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시관은 쓰지 않겠다 (2)
판자 장벽으로 둘러싸인 정착지. 인구수는 남자 61명에 여자 218명으로 합쳐서 279명.
“저희 정착지는 ‘낙원(樂園)’이라 하지요.”
아무리 봐도 낙원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은 정착지다.
하지만 또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정착지 바깥이 지옥과도 같을 테니 그런 이름으로 정착지를 부르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럼 저희는…. 존함이 따로 있음에도 강령술사님이라 불러드리면 되는 것인지요?”
“네. 이름보다는 그 호칭으로 불리고 싶네요.”
이 노인은 낙원의 후계자라고 한다. 촌장이나 영주나 의장 같은 게 아니라 후계자라고 하는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원하시는 바가 그러시다면 사람들에게도 그리 알리겠습니다.”
탁한 하늘에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해질 즈음, 정착지의 아녀자들이 구운 고기를 마을 중심에 모았다.
사람들은 커다란 모닥불을 다섯 개 피워뒀다. 그리고 각 모닥불을 기준으로 무리를 지어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이 구운 고기를 뜯는 모습은 정말이지 게걸스러웠다. 오랜만에 먹을 것을 입에 댄 걸인들처럼 허겁지겁 턱을 움직이는 것이다.
「내장만 먹는 게 좋을 텐데.」
지금 사람들이 먹고 있는 건 아까 내가 해치운 ‘길을 잃은 사냥꾼’들의 고기다.
190의 악을 가진 이물의 고기를 자꾸 먹으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물의 고기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영혼에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런 것은 제쳐두고 일단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남자들이 왜 이렇게 적죠?”
슬쩍 남자들의 숫자만 세어보니 스무 명 정도는 이 고기 잔치에 참여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착지의 문을 지키거나 장벽을 돌면서 순찰하는 남자들이 따로 있어.」
그리고 후계자는 설명했다.
“이곳에서 먹을 것은 썩은 풀뿌리, 괴물의 고기가 전부입니다. 장벽을 보수하고 불을 피우기 위한 장작도 벌목하려면 사내들이 나서야만 하지요.”
“그런 것들을 주로 어디서 구합니까?”
“숲입니다. 사내들이 숲에 들어가서 먹을 것과 나무를 구해와야만 아녀자와 노인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숲은 위험할 텐데요.”
“그래서 사내의 숫자가 부족한 것이지요.”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따금씩 절벽길에서 산양들이 튀어나와 정착지를 들이받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날은 하늘에서 까마귀들이 내려와 여자와 아이들을 잡아가는 일도 있습니다.”
이들에겐 하루하루가 사투였다. 먹을 것, 마실 것, 나무를 구하기 위한 싸움. 이물로부터 정착지를 지키기 위한 싸움.
그 모든 활동에는 반드시 희생을 감수하고 최전선에 설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근육도 없이 왜소한 몸들로 잘도 지켰네. 지금까지 정착지가 생존한 게 용하다니까. …아니면 생존하는 중이 아니라 천천히 죽어가는 중이라 보는 게 맞나?」
“그럼 후계자님, 계속 잿빛세계의 먹을 것을 먹는다면 악령화는 어떻게 해결하는 거죠?”
“며칠, 몇 달이고 가둬놔서 악령이 스스로 빠지게끔 만들지요….”
그건 퇴마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나 쓰였던 아주 원시적인 방법이다. 팔다리를 묶어서 방에 가두고 멀쩡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니 말이다.
물론 일부 ‘악’은 사람의 영혼에 흘러들어 악령이 되는 일에 성공하더라도, 자신이 악령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악이 되어 떠나기도 한다. 그런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악’은 악령이 된 시점에서 그 삶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 그렇게 가둬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면요?”
“계속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는 나아지길 바라면서….”
“혹시 지금도 악령화 때문에 갇힌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후계자를 따라서 정착지를 돌았다. 엉성한 집들을 구경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확인하였다. 텃밭이나 울타리도 없고 심지어는 우물조차도 없다.
