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시관은 쓰지 않겠다 (1)
나는 제국에서 파견한 정찰대장을 심문했다.
“왕국에 그대와 같이 강한 주술사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스스스스…!
새끼 거미들은 그를 호위하던 창기병과 말 세 마리를 깔끔하게 먹어치우고 있다.
“아, 알았으면 애당초 정찰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희는 그저 승천자가 산화하였다는 첩보만 듣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병사들일 뿐입니다!”
“승천자는 죽었어. 중앙교회 일대와 함께 산화했지.”
“예! 물론이죠! 압니다! 저희도 반나절 전에 그 사실을 확인하였으니 이를 보고하러 제국에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걸 제국에 보고하면, 제국에서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거지?”
그는 내 뒤에 배경처럼 서있는 아라나크와 자기 옆에서 들끓는 새끼 거미들을 번갈아보았다.
“맹세컨대 그 이상은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남은 건 폐하와 원로원의 판단으로…”
그는 횡설수설하며 나머지 일은 윗선에서 결정하는 일이니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던 중 아라나크가 나섰다.
“거짓말이다. 뭔가 더 있다.”
스스스스!
새끼 거미 한 마리가 그의 손등, 팔뚝, 어깨, 목을 타고 귓바퀴까지 기어 올라갔다.
아라나크는 나보다 더 강제적인 방식으로 그를 심문했다.
“너의 황제와 지도부는 이번에도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겠지. 그리고 정찰대장인 네놈은 뭔가를 더 알고 있을 것이다.”
“끄으으아아아아…!”
새끼 거미가 그의 귓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아아악!!!!”
정찰대장은 연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실토하거라. 네놈의 조그만 뇌를 파먹어버리기 전에.”
정찰대장의 귀에서 묽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저, 전…. 전쟁……. 근거가…. 됩니다…!”
“승천자의 죽음이?”
“그의…! 그 힘의 공백이 확실하면…. 절벽길을 통과하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세인트 왕국을 정복하겠다는….”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세인트 왕국을 정복하고 싶어서 안달이야?”
“제국 각지에도, 이 세계의 각지에도 세인트교의 추종자들이 있어서…! 황제의 말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거거거거부하는….”
그의 얼굴과 팔다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제국과 황제의 위상… 드드드높이기 위해선… 세인트 왕국은 예전부터 눈엣가시… 세인트교에 황제와 관련된 교리를 추가해서… 꼭두각시 왕을 세워서 왕국을 마법사… 주술사… 퇴마술사… 모든 능력자들을 양성하는… 속국으로 삼아 제국의 군사력을 증진…….”
정찰대장은 그러다 눈을 하얗게 뒤집더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제국의 야망은 무시무시하지.」
아라나크는 뼈다귀 근처의 새끼 거미들을 자기 밑으로 불러들이며 말했다.
“세인트교는 황제를 추종하는 도구로 바꿔서 이용하고, 세인트 왕국은 마법사와 주술사들을 양성하는 목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세인트 왕국이 정복을 당하든 말든…. 아! 그러면 제국이 왕국을 치려고 군대를 빼놨을 때 황제를 노리면 되겠다! 그렇지?」
동시에 아라나크도 같은 소리를 했다.
“제국은 전쟁 전에 정보를 모으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의 정보가 될 정찰대가 복귀하지 못하더라도 전쟁은 무조건 시작되겠지. …그러면 제국군이 왕국으로 움직였을 때가 그들을 공격하기 좋은 기회가 되겠구나.”
“그럴 수 없어.”
“뭐?”
「왜?!」
상식적으로 그럴 수가 없다. 왕국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제국을 노린다니.
아무리 미워도 내가 태어나 줄곧 자라온 나라다. 세인트 왕국의 여러 부분들이 증오스럽다고 해서 내가 세인트 왕국의 멸망을 달갑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난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정도는 배웠다. 내가 살면서 겪어온 모든 전투들을 합친 것보다 규모가 큰 전투를 상상해보면 답이 나온다.
비현실적인 숫자의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수많은 과부, 고아, 사망자, 부상자가 발생하고 단순 전투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굶고 병들어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시체가 쌓여서 역병이 돌고 피로 물든 분노와 원망 따위가 뒤섞여 수많은 악령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게 타국이 아니라 자국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나라를 잃어버린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제국 사람들보다 낮은 신분을 받고 이곳저곳으로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라를 잃은 대가는 내 주변 사람들도 똑같이 치르게 될 것이다.
“아라나크. 아무래도 네 목표를 바꿔야겠어.”
“누구 맘대로?”
“제국에 있는 900만 인간들의 떼죽음. 거기까진 도와줄 수 없겠다고.”
