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역모 (1)
3층에도 많은 이물들이 있었지만 녀석들은 내 존재감을 느끼고 금방 달아나버렸다. 또한 지하에 있던 소수의 이물들도 사라졌다.
내가 영력 발산을 발동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도망친 것이다. 확실히 이 저택에 있는 이물들은 내가 지금껏 마주해왔던 놈들과 다른 것 같다. 다들 형태가 이상하고 눈치가 빠르다.
그리하여 나는 3층에 유일하게 남은 이물을 찾아오게 되었다.
그림들이 전시된 넓은 방이었다.
「이 가구들을 뭐라고 하더라?」
‘이젤.’
그림을 받쳐서 전시할 수 있는 이젤들이 가지런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젤에 놓인 것들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백지였는데, 그중에 하나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녀석이야.」
밝은 태양 아래, 풀밭 위에 놓인 네잎클로버 그림이다.
이것도 주물이 아니라 이물이었다.
‘이 저택 분위기와는 너무 안 맞는데.’
이질적일 정도로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밝은 태양, 싱그러운 풀밭과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클로버가 웬 말인가.
심지어 이곳은 잿빛세계다. 이 세계에 밝은 태양이 보내오는 햇볕이란 찾기 어렵고 풀밭은 있지도 않다.
「핏덩이를 위한 동화.」
「515.」
‘다른 건?’
「파악할 수 없어. 안에 숨겨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차원의 벽에 가로막힌 것 같아.」
‘차원…. 핏덩이를 위한 동화….’
핏덩이란 갓난아기를 뜻하는 게 아닌가. 그 나이대의 아기는 아이와 달리 동화라는 것을 이해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핏덩이를 위한 동화라니.
이 녀석이 어떤 능력을 감추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런 형태의 이물은 이해조차 하기 어렵다.
「찢어버릴까?」
불태우는 게 좋겠다. 어쨌든 불에 잘 타는 재질이니까.
일단 불을 붙이고 녀석의 반응을 봐야겠다.
‘방사.’
나는 그림에 화염을 쏘았다.
그러자 머릿속에 동화를 읽어주는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 것이다.
* * *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공원에 작은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의 이름은 네잎클로버.
네잎클로버의 친구들은 모두 잎이 세 장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네잎클로버는 모두가 특별하게 여겼어요.
네잎클로버는 해님의 따사로운 은혜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요. 하늘은 높았고 구름은 살랑거렸으며 친구들은 네잎클로버의 특별함을 부러워했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커다란 동물이 네잎클로버의 친구들을 밟으며 공원을 지나다녔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겨우 그런 것으로는 네잎클로버도, 세잎클로버 친구들도 다치지 않으니까요.
혹여라도 저 동물이 세잎클로버 친구들을 뜯어먹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다행히 그 동물은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요.
또 어느 날이었어요.
어제 보았던 동물이 다시 공원을 방문한 것이죠. 이번엔 땅을 유심히 살펴보며 앞발로 세잎클로버 친구들을 건드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세잎클로버 친구들은 무서웠어요. 그러나 별일은 없었어요. 동물은 세잎클로버 친구들의 여린 잎사귀를 건드리고는 돌아갈 뿐이었죠.
비가 내렸어요. 벌써 하루가 지난 걸까요?
시원한 빗방울이 공원 친구들을 깨끗하게 씻겨줬어요. 덕분에 네잎클로버의 몸도 깨끗하게 됐어요.
작은 물방울 하나가 네잎클로버의 보드라운 잎에 올라탔어요. 그러면서 네잎클로버를 빤히 쳐다봤죠.
“뭘 보니?”
“넌 정말 이상하게 생겼구나!”
“이상하다고?”
네잎클로버는 보드라운 잎을 작게 떨면서 물방울 친구에게 화를 냈어요.
“나는 특별한 거야!”
“아니야. 너는 이상해.”
따뜻한 느낌이에요.
아! 해님이 떠올랐네요. 공원은 밝고 따뜻해졌어요. 세잎클로버 친구들 위에 올라탄 물방울들은 반짝였죠. 모두가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그런데 네잎클로버와 물방울 친구는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아요.
