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61화 (61/181)

12. 잊지 않겠다 (1)

모든 것이 내 계획이었다.

제국을 안팎에서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

나는 나쿠타서스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다.

산양의 머리가죽을 재결합으로 내 머리에 붙였다. 말투도 바꾸고 일부러 정신병이라도 있는 척 말을 더듬었다. 그러는 편이 더 연기하기 쉬웠고 혹시 말실수를 하더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원래 좀 이상한 놈이니까, 하면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쿠타서스는 방랑자라는 설정이었다. 사람 죽이는 것을 싫어하지만 다수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드넓은 광인의 숲을 정찰하다가 제국령 남쪽에서 군대의 수상한 결집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들과 마주치기로 했다.

그게 벤들렌타 변경주의 병사들이었다.

- 너도 그들의 반란이 성공하나 실패하나 지켜볼 생각이로군.

- 그렇게 됐지.

- 이번에 실패하면 내 목숨 하나만 날아가는 일이 아니니까.

-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이건 나의 복수지, 너의 복수는 아니지 않느냐.

- 그래서 무조건 승리하여 제국을 끝장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나서려고.

그들은 역모를 꾸몄다.

나는 기회가 올 때까지 끊임없이 지켜보고 분석하고 계획했다. 그리고 확신이 생겼을 때 총공격을 가하기로 했다.

실재세계의 광인의 숲에 아라나크, 거미 악귀, 불나방 군단 그리고 가뭄의 생존자로 만든 가짜 강령술사까지 소환하여 대기하게 하였다.

광인의 숲은 그 많은 악귀들을 숨겨줄 수 있을 정도로 울창하고 거대했다.

사방위 변경백들의 역모는 내 예상보다 거대했다. 세인트 왕국에서 평생을 자라온 내가 보기에 제국의 군사적 움직임은 숫자의 단위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나쿠타서스가 된 나는 전장에서 직접 역모를 지켜보았다. 기꺼이 힘을 써서 수도의 관문을 뚫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제국은 제국이었다. 황제의 뛰어난 지략과 강력한 흑마법사 우토의 존재로 인하여 역모는 실패하였다.

어쨌든 사방위 변경백들의 역모는 내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제국의 수도를 공격하여 황제에게 나쿠타서스의 힘을, 나쿠타서스의 가치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흑마법사 우토의 힘도 가늠했다.

다행히 우토는 나보다 약했다.

물론 나는 황제의 곁으로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져주었다.

그러니 제국의 사정이 더 훤히 보였다.

황제는 엄청난 군사력을 자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술적, 마법적 힘을 가진 수하들을 부리고 싶었다. 그리고 개인의 힘이 군대에 필적하는 존재란 어디를 가든 최우선 제거 대상이자, 포섭 대상이었다.

- 꿇어라.

나는 포섭 대상이 되기 위해 황제 앞에 끌려가서 두려움을 연기했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연기했다.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게 익숙한 황제였겠지만, 그래도 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엔 의심이 가득했다.

- 듣자 하니 세인트 왕국에도 강력한 주술을 부리는 자가 있다고 했다. 그자가 절벽길에서 나의 충성스러운 정찰대를 학살한 범인이겠지. 그러니 우리에게도 주술을 부리는 아군이 필요할 것 같은데, 나쿠타서스.

그래서 나는 황제의 제안을 곧장 받아들이지 않고 두려움을 연기했다.

- 나쿠타서스. 짐이 언제까지 너의 대답을 기다려줘야 하느냐?

그래도 대답하지 않았다.

- 어린아이라도 보는 것 같군. 재밌는 놈이구나.

황제의 흥미가 커져도 대답하지 않았다.

공들여 술을 달이듯 계속 두려움을 연기했다.

나는 그의 눈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 고개를 들고 짐을 마주하거라.

- 의술사 나쿠타서스. 제국의 힘이 되어주지 않겠나?

그때쯤 황제의 눈에는 의심보다 흥미가 더 많았다.

- 제, 제, 제, 제, 모, 모,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리라 맹세드리옵니다…! 폐하…!

