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방독면의 뒷면 (3)
비좁은 절벽길.
이곳에서 양국의 병사들이 빼곡하게 모여서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있다.
“절대 밀리지 마라! 대열 유지해!”
앞사람의 발이 밟힐 정도로 좁은 전장에서는 시체가 생기면 그 시체를 밟은 채 싸워야할 지경이었다.
“밀어붙여라!”
제국의 공성탑은 두세 대만 있어도 절벽길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공성탑의 하단에서는 창병들이 창질을 하고 공성탑의 배후에서는 장궁병과 석궁병들이 화살을 쏘아댔다.
“비첸크로이, 이 야만인 새끼들아!”
“죽어라! 미개한 왕국 놈들아!”
전쟁에서 병사들은 대부분 창을 썼다.
검 다루는 법을 훈련하는 것보다 창을 훈련하는데 필요한 기간이 더 적고, 대장장이가 검 한 자루를 만드는 것보다 창 열 자루를 찍어내듯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제국은 이러한 부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세인트 왕국의 병사들은 아주 오랜 기간을 훈련한 검사들이 많았지만 제국의 전술 앞에는 비효율을 초래할 뿐이었다.
“불화살을 쏴! 저놈들 공성탑을 불태우란 말이야!”
“철판을 덧대고 있어 타질 않습니다! 게다가 물 양동이까지 준비하고 있어서…”
“또 바위가 날아온다!!”
절벽길은 승천자와 나란히 전쟁의 억제 요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승천자가 죽었고 제국의 황제는 이미 절벽길의 파훼법을 깨우치고 있던 것이다.
전술, 물량, 효율에서 제국이 왕국을 압도하였다. 병력의 교환비율도 제국이 유리하게 가져가는 중이다.
콰아앙!!!
똘똘 뭉쳐서 방패로 하늘을 가려도 투석기가 쏘아대는 바위는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훈련된 사람이라도 바위를 맞으면 방패와 함께 으깨진다.
“끄아아아아아!”
“다리가 깔렸어! 살려줘!”
“물러서지 마라!”
그 시점에서 이미 왕국군에 승산은 없었다. 그저 전장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며 시간을 끌 뿐이었다.
이 절벽길마저 돌파당하면 그때는 정말 제국의 백만 대군을 막을 수 없으니 말이다.
“제기랄! 성기사들! 저 공성탑을 무너뜨려라!”
“하지만 벌써 그들을 전열에 투입해버리면…”
“명령이다!”
훈련된 검사보다 더 강하고 높은 칭호를 받은 기사.
교단을 통해 하늘의 축복을 받은 성기사들은 세인트 왕국이 자랑하는 정예다.
그들은 묵직한 방패를 들고 새하얗게 빛나는 신성한 성검을 휘둘렀다. 최전열로 나서서 제국의 창질을 막아내고 철판으로 강화된 공성탑을 성검으로 가르는 것이다.
콰지직!
그들의 성검은 공성탑을 베어 무너뜨렸다. 공성탑 하단에 있던 제국 창병들은 무너지는 공성탑에 깔려죽었고 공성탑 상단에 있던 석궁병들은 추락하여 다리가 부러졌다.
“이대로 계속 밀릴 수는 없다! 진격하라!”
성기사들이 공성탑을 무너뜨리자 뒤에 있던 왕국의 장검사들이 튀어나갔다. 그들의 온몸을 보호하는 견고한 철제 갑옷은 제국군의 창질에 어느 정도 저항력이 있었다.
콰자자작…!
장검사들은 창을 베어내고 제군군 사이에 파고들었다. 뒤이어 일반적인 검사들과 창병들이 장검사를 따라서 돌진했다.
한편, 전열에서 살짝 떨어진 곳.
이 공성탑 위에는 지휘관이 있었다. 제국의 제4전격대장이었다.
“무식하게 미어터진 전장이군. 기병대도 쓸 수 없고 다른 대열을 짤 수도 없다니.”
그러자 그의 부대장이 성질을 냈다.
“그냥 공성탑 치우고 창병으로 밀어버리면 안 됩니까?! 벌써 이틀째인데 오백 보는 전진했는가 모르겠습니다!”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왕국 놈들이 서른 명은 뒈지고 있다. 이대로면 충분해.”
“후방에서는 지루함에 사기가 떨어질 지경이라고 합니다. 성벽도 없는 곳에서 농성전이라니….”
“폐하의 뜻이다.”
“이틀 동안 오백 보를 전진하는 것도 폐하의 뜻입니까?”
“폐하께선 삼백 보를 예상하셨지. 이곳의 세세한 전술과 적들의 반응에 대한 수백 가지 대응 방안도 전부 폐하께서 직접 검토하시고 하명하신 일이다. 그러니 기운 빠지는 소리 하지 말고 전황이나 보고해라.”