“넌 왜 이렇게 이상하게 생긴 거야?”
“시끄러워!”
그리고 밤새 생겼던 새벽의 이슬 친구들까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날 아침의 해님이 물방울 친구들과 이슬 친구들을 지워주었어요.
이번에도 동물이 찾아왔어요. 자꾸만 공원을 돌아다니며 땅을 두리번거려요.
네잎클로버는 동물 친구에게 말했어요.
“내가 도와줄까? 뭐라도 찾고 있니?”
그러나 네잎클로버는 너무나 작아서 동물 친구에게까지 목소리가 닿지 않았어요.
다음 날, 일개미가 네잎클로버의 줄기에 더듬이를 문질렀어요.
“우리 여왕님이 그러셨는데 너는 행운의 상징이래!”
“고마워! 여왕님께도 고맙다고 전해줘!”
네잎클로버는 기뻐했어요.
곧이어 덩치 큰 병정개미가 왔어요. 병정개미는 네잎클로버의 줄기에 씩씩하게 올라왔어요.
“전쟁! 우리는 전쟁을 한다! 전쟁! 전쟁!”
“그런데 왜 나한테 왔어?”
“너는 행운의 상징이다! 우리 용맹한 전사들은 다가올 전투에 승리할 것이다! 전쟁! 전쟁!”
“꼭 이기길 응원할게!”
개미 친구들은 네잎클로버의 응원을 받고 씩씩하게 떠나갔어요. 꼭 이겨서 여왕님께 칭찬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다음 날, 나비가 사뿐히 앉았어요.
“찾았다!”
“나는 꽃이 없는데?”
“너는 꽃과 꿀보다 좋은 걸 가지고 있잖아!”
“정말?”
“난 지금부터 예쁜 나비를 찾으러 갈 거야! 그리고 예쁜 애벌레를 낳고 싶어! 너의 행운이 필요해!”
“좋은 짝을 만나길 응원할게!”
“고마워!”
나비는 네잎클로버의 보드라운 잎을 다리로 만졌어요. 그리고 힘차게 하늘을 날아갔죠. 꼭 예쁜 날개를 가진 짝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 뒤로도 다양한 동물 친구들이 찾아왔답니다.
두더지, 파리, 메뚜기, 개구리, 참새가 네잎클로버를 찾아내곤 기뻐했어요. 저마다 행운을 받았다면서 네잎클로버에게 고맙다고 인사했죠.
그리고 네잎클로버는 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친구가 되었어요.
비가 내려요.
이번에도 네잎클로버의 보드라운 잎에 물방울이 내려앉았어요.
네잎클로버의 잎은 저번보다 넓어졌고, 잎에 사뿐히 내려앉은 물방울 친구도 왠지 커진 것 같아요.
“아 뭐야! 또 이렇게 이상하게 생긴 클로버에 앉게 되다니!”
“이제 네가 뭐라고 말하든 관심 없어!”
“다른 클로버들은 잎이 세 장인데 넌 네 장이잖아! 이상해!”
“맘대로 생각해! 너한텐 행운을 나누어주지 않을 거야!”
“흥! 나도 관심 없어!”
화가 난 물방울 친구는 스스로 데굴데굴 떨어져서 흙 속으로 사라졌어요.
“바보!”
물방울 친구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네잎클로버는 누가 뭐라고 해도 행운의 상징이 맞으니까요! 공원에 있는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새벽이 되었어요.
네잎클로버는 잠을 자다가 깨버렸어요. 어느 부드러운 동물 친구가 줄기에 매달렸기 때문이죠.
네잎클로버는 물었어요.
“너는 누구니?”
부드러운 동물 친구는 속삭였어요.
“나는 달팽이야.”
달팽이 친구는 부드러운 몸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단단한 집을 가지고 있었어요. 정말 멋진 친구죠?
“반가워! 달팽이야!”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정말? 모든 걸 알고 있어?”
“맞아. 나는 공원에서 가장 느리지만 가장 똑똑하단다.”
