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방독면의 뒷면 (4)
두 간수가 철창 앞을 지키는 가운데 법무관이 직접 강령술사를 보고 있다.
“세 시간째 저렇게 누워서 신음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몸에 상처는 다 치료하지 않았는가.”
“우토 님이 확실하게 치료했습니다. 도구도 항상 소독한 것을 썼고 목구멍으로 주입하는 음식물에도 뇌를 몽롱하게 만드는 약물을 섞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리 통증을 호소하는 건지 저희로선 잘….”
강령술사의 몰골은 실로 처참했다.
며칠 사이에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진 몸, 못 박힌 방망이에 맞은 흉터가 점박이처럼 빼곡하고 목구멍에는 철로 만든 짧은 관이 꽂혀있다.
“으으으…….”
“아침에 배설물을 치울 때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습니다.”
법무관은 속으로 생각했다.
‘몸이 아플 리가 없는데 앓고 있다면…. 드디어 정신이 무너진 건가.’
그는 밤낮을 쉬지 않고 뾰족한 둔기에 맞았다. 사지는 수갑과 족쇄에 묶여서 꼼짝도 할 수 없고 용변은 속옷을 입은 채 싸야 했다. 그리고 죄수들이 들어와 짐승의 배설물을 치우듯 그의 용변을 처리하고 바닥을 청소했다.
잠조차 길게 잘 수 없도록 한 시간마다 강제로 깨워서 때렸다. 그러다 살이 으깨지고 뼈가 부러지면 치료하고 다시 방망이질을 반복했다.
먹을 것은 목구멍에 뚫은 관을 통해 억지로 주입했다. 굶주리되, 아사하진 않을 정도로만 주입했다.
‘제아무리 강자라도 끝을 알 수 없는 고통 속엔 무너지는 법인가.’
두 간수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하나를 더 말했다.
“어제까지는 차라리 죽여달라는 말을 하거나 폐하를 모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언어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신음만 하는 겁니다.”
“놈이 며칠하고도 몇 시간을 버텼지? 고문은 몇 번을 받아냈나?”
“12일 그리고 5시간째입니다. 지금까지 방망이질 261회, 채찍질 40회, 사포질 21회, 치료를 310회 했습니다.”
와중에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등만 보이고 있는 강령술사.
그는 애석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으…. 으으으….”
그제야 법무관은 확신했다.
그는 무너졌다고.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우토가 복귀하는 즉시 내려보낼 테니 세뇌 작업을 준비해라. 놈은 지금 몸이 아니라 정신이 아픈 상태다.”
* * *
법무관이 자리를 비운 후 다른 간수가 의자를 들고 내려왔다.
세 간수는 부적 붙은 철창을 열어서 의자를 끌어다 중앙에 놓았다.
“법무관님께서 세뇌 작업을 준비하라 하셨다.”
한 간수는 살벌한 검을 들고 그를 주시한다. 그리고 다른 두 간수가 강령술사에게 다가갔다.
“일어나.”
툭! 툭!
발로 건드려보았지만 일어날 힘이 없는 모양이다.
“끌어다 앉혀.”
간수 한 명이 그의 발목을 쥐고 다른 한 명이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두 팔을 끼워 넣었다.
그때였다.
“이 새끼 왜 이래?”
“왜?”
“이거 힘 안 풀어?”
“뭐야, 왜 그러는데?”
강령술사가 어깨에 힘을 주고 간수의 두 팔을 놔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몇 발자국 뒤에서 그를 예의주시하던 간수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강령술사는 지금 등 뒤로 손이 묶여있다. 그런데 그 두 손이 집게손가락을 만들어 등에서 뭔가를 뽑아내는 것이다.
“힘 풀라고! 이거 안 놔?!”
강령술사가 자신의 등에서 뽑아낸 것은 길쭉하고 얇은 물건.
그 작은 물건이 피에 젖고 동료 간수의 엉덩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동료의 사타구니 사이로 보인 그것은 분명 횃불의 빛을 받아냈다.
“잠깐…”
다시 말해 반사광을 보이는 물건이었다.
마치 철처럼.
검을 든 간수가 즉각 나섰다.
“야, 야…! 비켜!”
하지만 이미 늦었다.
푹!
“끄아아아악…!”
강령술사를 일으켜 세우려던 간수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붙잡고 쓰러졌다.
그리고 강령술사의 두 팔이 자유로워졌다. 열쇠도 넣지 않은 수갑이 갑작스레 풀렸다.
“아아아아아악! 거시기를 찔렀어! 씨바아알!!”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해볼 틈도 없었다. 상대는 승천자까지 죽인 강령술사였다.
그는 심지어 일어섰다.
심지어 족쇄까지 풀려있던 것이다. 혹은 방금 풀었거나.
“261회….”
