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44화 (44/181)

8. 가시관은 쓰지 않겠다 (4)

실재세계에서는 ‘광인의 숲’.

이 잿빛세계에서는 백 년은 살았다가 죽었을 법한 두께의 나무들이 건조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런 나무들의 높이는 폐허에 있는 3층, 4층 건물 따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다.

하지만 역시 잿빛세계라 나뭇잎은 없고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완만한 언덕만 있는 숲, 나는 거미 악귀의 힘을 빌려 높은 거목 위로 올랐다.

이제 녀석이 보인다.

「어둠에 취한 흑기사.」

「1006.」

무려 네 자릿수의 악을 지니고 있는 이물이다.

광택이 흐르는 까만 광물로 된 갑옷을 전신에 갖추고 두 손에는 사람보다 큰 까만 장검을 들고 있다.

근육질 덩치에 키도 비인간적이다. 이렇게 녀석의 우람한 육체를 보고 있으면 전에 봤던 그 ‘나무꾼’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흑기사는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투구의 안면 부분에 있는 창살 같은 구멍으로 연기가 흘러들어가는 중이다.

「경고했지만 육체적인 능력은 물론이고 주술적 능력까지 고루 갖추고 있는 이물이야. 이 거리에서도 영력이 느껴질 정도니까.」

‘영력은 무덤에서도 느껴져.’

저 무덤이 무언가 어두운 힘의 원천인 것 같다. 녀석의 악명이 ‘어둠에 취한’ 흑기사라면, 녀석을 취하게 한 어둠이란 분명 저 무덤을 뜻하는 것이리라.

「저 무덤…. 파헤쳐 보고 싶어.」

나도 왠지 그러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내 머리는 저것과 혼자서 싸우면 안 된다고 판단하는 중이다.

‘아라나크.’

키이잉!

거목 위에 아라나크가 소환되었다. 나뭇잎 하나도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이긴 하지만 일단 그 두께가 실재세계의 웬만한 나무줄기보다 굵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또 무슨 일이지?”

“이번엔 너랑 거미 군단도 같이 쓰자.”

아라나크는 내 시선을 따라서 흑기사를 쳐다보았다.

“저걸 사냥하겠다니 제정신인가?”

“우리는 집단이야. 사냥할 수 있어.”

“희생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일만 벌이는구나. 폐허에 신선한 인간들을 들여오길래 나에게 주는 선물인가 기대한 내가 멍청했지.”

“폐허나 근방의 숲보다는 이 광인의 숲이 더 넓고 사냥감도 풍부하지 않겠어?”

“무슨 뜻인가?”

“이 숲에 있는 이물들은 왕국의 폐허 근방에 있는 것들보다 가치가 높아. 더 다양하고 더 강한 것들이 많지.”

아라나크라면 입맛을 다실 것이다. 거미 악귀 군단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아라나크라면 더 많은 악을 갖춘 더 많은 사냥감을 원하기 마련이고, 자신의 거미 악귀 군단을 운용하기 위해 더 넓은 영역을 원하는 법이다.

게다가 아라나크가 통제하고 있던 세인트 왕국의 폐허에는 아라나크가 싫어하는 ‘인간’ 집단이 들어선 상황.

안 그래도 폐허와 숲에서 출몰하는 이물들에게 질렸을 아라나크라면 내 제안을 달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냥 명령하면 되잖아.」

‘명령이랑 충성은 달라.’

따라서 나는 아라나크에게 제안한다.

“광인의 숲을 ‘거미의 숲’으로 바꾸려면 네 힘이 절실할 것 같은데. 네가 나서서 어느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냐.”

“변함없이 혀놀림 하나는 좋구나. 페인.”

“왕국 일대에서 나오는 조촐한 악과 살점으로 어느 세월에 군대를 모아 제국을 치겠어? 내가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물의 가축화는 성공했어도 그것만으론 네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없을 거야.”