그리고 판자 장벽의 한쪽 구석에 창고 같은 건물을 모아둔 곳이 있었다. 마을에 있는 엉성한 집들보다는 더 견고하게 건설한 듯한 창고였다.
“이거 풀어!!! 이거 풀어줘어어어어어!!!!!!”
“시끄러워! 다 닥쳐! 아아아악!!!”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창고 하나마다 사람이 열댓 명은 의자에 묶여있었다. 어떤 창고에는 아이들만, 어떤 창고에는 노인들만, 어떤 창고에는 여자들만, 어떤 창고에는 남자들만.
그렇게 악령화로 인하여 격리된 자들이 30명은 넘었다.
그 30명에게 밥을 주고, 30명이 의자 밑으로 배설한 오물을 여자들이 통에 받아서 빼내고, 남자들이 그 오물을 정착지 바깥에 뿌리고, 그 자리에 먹을 수 있는 이물들이 모여들길 기도하다가 목숨을 걸며 사냥하고.
그런 삶이다.
이곳의 생활양식이 그런 식이었다.
“강령술사님…. 혹 실례가 안 된다면 강령술사님의 고향을 여쭈어봐도 되겠는지요?”
“실재세계입니다.”
“참말로 그런 세계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무슨 세계요?”
“회색, 흑색, 백색, 적색 말고도 다른 색깔이 존재하는 세계 말입니다요. 씨앗을 심으면 작물이 자라나고, 맑은 하늘이 마실 물을 내려주고, 푸른 나무와 알록달록한 꽃들이 세상 천지에 피어나고….”
내 세계의 일상이 이들에겐 환상이었다.
‘영력 발산 3계로 강화해.’
「그건 왜?」
‘퇴마할 거야.’
「퇴마하기엔 너무 늦은 자들도 있어.」
‘그래서 영력 발산을 3계로 강화하라고. 겁을 주고 협박해서라도 이곳의 악령들을 떼어낼 거야.’
나는 품속에서 성수를 한 병 꺼냈다.
「너 말이야…. 선하면 선하고 악하면 악하던가. 어중간하게 뭐 하자는 거야?」
‘원래 난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나빠.’
나는 의자에 묶인 사람의 얼굴을 쥐었다.
“이거 놔아아아아!!! 끼야아아아아아아아!!”
“가, 강령술사님?!”
“오늘 밤 이 사람들은 모두 가족과 재회하게 될 겁니다.”
“아아…….”
“나가세요. 큰 소리가 들려도 아무도 창고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통제하세요. 누구든 절 방해하면 엄벌을 줄 겁니다.”
“아, 그렇게 해야지요…! 알겠습니다!”
나는 의자에 묶인 사람의 눈꺼풀을 억지로 벌렸다. 그리고 동공에 성수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댔다.
- 안에서 무슨 짓이야?!
- 이건 우리 손주 비명소리지 않느냐! 이놈들! 비켜라!
하지만 후계자의 목소리가 더 컸다.
- 강령술사님께서 직접 퇴마를 행하시니 누구도 창고에 들어가선 아니 된다! 저분의 퇴마를 방해하는 자에겐 마땅히 책임을 물을 것이야! 엄벌에 처할 거라고!
악령화가 이미 끝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악령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악령이 된 사람을 억지로 퇴마하고 있다. 영혼과 하나가 된 악령을 수술하듯 강제로 뜯어내는 것이다.
“꺄아아아아! 히야아악…!”
“그 몸에서 나가라.”
“왜 이러세요?! 왜 저한테…!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 좀 살려줘!!!”
나는 녀석의 동공에 성수를 한 방울 더 떨어뜨렸다. 그리고 내가 가진 영력까지 발산하였다.
“히이이야아아악…!!!”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머리를 1초에 10번은 흔들면서 입을 위아래로 크게 벌린 것이다. 그리고 입 밖으로 나와서 늘어진 혀가 심히 길다.