“…전방에서 성검사들이 공성탑 두 대를 무너뜨리고 다수의 장검사들과 함께 진형을 돌파하는 중이라 합니다.”
“중보병을 내보내라.”
잠시 후 왕국의 성기사와 장검사들은 육중하고 강인한 철갑들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일반인보다 덩치가 크고, 갑옷은 저런 걸 입은 채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껍다.
제국의 중보병들은 커다란 방패, 망치, 철퇴 따위로 무장한 덩치들이었다.
“우리는 인간 육체의 강함이다.”
쿵! 쿵!
그들은 성기사들에게 다가가고 있을 뿐인데 발장구라도 구르는 소리가 났다.
“나약하게 하늘의 힘이나 빌리는 네놈들과는 다르지. 이 눈꼴 시린 뼈다귀 새끼들아.”
“온몸의 뼈와 내장을 분쇄해 주마.”
그들의 도발에도 성기사들은 흔들림 없이 외쳤다.
“신념은 결코 죽지 않는다!”
“여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성기사들의 빛나는 성검이 중보병 앞의 창병들을 단칼에 베어넘겼다. 그들의 성검은 아무리 단단한 갑옷이라도 종이를 베듯 깔끔하게 가르는 것이었다.
“저런 불나방 같은 새끼들!”
“놈들의 신념을 짓밟아 부숴라!”
중보병들이 달려나가 철퇴와 망치를 휘둘렀다. 몇몇 성기사들은 노련하게 공격을 피했고 더 뛰어난 자들은 직접 성검을 휘둘러 그들의 육중한 무기를 파괴했다.
그러나 철퇴와 망치에 단 한 번이라도 맞은 성기사들은 문자 그대로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으깨졌다.
“철갑이라도 빛으로 갈라주마!!!”
대체로 성기사 한 명이 중보병 일곱을 데려가는 식이었다.
그것이 이 전장에서 왕국의 불리함이었다.
제국은 당장 중보병들을 잃어도 아무 문제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지만 왕국은 달랐다.
왕국은 귀중한 성기사들 한 명 한 명이 쓰러질 때마다 크나큰 전력을 잃는 것이다.
* * *
원형경기장.
수많은 관중들.
그리고 황제와 원로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대들의 연극이 한창이다.
이건 전쟁 중에 경기를 관람하는 여유가 아니다. 그런 개념 따위는 제국에 없다.
제국은 언제나 전쟁 중이기에.
“내가 바로 천계의 정복자! 엑수스다! 으랴아!”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 광대가 눈썹이 삐죽한 가면을 쓰고서 풀로 만든 철퇴를 휘둘렀다.
“끄악!”
“으아악!”
그의 부드러운 철퇴에 맞아서 쓰러지는 자들은 모두 우스꽝스러운 가면에 목검을 쥐고 있었다.
“누가 감히 이 엑수스 님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제길! 놈이 너무 강하다!”
“어쩔 수 없군!”
우스꽝스러운 광대들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이윽고 그들 사이에서 까만 복장에 복면을 쓰고 있는 광대가 걸어 나왔다.
“우리에겐 흑마법사 유토가 있다!”
“유토 님! 엑수스를 처단하소서!”
“음하하하하! 저 비실비실한 뼈다귀 놈이 천계의 정복자, 엑수스라고? 웃기는 소리!”
유토라고 불리는 광대가 두 팔을 활짝 벌려 관중들에게 소리쳤다.
“너희 수천 얼간이들은 저놈이 진정 엑수스라고 믿는 것이냐? 저런 허약한 놈이 황제라니! 비첸크론 대제국도 물러터졌군!”
그러자 수천 관중들이 화를 냈다.
- 감히 폐하를 모욕하다니!
- 죽어라! 유토!
- 흑마법사 따위가 감히 폐하를!
그러자 유토라고 불리는 광대는 엑수스 역할의 광대를 손가락질했다.
“내가 증명하지! 너처럼 비실비실하고 키만 멀대같이 큰 놈이 진정 엑수스라면! 이것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보아라! 이것이 용(龍)이다!”
둥! 둥! 둥! 둥!
경기장 전체에 북소리가 퍼져나갔다. 그 일정한 박자는 제국군들이 전장에서 애용하는 박자와 같았다. 심장이 뛰는 속도와 맞춘 것이다.
둥! 둥! 둥!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관중들은 입을 닫고 눈을 부라렸다.
둥! 둥! 둥! 두두둥!
커다란 인력거가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인력거는 도마뱀 같은 머리에 산양의 뿔을 달고, 박쥐의 날개를 크게 펼치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누비며 지옥불을 내뿜고! 발톱으로 산맥을 갈라 협곡을 만드는 악마의 피조물! 이것이 바로 용이로다!”
화르륵!
용의 입에서 짧은 화염까지 타올랐다.
“비첸크론 대제국만 없으면 인간의 세계 따위는 손쉽게 멸망시킬 수 있겠지! 어서 덤벼라! 엑수스!”