“알겠다. 요컨대 자원이 풍부한 영토로 확장을 하자는 말이군. 저 강력한 토착민을 몰아내고서.”

아라나크는 육중한 덩치로 나뭇가지를 잘도 탔다. 배에서 나온 거미줄을 나뭇가지에 묶어서 거미답게 지면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배와 머리 사이에 돌출된 여성의 상반신으로는 전략을 논했다.

“이물에게 광란의 집단부화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먼저 선공을 넣어라.”

“알겠어. 그다음에 거미 악귀가 덮치는 걸로 하자. 저 장검 두 자루가 위협적이니까 처음엔 원거리에서 거미줄로 제압부터 시도하자고.”

“좋다. 이후엔 너의 판단에 맡기지. 필요하다면 언제든 목줄로 말해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너의 안목 하나는 인정하고 있으니.”

「자기가 뭐라고 너를 인정하고 말고야? 그래봤자 한낱 이물 출신인 악귀 따위가 너에 대해 뭘 안다고…」

“고맙다. 아라나크.”

지면에 거의 다 내려간 아라나크는 나를 보며 얼굴을 한번 찌푸리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저, 저 벌레 새끼가 새침한 척을…!」

‘싸움에 집중해.’

* * *

흑기사는 무덤 앞에 서서 검은 연기를 흡입하고 있다.

“스으으으으읍…….”

검은 연기는 돌로 된 무덤의 비석과 덮개 사이, 마치 간헐천이 밑에 있는 것처럼 흙바닥 위로 흘러나오는 중이다.

“스으으으읍…”

흑기사는 오로지 들이마실 뿐, 날숨은 한 번도 내뱉지 않는다.

고개는 살짝 위를 향하고 있고 커다란 장검을 든 두 손은 아래로 축 처져있다. 그래서 오로지 연기에 취한 것 같은 자세다.

…부웅!

흑기사의 배후에서 페인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도끼를 휘둘렀다.

카앙!!!

날붙이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스으으으으…”

흑기사는 배후에서 달려든 페인의 공격을 장검으로 막아낸 것이다. 커다란 덩치에 무거운 갑옷을 두르고 있음에도 그 움직임이 말도 안 되게 기민했다.

“…어떻게 알았지?”

“하아아아아아…!”

그 순간, 흑기사의 투구에 있는 구멍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날숨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검은 연기는 페인과 흑기사를 집어삼킬 듯 자욱하게 주변을 감싸고 말았다.

후웅!

시야를 가리는 검은 연기 속에서 장검이 날아들어 페인의 목을 노렸다. 동시에 페인은 허리를 뒤로 꺾어서 장검을 피해냈다.

후웅!

하지만 두 번째 장검이 뒤이어 페인의 다리를 노렸다. 첫 번째 장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다른 한 장검을 수평으로 휘두른 것이다.

그 거센 움직임이 밀쳐낸 공기는 검은 연기까지 흩어지게 하였다.

“스으으으으…”

페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흑기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나치게 비대한 나무줄기들. 평야 위에 자라난 숲에서는 제법 먼 곳까지 시야가 닿았다. 그래도 페인은 보이지 않는다.

“…!”

흑기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키에에에에엑!!!”

나무를 타고 이동한 거미 악귀들이 거미줄을 쏘고, 그 거미줄 사이에도 거미 악귀들이 뒤섞여서 흑기사를 덮치는 것이었다.

“하아아아아…!”

흑기사는 다시금 검은 연기를 폭발적으로 토해냈다. 이번엔 주변에 자욱하게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화 속 용처럼 거미 악귀들을 노려 연기를 뿜어낸 것이다.

“케게겍…!”

“그윽…!”

그 연기에 직접 닿은 거미 악귀들은 흑기사를 물기도 전에 공중에서 즉사하였다.

페인은 그런 광경을 나무 뒤에서 확인했다.

‘마시면 죽는 건가.’