“히, 히이이키키키이이! 난 이미 자리를 잡았어!! 이건 내 몸이야! 이 몸의 주인도 나와 하나가 되었지! 우리의 영혼은 이미 하나가 되었다고!”
‘영력 발산.’
“히야아아아아아아아!!! 아, 너, 너 누구야! 너 정체가 뭐야?!”
“이미 하나가 되었어도 상관없어.”
“이, 이런 씨발! 내가 빠지고 이 육체에 남은 영혼은 절대 온전치 못해! 절대 이전과 같은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어! 너도 알잖아! 이미 악령이 된 나한테 왜 억지를 부리는 거야?!”
“네가 영혼의 일부를 가지고 떨어져 나가면서… 이 사람이 어떤 추억과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나한테 지랄이야…!”
“의미가 있지. 지금 밖에서 이 사람을 걱정하는 노인의 기억은 그대로니까.”
내가 해결사였을 때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미 악령이 된 자들을 퇴마하는 방법이란 죽이는 것뿐이었다.
“맘대로 해! 씨발, 죽일 거면 죽여! 난 어차피 악으로 돌아가 새로운 악령으로 윤회할 테니…!”
「그건 힘들걸?」
녀석은 더욱 큰 공포를 느꼈다.
“방금 누구야?! 누구냐고!!!”
「내가 소화해버리면 그냥 내 일부가 되는 거지. 윤회라니 웃기네.」
“아, 자, 잠깐….”
“선택해라. 지금이라도 스스로 빠져나갈 건지, 아니면 잡아먹혀서 존재 자체가 지워질 건지.”
* * *
나는 아침이 되어서 정착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곳은 생존에 적합한 환경이 아닙니다.”
이물들의 습격이 너무 잦다. 게다가 식량과 나무를 구하기 위해 매번 숲에 가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척박한 땅이다.
주변에 강줄기 하나도 흐르지 않아서 식수를 구하려면 또 목숨을 걸고 새벽에 절벽으로 가서, 바위에 맺힌 이슬을 모아야 하는 환경이다.
차라리 이런 곳보다는 세인트 왕국의 폐허가 낫다.
「그래서 폐허로 데려간다고? 내가 보기엔 여기나 거기나 척박하긴 매한가지 같은데.」
‘더는 폐허가 아니게 될 거야. 사람들이 갈 테니까.’
나는 변조된 목소리를 높여 낙원 사람들을 설득했다.
“실재세계의 세인트 왕국은 다른 국가나 외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의 힘이 강한 영토입니다. 그래서 이 잿빛세계, 그곳의 폐허에 있는 이물들은 대체로 약한 편이죠.”
어느 남자가 질문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있습니까?”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자체적으로 먹을 것을 만들 수 있도록 가축을 대신할 이물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 세계에선 농사가 안 되니 목축업을 하는 겁니다.”
이번엔 후계자가 질문했다.
“폐허의 괴물…. 아니, 이물들이 이곳보다 약하다고 하여도 우리에겐 똑같이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그래도 이곳보다는 나을 겁니다. 세인트 왕국의 폐허는 제가 통제하는 악귀들이 점령하고 있으니까요.”
“악귀요?”
“이물이 제 소유가 되면 악귀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한 꼬마가 질문했다.
“거기에 있는 괴물들은 강령술사님 말을 잘 듣는 건가요?”
“…내게 거스르지 못하지.”
내가 그렇게 당당하게 발언하자 사람들이 수군댔다. 대체로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많았다.
“제가 소환하는 거미 악귀들이 여러분을 등에 태우고 그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할 것입니다. 물론 도착하기 전까지 저도 함께 합니다.”
키이잉!
사람들 사이에 부정한 소환진이 전개되며 다수의 거미 악귀들이 출몰하였다. 누군가는 기겁했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일부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무서워하면서도 눈을 반짝였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이주가 진행되었다.
절벽길을 통과하는 도중에 이물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녀석들은 내 손짓과 눈짓 한 번으로 터져 죽거나 처음부터 나와 싸우기를 거부하며 줄행랑을 쳤다.