“배신자 새끼!”
아라나크의 그늘에 있던 새끼 거미들이 지면을 기어서 내게 우르르 몰려왔다.
이쯤 되면 익숙하다. 이번에도 날 죽이려고 되지도 않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퍼퍼퍼퍼억…!
나는 새끼 거미들의 절반을 방혈로 터뜨려 죽였다.
“하지만 네 목표가 단순히 제국의 ‘멸망’이라면 도와줄 수 있어.”
아라나크는 날 이길 수 없다.
“황제를 추종하는 속국의 꼭두각시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황제와 원로원까지 해치우면 그만이잖아.”
“그래도 제국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군대 안에서 새로운 우두머리가 등장해 다시금 제국을 일으켜 세우겠지! 제국이 멸망하려면 900만을 모조리 죽여야만 되는 일이다!”
방금 아라나크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라나크가 모든 인간을 혐오하긴 해도, 900만을 죽이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제국을 확실하게 멸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저 인간이 싫어서 모조리 죽이려는 건 아니었다는 뜻이다.
죽이고 싶은 사람을 이왕 죽이는 김에 몇 대를 더 때려주는 것처럼, 제국의 멸망을 원하는 아라나크에게 제국의 900만 목숨들은 그 정도의 분풀이였다는 것이다.
“제국군이 세인트 왕국과의 전쟁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면?”
“심각한 피해? 승천자도 없는 왕국 따위가 제국군을 상대로 버티기라도 하면 잘 싸운 것이다!”
“왕국이 버티는 게 아니라 이기면 어쩔 거냐고.”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을 안팎에서 동시에 공략한다. 그렇게 제국의 군대와 지도부가 한날한시에 무너지게 된다면 그게 멸망이야. 제국은 사라지고 제국을 이루었던 소국들이 분열해서 각자가 새로운 나라로 독립하겠지.”
“허황된 꿈을 꾸는구나.”
“900만을 죽여서 멸망시키는 것보다 몇 배는 현실적인 이야기야.”
그렇게 결론짓자 아라나크는 더 이상 내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또한 내 안의 악령도 내 뜻을 이해했다.
「900만의 학살은 도와주지 않겠다는데 자기가 뭘 어쩌겠어. 싫으면 목줄에서 빠지던가.」
제국은 엄청난 규모의 군대를 갖추고 있다. 자신들의 세계에 만연하는 악령들을 모조리 군사력으로 처리할 정도다.
황제 하나를 죽이는 걸로는 제국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들의 지도부인 원로원이 있고 속국마다 황제를 추종함으로써 자기 밥그릇을 차지한 놈들이 아주 많을 테니.
그래서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역시나 전쟁이 필요하다. 그들이 자랑하는 힘의 근원인 군사력부터 정면에서 격파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속국의 꼭두각시들, 원로원, 황제까지 죽어야만 제국은 멸망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어느 쪽이든 전쟁만 볼 수 있으면 좋아. 꼭 한번 보고 싶어. 그게 어떤 건지.」
슬슬 정찰대장을 죽이고 떠나려던 도중에 뒤에서 영력이 느껴졌다. 그래서 새끼 거미를 보내어 확인했더니 파보크와 성기사 세 명이 말을 타고 내 발자취를 쫓는 듯하였다.
「승천자를 죽였다고 해서 잡아가려는 건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다. 날 강제로 구속하거나 즉결 처형할 심산이었다면 다른 마법사 두 명과 수많은 퇴마술사들까지 대동했을 것이다.
반대로 제국의 정찰대를 어떻게 해볼 심산이었다고 가정해도 저건 머릿수가 너무 적다.
「그럼 너랑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나 본데.」
‘내 힘을 빌려달라는 소리겠지.’
「역시.」
‘정찰대장에게 암시를 걸어놔. 돌아가라고.’
「쟤들이랑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게?」
‘필요하다면.’
* * *
절벽길을 빠져나오자 나무 한 그루도 찾기 힘든 평야가 펼쳐졌다. 언덕의 높낮이가 완만하고 눈에 보이는 지평선은 숲이 둘러싸고 있는 건조한 평야다.
강은 없고 지면은 흙과 자갈이 주를 이루어 매우 거칠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흔적은커녕 야생동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광인의 숲.」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숲은 굉장히 울창해 보인다. 나무의 굵기와 높이부터가 세인트 왕국 근처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들어가면 길을 잃고 악령들에게 당해서 미쳐버린다는 숲이지. 말은 광인이라고 하지만 저기서 진짜 위험한 건 악령에 씐 약탈자들이야.」
‘기억난다…. 군대 규모로 들어가지 않으면 절대 통과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지.’