이후 황명에 따라 흑마법사 우토가 나를 홀로스트 수용소로 데려갔다.

- 이 부적 그리는 법을 잘 보고 있어라. 나중엔 네놈이 날 대신해서 그려야 할 테니까.

우토는 날 지하에 가뒀다. 내 이마와 철창에 부적들을 붙였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진짜로 그 부적들은 효능이 있었다.

영력이 차단되는 것이었다. 이마에 하나만 붙였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철창에 수많은 부적들을 붙인 뒤부터는 아무 힘도 쓸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제국에 그런 주물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간수들이 들어와서 못 박힌 방망이로 매일 때렸다. 멀쩡한 피부에 사포질을 하고 채찍질을 하고 용변도 그 자리에서 처리하게 하였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후회하고 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의 내가, 나쿠타서스가 보인 두려움과 신음은 연기가 아닌 진짜였으리라.

나는 극심한 고문에 진짜로 정신이 무너질 뻔했다. 그래도 마지막엔 단 한 번의 연기를 할 수 있었다.

- 그만…. 흐, 흐흐…. 그만…. 그만하시오…. 히히.

마침내 우토가 부적들을 떼어냈다. 자신의 영력을 써 세뇌하는 흑마법을 걸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부적들을 떼어낸 순간부터 마법 저항 4계가 발동하여 세뇌를 차단하였다.

그의 흑마법은 승천자의 마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 나쿠타서스. 네놈은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지?

- 폐하…….

-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

- 폐하….

- 네놈의 일관성 없는 신념을 고쳐야 한다. 네놈은 900만의 목숨과 폐하 한 분의 목숨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가?

말을 더듬는 횟수도 줄이기로 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 폐하…. 내겐 오직 폐하뿐이오….

우토의 세뇌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나를 홀로스트 수용소에서 수도의 어느 어두운 공간으로 끌고 와서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 폐하께 충성을 맹세해라.

- 폐하께 충성을 맹세해라.

- 폐하께 충성을 맹세해라.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면 나의 모든 고통과 시련이 끝날 것 같다는 충동이 잠깐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겐 통하지도 않는 세뇌였다.

나는 우토가 떠들든 말든 거미 악귀 100마리와 가짜 강령술사를 수도에 투입하였다.

가뭄의 생존자라는 악귀는 짐승 같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 말은 앵무새처럼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도끼를 휘두르면 내가 적절한 순간에 영력을 보내어 검기를 쏘아낼 수 있도록 하였다.

어차피 방독면을 쓰면 얼굴도 목소리도 가려진다. 나의 어투와 싸우는 법을 학습한 가문의 생존자는 항상 내 감시를 받으며, 내 명령에 따라 말하고 싸웠다.

- 반다토움 움 샤헤라리움!

나는 목줄 능력을 써서 가짜 강령술사를 잿빛세계로 보냈다가 실재세계로 소환하여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우토와 나(나쿠타서스)를 궁지로 몰기 위해 때에 따라 거미 악귀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가짜 강령술사의 힘을 강조하기 위해서 도끼에 엄청난 영력을 투입하였다.

거미 악귀에게 명령해서 날 덮치게 하고 순간적으로 우토 혼자서 가짜 강령술사를 상대하게 만들었다.

- 역시 제국에도 능력자는 있었구나.

- …!

마침내 우토의 두려움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 거미 악귀를 방혈하여 혈관과 혈액을 뽑아내고 그것으로 가짜 강령술사를 구속했다.

- 자, 잘했다! 나쿠타서스!

-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소!

- 드라쉬르!

우토의 그림자가 더 강해졌다. 그래서 나도 가짜 강령술사가 장비하고 있는 의복이나 방독면 따위에 영력을 보내어 가짜 강령술사의 괴력을 지원했다.

- 노, 놓칠 것 같소!

- 조금만 더 버텨라!

나는 끝까지 우토를 몰아붙이는 상황을 강제했다. 그때쯤 우토는 진심으로 목숨에 위협을 느껴 살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강령술사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는 더더욱 커졌으리라.