“그럼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든지 물어봐. 대신 오늘 새벽에 너의 풍성한 잎사귀 밑에서 자고 싶은 걸?”
“얼마든지! 나는 잎이 네 장이나 있다고!”
네잎클로버는 똑똑한 달팽이 친구에게 최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어요.
가끔 공원에 찾아와 땅을 보며 서성이는, 키가 큰 동물 친구의 이야기였죠.
똑똑한 달팽이 친구는 네잎클로버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어요.
그리고 속삭였어요.
“네잎클로버야.”
“응!”
“그 두 발 달린 커다란 동물이 찾고 있는 건 네가 맞아.”
“그 친구는 발이 네 개였어.”
“곰보다 날씬했다면서?”
“응!”
“그럼 그 동물의 위쪽에 있는 발은 ‘손’이라고 부르는 거야.”
“혹시 내 행운이 공원 밖으로도 퍼진 걸까?”
“네잎클로버야. 너에게 한 가지 알려줘야겠어.”
“응!”
“놀라지 말고 들어.”
“알았어!”
네잎클로버는 빙긋 웃었어요.
“넌 행운의 상징이 아니야.”
“오히려 불운의 상징이지.”
달팽이의 말에 네잎클로버는 몹시 화가 났어요.
“거짓말! 너도 나를 질투하는 거구나?!”
“그런 게 아니야.”
“달팽이는 거짓말쟁이라고 소문낼 거야!”
“네잎클로버야. 나는 공원에 있는 모든 친구들을 좋아해. 정말로 널 위해서 말하는 거야.”
달팽이 친구는 네잎클로버의 꼭대기로 올라와서 긴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그러면서 혹여나 주변에 있는 세잎클로버 친구들이 깰까, 아주 작게 속삭였어요.
“다음부터 그 두 발 동물이 나타나거든 그림자에 숨어. 너에게 그 동물은 위험해.”
“하지만 나는 행운의 상징인데?”
“아니. 너는 불운하게 태어난 돌연변이야. 몸소 깨닫고 싶지 않다면 평생 숨어 살도록 해.”
“평생 그림자에 숨어서 살아가라고? 그건 싫어!”
해님의 따스함을 느낄 수 없는 그림자에 숨으라니. 그런 건 절대로 싫었어요.
“떨어져! 거짓말쟁이랑은 친구 안 할 거야!”
네잎클로버는 몸을 흔들어 거짓말쟁이 달팽이를 내쫓았어요. 그리곤 혼자서 새벽을 보냈어요.
아침이 되었어요. 오늘도 다리가 둘 달린 동물이 공원에 나타났어요.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동물은 이전에 봤던 동물보다 키가 꽤 작았죠.
어쩌면 저 키 작은 동물에게 네잎클로버의 목소리가 닿을지도 몰라요!
“나 여기 있어! 여기야! 여기!”
그러나 문득, 네잎클로버는 새벽에 만났던 달팽이의 말이 떠올랐어요.
자기도 모르게 그림자 속에 숨고 말았죠.
하지만 키가 작은 동물 친구는 네잎클로버를 금방 찾아냈어요.
“엄마! 찾았어!”
작은 동물 친구는 큰 동물 친구에게 말했어요.
“어머, 어디에 있니?”
“여기, 여기! 네잎클로버! 헤헤.”
이게 무슨 일일까요! 키 작은 동물 친구는 네잎클로버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었어요!
그래서 네잎클로버는 더는 무섭지 않았어요.
달팽이가 거짓말을 한 것이죠. 불행과 고통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요. 저 키 작고 귀여운 동물이 네잎클로버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나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안녕! 나는 네잎클로버야!”
“와아아! 엄마! 네잎클로버가 말했어!”
“그러니? 뭐라고 말하든?”
“자기 이름이 네잎클로버래!”
“정말 네잎클로버구나! 대단하네 우리 딸!”
두 동물 친구들도 기뻐했고 네잎클로버도 기뻐했어요. 이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동물 친구들에게 행운을 나눠줄 차례에요.
네잎클로버는 기쁜 마음으로 키 작은 동물 친구에게 말했어요.