광인의 숲은 너무 울창해서 일단 안에 들어가면 대낮에도 어둑어둑할 정도라고 들었다. 지나치게 비대한 거목과 식물들이 하늘을 두껍게 가린다는 것이다.
짐승보다 독충이 많고 살아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많다는 숲이다. 그래서 사체를 양분으로 삼은 식물들이 더욱 커진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저 숲을 통과해서 계속 가다보면 제국의 땅을 밟게 될 거야.」
키이잉!
나는 거기서 잿빛세계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상태가 괜찮은 무기와 갑옷들을 전부 이곳에 옮겨두었다. 식량, 화살, 칼, 붕대, 약품 등 제국 정찰대가 마차에 싣고 있던 보급품까지 전부 챙겨서 옮겨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실재세계로 건너갔다가 잿빛세계로 돌아오는 편법을 이용해, 저번에 마지막으로 도달했던 절벽 사이의 정착지에 왔다.
「아라나크는 돌아갔어. 세인트 왕국의 폐허와 인근 숲에서 다시 악귀 군단을 늘릴 거야.」
나는 이번에도 거미 악귀를 한 마리만 불러내어 말처럼 탔다.
이미 실재세계에서 통과해본 적 있는 절벽길이다. 그래서 지도가 없어도 가는 길은 훤히 알 수 있었다.
…실재세계와 달리 이곳의 절벽길에는 더 많은 존재들이 있었다는 게 문제지만.
「길을 잃은 사냥꾼.」
「다섯 마리. 각각 190의 악을 가지고 있어.」
참 해괴하게도 생겨먹은 놈들이다. 산양의 몸을 하고 있는데 다리가 여섯 개다. 그 여섯 개의 다리로 거의 수직인 절벽에 바짝 붙어서 일제히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만 사람이다. 산양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달고 있는데 이마에서는 또 산양의 뿔이 돌출되어 있으며, 눈동자도 산양의 것이다. 그런데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눈이 하나 더 달려있다.
세 눈알을 일직선으로 잇는 까만 털. 그것이 역삼각형을 표현하는 듯하다.
“헤에에에에에엑!!!!”
“헤에에에엑!!!”
‘뭐 저딴 울음소리가 다 있어?’
놈들의 울음은 절벽에 부딪혀서 끝도 없이 메아리쳤다. 저 울음소리가 내 몸에 있는 혈액을 묘하게 진동시키는 것 같다.
방독면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귀가 아팠을 것이다.
「저거 동료들을 부르는 주문이야.」
그냥 시끄럽게 울어서 인근 이물들의 이목을 모으는 게 아니라 ‘주문’이라니.
‘아니…. 주문은 언어로 되어 있지 않아? 저 해괴한 울음소리가 어떻게 주문이야?’
「악령인 내 직감으로는 그렇다고. 인간인 네가 듣기엔 이상한 울음이겠지만 내가 듣기엔 뭔가 언어인 것 같아.」
나는 그게 무슨 근거도 없는 소리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겨를도 없었다.
키이잉!
익숙한 소리가 절벽 곳곳에서 울렸기 때문이다.
나는 소환진을 전개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위!」
나는 재빠르게 거미 악귀를 멈췄다. 그 순간이었다.
……퍼억!
‘길을 잃은 사냥꾼’ 한 놈이 절벽에서 추락한 것이다. 녀석은 지면과 충돌하면서 다리가 모조리 부러지고 배까지 터져 죽어버렸다. 그리고 배가 터지면서 쏟아진 내장이 마치 기생충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갔으면 온몸으로 저 불결한 것을 받아낼 뻔했다.
- 헤에에에엑!
- 헤에에에에에에엑!!!
듣기 싫은 메아리가 계속 울린다. 그리고 절벽에 바짝 붙은 놈들이 바위를 굴리거나 제 몸을 내던지며 떨어졌다. 그리고 몇 놈들은 뿔 앞쪽에 소환진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 소환진에서 똑같은 놈들이 다리를 뻗으며 절벽에 붙고 있는 것이다.
즉, 이물이 이물을 소환하고 있다. 아라나크처럼.
「이게 다 몇 마리야?」
놈들이 계속 떨어져서 죽고 있다.
‘아깝게.’
이건 뜻밖의 풍작이다. 적잖은 악을 가진 이물들이 스스로 숫자를 늘리고 있다. 게다가 공격 수단은 그냥 바위를 굴리거나 몸을 내던져 물리적인 충돌을 노리는 것이다.