엑수스 역할의 광대가 호기롭게 돌진했다. 그리고 용의 머리를 철퇴로 쳐서 단번에 떨어뜨렸다.
유토는 높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지옥불은 촛불 같고! 날개는 곤충 같고! 발톱은 늙은 호랑이의 것처럼 흔들거리는구나! 유토! 호언장담한 것치고는 계집처럼 약해빠진 용이! 바로 네놈의 목소리를 닮은 것인가?!”
“엑수스! 이 자식이!!!”
유토는 아주 큰 목검을 뽑아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목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철퇴가 먼저 그의 머리를 때렸다.
“끼야아아아악!”
그러자 다른 광대들이 바지춤에 숨기고 있던 기다란 물병을 바닥에 쏟아댔다.
“오줌이 질질 흐른다아아아!”
“살려주시오! 엑수스 님!”
“너무 두렵사옵니다아아!”
수천 관중들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 와하하하하하!
- 꼴좋다!
- 오줌싸개가 되었구나! 하하하!
마지막으로 엑수스 역할의 광대가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용이 아니라 악마를 데려와도 나의 백성들을 건들 순 없다! 이 몸이 버티고 있는 한, 우리의 대제국과 인간 천하는 무너지지 않는다!”
“제길! 그럼 다음엔 진짜로 악마를 데려와주마!”
“모두 도망쳐!”
그렇게 다음 연극을 예고하면서 광대들은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이어서 사회자가 나와 관중들에게 알렸다.
- 위대한 비첸크로이 제국의 자랑스러운 관중 여러분! 우리의 집정관님께서 무료로 베푸시는 포도주와 빵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20분 후! 반역자 출신 검투사들의 혈투극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때 황제는 무미건조하게 턱을 괴고 있었다.
“…지루하군.”
그의 반응에 맞추어 원로들이 호응했다.
“인력거를 용으로 만든 것은 좋았으나 우리의 흑마법사 우토를 저렇게 악당으로 쓰는 것은 보기에 불편한 것 같사옵니다.”
“광대들의 연극도 수준 미달이군요.”
“아무렴요. 그리고 엑수스와 엑수스의 화신 정도는 분간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천한 소국 출신에 배우지 못한 광대들이라 대본에 오류가 있던 모양이군요.”
와중에 집정관은 황제를 유심히 살폈다.
원로들의 반응에 다른 반박이 없는 황제를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집정관이 말했다.
“그래도 이곳에 모인 백성들은 저렇게 하찮은 연극이라도 만족하는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폐하의 역할을 가진 인물이 출현했으니 환호하는 것은 당연지사겠지요. 저 실력 없는 광대들은 오늘 폐하의 존재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황제는 턱을 괴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원로들의 눈엔 그런 황제의 모습이 어떤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지적으로 비쳤다.
그때 황제의 뒤로 친위대장이 슬쩍 다가왔다.
“오랜만의 휴식을 취하시는 중에 황송합니다. 폐하.”
“음?”
황제는 기꺼이 친위대장에게 귀를 빌려주었다. 일부 원로들은 그런 친위대장에게 질투의 시선을 보냈다.
“…흑마법사 우토가 돌아왔습니다.”
“세뇌가 끝난 것이냐?”
“다름이 아니라 강령술사가 앓아누웠다고 하여…. 더 효과적인 치료에 필요한 재료들을 가지러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에 더하여 강령술사가 잘못될 것에 대비해 의술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나쿠타서스도 홀로스트에 데려가겠다고? 강령술사가 심하게 앓아누웠나 보구나.”
“제대로 조치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황제는 퇴장하는 광대들을 반쯤 감긴 눈으로 예리하게 노려보았다.
“놈이 아픈 척 연극을 하는 것은 아니고?”
“연극이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수용소와 강령술사의 감옥은 법무관이 권력을 행사해 직접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곳을 탈옥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강령술사는 그 불가능조차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집정관과 호민관이 일어서고 원로들이 황제에게 붙어서 그의 망토를 정돈하였다.
또한 친위대장의 손짓에 친위대들이 주변에서 모여들었다.
“아무래도 우토가 실수를 범한 것 같군.”
친위대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황제의 표정과 목소리가 싸늘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짐에게 묻지도 않고 홀로스트를 떠나 자리를 비우다니. …예감이 좋지 않다.”
“폐하…?”
“집정관. 당장 경기를 취소하고 백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의술사 나쿠타서스를 황궁으로 호출하거라.”
“따르겠사옵니다.”
“친위대장은 완전히 무장한 친위대와 투석기를 집결시켜 다가오는 침공에 대비하라.”
“따르겠습니다. 어디로 집결하면 되겠습니까?”
“북쪽이다. 홀로스트 수용소는 북쪽에 있으니.”
황제는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우토…. 이 멍청한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