“날 찾은 걸 축하해! 내가 행운을 나눠줄게!”
“가져갈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작은 동물 친구가 네잎클로버의 여린 몸을 덥석 손에 쥔 것이에요.
“아야! 아파! 이러지 마!”
“예쁘다!”
툭. 하고. 네잎클로버의 몸이.
뿌리는 땅속에 남긴 채. 간단하게.
몸만.
그대로 위로 하늘로 상공으로 높게 높게 해님에게 가까이 그러나 뿌리는 땅속에 남겨둔 채 뿌리의 감각이 상실되고 계속 높게 높게 두려울 정도로 커다란 살덩이에 쥐어진 채 높게 올랐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거 봐! 엄마!”
“무슨 짓이야! 내려놔! 내 뿌리! 뿌리가 없어…! 으아아아아아!!!”
“진짜 네잎클로버야!”
“그러게????클로버??대단????”
“하지 마! 내려줘! 내려줘어어어!!!!!”
“이거????자랑???”
“살려줘???몸이???몸이???몸이 잘렸??????”
“??????????”
시간이 흘렀습니다.
네잎클로버는 희미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나무에서 나는 냄새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밤보다 어둡습니다.
온몸이 눌려있고 뿌리에 감각이 없습니다.
정말 불행히도 네잎클로버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긴 어디지…? 어두워….”
하늘이 열렸다.
해가 없다.
있는 것은 해도, 달도, 별도 아닌 이상하게 생긴 불빛뿐이었다.
“네잎클로버야! 또 말할 수 있지?”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서 날 풀어줘! 날 공원으로 돌려보내줘…!”
“말을 안 하네….”
“건조해…! 목말라…! 추워…! 해님에게 데려다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칫.”
동물은 네잎클로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녀석의 탐욕적인 시선이 네잎클로버의 여린 몸을 훑었다.
괴물이다.
괴물의 얼굴이다.
다시 보니 징그럽게 생겼다.
동그란 눈. 작은 코. 조금 남아있는 젖살. 보드라운 피부. 말 그대로 괴물이다. 그런 괴물의 형상을 하고선 순수한 척 연기하는 악마 같은 녀석이었다.
녀석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부족해 전부 빼앗고,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생명체였다.
“갈색으로 변했어…. 물도 줬는데 왜지?”
괴물은 네잎클로버를 내려주지 않는다. 절대 풀어주지도 않는다. 그저 네잎클로버의 최후를 감상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지금 네잎클로버에겐 뿌리조차 없다. 풀려난다고 해도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이곳엔 해도 달도 없다. 딱딱한 천장만이 있을 뿐이다. 온몸이 건조하다. 죽음이 임박함을 느낀다.
“괴물…! 죽어버려…! 너 같은 괴물…! 진짜 싫어…! 저주할 거야…! 해님에게 벌을 받을 거라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죽어…! 죽어버려…! 저주한다…! 내가 반드시 저주할 테다…! 내가…!”
작은 괴물은 네잎클로버를 다시 나무 냄새가 나는 이상한 물건에 끼웠다.
나무 냄새가 나는 벽이 네잎클로버의 몸을 짓눌렀다. 세상이 다시금 까맣게 변했다.
그렇게 네잎클로버의 보잘것없는 생명이 책 속에 박제되었다.
* * *
혼란스럽다.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가서 다른 존재로 살다가 죽음을 경험한 것 같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내가 나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 방금 녀석의 안에 들어갔다 나왔어.」
「우산에 피아노에, 이번엔 그림이냐….」
그림의 형상을 한 이물이 스스로 빛을 내며 희미하게 변하고 있다.
‘불을 붙였는데 왜 빛나고 있지?’
「성불시킨 거야.」
‘내가 뭘 했다고?’
「그냥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성불의 조건이었나 본데?」
내 영혼에 515의 악이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불타서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이물이 내게 무언가를 남겨주었다.
파스스….
나는 잿더미 안에서 주물을 꺼냈다.
철사로 만들어진 네잎클로버였다.
「돌연변이의 상징. …페인을 위한…?」
‘나를 위한 주물이라고?’
