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보았기에 미쳤는가, 미쳤기에 보았는가 (4)
잠시만 되짚어보자. 방금 내가 죽은 것 같다.
「흑사병에 걸린 네 몸을 스스로 터뜨렸어.」
이곳은 광인의 숲, 셰르카의 저택 근처다.
셰르카는 내게 흑사병이라는 역병을 주입했다. 내가 그렇게 죽어서 부활하여도 셰르카는 금방 찾아올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부활한 직후에 셰르카가 날 노릴 수 없도록 그녀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혀야만 했다.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 내 몸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감염된 혈액이 그녀에게 한 방울이라도 튀도록 말이다.
그리고 내가 죽기 직전에 셰르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기가 만든 흑사병에 걸려서 죽었을까?」
‘그렇게 허술하진 않겠지.’
셰르카는 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자기 몸에 걸린 흑사병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아주 조금은 걸릴 것이다.
키이잉!
나는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다차원 능력을 발동했다.
* * *
도망치듯 잿빛세계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그 미친년 때문에 아까운 목숨 하나 날려먹었네.」
이제 남은 목숨은 네 개다. 다시 말해 앞으로 네 번 더 부활하면 그때부턴 리비카의 선물이 아니라 진짜 내 목숨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하나였던 내 목숨에 리비카의 선물로 아홉 목숨이 더해졌으니까.
‘헷갈리니까 네 번 부활할 수 있다고 계산하자.’
「셰르카는 어쩔 거야?」
그녀의 성장 배경, 160년 이상의 외로운 세월과 광인의 숲이라는 환경을 고려해보면 내게 그렇게 행동한 것이 얼핏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내가 더 강해진 다음에 만나야 할 상대야.’
「걔는 네가 제국으로 향할 거라는 걸 알잖아. 괜히 네가 짜고 있는 판에 끼어들어서 다 망치면 어떡해? 그 역병으로 900만 인구를 다 죽일 수 있다는 게 허풍이 아니면….」
‘그러진 않을 거야.’
「어떻게 확신해?」
‘그런 짓을 벌였다간 나의 영원한 적이 될 테니까. 본인도 그건 알고 있겠지.’
충동적이었던 셰르카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흑마법에 대한 능력이나 지식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현명함까지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면, 앞으로 그녀가 할 일은 불 보듯 뻔하다.
‘내 환심을 살 기회를 노릴 거다.’
「팔다리를 잘라서 세뇌하겠다는 말까지 했잖아.」
‘그러려고 무력을 휘둘렀는데 안 통했으니까.’
그리고 다음에 그녀를 만날 때, 그녀의 입장에서 내 목숨이 몇 개가 남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혹시라도 내 목숨이 하나만 남았을까 걱정하여 진심을 다해 싸우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내게 무력을 쓸 수 없다. 그러니 내 환심을 살 기회만 엿보리라. 그게 결론이다.
‘나는 그 정도로 강한 흑마법사와 싸우고 싶지 않아. 오히려 등을 맡길 수 있는 아군이 되고 싶지.’
그리고 이건 셰르카도 나를 보며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어떤 면에선 나보다 훨씬 더 간절하게 말이다.
* * *
나는 산양들을 몇 마리 소환해서 물건을 한 번에 옮겼다. 그 물건들이란 제국 정찰대의 보급품과 장비 따위였다.
“이렇게나 예리하고 고급스러운 창은 처음 봅니다!”
“아무렴. 강령술사님께서 가져온 물건인데.”
“우리의 낙원은 우리가 지킬 수 있도록 해야지. 언제까지고 강령술사님께만 의존하는 건 좋지 않다고 했어.”
“세인트교의 가르침이야?”
“신관님들의 가르침이지. 지금이야 항상 도움을 받는 입장이지만 정말 나중에는, 언젠가는 우리가 강령술사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고.”
“자, 자, 다 쉬었으면 움직입시다!”
세인트 왕국의 폐허에 있는 분지.
나름 모양새를 갖춘 민가들이 생겼다. 울타리에 가둔 산양들도 잘 키우고 있고 중앙교회는 유리창만 빼고 거의 다 재건되었다.
나는 두 배척자, 후계자와 함께 중앙교회에 앉았다.
“페인. 우리에겐 색유리로 만든 판유리가 필요하다.”
“알록달록한 그거?”
“그렇다. 그리고 다양한 물감. 십자가에 쓸 황금. 마법 등불에 쓸 마법석. 마법 등불을 장식할 보석이 필요하다.”
