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시관은 쓰지 않겠다 (5)
흑기사를 죽여서 1006의 악을 흡수했지만 다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전생이 없던 걸지도 몰라. 영혼에 전생의 기억이 없어.」
거미 악귀들은 흑기사의 튼튼한 갑옷을 모아서 잘 쌓아두었다.
“페인. 무덤 안에 이런 게 있었다.”
아라나크는 내게 종이 한 장을 넘겨줬다.
그것은 유언장이었다.
「글씨가 왜 이래?」
광인이 휘갈겨 쓴 것처럼 글씨가 엉망진창이다. 그리고 관에 안치된 유골로부터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악령화라도 일으켜서 정신에 문제가 생겼었나? 글자 몇 개는 알아보기도 힘들잖아.」
그래도 난 유언장의 글씨를 하나씩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 * *
나는 시한부 마녀와 사랑을 했다. 그녀는 내게 흑마법의 재능을 일깨워줬다.
제국군에게 ??? 사형당하기 직전,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 자신을 잿빛세계로 추방했다.
??? 핏덩이 같은 아이를 ?????? 나는 나쁜 아버지다.
잿빛세계 사람들이 내게 의존하도록 ??? 무능력하고 무책임 ?? 풍화된 나쁜 지도자다.
내가 만든 흑기사를 ??? 거둔 당신은 악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절벽 ??? 낙원이 있다. 그들을 거두고 인도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 간곡히 부탁한다. 두 세계를 오가는 다차원 능력자라면 ??? 내 염원을 ??????.
실재세계의 광인의 숲 ??? 외로운 내 아이에게 이 유언장을 ??????.
셰르카.
뒤에 ??? 봉인진은 너의 아비가 잿빛??? 한평생??? 흑마법의 지식이란다. 너에게 남겨줄 ??? 미안하다. ??? 유용하게 쓰길 바란다.
??? 많지만 종이가 마땅치 않아 말을 줄여야겠구나.
이리를 잘 키우거라. 근본은 사악하여도 ??? 배신하지 않을, 무엇보다도 순수한 악령이니까.
너의 못난 아버지 토리우스가.
* * *
「이건 봉인진(封印術)이야.」
유언장의 뒷면에 흑연으로 그려진 것은 봉인진이었다.
‘흑마법의 지식을 여기에 담아둔 건가.’
「대단한 녀석이네. 자기가 가진 지식을 직접 종이에 담아서 봉인하다니.」
흑마법은커녕 마법에도 일가견이 없는 나로선 이걸 해석하기 어렵다. 해석한다고 하여도 내겐 힘이 되지 않는 지식이다.
「네 영혼에 맞지 않는 걸 받아들였다간 정신이 무너질 수도 있지.」
어쨌든 유언장에는 토리우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흑마법의 재능을 가지고 흑마법의 지식이 담긴 봉인진까지 유언장에 써놨으니, 저 관에 안치된 유골은 토리우스임이 확실하다.
「아내는 마녀, 본인은 흑마법사였으니까 광인의 숲에서 은거했겠네. 그러다가 제국군에게 본인만 들켜서 잡혀가고. 사형 당하기 직전에 목숨을 부지하고자 자신을 잿빛세계로 추방한 거고.」
유언장에는 두 세계를 오가는 다차원 능력자라는 언급이 있었다.
토리우스 본인은 다차원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만약 이 유언장을 보는 사람이 다차원 능력자라면, 자신의 아이한테 유언장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셰르카. 여자아이 이름 같은데.」
‘셰르카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토리우스는 잿빛세계에서 150년을 넘게 살았다.
핏덩이라는 표현이 있는 걸 보아하니 그는 셰르카가 눈도 뜨기 전에 잿빛세계로 온 것 같다. 그렇다면 실재세계에서 젊은 시절에 아이를 낳았어도 그 아이는 지금쯤 다 늙은 할머니가 되었거나 이미 노화해서 죽었으리라.
…라는 것이 상식이다.
「토리우스는 흑마법으로 본인의 노화를 늦췄다고 했지. 아이한테도 거리낌 없이 흑마법의 지식을 주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아내가 시한부 마녀라고 했어. 그러면 셰르카는 광인의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친에게서 흑마법을 배웠을 거야.’
따라서 셰르카 본인도 노화를 늦췄을 것이다. 잿빛세계에서 150년을 살다가 스스로 무덤을 판 토리우스가, 150살이 넘었을 제 딸에게 기어코 유언장을 남겼다는 것이 근거다.
「‘이리’는 뭐지? 근본은 사악하여도 배신하지 않을…. 무엇보다도 순수한 악령인데 셰르카한테 그걸 잘 키우라고 하잖아.」
‘너랑 나 같은 관계를 얘기하는 거겠지.’
