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43화 (43/181)

8. 가시관은 쓰지 않겠다 (3)

그때 그 순간이 생각났다.

내 앞에서 입가로 피를 줄줄 흘리며 힘겹게 말했던 성기사의 얼굴이 말이다.

- 네놈이 생각하는 승천자님이 어떤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 그분의 목적도 진의도 중요치 않단 말이다! 이 어리석은 잡놈아!!!

당시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와닿지 않았다.

- 중요한 건 오로지 나라와 백성뿐이다!

타락한 승천자라도.

아무리 악랄한 그 승천자라도 존재 자체가 왕국에는 필요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승천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 네놈이 저지르는 일들이 어떤 재해를 야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면 차라리 죽는 게 이로울 것이다!

그때 성기사가 내게 했던 말은 오늘의 일을 일컫는 것이었다.

* * *

실재세계.

“전쟁은 확정이라고 봐도 돼. 곧 제국에서 사신이 올 거야.”

나는 황금달 건물의 집무실에서 베르자인부터 만났다.

“왕궁 놈들이 네가 남겨둔 정찰대장을 심문했는데 제국에선 승천자가 죽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더라고. 이번에 정찰대를 보낸 건 황제에게 조금 더 강한 확신이 필요해서 그랬던 거래.”

“파보크가 알려준 정보야?”

“응. 하루에도 몇 번씩 나한테 와서 널 찾고 있어. 그럴 때마다 돌려보내긴 하지만.”

파보크와 다른 두 마법사는 승천자와 함께 날 추방시키는 일에 일조한 자들이다.

개인적으론 그 마법사들과 말 한마디도 섞기 싫다.

“그래도 언제 한번 얘기해서 왕국이랑 정보는 공유해야 하지 않겠어? 전쟁에 대비해서 전략도 짜야 할 거고.”

“이미 날 활용하겠다는 방침인가 보네.”

“네가 나라의 위기를 모른 척하진 않을 거잖아.”

내게도 책임이 있긴 하다.

내가 제국의 정찰대를 죽인 탓에 제국에서는 그것까지도 왕국을 침공할 명분의 일부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내가 승천자를 죽이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계의 풍파에도 언제나 평화로운 호수 같던 왕국에 돌을 던진 건 나다.

“만약 정찰대가 멀쩡히 돌아갈 수 있었다면 널 사신으로 써서 제국에 우리의 새로운 힘을 과시할 수도 있었어. 승천자가 없어도 네가 있다는 식으로. 그런데 이미 다 죽었으니까 물 건너간 이야기고.”

“맞아.”

「맞긴 뭐가 맞아? 먼저 시작한 건 제국 새끼들이잖아. 승천자를 죽인 것도 승천자 새끼가 먼저 시작한 일이니까 죽였지. 네가 당한 일들을 벌써 잊어버린 거야?」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야.’

베르자인은 옆에 있던 자객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자객이 어떤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그 상자 안에는 성수가 서른 개나 담겨있었다.

“이 많은 걸 한 번에 구매할 생각은 없는데.”

“그냥 주는 거야. 파보크랑 그 마법사들이 전해달래.”

“내 환심이라도 사려고?”

“너한테 사죄하고 싶대.”

「이 정도면 잿빛세계에서 두고두고 쓸 수 있겠네. 사과는 몰라도 성수는 받아야지.」

성수 서른 개를 굳이 거절할 생각은 없다.

“내가 너랑 유일한 연결점이라는 상황이야. 그래서 내가 왕궁이랑 교단 측에 대답은 해야 해서…. 어차피 피할 수 없게 된 전쟁에 너도 참전은 할 거지?”

“그 대답 하나면 되나?”

“구체적이면 더 좋고.”

“제국을 멸망시킬 거야.”

그리 대답하자 베르자인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듯하다.

“네가 승천자를 죽이겠다고 했을 때도 믿기 어려웠는데 결국엔 해냈지. 그래서 그런가. 네가 지금 그 거대한 제국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소리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어.”

“제국의 지도부와 속국의 머리들을 일망타진하고 황제까지 죽일 거야. 그러면서 군대끼리의 전쟁은 세인트 왕국이 이길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야. 그 모든 일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져야 해.”

“그게 가능해?”

“제국이 본격적으로 진군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것 같아?”

“길면 다섯 달. 짧으면 두 달.”

짧으면 두 달이라고 하는데 내가 체감하기론 두 달도 긴 시간이다.

역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은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싸움처럼 간단히 시작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방관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수면 밑에서 움직여 제국을 무너뜨릴 거라고 파보크한테 전해. 구체적인 건 알려줄 수 없어.”

승천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제국에서 이토록 일찍 알아차렸다는 건, 세인트 왕국에도 제국이 심어놓은 첩자가 있다는 걸 의심하게 한다.

파보크나 다른 마법사들에게 전언을 보낸다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내 계획을 왕국에 알렸을 때 그것이 제국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왕국 바깥에서 나에 관련된 소문이 돌 수도 있을 거야.”

