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53화 (53/181)

10. 역모 (3)

업무를 보고 있던 변경백에게 근위대장이 찾아와 보고했다.

“의술사 나쿠타서스가 빌츠 남작령에서 강력한 방혈술을 써 적진을 돌파, 남작의 사병 800과 천인대장을 쓰러뜨리고 4000의 사병들을 포섭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병들은 도주했습니다.”

“백인대장의 피해는 어떻다고 하는가?”

“전무했습니다.”

“허면 80의 병사로 4000의 병사들을 포섭하였다고…? 지금 나만 이해가 되질 않는 건가?”

“저도 그러한 숫자가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만, 천인대장이 나쿠타서스에게 자비를 구걸하였고 적병들은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공포를 느껴 전의를 상실했다는 게 이유라고 합니다.”

“믿을 수가 없구나. 아무리 그래도….”

개인이 군대를 압도한다는 것은 제국의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만한 머릿수가 남아있음에도 제 주인인 남작에게 칼을 겨누다니. 긍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들이군. 그렇다 친다면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었다는 소리가 얼핏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비상식적인 승전보다.

또한 그것은 변경백의 예상과 크게 다른 결과였다.

“나쿠타서스를 적진에 앞세워버리고 그자가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버리라고 하였거늘. 나는 분명 백인대장에게 그리하라고 따로 일러두었다네.”

“저도 나쿠타서스가 최대한의 피해를 입힌 후 백인대장과 병사들만이 간신히 돌아오리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자 한 명의 방혈술이 군대를 파괴하리라곤….”

“위험할 정도로 쓰임새가 있는 놈이었군.”

“그자를 신뢰하십니까?”

“그럴 리가.”

변경백은 보고 있던 문서들을 말아서 한쪽에 쌓았다.

“이대로 빌츠 남작령이 함락된다면 다음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가 나쿠타서스에게 말했던 거짓말이 진실이 될 뿐이겠지. 남작의 인장을 탈취하고 명령서를 위조하여 그의 4만 병사들을 내 것으로 흡수하는 것이네.”

“그리하시면…”

근위대장은 빠르게 덧셈을 하였다. 하지만 변경백의 계산이 더 빨랐다.

“나의 군사는 5만에 4만을 더하여 9만이 된다. 그리고 서쪽, 북쪽, 동쪽에 있는 변경백들까지 합세하기로 약조했으니…. 우리는 그들의 20만 군사에 9만 군사를 더하여 최소 29만의 대군으로 황제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지. 거기에 신묘한 힘을 지닌 나쿠타서스까지 있고, 황제는 오랜 눈엣가시였던 세인트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백만의 대군을 보내게 될 것이네.”

“방벽이 둘러싸고 있는 수도를 15만 이상의 훈련된 친위대가 수호할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라면 군대의 힘을 가진 개인을 수중에 감추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숫자가 친위대보다 두 배는 많네.”

반란이라는 것은 확신이 있을 때나 시도하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 변경백이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근위대장은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각하. 수도에 있는 황제는….”

“물론, 지략가인 황제는 이 시기에 내란의 위협도 상정하여 대비하고 있겠지. 하지만 언제 황제가 대비하지 않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황제는 어차피 모든 일에 대비하는 인물이니 그런 것들까지 신경 썼다간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질 뿐이라네.”

“…예. 이해했습니다.”

“황제의 친위대와 정직하게 싸워서 모조리 해치운다는 생각은 지워버리게. 이번에 80의 숫자로 6000이라는 숫자를 극복해낸 것처럼, 몸이 아닌 마음부터 무너뜨리면 인간인 이상 항복하거나 포섭될 수밖에 없는 법이네. 반드시 죽여야만 이기는 게 싸움이 아니야. 게다가 이번엔 우리의 숫자가 두 배는 많지.”

절대 무모한 반란이 아니었다. 나쿠타서스까지 있어서 더욱 확신이 생긴다.

아무리 황제라도 이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본래 계획에 나쿠타서스까지 더하여, 적들의 몸이 아닌 마음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전술을 구축해보겠습니다.”

* * *

나는 잿빛세계의 오두막 근처에서 불나방과 거미 악귀들을 만들고 있다.