우리 관계가 협력과 공존이라면, 셰르카와 이리는 어미와 자식 같은 관계일 것 같다. 잘 키우라고 했으니.
‘셰르카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시한부 모친을 잃고 오랜 세월 이리라는 악령과 함께 지내왔겠지. 그래서 외로운 아이라는 문장이 있는 것 같아.’
스으으으….
토리우스의 유골로부터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가 유언장을 따라왔다. 그 연기는 유언장 주변으로 모여들더니 나를 중심으로 빙빙 돌았다.
“조심해라. 움직임이 인위적이다.”
아라나크는 검은 연기를 경계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검은 연기는 전혀 공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내 주위를 빙빙 돌고는 다시금 유언장 주변에 모여들어서 더 까맣게 뭉치는 것이다.
「이건…?」
너무 뭉쳐서 먹물처럼 까맣게 변한 연기가 무언가를 표현했다. 그림인 것 같기도 하고 소환진이나 마법진 같기도 하다.
“글자다. 그 유언장을 뒤집어라.”
나는 아라나크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유언장을 뒤집었다. 좀 전까지 보던 건 유언장의 뒷면에 그려진 봉인진이었고, 이제 보이는 건 유언장의 앞면이다.
스으으으…
그러자 까맣게 무언가를 표현하던 검은 연기도 유언장을 따라서 뒤집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지옥을 엿보았다….”
나는 지옥의 실체를 엿보았다.
당신이 만약 악한 힘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지옥과의 연결성이 짙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나머지는 내 딸에게서 듣도록 해라.
「솔직히 인정할게. 이건 나도 궁금하다.」
「너무 궁금해. 악령으로서.」
이런 식으로 유언장에 포함되지 않는 숨겨진 내용까지 내게 전한 것이다.
호기심을 자극해서 어떻게든 셰르카를 찾아가게 만들고 자신의 유언장에 있는 흑마법의 정수를 딸에게 전해줄 수 있도록, 아주 능숙하게 상대를 유도하는 것이다.
저 관에 누워서 뼈만 남은 인물이 생전에 얼마나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셰르카도 찾을 거지? 응? 어차피 실재세계에서도 제국으로 가려면 광인의 숲을 통과해야 하잖아. 가는 김에 찾을 거지? 여기서 숲을 통과하는 김에 토리우스의 행방을 찾은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해줄 거지? 후계자 부탁도 들어줬는데 내 부탁도 들어주라.」
‘네가 부탁 안 해도 찾아갈 생각이었어.’
* * *
흑기사는 거미 악귀에게 공격당해도 흠집조차 안 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건 수준 높은 대장간에서도 제련하기 어려운 소재야.」
다행히도 내겐 재결합 5계가 있어 흑기사의 갑옷을 내가 원하는 형태로 가공할 수 있었다.
또한 흑기사의 갑옷과 커다란 장검은 단순히 물질적인 소재가 아니라 주술적인 힘까지 머금고 있는 것이었다.
「흑기사의 사철(砂鐵). 이 알갱이 하나하나가 마법과 주술에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 빛을 흡수하기 때문에 광택이 없어 은신하기에 좋고 무게도 적당한 수준이지. 게다가 자체적인 강도(剛度)는 말할 것도 없어.」
나는 남은 영력을 쥐어짜서 흑기사의 장검과 갑옷을 가루처럼 분해했다. 그렇게 가공된 흑기사의 사철은 내 도끼, 단검, 손목쇠뇌, 방독면, 방어구, 로브를 강화하는 소재가 되었다.
「약한 마법이나 주술은 베어버릴 수도 있어. 흑기사처럼 검기도 쓸 수 있고.」
도끼는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도 벨 수 있게 되었다. 전에 쓰던 것보다 더 예리하고 단단해졌으며, 도끼날에 새겨진 표식들 중 일부는 내 영혼과 직접 연동되는 주술적 장치가 되었다.
덕분에 흑기사가 검기를 쏘아낸 것처럼 나도 검기를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검이 아니라 도끼지만.
「여왕의 독니는 더 예리해졌고.」
여왕의 독니. 그 단검은 주물이었다. 그런 주물을 흑기사의 사철로 강화해서 더 예리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여왕의 독니가 본래 가지고 있던 뼈칼의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손목쇠뇌는 여차할 때 둔기나 방패처럼 쓸 수도 있겠네.」
내 왼쪽 손목에 장착되었던 기존의 손목쇠뇌는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랬던 손목쇠뇌를 전부 흑기사의 사철로 교체해서 긴박한 순간에 방패처럼 활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
「방독면은 살짝 어두침침하게 변했어. 광택이 사라졌고 아까 봤던 검은 연기처럼 주술적 독성을 가지고 있는 기체도 걸러낼 수 있게 되었어. 더 단단해진 건 당연하고. 강화하면서 아라나크의 극세사도 썼으니까 전에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로브 안에 껴입은 방어구에도 흑기사의 사철을 섞었다.