물론 기생충처럼 꿈틀거리는 내장이 뭔가 핵심인 것 같지만, 어차피 몸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금방 움직임을 멈추는 것들이다. 그러니 닿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이 정도로는 긴장도 되지 않는다.
‘재결합 5계.’
쿠르르르르!!!
절벽에 바짝 붙어서 여섯 다리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놈들이다. 그러니 놈들이 딛고 서있는 발판만 조금씩 건드려주면 전부 떨어져 죽는 법이다.
퍼억! 퍼억! 퍼억!
녀석들은 추락에 저항하는 수단이 전혀 없었다. 내가 절벽에서 떨어뜨리면 그대로 딱딱한 지면과 충돌해 터져 죽는 놈들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들은 부러진 다리 대신에 내장을 촉수처럼 움직여 내게 기어 왔지만,
‘방혈 4계.’
난 놈들의 움직이는 내장이 내 몸에 절대 닿지 않도록 주술만을 이용하였다.
푸어억!
방혈에도 저항 능력이 없는지 금방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헤에에에에엑…!”
키이잉!
지면에서 죽어가던 일부 사냥꾼들이 다시금 소환진을 전개했다.
“헤에엑!!!”
녀석들은 말과 비슷한 속도로 내게 돌진해오고 있다.
「지금 소환된 멀쩡한 놈들은 사로잡을까?」
평소엔 이물들을 최대한 죽이고 싶어 하는 녀석이 웬일로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별로 쓸모가 있는 이물들은 아닌 것 같은데.
「놈들의 내장이 아주 유용한 것 같아.」
‘영력 발산 2계.’
나는 다가오는 마지막 놈들에게 내 존재감을 과시했다. 저 산양을 닮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 아주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처럼 보였을까.
“헤에엑……!”
녀석들은 뛰다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머리는 사람의 것을 하고 있어서 표정이 아주 잘 보인다.
「됐네.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게 녀석들의 일부를 목줄 능력으로 묶어버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서 악을 취했다.
하찮은 공격 수단, 거미 악귀보다 느린 속도, 시끄러운 울음이 특징인 악귀들이다.
그런데 녀석들의 내장에 쓸모가 있다니.
「무려 식용이야! 사람이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왜…?’
「녀석들의 움직이는 내장도 살아있는 존재들인데, 악명이나 악이 없어. 그냥 놈들과 별개의 존재로 취급되는 고깃덩이라는 소리지!」
어차피 내가 먹을 것은 실재세계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식용이라는 발상이 도대체 어떤 사고를 통해 도출되었는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식용 내장에 쓸모가 있다고 했지만 내겐 전혀 쓸모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
잿빛세계의 절벽길 끝에서 이들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생존자다! 생존자가 왔어!”
“다들 모여봐! 저 사람이 절벽길을 통과했다고!”
“사람 맞아? 괴물은 아니고?”
“괴물이 괴물 죽이는 거 봤냐?! 내가 망원경으로 다 봤다니까! 저 사람이 ‘산양 무리’를 단신으로 쓸어버렸다고!”
실재세계에선 아무것도 없던 평야.
그런데 이곳, 잿빛세계의 황량한 평야에는 마을 하나 규모의 문명이 있던 것이다.
“그, 그럼 지금 빨리 절벽길에 들어가면 그 고기들 좀 가져올 수 있나…?”
이들은 모두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루에 한 끼라도 먹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것처럼 볼이 움푹 파여 있고 체형은 빼빼 마른 사람들이었다.
“들어오십시오! 지금 당장 열어드리겠나이다!”
그들의 정착지는 판자 장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그리고 절벽길 방향에 문이 있었는데, 내 이름도 목적도 묻지 않고 일단 문부터 열어주었다.
내가 타고 있는 거미 악귀는 경계대상도 아니라는 건지 허둥지둥 나를 마을에 들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있었어….’
사람들이. 생존자들이. 이런 세계에도.
내가 이들을 찾아서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는가.
* * *
나는 베르자인에게 질문했었다.
“만약 네가 내 능력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쓸 건데?”
그날 그녀는 술잔을 돌리다가 내게 답했다.
* * *
‘……개척.’
다들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초췌한 자들이지만 그중에 노인, 여자, 아이들도 섞여있었다. 그 시선들 속에 나로선 상상하기 버거운 무게의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덩달아 내 마음도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이 인간들 살아있는 게 용하네.」
무채색의 잿빛세계.
그러나 이들은 나를 통해 극채색을 보는 듯했다.
왠지 이들도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내가 이들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너 앞으로 많이 바빠지겠다?」
그리고 사뭇 깨닫게 되었다.
희망이라곤 없는 이 세계에서 내가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