이건 클로버가 남긴 ‘돌연변이의 상징’이라는 주물을 목걸이에 합친 후부터 시작한 일이다. 전투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악귀들을 거미 악귀나 불나방으로 변이시키는 것이다.

“그그그극…!”

오늘도 악명 모를 악귀가 거미 악귀로 뒤바뀐다. 사람처럼 팔다리를 갖고 있던 녀석의 몸속에서 뼈가 자리를 바꾸는 소리가 났다.

뚜드득! 뚜둑!

녀석은 바닥에 엎드린 채 피를 토해냈다. 다리가 개구리처럼 좌우로 벌어지더니 직각으로 땅을 짚었다. 옆구리에 있던 갈비뼈 두 쌍이 양쪽으로 살갗을 찢고 나와서 직각으로 꺾여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두 쌍의 갈비뼈를 따라 혈관이나 근육 따위가 넝쿨처럼 엉키며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냈다.

“끄으으어어어거거걱…!”

갈비뼈가 빠지면서 바닥에 쏟아진 폐는 하복부를 따라 이동하여 항문에 붙었다. 녀석의 엉덩이는 끊임없이 부풀어서 폐를 삼켜버렸고 몸 전체의 피부가 거미 악귀처럼 까맣고 단단하게 변하였다.

“끄으으…! 크그그으…!”

우지직!!!

녀석의 턱이 가로로 비틀어졌다. 그리고 계속 벌어졌다. 치아가 전부 빠져버리고 턱뼈 자체가 거미 악귀의 턱이 되어서 자리를 찾아갔다. 얼굴 가죽이 팽창하면서 피부가 찢어졌고 그 찢어진 틈새로 새로운 붉은 눈들이 자라나 16개의 눈알을 이루었다.

엉덩이는 이미 거미 악귀의 배처럼 도톰하게 변하였고 가슴 부분도 거미 악귀의 가슴처럼 모양이 변하였다. 머리털은 하얗게 새더니 점차 끈적하게 변해서 피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크그그기긱…!”

아라나크의 거미 군단은 잿빛세계에 있는 광인의 숲에서 온갖 이물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악귀로 만들었다.

그중에 먹고 남은 이물들을 악귀로 만들어 내게 보내고, 나는 그런 악귀들을 매일같이 이렇게 변이시키고 있다.

그러다보면 금방 해가 저물고 떠올랐다.

「영력 다 썼어.」

요즘엔 거미 악귀와 불나방을 만드느라 영력이 찰 때마다 소모하고 있다.

“후우….”

나는 오두막의 마당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숲속에서 아라나크가 내게 다가왔다.

“존재감이 옅은 악귀들을 너에게 보냈는데, 정보는 수집하였느냐?”

“군사의 실제 움직임을 중점적으로 살펴봤어. 아무래도 귀로 전해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정확할 테니까.”

“어떤가? 돌파구가 보이더냐?”

요즘에 아라나크는 매우 의욕적이다. 더는 날 죽이려 하지도 않는다.

“동서남북. 사방위의 변경백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같아. 그중에 남쪽에 있던 놈들은 바로 옆에 있던 속국을 공격해서 황제 몰래 군사를 모으려는 것 같고. 아마 제국이 선전포고 후 군대를 세인트 왕국으로 보냈을 때 그들은 내부에서 수도를 기습하겠지.”

“꽤나 구체적이구나. 그럼 너는 변경백들의 반란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보느냐?”

“나는 황제의 지략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수도의 군사력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모르고. 그래도 역대 최대의 정복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 황제라면 이 시기에 내란 정도는 대비하고 있겠지. 제국에선 외부든 내부든 싸움이 흔한 일이잖아.”

“변경백들의 반란이 성공하면 황제가 바뀌고 전쟁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들의 반란이 실패한다면, 수도의 전력이 조금 약화되는 정도로 끝나는 일이 되겠구나.”

“아라나크. 넌 변경백들의 반란이 성공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묻자 아라나크는 곧잘 대답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당혹감 섞인 반응까지 엿보이는 것 같다.