천장을 확인해보니 누군가 벌써 밑그림을 다 그려놨다. 역대 승천자들, 강림했던 천사들, 신관과 신도들의 그림이다. 다만 바로 전에 있던 타락한 승천자는 그림에서 쏙 빠져있다.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재건해야겠어? 어차피 천사가 잿빛세계에 강림할 수는 없잖아.”
“신성함을 위해 필요하다.”
후계자가 물었다.
“무지개 빛깔의 유리창, 황금 십자가나 화려한 마법 등불 같은 것이 신성함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요?”
거기에 내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이. 그건 그냥 사치스러울 뿐이잖아. 천사가 중앙교회를 휘황찬란하게 꾸며야 한다고 말이라도 한 적 있냐? 마음이 중요하지.”
가만히 듣고 있던 배척자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바로 그것이다.”
“뭐가?”
“마음. 그것이 중요하다.”
다음에 배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웠다.
“빛나는 황금 십자가. 화려한 색유리. 반짝이는 마법 등불. 거울처럼 깨끗한 바닥. 역사를 담은 천장 그림. 그 모든 것들이 마음을 만든다.”
“그 사치스러운 게 천사가 아니라 우리한테 필요하다는 말이야?”
“거울처럼 깨끗한 바닥. 누가 더럽히고 싶겠는가. 화려한 색유리. 멀리서도 보인다. 세인트교가 있다는 것을 항상 각인한다.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각인한다. 어디에서든 눈에 잘 띈다.”
“…그런 의도였구나.”
이물이 하는 말인데도 나로선 전혀 닿을 수가 없는 신앙심이자 깨달음이었다.
역시 신관은 신관이었다. 게다가 조각상으로 남겨진 역사적 인물이 전생이었으니 평범한 신관 그 이상이었다.
“또한 아름답다. 사람은 아름다운 것, 예쁜 것, 깨끗한 것, 조화로운 것을 보면. 지키고 싶어 한다. 물론 그런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원초적 본능. 모두가 갖고 있다. 일부는 성인이 되어서도 갖고 있으며 그것을 표출한다.”
“하지만 사람은 짐승이 아니다.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 사람이란 그렇다. 누구도 예외 없이 악을 품고 있지만. 대체로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 선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우리 세인트교는 사람을 그렇게 정의한다. 악을 가지고 태어나, 선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라고.”
다음은 내가 아니라 후계자에게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 낙원에서 죄악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걸 배척자는 계속 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지 못하여 악행으로 선을 죽이는 자가 있다면. 우리도 그런 자는 포용치 않고 불태워 죽인다. 세인트교. 죄인을 포함해 모든 자들을 사랑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다.”
“모순적인데.”
“현계의 이야기다. 현계에서 육체로 이웃을 해한다면 이웃도 사랑하는 우리로선. 문제가 되는 하나를 죽인다. 우리가 현계에서 감당할 수 없어 죽인 자. 하늘의 뜻에 맡긴다. 자비를 구하는 것도, 죄를 뉘우치는 것도, 징벌을 받는 것도 그자의 몫인 것이다.”
그렇게 덧붙이고는 처음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자연스레 돌아온 것이다.
“중앙교회의 화려함과 깨끗함. 선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선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 예쁜 것. 깨끗한 것. 주변과 조화로운 것. 따라서 지켜야 한다고. 또한 하늘은 어디에서든 지켜보고 있으며, 존재하며, 누구에게든 가르침을 주겠노라고. 이렇듯 시각적인 요소로 각인. 마음가짐을 유도하는 것이다.”
낙원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존에 사활을 걸어 언제나 서로 힘을 합쳤던 작은 집단이다. 그래서 죄인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랬던 낙원이 앞으로 계속 커지고, 배가 부른 이들이 유혹이나 갈등 따위에 휘말린다면 집단 구성원의 누군가가 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배척자는 이 자리를 이용해 죄에 대한 처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것이다.
「후계자도 알아들은 눈치네.」
또한 배척자는 중앙교회를 꾸미는데 쓸 사치품들이 필요하다고 내게 설명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나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어.”
“있는 그대로의 의미다.”
“필요하다는 건 오늘 당장 구해줄게.”
“그렇다면 중앙교회. 오늘 완공될 것이다.”
두 배척자는 그대로 중앙교회를 나가버렸다. 사람보다 몇 배의 힘을 쓰는 두 배척자의 노동력이 현장에 절실하니까.