「심장마비에 걸려. 너는 방독면이 주술로 강화되어 있어서 멀쩡했던 거야.」

거미들의 커다란 사체가 우르르 떨어져서 지면에 처박혔다. 흙 알갱이가 튀어 오르고 그 와중에 나무 위의 녀석들이 쏘아낸 거미줄은 연기를 유연하게 회피하여 흑기사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거미줄은 안 통해.」

투두둑! 투둑!

흑기사는 거미줄을 무시하다시피 움직였다. 그냥 몇 발자국을 움직이고 팔을 뒤트는 것만으로 거미줄을 모조리 끊어낸 것이다.

그리고 꽁무니나 입으로부터 거미줄이 연결된 일부 거미 악귀들은 거목 위에서 버티다가 지면에 떨어지고 말았다.

쿵! 쿵! 쿵! 쿵!

흑기사는 엄청난 덩치로 뛰었다. 움푹 파인 발자국이 녀석의 뒤로 이어졌고 지면에 떨어진 거미 악귀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녀석의 장검이 거미 악귀를 베었다.

콰가가가…!

녀석은 거미 악귀를 땅과 함께 베었다. 그리고 온 사방에서 달려드는 거미 악귀들에게 단 한 번의 공격도 당하지 않고 매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악귀들을 모조리 도륙 내버렸다.

그 과정에서 함께 베인 거목들도 우지끈거리며 거대하게 쓰러졌다.

“하아아아…!”

이어지는 검은 연기는 거목을 타고 올라가서 구름처럼 공중에 퍼져나갔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있던 거미 악귀들까지 지면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커헉…!”

그러나 그런 흑기사조차도 기침을 했다.

투구의 구멍 사이로 진득한 혈액이 흘러나왔다.

“이쪽이다. 흑기사.”

흑기사는 배후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재빠르게 몸을 틀었다. 시선 아래에 어느새 페인이 접근한 채였다. 그리고 페인은 이미 손목쇠뇌를 조준하고 있었다.

쐐액!

은화살이 투구의 구멍 사이로 정확하게 박혔다.

“커허으으으으…. 크아아아아!!!”

그냥 화살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으리라. 어쩌면 화살이 박힌다는 전제조차 성립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안면에 박힌 은화살은 흑기사에게 상당한 통증을 유발한 모양이다.

후웅!

콰아앙!!!

흑기사는 장검을 도끼 다루듯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그래서 장검에 찍힌 흙바닥이 폭발하듯 거꾸로 솟아올랐다. 그 사이에 파편처럼 튀어나간 돌덩이가 페인의 질긴 로브를 뚫고 피부에 상처를 낼 정도였다.

하지만 페인은 거리를 벌리지 않고 오히려 달려들었다. 그것 또한 흑기사의 예상외였다.

“하아아아아!!!”

흑기사는 검은 연기를 페인에게 정면으로 토해내면서 연달아 장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장검을 대각선으로 교차시키듯 휘둘렀고 그 모양 자체로 새까만 검기(劍氣)가 사출되어 페인을 노렸다.

그래도 페인은 교차된 검기 사이로 몸을 비집고 넣어서 회피하였다. 그래서 흑기사는 다시금 장검을 휘둘러 물리적으로 페인을 베어내려고 했다.

키이잉!

그 순간에 흑기사의 왼쪽 발밑에서 흙이 올라왔다.

‘아라나크!’

재결합으로 흑기사의 발밑에 굴을 파버리고 거기에 아라나크를 목줄 능력으로 소환해버린 것이다.

쿠와아아!!

아라나크가 지면을 파헤치며 튀어나왔다. 네 개의 다리는 아라나크의 몸을 지탱하고 다른 네 개의 다리는 흑기사의 팔다리, 갑옷의 관절 부분을 노려서 찔렀다. 그리고 머리에 달린 턱은 흑기사의 목을 물었으며, 어미의 싸움을 지켜보던 다른 거미 악귀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흑기사에게 다닥다닥 붙었다.