마지막으로 검붉은 로브는 아라나크의 실과 흑기사의 사철을 더하여 훨씬 질겨졌다.
물과 불에 강한 것은 물론이고 날붙이, 주술, 마법 따위에도 쉽게 당하지 않는, 그 자체로 갑옷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검붉은 로브가 된 것이다.
‘벌써 하루가 다 갔네.’
「장비를 전부 다시 만들었으니깐.」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 거미 악귀들이 모여있는 쪽을 보았다.
녀석들 중심에 거미 악귀들의 사체가 쌓여있다. 그리고 아라나크가 그 앞에서 눈을 감고 여덟 다리를 굽힌 채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누구한테 기도하는 거지?」
‘전생에 제국의 성녀였다고 하잖아. 자기도 뭔가 믿는 게 있겠지.’
나는 아라나크가 기도를 끝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세인트 왕국의 폐허, 폐허 근처의 숲, 그리고 지금부터는 이 새로운 숲까지 네가 통제해야 돼.”
“그리하지.”
그렇게 나지막이 대답하는 아라나크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좀 전에 흑기사와 싸우다 죽은 거미 악귀들 때문일까. 그 악귀들이 내겐 그냥 군단 같은 것이지만 아라나크에겐 ‘아가’들이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다른 악귀들은 제외하고 거미 악귀만 따지면 몇 마리나 남았어?”
“폐허에 24마리, 그 근처 숲에 35마리, 이곳에 8마리다.”
조금은 반성한다.
내가 승천자와 싸울 때 아라나크를 부르지 않았다면, 내가 흑기사와 싸울 때 아라나크를 부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라나크의 거미 악귀 군단은 100마리를 훌쩍 넘겼으리라.
제국을 치기 위해 열심히 모으던 군단을 두 번이나 차출해버린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한테 준 모든 영역을 확보하면서 악귀들을 늘리도록 해. 당분간은 내가 타고 다닐 거미 악귀 한 마리만 제외하곤 부르지 않을 테니까.”
“바라던 바다. 지배해야 할 땅의 크기에 비해 내 아가들의 숫자가 부족하던 참이다. 네가 드디어 그 고충을 인지하게 된 것 같아 다행이구나.”
“그리고 이 숲 전체를 탐색하다가 사람의 구조물 같은 게 발견되면 바로 말해줘.”
“흑마법사의 딸을 찾기 위해서인가?”
“맞아.”
실재세계에 있는 광인의 숲은 몇 나라의 국토를 합친 것보다 넓다. 그러니 셰르카를 찾기 위해 내가 실재세계에서 돌아다님과 동시에, 이곳 잿빛세계에서 악귀들도 숲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 * *
나는 선생의 오두막에서 수면을 취하고 일어나자마자 실재세계로 이동했다.
이곳은 절벽길 끝이다. 잔디와 잡초가 뒤덮고 있는 완만한 언덕의 평야를 광인의 숲이 둘러싸고 있다.
키이잉!
나는 즉시 거미 악귀에 올라타서 광인의 숲으로 진입했다.
「여기 분위기 좋은데?」
엄청난 두께와 높이를 자랑하는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 위에서 귀신의 머리칼처럼 아래로 축 늘어진 넝쿨이 스산하고 버섯과 꽃은 너무 큼지막해서 거부감이 들 정도다. 게다가 커다란 나뭇잎이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언제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이다. 그래서 대낮에도 어둡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도 간혹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틈새로부터 햇빛이 떨어지는데, 그게 한 줌의 빛줄기처럼 마음의 갑갑함을 풀어주는 듯하다.
스스슷! 스스스슷!
거미 악귀를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하던 참이었다.
「냄새가 난다.」
나는 한껏 강화된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냄새를 맡지 못하면 나와 감각을 공유하는 내 안의 악령도 맡지 못할 텐데.
「냄새는 거미 악귀가 맡은 거야.」
‘무슨 냄새인데?’
「피 냄새.」
그래서 거미 악귀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청력을 증폭해보았다.
풀 밟는 소리, 옷깃에 살갗이 스치는 소리, 무거운 갑옷이나 장비 따위가 철그렁대는 소리, 남자들의 대화.
‘잠깐 정지.’
나는 거미 악귀를 멈추고 그들의 말소리만 걸러내서 가만히 들어보았다.
- 제국에서 도망친 거야.
- 여자는 왜 없지? 애랑 아빠랑 늙은이들도 있는데.
- 여기까지 오다가 뒈졌나.
- 이야! 여기 말린 고기가 한 보따리다!
