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46화 (46/181)

9. 보았기에 미쳤는가, 미쳤기에 보았는가 (1)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학! 흑…! 으으으흐흐…! 해, 해결사, 해결사라고…! 아하하하학!」

내 안의 악령이 아까부터 처웃어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질 않는다. 싸움에 집중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자꾸 웃음소리가 울리면 어쩌라는 말인가.

부웅…!

망치가 내 머리를 노려서 수직으로 떨어졌다. 단번에 접근하는 것부터 망치를 휘두르는 것까지 제법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수준은 아니었다.

…콰앙!!!

나는 그대로 망치를 맞고 말았다. 망치가 때린 곳은 이마와 정수리 사이. 그곳도 방독면이 감싸고 있는 부분이었다.

사아아!

잠깐이지만 주변으로 공기가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앞의 녀석은 망치에 대해서 상당한 숙련자인 것으로 보인다.

“끄아악!”

녀석은 들고 있던 망치를 떨어뜨리고 신음했다. 잔뜩 놀라서 날 쳐다보고 있는데 두 팔과 손아귀가 부르르 떨리는 참이라 거동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뒤에 있는 다섯 놈들도 비슷한 반응이다.

“볼터! 너 왜 그래?!”

“저 새끼 어떻게 한 거야?”

방독면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흑기사의 사철로 된 방독면이 망치의 충격을 1차적으로 흡수하고 내 몸이 갖추고 있는 철인 3계가 2차적으로 충격을 흡수한 것이다. 그중 일부에 불과한 충격이 망치의 손잡이를 따라서 녀석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 자식이 뭔가 속임수를 썼어!”

녀석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보통 놈이 아니야! 빨리 와서 도와거거거거거걱…!”

그는 하던 말도 끝내지 못하고 자기 입으로 붉은 것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내가 방혈 1계를 건 탓이다.

「흑기사의 사철. 진짜 괜찮은 소재야.」

남은 다섯 놈들은 자기들이 믿던 동료가 쓰러지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저런 놈들을 상대로는 도끼를 꺼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검기는 써보자고.」

그래도 난 도끼를 뽑아들어 녀석들을 향해 휘둘렀다. 허공을 베듯 휘두르면서 검기를 쓰고자 의도하자, 도끼날에 새겨진 복잡한 무늬의 일부가 검은 연기를 살짝 흘렸다.

콰아아…!

순간, 도끼를 휘두른 방향 그대로 날아간 어두운 검기는 네 명의 몸을 차례대로 베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녀석은 머리가 베어졌고 그다음 녀석은 어깨가 베어졌고 그다음 녀석은 가슴이 나뉘었으며 그다음 녀석은 허리가 끊어졌다.

그렇게 네 명의 숨통이 끊어졌고 가장 오른쪽에서 달려들던 녀석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우, 우와아아악!!”

녀석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조각난 동료들을 눈에 담으면서 극심한 공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 어깨, 가슴, 허리가 끊어진 자들의 상반신이 충격적이었으리라. 가슴과 허리가 끊어진 두 명은 지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 동료를 쳐다보고 있으니.

“다시 묻겠다.”

나는 마지막 녀석에게 접근했다.

“너희들한테 본거지는 있나?”

“히이이익…! 사,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나는 녀석의 옆에 떨어진 시신의 머리를 힘껏 짓밟았다.

쿠적!

흙과 뇌수가 함께 튀었다. 부서진 두개골에서 흘러내린 눈알이 녀석의 가랑이 사이로 굴러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녀석은 내 눈조차 쳐다보지 못했다. 그 자리에 꿇어서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다.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살려줄게.”

내가 그렇게 일말의 희망을 던져주자 녀석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했다.

삶에 대한 욕구, 간절함, 공포가 서로 뒤섞여 들어찬 눈빛이다.

“무, 무엇이든 대답하겠습니다…!”

“계속 물었잖아. 너희들 본거지가 있냐고.”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광인의 숲을 떠돌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 아무것도 없고 아무랑도 관련이 없는 놈들입니다! 히이이익…!”

거목 위에 숨어있던 거미 악귀가 내려와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먹어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행동하는 걸 보니 나중에 교육을 해야겠다.

오도독! 뚜둑!

일단 지금은 맛있게 먹고 있으니 괜히 뭐라고 하진 말자.

흑마법사 토리우스의 딸.

셰르카에 대한 정보가 우선이다.

“그럼 하나 더 물어볼게.”

“으, 으으아아….”

“광인의 숲에서 흑마법사나 마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아니면 그 흔적이나 소문이라도 좋으니까 뭐든 말해봐.”

“아…. 그, 저….”

시체를 뜯던 거미 악귀가 녀석에게 관심이 생겼는지 먹던 것을 뱉어내고 다가갔다.