이럴 줄 알았다. 이럴 거라고 믿었다.

결국 아라나크도 성녀였던 시절의 인간성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인간 혐오와 복수에 미친년인 줄 알았는데…. 진짜 신기해. 네 말이 맞았다니.」

“아라나크?”

“잘 모르겠구나. 나는.”

“왜? 언제는 제국의 멸망을 바란다면서.”

“반란이 성공하면 그것도 제국의 멸망인가?”

되돌아오는 질문에는 나도 곧잘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만약 제국이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내부적으로 교체를 성공한다면…. 모르겠구나. 나는 그저 제국의 인간들이 피를 보고 제국의 지도층이 모조리 죽어서, 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멸망하기를 원했단 말이다. 그런데 만약 반란이 성공한다면….”

“모르겠네.”

“그렇다. ……모르겠다.”

“그럼 반란이 성공했을 때 생각하자. 어차피 실패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잖아.”

“그게 맞는 것 같구나. 우선은 지켜보는 것이 옳다.”

말로는 그렇게 하겠다며 결정한 것 같지만, 아라나크의 미묘한 표정을 보니 여전히 고뇌하고 있는 것 같다.

“…페인. 네가 직접 나서서 변경백들의 반란을 도와줄 생각은 없느냐?”

“말했지만 황제나 수도 상황을 잘 몰라서. 그렇게 정면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아.”

“너도 그들의 반란이 성공하나 실패하나 지켜볼 생각이로군.”

“그렇게 됐지.”

황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수도의 군사는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국 중심부에서 쓰이는 무기와 전술이 무엇인지 다방면에서 지켜보고 결정할 것이다.

“이번에 실패하면 내 목숨 하나만 날아가는 일이 아니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이건 나의 복수지, 너의 복수는 아니지 않느냐.”

내 걱정도 하면서 양보하다니. 아라나크의 예전 태도를 떠올려보면 괜스레 뿌듯하다.

이럴 땐 방독면이 내 표정을 숨겨줘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복수도 복수지만 이대로 제국을 내버려 두면 왕국은 몰락하게 될 거야.”

“흠. 변경백들의 반란이 실패하더라도 제국에 심대한 피해를 입혔으면 좋겠구나. 어떻게 될지….”

“그래서 무조건 승리하여 제국을 끝장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나서려고.”

기회가 올 때까지 끊임없이 지켜보고 분석하고 계획한다.

그리고 확신이 생겼을 때 공세를 취한다.

* * *

벤들렌타 변경백의 9만 군사는 비첸크로이 제국의 수도로 진군했다.

열흘에 걸쳐 진군한 9만 군사들은 수도로 가는 길에 몇 개의 속국을 싸움 없이 제압하고 그들의 군대까지 흡수하여 12만까지 숫자가 불어났다. 이는 속국들이 모두 황명에 따라 대다수 군대를 남쪽으로 보낸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변경백의 란코우트 백인대장은 ‘전격대장’으로 승급하였다.

그의 휘하에 있던 기병대장, 보병대장 등 많은 지휘관들이 전보다 더 강력한 지휘권을 가진 지휘관들로 승급하여 만 단위의 군대를 통제했다.

그리고 대망의 11일째.

란코우트 전격대장은 12만 군사의 중심, 고지대에서 망원경으로 수도의 황제 친위대를 목도하였다.

그의 곁에서 전격부대장이 보고한다.

“저희가 워낙 거대한 규모의 군사인지라 황제 측에서도 일찍이 방비를 탄탄히 하고 있었습니다.”

“징병된 군사도 아니고 친위대가 저만한 숫자라니…. 우리의 정보와는 다르지 않은가.”

“황제가 반란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던 건 아닌 듯합니다.”

비첸크로이 제국의 수도는 150만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다. 그런 대도시 전체를 장엄한 방벽이 감싸고 있어 사방위의 관문들 중 하나를 통과해야만 수도에 진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서쪽, 북쪽, 동쪽 관문에서는 싸움이 한창이다. 세 방위의 변경백들도 공격 시기를 맞추어 각자 군사를 보낸 것이다.