목소리만 구분해보면 대략 여섯 명이다.
악마에 심취한 광신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광인에 가까운 자들인 건 분명하다.
「좀 전에 네 명을 죽인 것 같아. 어린 것 하나랑 늙은 것 둘이랑 성인 하나.」
‘생존자는 없구나.’
「뭐, 정의의 사도처럼 복수라도 해주게?」
‘아니. 생존자가 있어봤자 짐짝만 될 뿐이야.’
물론 생존자에게서 정보를 캐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제국에서 도망친 생존자보다는 광인의 숲에서 살아가는 놈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리라.
* * *
더러운 천으로 짜낸 옷 위에 가죽 갑옷을 두르고 곡괭이, 검, 망치 따위로 무장한 여섯 명.
그들은 손을 바삐 움직여 전리품을 챙기고 있다.
“애까지 데리고 제법 멀리 오긴 했어. 크크….”
“야, 앞으로 반나절만 더 가면 광인의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불쌍해서 어쩌냐.”
일가족의 시신이 차가운 땅 위에 쓰러져서 피를 흘리고 있다. 와중에 두 명은 그들이 갖고 있던 보따리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어 게걸스럽게 씹는 중이다.
“맨날 풀이랑 버섯만 처먹다가 횡재했네! 횡재했어!”
다른 네 명은 일가족의 시신을 뒤적이는 중이다.
“어차피 숲을 빠져나가도 절벽길이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아니었어도 그쪽에 있는 악령이나 미친놈들한테 뒈졌을걸?”
“좋은 일 했네! 고통도 덜어주고!”
“푸하하하! 미친놈!”
광인의 숲에서 사람을 사냥하는 건 한 달에 한 번인가 있을 정도로 드문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물과 달리 사람은 사냥하면 옷가지, 도구, 먹을 것 등을 다양하게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돼지 새끼들아! 그만 처먹고 와서 좀 도우라고!”
“내버려 둬. 저 두 새끼가 어제부터 발자국 쫓는다고 개고생……. 네 뒤에 누구야?”
“뒤?”
쪼그려 앉아서 시신을 뒤적이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한 방독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뒤에 있었다. 어느 틈에 접근해온 걸까,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유령처럼 바로 뒤에 서있는 것이다.
“으앗! 씨발! 깜짝이야! 이 새끼 뭐야?!”
그들은 본능적으로 모여서 각자의 무기를 쥐었다. 뒤에서 말린 고기를 씹고 있던 두 명도 잽싸게 합류했다.
“뭘 변태처럼 쳐다보고 있어?!”
“방랑자냐?”
그러나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등에 달고 있는 흉악한 도끼조차 뽑지 않고 맨손으로 우두커니 서있다.
“미친놈이네, 미친놈.”
“내가 보기엔 악령 같아.”
“저 검붉은 옷, 되게 좋아 보이는데?”
“난 도끼 가질래.”
“이번에도 먼저 죽이는 새끼가 임자다!”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는 덩치 큰 남자가 의욕적으로 나섰다.
뚜둑! 뚜둑!
그는 머리를 좌우로 꺾으며 위협적으로 근육을 풀었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망치를 겨누었다.
“지금이라도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지면 살려주지. 네가 입고 있는 옷이랑 들고 있는 것들 전부, 속옷까지 다 내놔.”
그러자 상대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너희들한테 본거지는 있나?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뭐야?”
그건 어떻게 들어봐도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인간적인 분위기는 하나도 풍기지 않는 상대였다.
그래서 망치를 들고 있는 남자는 확신했다.
“악령이군. 목소리부터 차림새까지.”
뒤에 있는 자들은 킥킥댔다.
“볼터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텐데!”
“야 이 악령 새끼야! 지금 네 앞에 상대가 누군지 알아? 제국의 해결사 출신이라고! 해결사! 들어는 봤냐?!”
“저 새끼 볼터한테 쫄아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네, 푸하하!”
망치를 든 볼터는 짐승처럼 콧김을 내뿜었다.
“어이, 악령. 미안하지만 살려주겠다는 말을 취소다.”
볼터의 눈매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악령한테 자비를 베풀 정도로 도량이 크진 않아서 말이지. …이 넓은 숲에서 하필 날 마주친 걸 불운이라 여겨라.”
이윽고 그가 앞으로 발을 내밀면서 망치를 휘둘렀다. 그것은 도저히 망치의 속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빨랐으며, 잦은 경험으로 숙련되었는지 웬만한 중보병의 망치질보다 파괴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런 망치가 지금 페인의 정수리를 노려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부웅…!
그때 페인은 망치에 집중을 못하고 있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학! 흑…! 으으으흐흐…! 해, 해결사, 해결사라고…! 아하하하학!」
악령이 너무 시끄럽게 웃고 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