“아악! 말할 테니까! 말할 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방금 먹던 것도 신선한 건데 왜 다가가는 걸까.

「성체가 된지 얼마 안 된 녀석이라 사냥에 호기심이 있나 봐.」

‘가서 먹던 거나 먹으라고 해.’

거미 악귀는 타액과 함께 피를 삼키고는 휙 돌아갔다.

“그렇지…! 예전에…! 예전에 같이 지내던 동료가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당시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서론은 치우고.”

“아, 예…! 그때 저희는 야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말했었습니다! 잠깐 오줌 좀 누려고 야영지에서 멀리 갔다 왔는데 웬 발자국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무슨 발자국?”

“소녀의 구두 같은 발자국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발자국 주변에 다른 어른의 발자국은 없었다고…. 그래서 저희는 개소리하지 말라고 비웃었죠. 광인의 숲 한가운데에서 조그만 년이 어떻게 혼자 다니고 있냐고….”

“실제로 그 발자국을 확인해보진 않았어?”

“예…. 그냥 개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웃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에 그 친구가 사라진 겁니다!”

「이 대목이 핵심인 것 같네.」

녀석은 눈물이 맺혔다.

“저…. 끝까지 말하면 살려주실 거죠?”

“물론이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약속 하나는 확실하게 지키는 놈이야.”

그러자 아주 조금이지만 녀석의 두려운 얼굴 뒤에 안도의 미소가 엿보였다.

“저희는 사라진 친구를 찾으려고 발자국부터 추적했습니다. 이 어두운 숲에서 누군가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일이라면 어,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다행히도 친구의 발자국은 야영지에서 어떤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발자국이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겁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 녀석의 발자국이 끊긴 지점에 다른 발자국은 없었고?”

“없었습니다…. 혹여나 발자국 말고 다른 흔적이 있을까 싶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죠. 광인이 데려갔으면 광인의 발자국이, 짐승이 물어갔으면 핏자국과 짐승의 발자국이, 다른 도적들이 납치했으면 도적들의 발자국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처럼 말이죠.”

「자기들을 광인이 아니라 도적이라고 구분하는구나.」

“그 위치가 어딘지 기억해?”

“그게 일곱 달…. 아니, 여섯 달은 지난 이야기라 가물가물합니다만…. 여기서 북서쪽 방향이라는 건 기억이 납니다. 그, 그리 멀진 않습니다! 저희가 목적지를 정해고 일직선으로 이동하는 놈들은 아닌지라….”

사냥과 약탈로 먹고사는 도적들이라면 이동방향이 매 순간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북서쪽 방향, 6개월이나 지난 이야기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발언은 신빙성이 있다.

“주, 주술이나 마법을 부리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흑마법사나 마녀 같은 걸 찾고 계신다면 아마 이 일에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헤헤….”

6개월 전 이야기라면 발자국은 지워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 근방에 셰르카가 있다면 또 새로운 발자국을 발견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근방이 셰르카의 활동 영역이라면.

“토리우스나 셰르카라는 이름은 들어봤어?”

“아…. 아니요. 처음 들어봅니다.”

아쉽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 다른 이야기는 또 없고?”

“예. 정말 이게 전부입니다. 맹세합니다.”

“알겠어.”

콰아악!!!

쓸모가 없어진 도적은 거미 악귀의 첫 사냥감이 되어 목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뚜둑! 쿠적! 오도독…!

「북서쪽이라…. 비첸크로이 제국이 북쪽이니까 방향은 얼추 비슷하네.」

* * *

실재세계의 세인트 왕국.

승천자가 발키리의 낙뢰로 만들어낸 분지 위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영역을 재건하고 있다.

수레로 돌과 나무를 옮기고 흙바닥에는 벽돌을 깔아 망치질을 한다. 훤하게 드러난 지하수로를 다시 각진 모양으로 파내고 흙이 든 자루를 분지 위로 옮긴다. 따가운 햇살에 땀을 흘리고 냉수로 갈증을 해소하며 더위를 식힌다.

그런 힘찬 현장의 한쪽에서는 부유하고 힘 있는 가문의 인사들이 모여서 분지를 살피고 있다. 이들은 모두 중앙교회 일대 재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자들이다.

집사의 양산 아래에 있는 여성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재소에 있는 목재와 인부들도 제가 힘껏 지원했죠. 여기에 세워질 건물의 절반 이상은 우리 가문의 목재를 쓰게 될 예정이랍니다.”

“대단하십니다. 부인.”

“부인. 혹여나 석재가 필요하게 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죠. 제 채석장에 물량이 많아서 얼마든지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휴, 물론이죠.”