“…지금쯤이라면 황제도 알게 되었겠지만, 이번 싸움의 진짜 공세는 우리다. 남문을 돌파할 우리 벤들렌타 전격단이 반드시 황궁까지의 공격로를 열어야만 하는 것이다.”

“방벽과 황제 친위대의 15만 전력이 막강하여 세 방위에서 관문 돌파는 아직입니다. 그래도 친위대의 투석기와 석궁병들은 세 방위에 투입되었으니, 남쪽 관문은 상대적으로 무방비한 상황입니다.”

다른 세 변경백의 군대는 관문 앞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무기, 지형, 병사들의 숙련도 차이로 인하여 변경백들의 군사가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

결국 공성보다는 수성이 유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쪽의 진군을 확인한 친위대들이 남쪽 관문으로도 병력을 보내는 모습이다.

“때를 놓치면 황궁은 구경도 못해보고 전멸하겠군.”

모든 상황을 확인한 전격대장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벤들렌타 전격단!”

- 전격단!

- 전격단!

- 전격다아아안!

전격대장의 주변에 있는 몇 천 명의 병사들이 짧게 응답했다. 그 목소리가 구호처럼 퍼져나가면서 12만 병사들이 모두 같은 구호를 외치게 하였다.

“제국의 강제적 합병 아래 오래토록 기다렸다! 우리의 선조들은 황제에게 몰살당하였고 가문은 무너졌으며 가보는 불태워졌다!”

전격대장의 목에 울긋불긋한 핏줄이 섰다.

“우리 중엔 벤들렌타 출신이 아닌 녀석들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모두 같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황제에게 당하여 선조를 잃고! 땅을 잃고! 곡식과 가축을 빼앗기고! 우리 모두가 나라를 잃어버렸다!”

병사들의 마음에 사기가 차올랐다. 그들의 종아리와 팔뚝 근육이 성난 야수처럼 힘을 싣고 눈빛은 언제라도 사지에 뛰어들어 싸울 의지로 충만해졌다.

“보이는가! 저곳에서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심장을 바치고 있는 자들이 보이는가! 농부! 대장장이! 노예! 전사! 귀족!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태우고 있다! 그러니 당장 깃발을 세우고 호각을 준비하라!”

둥! 둥! 둥! 둥!

그들의 빠른 심장 박동을 따라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남쪽 관문을 무너뜨리고 황궁까지 공격로를 확보할 것이다! 할 수 있다! 해낼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뒤에 있는 동료가 내 시체를 짓밟고 해낼 것이다! 우리는 해낼 것이다!!!”

두려움이 사라진다. 칼에 베여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죽더라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사기가 차오른다. 지금 당장 뛰어가서 싸울 수 있다.

“혁명의 시간이다!!!”

-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온 세상에 들릴법한 뜨거운 함성이 퍼져나갔다.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그들의 뜨거운 심장을 채찍질했다.

두두두두두두두!!!

2만 기병이 좌우로 쭉 갈라져서 남쪽 관문을 향해 돌진했다. 이어서 6만 보병들이 창과 방패를 앞세워 빠르게 남쪽 관문으로 진격했다.

“친위부대장님. 기병이 갈라져옵니다.”

“마치 방벽에 들이박아 죽으러 달려오는 것 같군. 저걸로 뭘 할 수 있다고….”

이 병력들의 거대한 움직임을 남쪽 관문 위에서 지켜보던 지휘관.

제국의 친위부대장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했다.

“그럼 코앞에 붙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칩니까? 아니면 붙기 전에 모조리…”

“불화살을 쏴라. 저들 사이에 능력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즉시 방벽 뒤에서 발사된 불화살들이 하늘을 빼곡하게 채워 그림자가 드리우게 할 정도로 쏟아져내렸다.

“하늘! 화살이다!”

“방패!”

“방패애애애!!!”

앞서 돌진한 기병들은 작고 둥근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려서 우산처럼 썼다. 이윽고 빼곡한 불화살이 떨어져서 그들의 방패를 긁거나 군마의 머리, 엉덩이 등을 때렸다.