그렇게 나는 후계자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토리우스를 찾았어요.”
그는 눈을 반짝였다.
“저, 정말 찾으셨습니까?! 그분은 지금 어디에…”
“죽었어요. 자기가 무덤을 파고 비석을 세워놨더군요. 흑마법의 지식과 유언을 지킬 흑기사도 하나 남겨놨었고요.”
“그토록 강인하신 분이 어째서….”
“수명이 다한 거죠.”
말년에 토리우스는 나이를 먹어서 힘이 다 빠진 흑마법사였겠지만 후계자의 기억에는 여전히 강인한 사람으로 남아있던 모양이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낙원 사람들을 거두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네요.”
여기서 다른 이야기를 더 꺼내봤자 후계자는 듣기 힘들 것이다. 이미 그는 슬픔에 차올라서 무슨 말을 꺼내기도 버거울 테니.
그래서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잠시 기다려주었다.
“제가 비록…. 지금은 거동하기도 힘겨운 나이가 되었지만, 이따금씩 그분이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면 소년이 되곤 합니다. 그 무엇도 토리우스 님을 해칠 수 없다고 믿었는데…. 세월은 매정하군요.”
후계자는 눈을 비볐다.
“어린 시절부터 믿고 따랐던 영웅이었지요. …그래서 강령술사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마음의 문을 열었던 걸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낙원 사람들도, 그 시절의 영웅을 회상하며 말입니다.”
그리고 내게 부탁하는 것이다.
“…강령술사님. 저는 그분의 주검이라도 낙원에 안치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영웅을 위해 그것만은 꼭 해야만 하겠습니다.”
토리우스는 이미 유골이 되었지만. 어쨌든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다.
그의 유골은 더 이상 검은 연기를 흘리지 않는다.
“거미 악귀한테 시켜서 이쪽으로 가져오도록 할게요.”
“감사드립니다….”
“사람들한테 소식을 전하는 건 후계자님께 맡길게요. 토리우스의 넋을 기리는 건 사람들을 모아 신관님들과 함께 하면 될 것 같고요.”
“강령술사님께 받은 것들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강령술사님도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토리우스만큼은 아닐 거예요. 저는 그냥 제 이득을 우선해서 움직일 뿐이죠. 선심도 여유가 있을 때나 베풀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놈입니다.”
후계자는 진지하게 내 손을 잡았다.
“아무리 무섭고 잔인한 사람일지라도, 얼마나 사악한 힘을 휘두르는 사람일지라도,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힌 사람일지라도, 그런 건 중요치 않습니다.”
“그런가요?”
“제겐…. 사람들에겐 언제나 영웅이 필요한 법입니다.”
영웅.
내겐 그런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어딘가의 진짜 영웅이 나를 본다면 분노할 것이다.
“저는 영웅이 될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정의 같은 건 관심도 없거든요. 제가 지난날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지 후계자님은 모르시잖아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영웅은 자칭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가 내뱉는 말을 곱씹었다.
“강령술사님께서는 자의와 상관없이 영웅이 되셨습니다. 저희를 배불리 먹여주신 바로 그날부터 말이지요.”
* * *
나는 실재세계에 있는 황금달의 본진으로 왔다.
키이잉!
쓸데없이 고급스러운 화장실에서 능력 발동을 마치고 복도로 나왔다.
“엇…!”
마침 앞에 있던 자객이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령술사님…?”
“베르자인은?”
“아, 예. 교단과 약속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시간이니…. 어…. 저쪽 귀빈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내가 여기에 왔다는 건 너희랑 베르자인만 알고 있어.”
“비밀유지에 대한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타다닷!
다차원 능력이 발동되는 소리를 아래층에서도 들은 모양이다. 복도 중앙쯤에 있는 계단에서 다른 자객들이 연달아 뛰어올라온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자객은 서둘러 안내했다.
“이쪽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어이! 지금 당장 베르자인님께 알려. 강령술사님께서 비밀리에 찾으신다고.”
나는 자객을 따라서 귀빈실에 들어왔다.
황금달의 자본력이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것이 체감되는 공간이다.
횃불이나 양초 대신 마법석으로 된 조명이 벽에 걸려있고, 예전과 달리 창문의 커튼은 당당하게 활짝 열어놔 햇빛을 받아들이고 있다.
긴 책상에 서로를 마주하게 배치된 의자들은 황금달을 상징하듯 적갈색 비단에 황금색 십자수로 치장되어 있어 사치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마실 것이라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과일 같은 거 있어?”