허리춤에 채찍을 차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남성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훌륭하십니다. 정세도 불안정한 마당에 우리 같은 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주름진 인상에 살찐 복부가 특징적인 남자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이것 참, 전하께서 군마(軍馬)가 급하다 하셨으니 저는 이곳에 나설 여유가 없군요. 마음 같아선 힘을 보태고 싶은데 말 한 필도 귀한 실정이라, 허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아, 전하께서 직접…. 그렇다면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벌써 소문이 쫙 퍼졌어요. 비첸크로이 제국…. 그 야만인들이 우리 왕국의 상황을 염탐하고는 병력을 모으고 있다고요.”

“승천자 하나 없다고 어찌 그렇게 호전적으로 나올 수가 있다는 건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국이랍시고 겉만 번지르르한 나라를 세웠을 뿐, 근간은 야만인 같은 족속들입니다.”

“제국군이라는 호칭도 아깝군요. 전쟁만 일삼는 놈들에게 군대라는 호칭은 필요 없겠어요.”

“그래서 저랑 제 사병들은 그들을 ‘비첸크로이 무리’라고 부르곤 합니다.”

한편, 재건 중인 중앙교회 앞에는 세인트 교단의 신관들이 모여있다.

한 젊은 신관은 가문의 사람들을 곁눈질했다.

“타락한 승천자와 달란트 상회에 붙어있던 자들도 저들 사이에 섞여 있군요.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것 같습니다.”

“승천자와 상회가 그런 집단이었는지 그들도 몰랐겠죠.”

“정말 몰랐을까요? 승천자는 그렇다 쳐도 달란트 상회는 뒷골목에 본진을 두고 있는 암흑가 조직체가 아니었습니까. 저는 교단과 왕궁이 어째서 뒷골목을 방관하고 숨겨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자 나이 지긋한 신관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뒷골목은 필요악입니다. 어떤 국가에든 어두운 면은 있기 마련이고, 이왕 있을 어둠이라면 차라리 한 구역에 몰아넣어 통제함이 현명하죠.”

“그, 그래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상회 때에 비하면 황금달이 낫죠. 여기선 그런 말이 있잖아요.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다고.”

“베르자인이 더 낫다는 의견엔 동감합니다. 단지…. 근래에 그녀의 세력 확장이 너무 공격적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교단은 물론이고 저기 모인 가문의 인사들까지 포섭하여 양지로 손을 뻗고 있지 않습니까. 모순적이게도 한 구역에 몰아넣어 통제한다는 뒷골목의 존재 의의는 그녀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예. 이제 베르자인은 양지로 나온 인물이죠.”

“이해관계상 어쩔 수 없습니다. 가문에는 일손과 사적인 무력이 필요하고 교단과 왕궁에는…. 음지에 대한 통제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보다 저희에겐 그녀와 연결된 강령술사가 절실하다고 봅니다. 적어도 중앙교회 일대가 재건되고 다음 승천자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모두 포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강령술사는 베르자인이 아니면 소식을 접할 방도가 없는 건지요? 로이틀란크, 헤이틀란크 전 신관님들의 영령도 강령술사의 주술에 의존한다는 모양이고….”

“물의 마법사 파보크가 직접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저희로선 강령술사가 베르자인을 통해 전한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기도할 뿐이죠.”

“왕궁, 교단, 가문, 뒷골목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선 안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왕국의 백성으로서 힘을 합쳐 거악에 대항해야만 하는 시점입니다.”

“그래도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건 다들 동의하시지 않습니까. 뒷골목 출신의 베르자인, 근본이 사악한 힘을 다루는 강령술사, 박쥐처럼 옮겨 다니는 저 가문들도 그렇고요.”

“재밌는 말씀을 나누고 계시네요.”

그 어느 신관도 눈치채지 못했다.

베르자인이 가까이에 왔던 것이다. 주변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마구 섞여있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평상시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자객은 없다. 대신에 지금은 가문의 인사들이 그녀의 뒤를 꼬리처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황금달의 베르자인입니다.”

베르자인은 햇살처럼 웃으며 선뜻 손을 건넸다. 자기 앞에 있는 나이 많은 신관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관은 떨떠름한 얼굴로 불편하게 웃었다.

“렌달틀란크입니다. 반갑습니다. 베르자인 씨.”

“반가워요. 신관님.”

누가 봐도 두 사람의 악수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또한 렌달틀란크의 뒤에 있는 신관들과 베르자인의 뒤에 있는 가문 인사들의 시선 교환도 살갑지 못했다.

“비록 타락한 승천자가 날려버린 일대이긴 하지만, 그래도 중앙교회가 무너진 일에 저도 일부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베르자인 씨는 당시 그 현장에 안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저희 쪽 사람이 현장에서 타락한 승천자를 홀로 상대했으니까요. 황금달의 머리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죠.”