기괴한 목소리.
변조된 목소리.
아니, 끔찍한 목소리.
괴물.
“내 손이 닿는 자리에…. 피부 깊숙이 대못이 하나만 박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했다….”
강령술사는 피 묻은 대못을 들고 있었다.
“등을 때리는 순간에 맞춰서 허리를 들고…. 우토가 치료할 때 손으로 가려서…. 살갗 밑으로 숨겼다….”
두 간수는 싸우기도 전에 의지를 상실했다.
두려웠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눈앞의 존재가 두려웠다.
“12일 동안 손톱이 자라더라…. 내 살갗을 파헤쳐서 대못을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길어지더라….”
간수들은 몸이 굳어서 도망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강령술사다.
제압할 수 없다.
1초라도 빠르게 자비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다.
“자, 잠시만 말 좀 들어주십시오! 저희도 좋아서 이 짓거리를 했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강령술사에겐 자비라는 것이 없었다.
푸욱!
“끄어어….”
그는 바닥에 쓰러져있던 간수의 목을 대못으로 찔러버렸다.
“허어…. 허어…. 허으윽…. 그극…!”
“…알아.”
“예?!”
쑤욱!
강령술사는 대못을 뽑아냈다.
쏴아아아아…!
쓰러진 간수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안다고. 너희는 이게 일이잖아. 그래서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강령술사는 이마에 붙은 부적을 떼어냈다.
착각이었을까. 두려움이 낳은 환각이었을까.
잠시지만 횃불이 만들어낸 그의 그림자에 어떤 여성 악령의 머리칼이 가시덤불처럼 꿈틀거렸던 것 같다.
“저, 저, 저, 저, 잠시, 잠시만…”
“너희한테 그렇게나 고문을 당했는데도…. 너희 사정이 이해가 되더라. 그래서 나도 이런 내가 신기해.”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요! 이 씨발새끼야!”
부웅!
두려움에 벼랑 끝까지 몰린 간수가 못 박힌 방망이를 휘둘렀다.
퍼억…!
어깨를 정확하게 때렸다. 뼈가 부러졌으리라. 그래서 어깨를 붙잡고 아픈 내색이라도 표출해야 할 터인데.
“이젠 아프지 않아.”
강령술사는 왼팔을 쓸 수 없게 되었어도 오른손에 든 대못 하나로 달려들었다. 그 기세에 압도당한 간수는 대못에 복부를 열 번 이상이나 찔렸다.
푹푹푹푹푹…!
“어, 아악! 아아악…! 으으아아아아!!!”
푸욱!
그러다 관자놀이를 찔려서 절명했다.
마지막으로 검을 들고 있는 간수는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럴 수가 없어…. 어떻게 사람이…. 사, 사람이 아니구나…. 사람이 아닌가…?”
그러는 사이에 강령술사는 못 박힌 방망이를 주워들었다. 자신의 피와 살점이 대못에 얽혀서 붙어있는 방망이였다.
“수갑이랑 족쇄…. 어떻게…. 어느 틈에…?”
“처음부터.”
으직!
강령술사는 못 박힌 방망이로 간수의 다리를 쳤다.
“끄으으아아아아…! 아아아…!”
“우토의 부적은 처음부터 효과가 없었어.”
“어어어…? 어어어어…?!”
“가짜 부적이거든.”
으직!
간수의 부서진 안면 사이로 뇌수가 강물처럼 흘렀다.
* * *
홀로스트 수용소의 지하 감옥에 12일간 갇혀있던 강령술사.
속옷 차림의 그는 양손에 검을 든 채로 수용소 옥상까지 올라왔다.
사막의 더운 모래바람이 방독면을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옥상까지 올라오는 길에 몇 명의 간수를 더 죽인 걸까.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상의 죄인과 간수들이 올려다보았다.
그를 목도한 이들은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간수들은 눈을 의심했고 죄수들은 그가 누구의 편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사막의 모래언덕이 만들어낸 지평선에서 검은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토록 기다렸다! 드디어 복수의 염원을 이루는구나!”
아라나크와 거미 악귀들이었다. 모래언덕을 까맣게 뒤덮고 있는 괴물들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또한 높은 하늘에서는 거대한 불나방들이 홀로스트 수용소 위에 모여들어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들이 하늘에서 뿌린 잿빛의 가루가 공기를 뿌옇게 더럽혔다.
높은 하늘은 낮아졌고 밝은 색감은 칙칙해졌으며 하늘에 뜬 해는 저편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가시거리가 짧아지면서 하늘의 어디에 얼마나 많은 불나방들이 있는지, 지금 바깥에서 얼마나 많은 거미 악귀들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길이 없다.
- 으아아악!!!
- 이쪽이야! 막아!
- 저것들 계속 들어오잖아…!