그쯤 하면 된 것이었다.

- 우토! 놈의 힘이 빠, 빠지고 있소!

가짜 강령술사에게 지원하던 영력을 천천히 줄였다. 녀석이 목을 졸려서 기절할 정도로만 힘을 풀어주었다.

- 질식사했는가?! 어서 놈의 생사를 확인해라!

- 심장이 야, 약하게 뛰고 있소….

- 이런 괴물 같은 놈을 봤나!

- 칼! 칼 같은 거 가지고 있나?!

- 아아, 어, 없소!

나는 믿었다.

- 친위대애애애애!!!

나는 황제를 믿었다.

- 흑마법사님?! 그자는…

- 기절했다! 어서 칼을 내놔라! 이 자리에서 놈의 심장을 도려내야 한다!

나는 황제가 강령술사를 쉽사리 죽이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다.

- 뭣들 하는 거냐? 칼 달라고! 칼!

- 실은 그게….

그간 내가 느껴본 황제라는 자는 누구보다도 야망이 큰 인간이었으니까.

* * *

결국 가짜 강령술사를 황궁에 들일 수 있었다.

-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황제는 내 본명을 몰랐다.

세인트 왕국의 뒷골목에서나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정보까진 모르는 것이었다.

- 짐의 수도를 공격한 동기가 무엇이냐?

- 너의 왕이 시켜서 한 일이냐, 아니면 너의 자의로 한 일이냐?

황제는 내가 누구의 편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 너는 최근 변경백들의 역모와 관련이 있느냐?

황제는 지략가답게 가짜 강령술사의 공격 시기까지도 수상히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확신은 못 하는 듯하였다.

- 언제부터 제국의 영토에 들어와 있었지?

황제는 광인의 숲에서 대기 중인 악귀 군단의 존재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 지금 네가 품고 있는 목표가 무엇이냐?

황제는 나에 대해 무지했다.

하지만.

- …흐. 흐흐흐.

- 으하하하하!

- 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 하하하…! 우토!

- ……자네는 왜 아까부터 겁에 질린 토끼의 냄새를 풍기고 있느냐?

내가 우토를 겁준 이유는, 우토가 황제에게 강령술사의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토는 황제에게 거짓을 고했다.

- 실은……. 이 강령술사의 방독면에 걸려있는 저주가 두려웠사옵니다.

가짜 강령술사가 쓰고 있는 방독면에는 저주를 건 적이 없다. 그냥 절대 떼어낼 수 없도록 재결합으로 피부와 붙여놨을 뿐이다.

어쩌면 우토는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령술사를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황제에게 거짓을 고할 정도로.

계획이 살짝 틀어지고 말았다.

원래 내 의도는 수많은 친위대와 함께 홀로스트 수용소로 가짜 강령술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황제가 우토뿐만 아니라 수많은 친위대까지 홀로스트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선 강령술사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인식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토를 겁준 것인데 계획이 틀어졌다.

황제의 눈빛에서 야망이 지워졌으며, 근엄했던 표정도 강단 있던 목소리도 지워졌다.

그저 침착하고 차가웠으며,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평탄하게 변했다.

마치 강령술사도 우토와 같은 ‘아랫것’ 정도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 나도 다를 거야. 당신이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아랫것들이랑은.

- 난 절대 당신 밑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야.

- 이런 식으로 무의미한 심문이나 계속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죽여.

일단 가짜 강령술사를 죽이고.

새로운 가짜 강령술사를 만들어서 수도를 재침공한다.

그러면 황제는 강령술사의 힘을 더욱 경계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강령술사를 세뇌하기 위해 홀로스트 수용소로 보내면서, 자신의 곁에 둔 수많은 친위대까지 기꺼이 수용소에 대동할 것이다.

그렇게 수도가 비어버리면 내 정체를 드러내고 선전포고한다. 그것이 그 순간에 수정된 계획이었다.

- 으하하하하!

그러나 황제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웃음을 멈췄다.

-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느냐?