뒤이어 아라나크는 순간적으로 구속된 흑기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흰자위 없는 검은 눈이 흑기사의 투구 안쪽을 탐닉하듯 들여다보았다.

“내 아가들을 많이도 죽였구나!”

아라나크는 흑기사의 투구를 새하얀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파고들지어다…!”

동시에 아라나크의 거미 몸체, 두툼한 배에서 엄청난 숫자의 새끼 거미들이 튀어나왔다. 녀석들은 어미의 몸을 타고 가서 어미의 팔을 돌다리로 삼아 흑기사의 투구 위에 올랐다.

무수한 새끼 거미들이 투구 사이에 있는 구멍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하아아아아!!”

그러나 흑기사는 다시금 검은 연기를 토해냈다.

촤악!

아라나크는 배후로 거미줄을 쏘아내서 재빨리 페인의 옆으로 물러났다.

- 키익…! 키이익…!

흑기사를 덮쳤던 모든 거미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스흐으으읍….”

쾅!

흑기사는 장검을 지팡이처럼 흙바닥에 꽂으며 일어섰다. 녀석의 투구 사이로 새끼 거미들의 사체가 쏟아져 나왔다.

아라나크는 흑기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페인. 녀석의 영력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

“….”

“아무리 1006의 악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저만한 위력의 주술을 연달아 사용한다는 건 비상식적인 일이다. 나도 한때 이물이었으니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괜찮아. 파악 끝났어.”

흑기사는 장검을 고쳐 쥐었다. 주변에 다른 거미 악귀들을 둘러보더니, 녀석들을 무시하고 페인과 아라나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어서 내게 명령을 내려라! 페인!”

“무덤을 부숴.”

* * *

악명. 어둠에 취한 흑기사.

가지고 있는 악. 1006.

내가 선공으로 후방에서 기습을 가했지만 녀석은 그것에 반응했다. 하지만 내가 멀찍이서 녀석을 쳐다보고 있었을 때는 아무 반응이 없었으니, 존재 자체를 추적하는 능력이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육감적인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육감적인 능력과 더불어 신체적인 능력도 가히 괴물 같은 이물이다. 저 무거운 장검 두 자루를 쉼 없이 휘두르며 검기를 날리고 땅과 나무까지 함께 베어낼 정도이니 지구력도 상당하다.

따라서 녀석에겐 기습이 통하지 않으며, 거미 군단의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서 지치게 만든다는 수도 통하지 않으리라. 괴력 탓에 거미줄로 포박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만약 녀석의 갑옷이 완벽하다면 거미 악귀들의 공격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그런 가정 하에 시도한 수가 있다.

아라나크가 녀석을 덮친 덕분에 거미 악귀들이 몇 번인가 녀석을 물고 긁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가정과는 달리 녀석의 갑옷에는 아주 자그마한 흠집 하나조차도 생기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재로 만들어진 갑옷인지.

싸우는 와중에 녀석은 계속해서 검은 연기를 빨아들이고 토해냈다. 검은 연기를 조종도 할 수 있는 것 같고 그 연기를 조금이라도 들이마신 것들은 심장마비로 즉사했다. 당연히 이물인 녀석의 그것은 능력이고 주술이다. 따라서 영력에 의존한다.

또한 영력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 쓰다 보면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녀석은 계속해서 검은 연기를 다뤘다.

「이번엔 검은 연기와 검기를 함께 날릴 거야!」

‘아라나크. 너는 연기를 가림막으로 삼아서 우회해.’

- 혼자 괜찮겠어?

‘무덤만 확실하게 부숴줘.’

결국 생각은 처음으로 돌아온다.

무덤이다.

무덤이 흑기사가 가진 어두운 힘의 원천이 맞았다. 녀석의 악명이 ‘어둠에 취한’ 흑기사다. 녀석을 취하게 한 어둠이란 저 무덤을 뜻하는 것이 맞았다.