일부 해괴한 이물들은 무리를 지어서 공격해왔지만 이쪽엔 그보다 더 많은 악귀 군단이 있었다.
그렇게 단 한 명도 죽거나 다치는 일 없이 세인트 왕국의 폐허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279명을 어디에 두고 사육하게?」
‘사육이 아니라 문명의 재건이야. 말 똑바로 해.’
「아라나크 하나로 숫자를 늘리는 건 부족하잖아. 아라나크처럼 다수의 이물을 군대로 부리는 악귀가 더 필요하기도 하고. 이물을 번식시켜 키우는 장소와 그런 것들을 관리할 손이 필요했던 거 아니야?」
‘맞긴 하지만 그런 이유가 없었어도 난 이 사람들을 움직였을 거야.’
이들을 여기까지 인도하고 구원하는 것에 이유를 따지는 건 중요치 않다.
「넌 잿빛세계의 왕이 될 거야.」
내 안의 악령은 내가 더 많은 힘을. 그중에서도 권력과 지위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잔뜩 들뜬 것이다.
‘배척자들한테 중앙교회에 있는 이물들 치우라고 해.’
「걔네 둘은 지금 악귀들한테 시켜서 중앙교회를 다시 세우고 있어. 그 명령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걸?」
‘이물들을 죽이거나 멀리 쫓아내라고. 명령을 듣는 악귀들까지 치우라는 말이 아니야.’
「아, 알았어. 알았어.」
나는 낙원 사람들을 중앙교회 일대로 데려왔다. 실재세계에서 승천자가 발키리의 낙뢰를 쏘는 바람에 이 일대는 커다란 분지처럼 파인 지형이 되었다.
나와 함께 선두에 있던 후계자는 두 배척자를 가리켰다.
“저쪽에 움직이는 조각상과 이물들이 있습니다…!”
“악귀에요. 중앙교회를 재건하는 중이죠.”
“아, 악귀면 저희를 해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지…?”
“네.”
이윽고 279명 모두가 모였다.
두 배척자는 팔다리가 달린 악귀라면 전부 노동력으로 동원해서 중앙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폐허에서 대리석 따위를 가져와 그것을 반듯하게 잘라내 세우는 식으로 재건하는 것이다.
“페인. 너의 악령이 보낸 전언. 그것으로 설명은 들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몇 가지 질문이다.”
“해봐.”
사람들은 배척자의 특이한 말투에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이물. 악귀의 가축화. 어떤 악귀를 가축으로 쓸 계획인지.”
“길을 잃은 사냥꾼이야. 앞으로는 그냥 ‘산양’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산양의 고기. 그것도 결국 이물의 고기다. 영혼에 악이 축적되어 사람들에게 악령화를 일으킬 것이다.”
“알아. 그래서 이제부턴 산양의 내장을 먹게 할 거야. 강에다 잘 씻어서 핏기를 빼내고 구워 먹든 삶아먹든 하면 돼.”
“먹어도 문제가 없는가?”
“징그럽다는 것만 빼면 문제없어.”
그것도 내 기준에서 징그럽다는 것이다. 잿빛세계에서 태어나 평생을 자라온 사람들에겐 징그럽다는 표현의 기준이 더 높으리라.
“알겠다. 그럼 다음 질문. 이 생존자들이 살아갈 터전의 구체적인 위치다.”
“여기로 하려고. 중앙교회 근처.”
“이유는?”
“너희가 있잖아.”
배척자라는 악귀의 전생을 고려해보면 이보다 좋은 결정이 없다.
여기서 중앙교회와 세인트교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면 아주 안정적인 재건이 가능할 것이다.
“재건을 위해 세인트교를 이용할 생각인가?”
“그게 세인트교의 근본 아니야?”
“….”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신앙심과 권선징악을 가르쳐서, 이 사악한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살아가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미래에 이들의 숫자가 많아진다면. 우리는 전생과 같은 실수를 또 범할 수가 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한번 실수해봤으니까 이젠 알 거 아니야. 그리고 전 신관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들이었잖아. 너희 둘은.”
