 세워서 막아냈다.

「네 모습과 상황이 아무리 그렇다지만 너무 공격적인데?」

‘제국이야.’

「그래?」

저들은 군대다.

세인트 왕국의 군대는 아니다.

저들은 지금 절벽길에 있다. 또한 외부의 존재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다.

그리고 지리상 이 절벽길에 있을 수 있는 군대는 비첸크로이 제국뿐이다.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군대가 이곳에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제국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쩔 거야?」

비첸크로이 제국은 왕국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적국이다.

뭐 그런 건 둘째치더라도 내겐 저들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내가 굳이 저들로부터 도망치는 수고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때마침 누군가를 위한 예행연습도 될 것 같고.

‘아라나크.’

키이잉!

흙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그들이 목격한 것은 마차보다 큰 거미였을 것이다.

“페인? 무슨 일로 날 소환…”

쐐액!

퍼버벅!

아라나크의 거미 몸체에 화살이 몇 개인가 꽂혔다. 그리고 대다수 화살은 단단한 갑피에 튕겨나갔다.

“아라나크. 저들은 제국 놈들이야.”

때마침 내 말을 증명하듯 제국의 깃발과 방패가 눈에 들어왔다.

“제국….”

그 순간, 아라나크는 까만 눈을 크게 번뜩이면서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적들은 아라나크의 귀에 아주 거슬리는 말을 수군댔다.

이쪽의 청력이 아주 좋다는 것도 모르고.

- 저, 저런 흉악한 악령이 있다니…!

- 선두까지 전달해!

- 다음에도 이 절벽길을 통과하기 위해선 위협을 미리미리 제거해둬야 한다.

- 징그럽게도 생겼네.

- 정찰대장님의 명령이다!

- 저 괴물들을 불태워라!

“괴물……. 또 그 소리냐….”

이윽고 수많은 불화살이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날아들었다.

“거미 군단이 필요하면 말해. 소환해 줄게.”

그러나 아라나크는 내게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날아드는 불화살을 향해 손을 뻗은 것이다.

카드득!

그 순간 아라나크의 꽁무니 위쪽이 수많은 조각들로 개폐되면서 연근 같은 구멍들을 드러냈다.

촤아아!

각 구멍에서 한 줄기씩 사출된 거미줄이 똑같이 전방의 하늘로 날아가서 불화살들을 모조리 요격해버렸다.

이어서 아라나크는 혼자 중얼거렸다.

“진정 혐오스러운 것은 속에 있는 것…. 네놈들 속에서 자라난 그것이 도리어 모두를 파괴할지어니…. 이제 네놈들이 스스로 품은 것의 실체를 낱낱이 보아라.”

「뭐라는 거야? 저주하는 건가?」

그것이 모종의 주문이었을까.

행렬의 후방에 서있던 자들이 갑자기 괴롭게 신음했다.

그러다가 그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광란(狂亂)의 집단부화(集團孵化).”

갑작스레 그들의 머리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검은 것이 쏟아져 나왔다. 목구멍에서, 콧구멍에서, 귓구멍에서.

검은 것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은 다리를 놀리며 그들의 얼굴과 몸을 빼곡하게 기어 다녔다. 그러면서 눈알을 파먹고 목에 있는 혈관을 씹고 갑옷 밑으로 들어가 살점을 뜯어내고 몸속까지 파고들어 내장을 물어뜯었다. 방혈도 아닌 것 같은데 엄청난 혈류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을 산 채로 분해하고 있는 것들은 피를 뒤집어쓴 새끼 거미들이었다.

「아라나크한테 이런 능력이 있었어?」

또한 그런 참극보다 날 자극하는 것은 바로 내 곁에서 영혼을 통해 느껴지는 지독한 ‘분노’였다.

그래서 옆을 쳐다보니,

아라나크는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던 것이다.

“누군 괴물이 되고 싶어서 되었겠느냐. 쓰레기 같은 제국 놈들아….”

개인을 향한 복수가 비극이었다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복수는 참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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