“예를 들면?”

“강령술사가 제국의 편을 섰다거나, 강령술사가 어떤 나쁜 짓을 했다거나, 강령술사가 당했다거나. 어쨌든 왕국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게 여길 소문들이 생길 수 있어.”

“아, 그럼 그런 소문이 있어도 네가 나라를 배신했거나 제국에 당했다고 여기지는 말라고?”

“그래.”

“파보크한테 그렇게 전할게. 다른 건?”

“세인트교 성서 좀 구해줘. 100권 정도.”

“왜?”

“잿빛세계에 생존자 집단이 있었어. 악령과 이물이 들끓는 그곳에는 세인트교의 신앙심이 필요해.”

잿빛세계에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베르자인은 작게 한숨만 내쉬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몇 명이나 있었는데?”

“279명.”

“식량이랑 도구 같은 것도 대량으로 구해줄까?”

그녀는 이 놀라운 소식을 곧잘 자신의 사업으로 연결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내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전부 공급하면 잿빛세계에서 자급자족하는 방법을 모르게 될 거야.”

「여기서 식량을 가져가면 안 되지. 산양의 맛없는 내장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건 그곳에 조금 더 문명다운 것이 재건된 다음에 천천히 하자고.”

“난 제국의 멸망보다 그쪽이 더 기대되네.”

* * *

그렇게 왕국과의 일처리는 베르자인을 통해 끝내고 잿빛세계로 돌아왔다.

“성수. 성서. 저들에게 필요한 것. 고맙다.”

두 배척자는 중앙교회가 재건되면 본격적으로 세인트교를 가르칠 것이다.

「저게 가축이 된 거야?」

길을 잃은 사냥꾼이라는 이물.

그리고 어제부터 ‘산양’이라고 불리게 된 ‘악귀’들이 울타리에 얌전히 갇혀있다. 산양의 몸에 다리 여섯 개를 달고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어서 굉장히 기괴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그런 기괴한 생김새가 익숙한 듯했다. 내가 저 산양들을 보고 기괴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내가 실재세계의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조금씩 형태가 잡혀가는 중앙교회와 주변 구조물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분지 위로 올라가서 후계자와 함께 분지 전체를 눈에 담았다.

“산양의 먹이는 거미들이 잡아오는 이물들의 고기를 쓰고 있답니다. 마실 건 강물을 퍼와 큰 솥에 넣고 끓이지요. 다른 많은 일들을 ‘신관’님들께서 도와주십니다. 정말, 이 축복 같은 일들은 모두 강령술사님 덕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후계자님.”

“예, 말씀하시지요.”

“후계자님은 왜 후계자라 불리십니까?”

이젠 물어볼 때가 된 것 같다.

“정착지를 최초로 세운 사람이 있는 건가요?”

“그렇지요.”

후계자는 그러면서 그리움에 잠긴 눈을 했다.

“그분은 흑마법사…. ‘토리우스’라는 존함을 가진 헌신적인 분이셨습니다.”

* * *

낙원은 두 세대 정도를 살아남았다고 한다.

토리우스라는 흑마법사는 잿빛세계를 여행하며 사람들을 거두었다. 그렇게 거두어진 사람들이 한곳에 정착하면서 세워진 것이 낙원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매일 위험한 숲이나 절벽길에 들어가 필요한 것들을 구해줬다. 잿빛세계를 방황하는 이물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에,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낙원은 아주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분은 흑마법의 힘을 빌려 노화를 늦추셨습니다.”

한 세대가 끝나고 두 번째 세대가 되었다. 당시에 후계자는 어린아이였고 토리우스는 허리가 다 굽어서 지팡이를 짚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도 토리우스는 약 150년은 넘게 살았다고 하니 그의 흑마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시간은 계속 흘러서 후계자는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되었으며,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나 두 번째 세대가 세 번째 세대를 앞두게 되었다.

그것이 약 2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그 해에는 거동조차 불편해 보이셨습니다…. 그분조차도 세월은 이겨낼 수 없던 것이겠지요….”

원래 홀몸으로 나가서 나무나 식자재들을 구해왔던 토리우스다. 그랬던 그가 나이를 먹고 허리가 굽어지면서부터는 창으로 무장한 남자들을 대동하고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희생당하는 일이 생겼고 토리우스는 자책했다.

그 누구도 토리우스를 탓하지 않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했다.

“수행을 하고 돌아오겠다며 숲으로 들어가셨답니다…. 당시에 나이가 가장 많고, 악령화를 한 번도 겪지 않은 저를 낙원을 관리할 ‘후계자’로 임명하시곤 떠나셨지요.”

그 후로 2년이 지났지만 토리우스는 감감무소식이다. 그가 없는 2년 사이에 낙원은 더 이상 낙원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 것이다.

“강령술사님.”