목구멍이 간지럽다. 아무리 방독면으로 정화된 것이라도 잿빛세계의 공기는 오래 마시고 있으면 병드는 느낌이다.
“그러시면 과일과 과즙 음료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거 좋네. 부탁할게.”
자객이 물러가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하녀 같은 자가 접시에 과일과 음료를 담아왔다.
그리고 20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방독면을 벗은 채 목구멍을 적시고 있는데 귀빈실의 문이 열렸다.
내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들어올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녀뿐이다.
“페인! 돌아왔구나!”
베르자인은 반가움이 앞서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그녀와 포옹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객들을 배경처럼 세운 채 각자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중앙교회 재건 알려줬고, 가문들 알려줬고, 교단에 대해서도 알려줬고….”
“교단과 일반 백성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반신반의하고 있어. 강령술사 덕분에 세인트교의 심각한 타락을 정화할 수 있었다는 목소리가 있지. 반대로 너 때문에 왕국이 전쟁을 앞두게 되었다는 목소리도 있고. 그래도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야.”
“타락한 승천자보다는 전쟁이 더 큰 공포일 텐데 대체로 우호적이라고?”
“네가 도와줄 거라는 이야기도 함께 퍼졌거든. 외부 출신의 인물이 타락한 승천자를 처단하고, 전 신관들의 조각상과 함께 움직이고, 제국과의 전쟁까지 도와준다고 하니까 뭐 어쩌겠어. 너한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지. 눈치가 있는데.”
그녀는 귀걸이에 손을 댔다.
“…네가 요청한 물건들 1층에 준비됐어. 8색 물감, 금판, 마법석, 보석. 맞지? 중앙교회에 있는 거랑 최대한 비슷한 걸로.”
“얼마야?”
베르자인은 손바닥을 보이며 거절했다.
“너한텐 돈 안 받아.”
“받아. 빚지기 싫으니까.”
“안 받아. 빚지기 싫으니까.”
그러면서 해바라기처럼 웃는 베르자인이다. 얼핏 말장난 같은 소리였지만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깊었다.
“…너, 제국의 영토까진 진입했어?”
“오늘 중으로 광인의 숲을 빠져나갈 거야. 그러면 제국의 영토겠지.”
“그 숲에 진짜로 광인이나 악령들이 있는 거야? 실제로 가본 사람한테 경험담이나 들어보자.”
그녀 뒤에 있는 자객들도 호기심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광인도 있고 악령도 있고. 악령에 씐 광인도 있고. 막상 그놈들 사이에선 도적, 악령, 광신도 등으로 또 분류하더라고.”
“네가 만난 놈들은 뭐였는데?”
셰르카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말자.
“도적 네 명이었어. 미친놈들이었으니까 그것도 광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너한테 도적 네 명이면 뼈도 못 추렸겠네. 아, 아닌가? 광인의 숲에서 살아남을 정도라면 생각보다 강한 놈들이었으려나?”
“그중에 제국의 해결사 출신도 있던 것 같아. 망치를 엄청난 속도로 휘두르는 놈이었는데 이름이…”
「볼터.」
“볼터라고 했어.”
“볼터?”
베르자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객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자객들도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그게 누구야?”
“엄청난 근육질의 덩치였어. 웬만큼 훈련된 중보병보다 빠르게 망치를 휘둘렀지. 나도 집중 안 하고 있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으니까.”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네. 걘 얼마나 강했는데?”
“1 합에 끝났지.”
“에라이!”
베르자인이 가볍게 책상을 내려치자 그녀 앞에 있던 음료가 그녀의 무릎으로 쏟아졌다.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 웃지 마!”
자객들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희들도 웃지 말라고!”
항상 완벽해 보이던 사람이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는 씩씩대는 모습이 더 웃기다. 웃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자객들도 웃기고. 그냥 이제는 웃음이 웃음을 낳는 상황이다.
“손수건이나 가져와 빨리!”
나는 그렇게 웃으면서 한편으론 생각했다.
지금처럼 웃기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어두자고.
「충분히 쉬었지?」
‘…과분할 정도로.’
「영력 다 찼어.」
「이제 다차원 능력 써도 돼.」
나는 셰르카의 저택으로 갈 것이다.
실재세계가 아니라 잿빛세계에 있는 저택으로.
잿빛세계의 그곳이라면 얼마나 끔찍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을까.
당장은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