「온다!」

아주 짧은 순간이다. 이번엔 검기가 연달아 다섯 번은 이어져서 내게 돌진해오는 것 같다. 전처럼 몸을 틀어서 회피하는 건 허가하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나는 앞에 흙벽을 세웠다.

콰…

새까만 검기가 흙벽을 가르고 나왔다.

콰아…!

나는 내 시야 한쪽에 있던 거미 악귀에게 순간적으로 명령하여 거미줄을 몸에 붙였다. 거미 악귀는 재빠르게 거미줄을 당겨서 날 위험한 위치로부터 탈출시켰다.

다섯 번 이어진 검기는 흙벽을 가르고 뒤에 있는 거목을 세 그루나 베어버렸다.

“크으아아아아아!!!”

흑기사는 자신에게 기울어지는 거목을 장검으로 가볍게 쳐내버리고 내게 달려오는 중이다.

‘방혈.’

아까 방혈은 미약하게나마 통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투구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으니까.

“커허억…!”

이번에도 흑기사는 투구 사이로 피를 흘렸다. 그래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와중에 자기 안면에 박힌 은화살을 뽑아서 피기침과 함께 바닥에 버리는 위엄까지 보여줬다.

“하아아아아!!”

그러면서 자기 몸에 검은 연기를 둘렀다.

‘방혈. 방혈. 방혈.’

「영력 좀 아껴!」

‘마른 익사.’

흑기사는 계속해서 피를 토해냈다. 좀 전에 아라나크가 녀석의 팔다리 관절에 뚫어놓은 구멍으로부터 출혈이 발생했다. 그래도 녀석은 멈추지 않는다. 쓰러지지도 않는다. 속도가 줄지도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방혈로 인한 피해는 누적되고 있다. 지금쯤 몸속의 혈관이 다 터진 채일 것이다. 그래도 녀석의 육체가 버티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영력 덕분이다. 녀석의 주술 저항에도 영력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콰앙…!!!

때마침 아라나크와 거미 악귀들이 무덤을 파헤쳤다. 그와 동시에 흑기사를 따라서 이동하던 검은 연기가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방혈 5계.’

나는 이 순간을 노렸다.

‘…교수척장분지형(絞首剔臟分肢刑).’

흑기사 주변에 널린 거미 악귀들의 사체로부터 혈관이 튀어나와 녀석을 옭아맸다. 그래도 흑기사는 엄청난 괴력으로 제 몸에 붙은 혈관을 뜯어내려고 했다.

“크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흑기사의 팔다리에 뚫린 구멍으로부터 혈관이 새로이 튀어나왔다. 그건 거미 악귀들의 혈관이 아니라 흑기사 자신의 혈관이었다.

그것이 흑기사의 목을 조르고 흑기사의 투구 사이로 파고들어 녀석의 안면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 들어갔으리라.

촤아아…! 촤아아…!

흑기사는 자세가 무너졌다. 장검 두 자루를 놓친 채 지면에 무릎을 대고, 극심한 통증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투구를 주먹으로 미친 듯이 쳤다.

쾅! 쾅!

“아아아아아아…!!! 거거거걱그억…”

이젠 흑기사의 투구에서도 혈관이 튀어나왔다. 녀석의 팔다리가 스스로 절단되어서 혈관에 대롱대롱 연결된 채 깃발처럼 허우적댔다.

터엉! 터터텅…!

이윽고 흑기사의 갑옷이 온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녀석의 몸이 폭발한 게 아니라 녀석의 살가죽, 혈관, 혈액, 내장 따위가 몸밖으로 나오면서 갑옷을 밀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광기의 춤을 추던 혈관과 내장이 흑기사의 목을 옭아매 나뭇가지에 매달아버렸다.

녀석의 마지막 모습은 그야말로 참사였다.

팔다리도 없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내장에 목을 매단 채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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