나는 황제에게 한 수 당한 것이다.

- 아니지. 아니야. 정말 진심으로 목숨을 포기한 건 아니겠지.

- 지금 네놈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면서 뭔가를 의도한 것이다.

나중에 내가 진짜로 정체를 드러냈을 때 그 부분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

* * *

그리고 지금이다.

황제에게 개인의 무력이 있을까, 없을까.

자신이 엑수스의 화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선전(宣傳)인가, 진실인가. 세인트 왕국에서 살아온 나는 천계의 정복자 엑수스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만, 만약 그가 정말로 천계에 있는 존재로부터 권능을 받은 인물이라면 진작 그의 힘이 세간에 알려졌으리라.

게다가 그보다 이전의 문제가 있다. 천계의 존재가 황제 같은 인간에게 권능을 내려줬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기 입으로 엑수스의 화신이라 계속 말하는 건 진실이 아닌 선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도 황제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 경계를 완전히 풀 수는 없겠다.

「친위대 5만의 살점을 포식한 거미 악귀 군단이 몰려오고 있어.」

“가짜가 홀로스트에 갇혀서 고문을 받든 세뇌를 당하든 상관없었어. 중요한 건 당신의 친위대 절반과 흑마법사가 이 장소에 없다는 거지.”

“인정하겠다. 짐은 그대의 강함만 대충 알고 있었을 뿐, 그대의 지략까진 모르고 있었다.”

콰장창!!!

황궁의 옆쪽 아치형 유리창을 깨고 불나방 한 마리가 난입했다.

쩌어.

불나방은 턱을 한껏 벌려서 나를 목구멍에 숨겼다.

나는 불나방의 목구멍에 있던 방독면, 붉은 로브, 도끼, 목걸이 등의 장비를 순식간에 되찾았다.

그리고 불나방이 나를 놓아주었을 때 두 다리로 서있었다.

그는 왠지 자신 있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면 수도에 있는 나머지 5만 친위대는 어쩔 셈인가?”

“보면 알 거야. 바깥 하늘.”

황제는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약 200마리의 불나방들이 제국의 하늘에서 가루를 뿌려대고 있었다. 거대한 안개가 잠식한 것처럼 수도 전체가 탁한 잿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그 공기 속에서 괴로워했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 백성들이 모여있는 수도에.”

…라고 말하며 내게 시선을 옮긴 황제.

나는 이미 그에게 접근해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터억!

나로선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짐에 대해서 모든 걸 대비했다고 생각하였느냐.”

황제는 맨손으로 도끼날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날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도끼를 통해 전해지는 ‘괴력’이었다.

“강령술사. 이 세상에 완벽한 계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 뭐야?”

크게 힘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어린아이의 목검을 손아귀로 막아서 붙잡고 있는 것처럼 내 도끼를 쥐고 있다.

팔을 힘껏 움직여도 도끼를 뺄 수가 없다.

“비첸 오솔로니오 아바타라 폴 엑수스.”

“아니….”

“위대한 비첸크로이 제국의 황제.”

아니 나는 그걸 묻는 게 아니다.

“천계의 정복자. 엑수스의 화신.”

그는 왜 숨겼는가.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천계는 왜 주었는가.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어째서 나는 이 순간에 그를 보며 이토록 억울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도대체 뭐냐고!!!”

“흐흐흐흐흐흐흐…!”

내가 울컥 소리치자 그는 고양감을 표출했다. 마치 오랫동안 무언가를 참아온 사람이 해방되는 것처럼. 이젠 도저히 이 흥을 참을 수가 없다는 것처럼.

그러다 또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어느 평범한 군인 밑에서 태어난 남자가 있었다.”

「이 새끼 위험한 놈이야….」

“그 남자는 명예롭게 전사한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적들의 목을 베어내며 황제의 신임을 얻고 끝도 없이 승급하였지.”

이렇게나 준비했는데.

이렇게나 계획했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

“남자는 혁명을 일으켰다. 자신을 믿던 황제를 배신하여 죽이고 원로원을 집어삼켰지.”