그녀가 ‘저희 쪽 사람’이라고 지칭한 자는 분명 강령술사를 일컫는 것이리라.

따라서 강령술사가 지닌 힘은 곧 베르자인의 힘과 같은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혹시 교단에 더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실까요? 정화수, 건축자재나 인력 같은 지원도 더 해드릴 수 있는데요.”

“하하. 베풀어주시려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교단은 이미 너무나도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남은 재건은 이대로 순조롭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겁니다.”

“성수의 원료가 되는 정화수는요?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하려면 성수도 충분히 비축되어야 할 것 같은데…. 성수는 교단에서만 만들 수 있는 신성한 물건이잖아요?”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결국 베르자인은 정화수를 줄 테니 어서 성수를 만들어 왕국에 풀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진의를 알아차린 일부 신관들은 불쾌감을 느꼈지만, 서둘러 성수의 보급량을 늘려야 하는 시점이라는 그녀의 뜻에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최근 각지의 작은 교회에서는 성수가 충분하지 않았고 신도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걸 아시나요?”

정곡을 찌르는, 다소 날이 선 발언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정곡을 찔렸기에 교단에서는 맞받아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대로 받아들여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

“압니다. …명확한 문제가 맞습니다. 승천자와 상회가 없어지면서 생긴 자리를 서둘러 채워야 예전처럼 백성들에게 충분한 성수를 공급할 수 있겠죠.”

“그럼 이쪽으로 납품할게요. 정화수.”

“…감사드립니다.”

교단은 베르자인에게서 대량의 정화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다가올 전쟁까지 생각하면 지금부터 열심히 성수를 비축해놔도 부족할 수 있다.

세상에 전쟁만큼이나 ‘악’이 만연하는 일이 없으며, 사람들이 전쟁만큼이나 ‘악’에 둔감해지는 일이 없다.

“성서나 마법서에 필요한 종이는요? 아주 고급스럽고 품질 좋은 것만 쓰잖아요. 중앙교회 일대가 다 날아갔으니 그런 것들도 다시 만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전쟁도 있고….”

“….”

부탁 한 마디면 들어줄 베르자인이다. 하지만 신관들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상태를 빠르게 읽어낸 베르자인은 스스로 숙여주었다.

“아, 여기 계신 분이 제지소(製紙所)를 다섯 곳이나 운영하시거든요.”

그녀는 자기 뒤에 붙은 부유한 차림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왕국을 위한 일인데 도와주실 거죠?”

“적자만 아니라면 도와드리겠소. 이익은 없어도 되오.”

“제지소 다섯 곳의 자금 문제는 황금달이 충당하죠.”

그러면서 또 하나의 문제를 말 몇 마디로 해결해버린 베르자인.

그녀가 다시 신관들을 돌아봤을 때, 그들은 저마다 보이지 않는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들로선 교단의 위신을 지키는 것보다, 왕국의 안정과 백성들의 삶이 훨씬 중요한 가치였기에.

그렇게 베르자인은 중앙교회 일대의 분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분지에서 올라와 뒷골목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의 곁으로 자객 한 명이 붙었다.

자객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두루마리를 그녀에게 넘겼다.

“오늘 구두로 나누신 모든 거래 관계의 기록물입니다.”

“수고했어.”

“그런데 베르자인 님. 비록 멀찍이서 지켜보긴 했지만 교단 측 젊은 신관들은 심기가 적잖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교단과도 상호 협력과 우호적 관계를 성립하시는 게 목적이 아니셨습니까?”

“그런 건 겉으로만 성립하는 거야.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밝은 쪽에 있는 사람들과 완벽한 신뢰를 가질 수 없거든.”

“베르자인 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에게 너무 과한 것을 베푼 게 아닌가 염려됩니다.”

“금전적 손해는 크지 않아. 내가 오늘 한 일이라곤 각 분야의 힘을 가진 가문들과 교단을 연결했을 뿐이지. 중간에서 교량 역할만 해도 얻을 수 있는 게 많아.”

그녀는 그러면서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가문과 교단까지 접수해야…. 왕궁까지도 닿을 수 있는 법이거든.”

왕궁.

그 단어가 자객에겐 벅찼다.

“저희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베르자인 님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단번에 비상하시다가 자칫 추락하진 않으실까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미안해.”

커다란 야망은 힘이 되지만, 스스로를 파멸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것이 두려워 멈추거나 망설이진 않을 것이다.

원래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때 아프다는 것도 감당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것을 감당할 용기가 없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면 안 됐다.

“…예? 어째서 사죄하시는….”

“내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발렌잔타르 가문.

사라진 가문을 일으켜 새 역사를 쓰고, 가문에 벌어진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주 많은 것들을 손에 넣어야 한다.

“……베르자인 님께서는 욕심이 많은 게 아니라 되찾을 것이 많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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