“우린 그렇게 훌륭한 인물상이 되지 못한다.”
“그럼 이 사람들한테 선의 힘을 누가 가르쳐? 악령의 힘을 휘두르는 내가 가르칠까? 내가 실재세계에서 해야 할 일들도 다 집어치우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도 없다. 우린 세인트교와 왕국을 위해, 무고한 자들을 죽여 씻을 수 없는 피를 묻혔다. 너는. 너는 초창기의 암흑시대를 모르는 세대다. 역병이 창궐. 하루에도 수백 명이 마녀사냥으로 죽었다. 반대세력들은 광인으로 몰렸다. 고문을 당하고. 본보기로 무고한 일가족까지 줄줄이 처형당했다. 그렇게 다수의 피와 죽음 위에 세워진 것. 그것이 오늘의 세인트 왕국이다. 그리고 우리 둘은 그 시대에 앞장섰다. 세인트 왕국을 세우고 안정시키는 일. 그때 그렸던 미래가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의 평화로운 세인트 왕국을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래서 우린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 가여운 생존자들에게 세인트교를 가르친다는 말인가. 그럴 자격이 없다.”
“배척자. 너희 둘은 스스로를 필요악이라 칭하지만 실재세계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달라.”
“어떻지?”
“사람들은 자기희생이라 생각하고 있어. 신관이라면 절대 저지르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했고 그걸 너희가 한 거야. 그래서 너희가 존경받는 인물이 된 거라고.”
“자기희생.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난 다르지. 너희가 쓰레기 같은 짓을 벌였다는 일에 동의해.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렇게 피로 얼룩진 세대를 만들었다는 것에 반감까지 있어.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너희의 악행에 감사하면서 조각상까지 만들어 기억하잖아.”
“결론이 무엇이냐.”
“이번에도 사람들을 위해 이용당하라고.”
나는 배척자를 노려봤다.
“그렇게까지 전생에 죄책감을 안고서 배척자라는 이물로 잿빛세계에 남을 정도면, 이것도 징벌이라 생각하고 달게 받으라고. 그렇게 속죄하라고.”
“너의 혀. 무섭구나.”
“혹시 모르잖아. 너희가 죽어서도 이렇게 봉사하다가 언젠가는 그 마음에 있는 죄책감 다 털어내고 성불하게 될지.”
“성불이라….”
배척자의 거절하는 태도가 한층 누그러졌다.
“이 뒤틀린 세계. 국가를 유지하기란 매우 불안정한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초창기의 국가. 원시적인 사회. 많은 노동력과 희생을 요구한다. 집단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죄악. 죄인. 그것 또한 강경하게 통제할 수밖에 없다. 못 배운 자들에겐 머리로 이해하는 것. 그보다 본보기가 확실하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후계자가 나보다 앞으로 나서서 배척자를 마주했다.
“…저 결핍된 자들의 머리인가.”
“그렇습니다.”
“감당할 수 있겠나? 나중에 우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나?”
“삶의 모든 순간이 생존과 사별이 되는 것보단…. 이게 더 나은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답니다.”
“흠.”
“조금이라도 실재세계의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누릴 수만 있게 된다면, 실재세계에서 벌어지는 나쁜 일들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리라 다들 생각할 테지요. 이건 하루하루 조금씩 죽어가던 저희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일이랍니다.”
배척자는 내게 시선을 옮겼다.
나는 그 순간에 맞추어 다시 물었다.
“맡겨도 되겠지?”
“……이것이 속죄하는 방법이라면.”
이제 다시 실재세계로 갈 시간이다.
나는 거미 악귀들을 아라나크의 곁으로 돌려보낸 후 분지의 바깥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배척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페인. 너 또한 이들을 구원하고 인도한 것.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 따라서 왕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 그것이 다른 이들의 피로 물든 왕관이든. 너 자신의 피로 물든 가시관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