황제는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기껏 내 도끼를 잡아놓고는 스스로 풀어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섣불리 달려들 수가 없었다. 같은 방식으로 도끼를 휘둘러봤자 너무도 쉽게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런데. 황제가 된 남자는 일상이 지루했다. 실패도 패전도 역모도 없는 완벽한 황제의 일상이 지루했지. 언제나 연전연승, 지략과 무력을 다 겸비했다는 황제에게 어느 누가 반기를 들겠는가.”

다음에 황제가 내뱉은 말은 커다란 주먹으로 내 뇌를 강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친히 짐의 무력 정도는 숨기기로 하였다. 그래야 아랫것들과 조금이라도 눈높이가 맞았으니.”

그 순간 무언가 내 복부를 때렸다. 나는 뭐에 맞은 건지도 모르고 황궁의 천장을 날았다.

매끄러운 바닥, 제국의 문양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바닥의 정중앙에 떨어졌다.

…쿵!

원로들의 피가 등을 적셨다.

“그대 덕분에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구나. 확실히 그대는 짐이 숱하게 경험해온 역모나 정복보다 훨씬 흥미롭다.”

황제는 옆에 쓰러진 집정관의 시신을 흘깃 보았다.

“그리고…. 내게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들의 넝마를 보니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하는군.”

황제는 주먹을 쥐고 있다.

설마. 내가 방금 황제의 주먹에 맞아서 여기까지 나가떨어졌다는 말인가.

“강령술사. 그대는 충분히 잘했다.”

나는 도끼로 바닥을 찍으며 일어섰다. 갈비뼈가 몇 군데 부러진 것 같았지만 재결합으로 붙였다.

그리고 황제가 다가온다. 품위 있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면 도망칠까. 하지만 그가 도망을 용납할까.

도망칠 수 없다면 죽을까.

하지만 그가 내 죽음을 용납할까.

내 죽음의 ‘의도’를 진작 의심하고 있는 그가.

“또한 인정하마. 그대는 짐이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것들이랑은 격이 다른 존재다.”

역모를 꾀하고. 수도를 치고. 첩자가 되어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하고. 연기하고. 황제가 열심히 키운 친위대의 절반을 수도 바깥에서 죽이고 나머지 절반의 발을 잿빛 가루로 묶어 놓았다. 심지어는 미래의 제국을 이끌 원로원들까지 해치웠고 황제를 속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황제는 이런 내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하고 있다니.

콰아아!

나는 그에게 검기를 날렸다.

그런데 그는 검기를 피하거나 막지도 않았다.

그냥 몸으로 받아냈다.

그러고도 멀쩡히 걸어오고 있다. 상처 하나 없이.

“하지만 짐 또한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다를 거라고. 네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놈들이랑은.”

이제 황제는 싸움꾼처럼 변했다. 권위 있고 근엄한 황제가 아니라 걸음걸이부터 말투까지 싸움꾼처럼 변했다.

벌써 그와 나 사이에 거리는 열 걸음이다.

“강령술사여. 엑수스의 화신인 나는 철인을 7계까지 개방하였다.”

「바, 방금 7계라고 했어? 철인 7계?」

촤자자자작! 절그럭!

그의 오른쪽 팔뚝이 번쩍이더니 황금 사슬이 소환되어 그의 오른팔 전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사슬 끄트머리에는 살벌한 황금 철퇴가 달려있었다.

“우리가 합심하면 바다 건너의 신묘한 대국들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래서 난 무슨 수를 써서든 널 심복으로 만들 것이야. ……이제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 제안하지.”

오랫동안 숨겼던 무력을 드러내고 진짜 적수를 만나서 끓는 감정을 느끼고 있을 황제가 아닌가.

그런 황제가 이 싸움을 참겠다니.

결국 나와의 싸움도 황제에겐 개인의 유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천하를 제패하자. 강령술사여.”

「…좋다!」

“좆까.”

“주저리주저리 떠든 보람이 없군.”

그 즉시 황금 철퇴가 코앞까지 돌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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