「맞춤형이야. 이걸 몸에 지니고 있으면 영력을 소모하여 기존의 악귀를 다른 악귀로 변이시킬 수 있어. 네가 알고 있는 다른 악귀로 말이지.」
이렇게 장식품의 형태를 하고 있는 주물은 값어치가 높다. 하지만 나를 위해 남겨준 선물이라는 듯하고 그 주술적 효과도 정확히 내게 맞춘 것이었다.
이러면 베르자인에게 파는 것보단 내가 쓰는 것이 옳다.
「예를 들어 거미 악귀 한 마리를 불나방 한 마리로 변이시킬 수 있는 거야.」
나는 바로 이런 주물이 손에 들어올 것을 예상하여 그동안 목걸이를 차고 다닌 것이다.
‘재결합.’
아무런 효과가 없는 목걸이에 돌연변이의 상징을 합쳤다.
「대신 언어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춘 이물은 변이시킬 수 없어. 자아가 바뀌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생기거든.」
그런 생각이 든다.
매일 조금씩 영력을 소모해서 거미 악귀를 꾸준히 불나방으로 만든다면. 그렇게 불나방의 숫자를 엄청나게 불린다면….
언젠가는 나 혼자서 나라와 전쟁을 벌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승천자처럼 개인의 힘이 군대에 필적하는 게 아니라, 일개 국가의 군사력에 필적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 정도 힘을 가진 개인이라면 천사나 악마밖에 없지.」
‘그래. 지금은….’
「아무튼 이렇게 이물은 다 해치웠고. 여기서 주물이나 좀 챙겨다가 쓸 건 쓰고 팔 건 팔면 되겠어.」
그다음엔 마침내 제국이다.
「근데 제국에 가서 구체적으로 뭘 어쩌려고?」
넓디넓은 영토와 강대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비첸크로이 제국.
그 모든 영토와 군사들을 다스리는 군주.
‘나는 그곳의 황제부터 노릴 거야.’
이후 나는 잿빛세계의 셰르카의 저택에서 주물을 모았다. 그리고 모은 주물은 실재세계로 가서 의뢰소를 통해 황금달에 팔아치웠다.
그러면서 황금달의 제법 높은 직위에 있는 상인을 통해 왕국의 사정을 들었는데, 다가오는 제국과의 전쟁에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 왕궁, 교단, 가문들 사이에서는 여러 번이나 의견이 갈렸습니다.
대체로 왕궁 측에서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춘 비첸크로이 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그들의 산하로 들어가 제후국이 되자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교단에서는 주변국에 대한 수탈과 정복활동을 일삼는 제국을 이번 기회에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가문들은 처음엔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나 ‘누군가’의 입김을 맞아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제국과의 전쟁을 피하지 말자는 방향으로 말을 맞추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시국에서 가문들에 입김을 넣을 수 있는 ‘누군가’는 베르자인밖에 없을 것이다.
- 우리의 전하께서는 전쟁을 피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하달하셨습니다.
내 나름 추측을 해보자면 왕은 제국의 오랜 패악질에 질려버린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 가문들의 발언력이 강해지기도 했고, 승천자는 없지만 강력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강령술사’를 열심히 포섭하고 있다는 교단의 말을 무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왕궁은 대체로 반대하지만 교단과 가문들은 찬성한다. 그리고 내심 왕 본인도 제국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리하여 세인트 왕국과 비첸크로이 제국 사이의 전쟁이 임박한 것이다.
‘전쟁.’
그 단어가 아직도 와닿진 않는다. 현재 왕의 세대도 그게 어떤 일인지 직접 겪어보지 못하였고 나 또한 비슷한 세대로서 전쟁을 잘 모른다.
세대마다 승천자가 있던 왕국은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할 필요가 없는, 굉장히 안정된 종교적 국가였으니.
‘전쟁…….’
나는 다가오는 전쟁 속에 할 일이 많다.
지금까지 그랬듯 어떻게든 이겨낼 것이다.
그래야 승천자를 죽임으로써 시작된 기나긴 폭풍이 비로소 끝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