- 아아아아아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 사방에서 싸우는 소리만이 끔찍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강령술사의 변조된 목소리가 증폭되어 수용소 전체에 퍼져나갔다.
“오늘, 홀로스트 수용소는 부서진다.”
- 잡아라아아아!!!
수많은 간수들이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그가 딛고 서있는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홀로스트 수용소에 항시 배치돼있던 병사들은 망루에 올라서 다가오는 거미 악귀 군단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하지만 견고하고 높은 담벼락이 무용지물이었다.
3중으로 굳게 걸어 잠근 정문도 무용지물이었다.
거미 악귀들은 담벼락을 타고 넘어왔으니.
그야말로 공성전이라는 개념이 없는 괴물들이었다.
“나는 지은 죄가 많은 놈이다.”
강령술사는 수백의 죄수들을 단 몇 마디만으로 선동하였다.
“그러니 나와 함께 이 지옥에서 탈출하자. 죄인들아.”
- 우아아아아아!!!!
바깥에서는 거미 악귀들이, 하늘에서는 불나방들이, 내부에서는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아비규환이었다.
그 중심에 있는 강령술사는 두 팔을 활짝 벌려서 자유를 만끽하는 듯하다.
“강령술사! 네 이놈!”
소수의 친위대와 간수들을 이끌고 등장한 법무관.
그들은 강령술사를 둥글게 에워쌌다.
“참으로 악랄하고 지독한 놈이구나! 세상에 풀어져선 안 될 흉악범들까지 데리고 함께 탈옥하겠다니!”
“안 되나?”
“사악한 힘을 근본으로 삼는 놈답구나! 그렇게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최소한의 정의조차 없는 것이냐?!”
“내가 지나온 길이 그렇게 밝지가 않아서.”
법무관이 호통을 치고 있지만 사실 다들 알 것이다. 그를 따라서 옥상까지 올라온 자들은 다들 알 것이다.
모두가 강령술사에 의해 이 자리에서 죽임당할 것이다.
그러나 법무관은 죽음을 각오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도대체 네놈 정체가 뭐냐! 사람이 맞긴 맞는 것이냐?!”
강령술사는 법무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모르고 죽는 게 좋을 텐데. 정말 알고 싶어?”
법무관은 침을 삼켰다.
그렇게 침묵으로 긍정했다.
모두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두려워하면서도 강령술사라는 존재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설령 진실을 알게 된 대가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원초적이고도 파멸적인 호기심이었다.
“…그래.”
강령술사는 방독면을 벗었다.
그때 친위대와 간수들은 보았다.
죽음과 공포 그 이상의 절망을.
“진실을 마주한 표정을 보고 싶긴 했어.”
진실이란 그들에게 선고(宣告)되는 것이었다.
* * *
“하오나 친위대장과 우토까지 없으면 황궁과 폐하는 누가 지킨다는 말씀이옵니까…?”
황제는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짐이 엑수스의 화신이다! 내가 아랫것들 좀 없다고 쉽게 죽을 것 같으냐?!”
그의 분노는 불바람 같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강령술사는 피바람 같았다.
“친위대장! 네 밑에 직속으로 있는 친위대의 절반을 끌고 가라! 당장!”
“예! 폐하!”
홀로스트 수용소가 있는 북쪽, 그 머나먼 곳을 망원경으로 내다보니 지평선 너머에서 잿빛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는 것이다.
잿빛이란 그곳에서 있을 수 없는 색깔이었다. 대낮의 사막지대에서 안개가 깔릴 리 만무했다.
“우토, 이 얼빠진 자식! 누가 네놈더러 짐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돌아오라 하였느냐! 법무관이 네놈의 이런 기행을 허락하였느냐?”
“허락하였…. 아, 아니…. 강령술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선 안 된다는 황명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더 많은 도구와 의술사까지…”
“닥쳐라! 그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
“네놈을 질책할 시간도 없다! 당장 친위대장을 따라 홀로스트로 튀어가라! 가서 강령술사를 막으라고!”
우토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듯 황궁을 빠져나갔다.
살살 눈치를 살피던 집정관이 물었다.
“폐하. 5만 친위대와 우토가 자리를 비워도 강령술사가 폐하의 털끝 하나 손댈 수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나, 그렇다면 더욱이 나머지 5만 친위대와 나쿠타서스까지 보내어 강령술사를 막으심은 어떻겠습니까? 녀석이 수도에 발조차 들이지 못하도록 더 강경하게 나가는 것이옵니다.”
“이 무슨 파렴치한 소리더냐? 집정관.”
황제는 집정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럼 수도에 있는 짐의 백성들은 누가 지키나? 내가 홀몸으로 지킬까? 아니면 태어나서 칼 한번 쥐어본 적 없는 네놈들이 지킬래?”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어서 황제는 나쿠타서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 안에는 여러 복잡한 것들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는 것이다.