“네.”

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계자는 덥석 내 손을 잡았다.

“낮엔 독충과 짐승 같은 이물들이, 밤엔 악마 같은 이물들이 날뛰는 숲입니다…. 그런 숲에 들어가셔서 두 해 동안이나 돌아오시지 못하셨지만, 그래도 그분이라면 숲의 어딘가에 살아계시리라 믿습니다.”

「뒈졌을 거야. 노화된 몸으로 혼자서 숲에 들어갔다잖아.」

“정말 그분이 지금까지도 살아계시리라 생각하세요?”

“호락호락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계시겠지요.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실 겁니다….”

「얼굴이라도 봤으면 존재 추적을 할 수 있는데. …귀찮으니까 거절하자.」

“알겠어요. 제가 찾아보죠.”

「야!」

후계자는 가뜩이나 안 좋아 보이는 허리를 연신 굽히면서 내게 감사를 표했다.

* * *

흑마법사 토리우스.

내가 흑마법사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이건 상식적인 추측이다.

토리우스가 잿빛세계 떨어진 사유가 있다면 뻔하다. 축복을 받아서, 혹은 선하고 신성한 영혼으로 마법사가 될 수도 있었던 그가 어떠한 이유로 타락한 것이다.

타락을 해서도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이 부리는 마법은 사악한 주술과도 비슷한 성질을 지니게 된다. 더는 순수한 마법도 사악한 주술도 아니게 된 그것을 우리는 흑마법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흑마법은 저주 저항, 마법 저항, 영적 저항, 신성 저항이라는 모든 저항 속성을 막론하고 상대에게 심각한 해를 입힐 수 있다. 이론적으로.

‘따라서 토리우스는 옛 추방자야. 노화해서 약해진다는 이야기를 접해보니 그가 선생처럼 이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이 드넓은 숲을 언제 다 찾아봐?」

‘어차피 제국으로 가는 길이잖아. 가는 길에 겸사겸사 찾는 거지.’

「토리우스를 찾으면 너한테 무슨 득이 있는데? 다 늙어서 뒈져가는 힘 빠진 흑마법사는 쓸모가 없어.」

「게다가 흑마법이야. 주술이 아니라 흑마법이라고. 선생 때와 달리 그건 배울 수도 흡수할 수도 없는 능력이잖아.」

내가 조금이라도 선심을 가지고 움직이면 전부 토를 다는 녀석이다.

「그, 그게 아니고 나는 그냥…. 진짜 이해가 안 돼서 말이지. …그렇게 느껴졌다면 미안.」

괜찮다. 녀석은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녀석의 언행을 이해하니까.

‘지금 일 안 하는 악귀들 전부 불러내.’

키이잉!

키이잉! 키이잉! 키이잉!

전투에 특화된 악귀들이 아니다. 당장 바쁘지 않은 악귀라면 전부 소환한 것이다. 그래서 소수의 거미 악귀, 거미 악귀의 새끼, 악명도 잘 모르겠는 이상한 악귀들이 내 주변에 많이 등장했다.

이곳은 절벽길 앞의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숲이다.

실재세계에서는 ‘광인의 숲’이라고 불리지만 잿빛세계에서는 달리 부르는 말이 없다.

나는 녀석들에게 명령했다.

‘그의 흔적을 찾아라.’

사사사삭!

그 많던 악귀들이 숲속에 뿔뿔이 흩어졌다.

‘목줄로 묶을 수 있는 이물이 있다면 묶어서 악귀로 삼아라. 그리고 같은 명령을 내려라.’

끝이 어딘지도 모를 숲속을 나의 악귀들이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악귀가 악귀를 늘린다.

내가 가진 악귀 집단의 숫자를 비약적으로 늘림과 동시에 토리우스를 찾을 수도 있는 방법이다.

만약 이렇게 해도 그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는 이미 죽어서 풍화된 것이리라.

“키기기그극….”

나는 거미 악귀에 올라타서 제국이 있는 방향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험한 지형에서도 말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거미 악귀는 언제든 유용했다.

물론 아직도 불나방이 그립긴 하다. 그때 불나방을 죽인 성기사들이 괜스레 밉기도 하고.

거미 악귀가 땅에서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하늘을 나는 불나방보단 느릴 테니.

「특별한 걸 찾아냈어.」

‘이물이야?’

「이물이야. 존나 강한 이물.」

그래서 그게 얼마나 강한 이물이냐고 물어보니, 뒤집힌 신관의 주술과 역병 마녀의 괴력까지 갖추고 있는 존재 같다고 한다.

「게다가 녀석이 어떤 무덤 하나를 지키고 있어. 무덤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데 녀석이 그 연기를 흡입하는 중이야.」

숲속에 뜬금없이 있는 무덤 하나.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는 무덤. 그 연기를 탐하듯 무덤을 지키는 강력한 이물.

‘가자.’

나는 그 무덤이 토리우스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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