운이 나쁘다면 낙마를 하거나 다리, 어깨 따위에 화살을 맞고 쓰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엔 운이 나쁘고 좋고를 따질 수도 없었다. 너무도 많은 불화살은 기병들의 3분의 1 이상을 쓰러뜨렸다. 심지어 그 불화살의 포격에는 쉬는 시간조차 없었다.

“다시 쏴라!”

2만 기병들은 남쪽 관문 앞에 도달하기도 전에 절반으로 숫자가 줄어버렸다. 하지만 후방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란코우트 전격대장이 말했다.

“남쪽에 투석기는 없고 관문 밖에 병사들도 내놓지 않았으니, 활을 쏠 거라고 예상은 했다.”

같은 순간, 남쪽 관문 위에서 친위부대장은 미심쩍다는 눈초리를 하였다.

“벤들렌타 놈들…. 공성추 열 개와 사다리 수백 개를 가지고 왔군. 기병으로 화살을 빼는 것까지 제법 준비한 티가 나긴 난다만…. 제 분수를 너무 모르는 게 아닌가?”

기병들이 관문 위로 화살을 쏘거나 투창을 하였다. 몇 친위대들이 쓰러졌지만 어차피 관문이나 방벽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뒤이어 방패와 창을 앞세운 6만 보병들이 남쪽 관문의 바로 앞까지 진격을 성공해냈다. 이 순간에도 불화살이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지만 처음에 기병들이 화살을 뺀 덕에 화살의 밀집도가 다소 떨어졌다.

친위부대장은 재빠르게 명령했다.

“그만! 후방에 화살 재보급을 요청하라!”

그리고 관문 앞의 병사들이 대놓고 조롱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와라! 이 겁쟁이들아!”

“불알도 없는 새끼들!”

“사내답게 관문 열고 싸워라! 개새끼들아!”

“황제 친위대는 모두 불알이 없는가 보구나!”

“우리가 황제 불알도 떼어주마!”

친위부대장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의 주변에 있는 긍지 높은 친위대 병사들도 모멸감을 느꼈다.

“저 천박한 농노 새끼들이 감히 폐하를….”

그래도 친위부대장은 섣불리 관문을 열지 않았다. 물론 당장 관문을 열어서 친위대를 내보내 싸우면 저런 농노들 따위 충분히 격파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공성추와 사다리가 바로 앞까지 붙었습니다!”

“멍청이들이.”

친위부대장은 작게 말했다.

“저들이 광대처럼 놀고 싶다는 것 같으니, 더 즐겁게 춤출 수 있도록 만들어라. 하는 김에 공성추와 사다리도 없애버릴 수 있겠군.”

끼릭! 쿵!

방벽에 달린 격벽들이 열렸다.

쿠쿠쿠쿠쿵!

연달아 열린 격벽에서는 본래 병사들이 튀어나오거나 궁병의 활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곳의 격벽에서는 새까만 기름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폐하께서 이런 역모를, 이런 전술을 예상치 못하셨으리라 여겼구나. 촌뜨기들이.”

기름은 걸쭉하게 퍼져서 군마와 기병들의 피를 까맣게 집어삼켰다. 그리고 더 퍼져나가 땅에 박힌 불화살에 닿아서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밀집하여 대열을 형성하고 있는 6만 보병들이 밀려드는 불길을 피해 도망치기란 불가능하리라.

그래서 친위부대장은 그들이 불 위에 타죽으며 서로를 짓밟는 장면을 상상했다.

“……저게 왜…”

하지만 불타는 기름은 그들의 발치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기름을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면 저 보병들 사이에 주술이나 마법을 부리는 자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나, 나, 나쁜 놈들! 관문을 열어라!”

창백한 얼굴, 헝클어지고 듬성듬성한 머리칼, 산양의 뿔을 이마에 달고 있는 괴이한 남성이 방패도 없이 보병들 앞에 걸어 나온 것이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변경백이 준비한 변수.

의술사 나쿠타서스였다.

“…!”

친위부대장은 그가 자신에게 손아귀를 향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곤 즉각 방패 뒤에 숨었다. 그러면서 급하게 외쳤다.

“제기랄, 궁병! 저 괴상한 놈부터 죽…”

퍼어억!!!

그는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온몸이 터져서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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