“나쿠타서스.”
“예…! 폐하!”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도끼눈을 했다.
“네가 우토의 부적 제작을 도왔다지?”
“예! 그렇습니다!”
“그 부적들이 강령술사에게 통했다면 탈옥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터.”
원로들은 바짝 긴장했다.
황제와 나쿠타서스 사이에 오가는 시선이 위험했다.
이윽고 황제는 원로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을 도출하고 말았다.
“…나쿠타서스. 그대가 강령술사였구나.”
* * *
강령술사는 방독면을 벗었다.
그때 법무관과 간수들은 보았다.
죽음과 공포 그 이상의 절망을.
“진실을 마주한 표정을 보고 싶긴 했어.”
진실이란 그들에게 선고되는 것이었다.
“아아…. 신이시여….”
법무관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방독면을 벗은 강령술사의 얼굴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강령술사는 강령술사가 아니었다.
“그흐흐…. 키히히…. 히히…. 이젠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아…. 이젠 아프지 않아도 돼….”
잔뜩 벌어진 턱. 촘촘한 이빨. 굶주린 눈빛.
“기기기기기기기기히히히히….”
그것은 ‘가뭄의 생존자’라는 악귀였다.
* * *
“…나쿠타서스. 그대가 강령술사였구나.”
원로들은 귀를 의심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늘어진 머리칼과 듬성듬성 보이는 두피. 적은 숱. 목소리와 체격은 젊지만 외모는 관에서 뛰쳐나온 노인처럼 보이는 의술사.
이마의 양쪽으로 ‘산양’의 뿔이 돋아나 있으며, 악령처럼 붉은 동공.
“…황제.”
찌지지직!
나쿠타서스는 스스로 얼굴 가죽을 뜯어냈다.
얼굴 가죽은 두피까지 이어져있어 산양의 뿔과 함께 뜯겨나갔다.
“다를 거라고 했지. 당신이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아랫것들이랑은.”
촤아아아아!!!
순간, 황궁에 있던 친위대와 원로들이 일제히 피를 터뜨리며 쓰러졌다.
몸부림이나 비명도 없었다. 사람들의 몸뚱이가 과일처럼 터지고 오로지 침묵이었다. 피비린내가 섞인 위험한 적막이었다.
“…그렇군. 친위대 절반이 빠진 사이에 원로원까지…. 일망타진인가.”
“내가 노린 건 그거 말고도 더 있을 거야.”
찬란했던 황궁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수십, 수백 년의 경험을 가진 살아있는 도서관인 원로원이 한자리에서 한순간에 몰살당했다. 그것만으로도 심각한 피해인데 강령술사의 노림수는 이게 끝이 아니라고 한다.
그때 황제는 표정을 뒤틀며 웃었다.
“기어코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수용소로 끌려간 강령술사의 정체는 방독면을 쓴 악귀였다.
그리고 나쿠타서스의 정체는 산양의 탈을 쓴 페인이었다.
“제국의 귀중한 원로원이 몰살당한 와중에도 짐의 목이 떨어지지 않은 연유를 묻고 싶군.”
“나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주겠어.”
“허…! 자비?”
“제국이 강제적으로 합병한 속국들에게 자유를 주고 세인트 왕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면 너의 목숨 하나로 봐주지.”
“열심히 정벌한 땅을 모두 포기하고, 절벽길까지 뚫어놓은 왕국에 항복하라니 이런 궤변이 있나.”
“머리만 죽는다고 무너질 제국이 아니잖아.”
“부정하진 않으마. 허면 차라리 제국과 왕국이 극적인 평화협정을 맺는 건 어떤가? 그대는 왕국 또한 지키기 위해 이런 모략을 시작한 것 같은데. 왕국을 건들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시작은 그게 아니다.
아라나크다.
한 성녀의 복수심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게 멈춰서는 안 되는 일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페인은 천천히 도끼를 뽑아들었다.
“오랫동안 눈엣가시였던 세인트 왕국에 승천자가 없는데, 백만 대군을 보내서 절벽길까지 뚫어놨는데, 세인트 왕국을 치는 오늘날을 줄곧 기다리다가 드디어 실현할 수 있게 된 당신이, 그런 목적의식이 분명했던 당신이, 황제로서 시작한 전쟁을 그렇게 간단히 번복하겠다고?”
“그간 이것저것 많이도 알게 되었군.”
둘 사이에 시간이 초 단위로 흐른다.
“마지막 기회야. 제국령에 속한 모든 국가에 자유를 주고 왕국에 항복해. 만약…”
“거절하지.”
“거절한다면.”
국가를 향한 개인의 선포.
“내가 지금부터 제국을 침공하겠다.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